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14.
『사랑과 결함』 읽기. 「팜」을 읽었고 86세대와 그 자식 세대 사이의 관계와 갈등이 생생하게 드러났다는 생각을 했다. 대의를 위해 실천하고 노력할 줄은 알지만 가부장적 질서가 체화된 대진과 “세계라는 치열한 투쟁과 멸망의 현장”에서 불안정한 위치에 흔들리며 살아가는 해나 사이에서 벌어지는 촌극. 문득 생각해보니 이 책에는 이미 떠나버린 이의 기행을 사후적으로 돌이켜보며 이해해보려는 불안정하고 가슴 속에 구멍이 난 인물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것이 가장 세태에 잘 맞아떨어진 것이 이 부녀 관계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어쩌다 이름 공모전에서 얻어낸, 세계가 이거나 먹고 떨어지라는 듯이 던져준 푼돈으로는 어디에도 뿌리내릴 수 없다는 것. 귀농해서 스마트팜을 시도하며 살아가는 대진의 모습이 힘차게 느껴지는 건 더 나은 세계를 위한 대의에 종사한다는 믿음이 있던 세대여서 아닐까. 시간이 지나고 신자유주의의 광풍이 몰아닥친 해나 세대는 대의가 사라진 지 오래인 세계에서 생존만이 목적인 삶이 일상이 되었기 때문에?
해나가 설렁설렁 장단을 맞추자 대진은 신나서 또 자기 이야기를 시작했다. 데모 이야기는 그만 듣고 싶었다. 뱃속에서부터 들었다고 생각하면 꼬박 이십구 년은 들어온 이야기였다. 지명수배된 이야기와 그때 대진을 숨겨줬던 여인들에 관한 이야기는 시간대까지 맞춰 줄줄 읊을 수 있었다. 어쩐지 대진은 그렇게나 위험했던 시절을 평생을 돌이키며 그리워하는 것 같았다. 해나는 그게 이상하게 미웠다. 그런 생각을 하다 문득, 무언가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케이크는?"
"아이고, 놓고 왔네. 아저씨 먹으라고 주자. 아빠가 더 맛있는거 사줄게." (197)
대진은 자꾸 사업을 구상하고, 체제에 대항하며 사회를 위한다고 여겨지는, 그런 일들을 도모했다. 그러면서 해나의 입학식과 졸업식, 심지어는 생일도 나이도 까먹었다. 집안일은 죄 까먹어도 대단한 일을 꾸미는 걸 보면 기억력의 문제는 아니었다. 대부분의 집안 대소사는 엄마가 챙겼다. 이혼하고 나서 제사는 자연스럽게 간소화되었다. (200)
해나가 어렸을 때 대진은 거칠 것 없이 정의로운 사람이었다.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며 불이 든 병을 던지고 물티슈 공장에 위장 취업을 했다. 부당한 것은 참지 못했고 그러다보니 작은 일 하나도 그냥 넘기지 못해 해나가 태어난 후로도 번번이 회사에서 잘렸다. 그들 가족은 점점 작은 집으로 이사하길 거듭했지만, 어릴 적 해나는 대진이 들려주는 스펙터클한 이야기가 좋았고 처지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럼. 아빠는? 아빠는 저열해?"
크고 나니 세상에 대고 자꾸 억지를 부리는 쪽은 대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정직하게 살면 가난한 거야. 대진이 자주 하는 말이었다. 엄마는 이직하기 전까지 보험설계사 일을 했다. 꽤 돈을 잘 벌었지만, 엄마는 일이 적성에 맞지 않다고 했다. 해나를 낳으면 바로 시민단체에 들어가 일하려 했던 엄마는 결국 적성에 맞지 않지만 돈을 잘 벌 수 있는 직업을 선택했다. 어쩐지 마음이 차분해진 해나는 귀까지 붉어진 대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기 연민이란 게 무서워."
