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를 드릴게요 - 정세랑 소설집
정세랑 지음 / 아작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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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교사 안은영을 처음으로 읽은 게 20187월이었는데, 이후 나는 정세랑의 신간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궁금해하고 찾아보는 독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초기작들이 개정판으로 꾸준히 나온 것도 한몫을 했겠지만. 목소리를 드릴게요도 마찬가지여서 처음 출간되었을 때 구입하고 띄엄띄엄 읽다가 이제야 다 읽게 되었는데, 여느 작품과 마찬가지로 재미와 흡입력 있는 이야기가 모두 충족된 독서 경험이었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정세랑의 작품세계, 특히 SF나 판타지의 세계를 요약하면 상상력에서 발아하여 관계에 다다르는 이야기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전 소설에서도 정세랑의 독특한 발상은 작품에 재미를 주는 요소 중 하나였으며, “SF 소설집이라는 소개에 걸맞게 그녀의 상상력은 여전하다. 지렁이가 세상을 리셋해버리는 이야기부터(리셋) 살인 충동을 일으키는 목소리를 가졌다는 이유로 감금되어 살게 된 선생님의 이야기까지(목소리를 드릴게요). 다만 이 작품들은 상상력에서 출발한 세계를 구축하고 진행시키는 것엔 그리 관심이 없고, 그 안에서 살아가야 할 이들의 관계에 초점을 둔다(리틀 베이비블루 필이 예외적이다). 이들이 서로의 차이와 감정을 받아들이고 함께 나아가는 연대가 작품의 주된 정서를 이루며(이는 정세랑의 다른 작품들도 마찬가지다), 이를 그려내는 작가의 시선이 작품에 온기를 부여한다. 차갑고 냉정하게 서술하는 작품이 거의 없다는 것은 인물을 대하는 작가의 시선, 즉 그대로 마무리해도 좋을 결말에 헬기 하나를 보내는 따뜻함(메달리스트의 좀비 시대)에 기인한다. 이러한 따뜻함이 때로는 군더더기나 작위적인 서술을 부르기도 하지만(피프티 피플), 인물들을 사랑스럽게 만들고 독자들을 끌어모으는 작품의 힘이 아닐까 싶다.

 

다채로운 상상력을 특장으로 지닌 작가이지만, 어떻게 우리는(또는 인류는)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지구를 포함한)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할까에 대체로 수렴하는 경향 탓인지 나는 단편을 읽으며 종종 정세랑의 다른 작품을 떠올렸다. 11분의 1을 읽을 때는 지구에서 한아뿐, 목소리를 드릴게요를 읽을 때는 보늬알다시피, 은열(옥상에서 만나요에 수록)을 떠올리는 식으로. 이는 작가가 지향하는 인간형을 뚜렷이 드러낸다는 측면에선 장점일 수도 있겠으나, 작품세계를 좁아지게 만든다는 한계점도 존재한다. 하지만 자신이 쓰고 싶은 상상력의 이야기가 있고, 우리가(또는 인류가) 함께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들에 대해서 독자들이 생각해볼 수 있도록 그들 앞에 가볍게 쏘아올릴 수 있는 걸로 작가는 만족하지 않을까.

 

상대적으로 뒤쪽에 실린 단편들이 더 좋았고, 나는 정세랑의 작품에서 괴짜들이(너드(nerd)한 사람들이) 함께 우왕좌왕하며 함께하는 이야기를 더 좋아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차별, 환경이라는 묵직한 주제를 가볍고 재치 있는 이야기로 풀어내는 것 역시 작가의 필력일 것이다. 앞으로도 정세랑의 작품을 읽으면서 인간 존재의 치열한 투쟁이나 세계의 묵직함을 느끼게 될 일은 없을 것처럼 보이지만, 앞으로도 나는 그녀 특유의 재미와 발상, 그리고 따뜻함을 기대하며 책장을 펼치리라. 이는 나 역시 작가의 문제의식에 공감하며, 인물들 사이에 느껴지는 온기를 현실에서도 마주하길 바란다는 뜻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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