『에이즈와 그 은유』는 수전 손택이 인터뷰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은유로서의 질병』의 후속작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이다. 질병에 가해진 해석을 겨냥하고 은유들을 다루고 있다는 점은 『은유로서의 질병』과 비슷하나, 에이즈에 가해진 은유와 해석은 ‘도덕적 판단’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이는 에이즈가 성관계로 인한 감염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¹
물론 손택이 질병을 둘러싼 모든 은유를 배격하는 것은 아니다. 서두에 밝히고 있듯이, 은유는 오래 전부터 “과학적 지식과 표현력을 포함해 각종 이해 방식을 낳은 기초”(129쪽)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과의학의 발전과 세균의 발견은 질병을 다루는 언어를 공격적인 “군사적 은유”로 바꾸어 놓았고, 이는 사람들에게 질병을 어느 정도의 희생(구체적으로 말하면, 환자의 희생)이 따르더라도 물리쳐야 할 실체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이와 같은 군사적 은유는 에이즈에도 똑같이 작용하지만, 에이즈는 방탕한 성행위를 한다고 여겨지는 특정 집단에 내려진 ‘역병’이라는 은유를 떠안는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이는 질병에 대한 종교적 은유가 성행하던 시기에 나타났던 은유/해석이었지만, 에이즈에 대해서는 이러한 전근대적인 은유가 횡행하고 환자들에게 수치심을 안긴다.
죄를 저지른 개인에게 내려진 징벌이 매독이라는 이런 생각은 사실상 음탕한 짓을 저지른 공동체에게 내려진 천벌이 매독이라는 생각─오늘날의 산업국가에서는 에이즈가 이런 대접을 받고 있다─과 별다를 바가 없었다. 그렇지만 이런 생각은 매독을 쉽게 치료할 수 있게 되기 전까지 실질적으로 오랫동안 유지됐다. 개인이 초래한(그리고, 악화시킨) 질병이라는 식의 현대적인 방식으로 이해되고 있는 암과 대조적으로, 에이즈는 개인은 물론이고 ‘위험 집단’의 구성원이 초래한 질병이라는 식의 전(前)현대적인 방식으로 이해되고 있다─이처럼, 마치 중립적인 것처럼 들리지만 지극히 관료주의적인 이 ‘위험 집단’이라는 범주는 질병이 타락한 공동체를 심판해 왔다는 낡아빠진 생각을 재탕하고 있을 뿐이다. (178-179쪽)
정상적인 집단과 ‘그들’을 분리하는 사고방식, “외래의 산물(또는 경멸받고 있는 사람들이나 공포를 안겨줬던 소수자들)과 결부”(189쪽)시키는 19세기적인 사고가 ‘역병’이라는 은유에 잠재되어 있다. 콜레라나 나병, 매독이 유행할 때마다 부상했던 도덕적 천벌, 재앙으로서의 은유가 다시 등장하는 건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공포를 이용해 과거의 가치로 회귀하려 하고, 자신이 원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과감한 조치’도 불사하려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에이즈는 자신들의 정치적 의제를 집단심리의 문제, 즉 국가적 자부심과 자신감의 문제로 해석하려 드는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사건이다. 이런 추악한 감정을 다루는 전문가 나리들이 에이즈는 비정상적인 성 관계에 내려진 천벌이라고 제 아무리 우긴다 할지라도, 이들을 움직이는 것은 전혀, 또는 특히 동성애 공포증이 아니다. 이들에게는 에이즈를 활용해 이른바 신보수주의자들의 주요 활동 가운데 하나를 추진하는 것, 즉 (좀 부정확한 표현이긴 하지만) 1960년대부터 진행되어 왔다고 말해지는 ‘만인에 대한 문화전쟁’을 추진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이 질병에는 ‘의지’의 정치─즉 편협, 과대망상증, 정치적 유약함을 둘러싼 공포의 정치 일체가 들러붙어 있는 것이다. (201쪽)
이러한 공포는 편견과 모순되는 의학적 사실마저 포용해 양립 가능한 것처럼 포장하고, 신체와 의식의 해방에 전근대적인 도덕(이를테면 순결과 같은)이라는 수갑을 채우며, “장기간 공연되는 연속극”으로서의 종말론, “오늘날부터 계속되는 종말”(232쪽)을 부추긴다. 하지만 이러한 수사학은 “재앙을 성찰하려는 노력을 마비”(230쪽)시킬 뿐만 아니라, 환자들을 고립시키고 낙인을 찍는 데 보탬이 될 뿐이다. “에이즈를 둘러싼 공포는 발달된 사회가 가져온 주목할 만한 여러 재앙들”(237쪽) 중 하나일 뿐이라는 손택의 말에는, 그릇된 은유를 걷어내고 질병을 제대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듯이, 전 지구적인 위기(환경오염, 인구 과잉 등)에도 말세의 수사학을 걷어내고 제대로 보아야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말세의 언어는 군사적 은유를 대동할 수밖에 없으며, 그것은 어떤 과감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우리를 선동하기 때문이다.
손택은 인터뷰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들은 우리가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를 보여줍니다”(252쪽)라고 말한다. 질병을 향한 우리의 이분법과 외국인 혐오증도 마찬가지이며, 이런 사유에 젖어있을 때 우리는 현실을 왜곡하고 극단의 언어에 선동되기 쉬운 상태가 된다. 질병을 차별과 혐오의 언어로 불러온 역사를(매독을 ‘프랑스 발진’, ‘독일 질병’, ‘나폴리 질병’, ‘중국 질병’으로 불렀던 “광신적 애국주의”의 역사), 질병을 가리키는 군사적 은유가 파시즘과 나치즘의 선동 수단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언제나 신중하게 의심해야 할 것이다. 질병은 성적, 도덕적 타락을 보여주는 징표도 아니며, 어떤 희생이든 무릅쓰고 맞서야할 적군도 아닌 그저 질병일 뿐이다. 환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공격’이나 ‘반격’, 자책감과 수치심의 ‘낙인’이 아닌 '치료'다. 손택의 마지막 문장으로 마무리하자면 이렇다. “저 따위 군사적인 은유는 전쟁광에게나 돌려줘라.”(240쪽)
¹ "HIV 감염인과 한 번의 성관계로 감염될 확률은 0.1~1%인 반면에 감염된 혈액으로 수혈을 받을 때 감염될 확률은 90%나 된다."("에이즈에 대한 오해와 진실 5가지", 메디칼업저버, 2012.11.28. http://www.mo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533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