그 말을 끝으로 정적이 흘렀다. 대진은 담배를 물더니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곧바로 다시 들어왔다. 그 와중에, 대진은 부엌으로 가더니 가스레인지를 켜서 담배에 불을 붙이고 이번엔 정말로 나갔다. (205-206)
눈을 감고 듣다가 그걸 왜 하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러니까 대진이 환경을 위해 한다고 했다. 그래서 해나가 왜 환경을 위해 그런 걸 하느냐고 물었다. 대진이 기후 위기에 대비해야 한다고 했다. 해나가 왜 기후 위기에 대비해야 하느냐고 물어보았다. 대진이 후손들을 위해 대비해야 한다고 했다.
"그럼 나는."
"어?"
"날 위해서는 뭐 하는데."
"이게 널 위한 거야."
해나는 가만히 그 말을 듣고 있다가 말했다.
"공모전 된 거. 그거 상금 말고도 뭐 하나 더 줘."
“뭔데?"
"수지 2지구 주택 분양권."
"야, 엄청난데?"
"근데 분양받을 돈이 없잖아."
“그거 당근마켓에 못 파냐?"
“그러니까, 날 위한 건 아무것도 없다고." (208-209)
어쨌든 대진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해 지구의 종말을 막고 있었다. 슈트를 갖춰 입고 포마드로 머리를 넘긴 채 날아다니는 사람이 히어로인가, 온 동네를 뒤지며 부산물을 죄다 그러모아 작물을 키우는 대진이 히어로인가. 해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배가 불룩 나온 몸으로 파란색 슈트를 입은 대진을 상상하다가 으, 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식으로 해나는 해나대로 대진의 진정성을 폄훼했고 대진은 대진대로 해나의 삶을 대의의 세계에서 아주 쉬운 방식으로 추방했다. (210-211)
해나는 문득, 자신 또한 세계라는 치열한 투쟁과 멸망의 현장에서 언제나 바라보는 사람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214)
25.5.15.
『율의 시선』을 다 읽음. 언젠가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을 알라딘에서 본 듯한 느낌이 있어서 빌려서 보았다. 예전에는 현실의 어려움에도 힘을 합쳐 용기를 잃지 않는 인물들이 많았다면, 요즘 들어서는 환경적, 심리적으로 나락까지 가라앉아 있는 인물들이 주가 되는 작품이 많은 듯하다. 과거에는 이렇게 차갑고 가라앉은 인물들(냉소적으로까지 보이던)이 신선했다면 지금은 너무 흔해진 느낌. 시대의 변화와도 관련이 있을까. 친구를 만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과정, 완벽해 보였던 다른 친구의 이면을 우연히 알게 되고 결국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과정에 대한 묘사는 섬세하고 문장의 세공력도 느껴졌지만 힘을 준 듯한 문장이 눈에 가끔 띄었고 내용 자체가 참신하게 느껴지지는 않아 아쉬웠다. 초반에 주인공인 안율의 차가운, 인간에 대한 일말의 기대도 없는 듯한 목소리는 여태 읽어왔던 어떤 청소년문학보다 어두웠지만…
25.5.16.
『사랑과 결함』 읽기. 「그 개와 혁명」, 「분재」, 「도블」, 「내가 머물던 자리」를 읽었다.
「그 개와 혁명」은 앞서 읽었던 「팜」과 동일한 주제 의식과 소재를 다루는 것처럼 보인다. 운동권 부모 세대와 자식 세대 사이의 관계가 빚어내는 복잡다단함. 내가 끔찍이도 싫어하는 면모와 닮고 싶은 면모, 나의 일부가 되어버린 면모까지 모두 가진 혈연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 이번 이야기는 「팜」과 달리 (사후적으로) 아버지와 딸 사이의 화해가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는데, 딸이 아버지의 유언을 적극적으로 실현시키는 주체로 자리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유언을 통해 아버지의 닮고 싶었던 면모를 자신의 몸으로 구현하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촌극. 가부장제의 옹호자였던 아버지의 유언이 딸의 의지로 실현되면서 딸을 상주로 인정하지 않는 장례식장을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아이러니.
언젠가 태수씨가 보는 유튜브 쇼츠를 함께 본 적이 있는데 유독 그런 내용이 많이 나왔다. 메갈이 어쩌고 한국 여자들이 어쩌고...... 나는 태수씨에게 이런 것들을 정말 믿느냐고 물었고 태수씨는 실제로 여자들이 그렇지 않으냐며 농담 아닌 농담을 했다. 나는 태수씨가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속에서 천불이 일었다. 왜냐하면 태수씨는 자식이라곤 나를 포함해 딸만 둘이었기 때문이었다. 자꾸 요즘 여자들 이야기를 하면서도 내가 요즘 여자들 중 한 명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태수씨는 가까이 있는 나를 두고도 저멀리 있는 요즘 여자들을 보는 식이었다. 그래서 유연한 노동 문제에 대해 비판하면서도 불가산인 가사 노동 시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사회는 조리 있게 굴러가야 하지만, 가족이라는 제도 안의 조리는 다른 문제였던 것이다. (226-227)
몇몇 노인은 완장을 찬 내게 태수씨가 아들이 없어 안타깝다는 소리를 했다. 그러면 나는 그렇게 안타까울 일은 아니에요. 라고 맞받아쳤다. 그러면 엄마가 하지 말라고, 그러지 말라고 손을 내저었다. 나는 애도하러 와서 굳이 그런 말까지 하는 사람들이 더욱 이해되지 않았다. 사촌동생이 남자라는 이유로 상주 노릇을 해야 한다는 것도 터무니없는 말이었다. 누구보다 태수씨를 잘 알고 사랑했던 맏딸이 여기 있는데. 하지만 사랑을 증명할 길은 달리 없었다. 누구의 사랑이 더 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한 트럭의 미움 속에서 미미한 사랑을 발견하고도 그것이 전부라고 말하는데. 더군다나 나는 태수씨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태수씨가 아프고 난 다음에야 깨달았다. (235)
나도 태수씨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태수씨는 내 말을 듣자마자 그러냐, 했다. 그러더니 내가 어떤 사람인데, 되물었다.
"모든 일에 훼방을 놓고야 마는 사람."
그렇게 말하자 태수씨가 웃었다. 웃다가 허리가 아픈지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그때 태수씨에게 고삼녀의 뜻을 알려주며 내가 그런 말을 들었다고 했다. 그러자 태수씨는 잠자코 이야기를 듣더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물었다. 네가 벌써 서른이니? 응, 태수씨. 나 서른이야. 많이도 먹었다. 그러게. 근데 말이야. 나이라는 게 사람을 주저하게도 만들지만 뭘 하게도 만들어. 그 사람들이 뭘 모르고 하는 말이야. 아빠는 어이고, 내 나이가 사십이네 하면서 조금 어른스러워졌고 어이고, 내 나이가 오십이네, 하면서 조금 의젓해졌어. (238-239)
그러니까, 나 같은 요즘 애들은 똑딱 핀을 만들면서 무언가를 도모할 거리는 없었지만, 그래도 뜻이라는 게 있었다.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뜻, 의지, 그런 것들. 비록 미적지근할지언정, 중요한 건 분명히 그런 게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244)
우리는 그렇게 태수씨의 죽음에 관해 우스갯소리를 하고 이것저것 계획하며 삶을 영위해나갔다. 그것은 죽음을 도모하며 삶을 버티는 행위였다. 태수씨는 자신이 죽는 것을 무엇보다 두려워했지만, 자신의 죽음을 계획하는 일에는 두려움이 없었다. 그 두 가지는 태수씨에게 전혀 다른 것이었다. (246)
「분재」는 할머니와 손녀의 시선을 번갈아 보여주고, 할머니의 집을 내놓는 과정에서 할머니의 몰랐던 모습을 손녀가 알게 되는 과정을 담았다는 점에서 「사랑과 결함」을 닮았다. 지난한 역경을 헤치며 살아온 할머니 차연이 힘이 부칠 때마다 마셨던 담금주를 손녀인 윤재와 부동산중개인 정미가 나눠마시며 서로의 불안정한 위치를 확인하고 잠시나마 위안을 얻는 장면은, 「사랑과 결함」에서 고모의 로봇 청소기를 바라보던 ‘나’를 떠오르게 했다.
윤재는 다 죽어가는 식물을 주워오는 할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다. 죽어가는 것을 살리고자 하는 마음이었을까. 윤재는 만약 할머니를 이해하게 된다면 버리는 사람들 또한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모르긴 해도 그 두 마음은 아주 미세한 차이에 불과해 보였으니까. 예컨대 그 얄팍한 미안함 때문에 할머니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소식을 알리지 않은 엄마의 마음과 그런 엄마를 오래 용서할 수 없을 윤재 자신의 마음 같은 것. 그런 복잡한 마음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윤재와 엄마의 삶을 이리저리 흔들며 관계의 모양을 바꾸곤 했다. (266)
「도블」과 「내가 머물던 자리」는 화자 또래의 젊은 여성들 사이의 관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우리 철봉 하자」와 같은 선상에 놓인 작품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도블」의 주된 인물 관계는 셋이다. “생각이 자기를 잡아먹고 종국에는 주변 사람들까지 잡아먹”는 사람만 만나며 고통받는 진경, 그런 진경에게 버릴 줄 알아야 한다고, “우리가 멋대로 삶을 망치게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신의 꿈을 버리고 취집을 선택한 승혜 언니. 스스로를 ”부장인턴“이라고 자조하며 어디에 정착하지 못하는 ‘나‘. 어쩌다 펜션에서 만난 델마와 주인 남자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점차 흐릿해지는 관계들의 힘.
나는 그런 사람은 생각이 너무 많아서 생각이 자기를 잡아먹고 종국에는 주변 사람들까지 잡아먹게 될 거라고 말해주었다. 그러자 진경이 옐리네크는 좋은 애라고 대꾸했고 나는 어쨌든 가오나시도 주인공에게는 좋은 귀신이었다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다 알면서도 멍청한 선택을 하는 사람이랑은 친구 안 해. 나는 진경이 승혜 언니를 두고 한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291)
나는 행사 기획 업체에서 세번째 인턴을 하는 중이었다. 기업에서 진행하는 행사 전반을 대신 맡아 운영하는 업체였다. 언니에게는 진작 부장인턴은 달았다며 농담처럼 말했지만 이미 모든 것을 내려놓은 참이었다. 나이가 들수록 혼자 살아갈 힘이 생길 거라고 생각했는데, 해를 거듭할수록 혼자일 미래를 상상하는 것이 끔찍해졌다. (293)
갑자기 귀뚜라미들이 울음을 그치더니 파도 소리가 몹시 크게 들렸다. 델마는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남자는 바다에서 이곳까지는 몹시 멀다며 우리를 안심시켰다. 그러면서 파도는 무언가를 부수려는 힘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했다. 바람이 불 때 해수면을 변형시키려는 교란력과 그 변형을 막으려는 복원력이 함께 발생하는데, 이 과정에서 바다가 부서지며 파도가 치는 것이라고. 남자는 손으로 꽃받침을 만든 뒤 한쪽 옆구리에 갖다붙였다. 에, 네, 르, 기, 파 다들 아시죠? 이 파가 그 파란 말이에요. (293-294)
침략을 대비하기 위해 갈린 수많은 삶을 떠올려보았다. 무언가를 대비하기 위해 삶을 갈아낸다는 것은 그 자체로 잔인한 일이었다. 혹시 내가 삶을 망가뜨리지 않기 위해 하는 일들이 사실은 정말 내 삶을 망가뜨리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 무서워졌다. (302-303)
「내가 머물던 자리」도 또래의 젊은 여성으로 보이는 ’나‘와 정선, 미리내의 관계가 핵심적이다. 임신 중절을 한다며 ’나’에게 돈을 받고 해외 여행을 떠나버린 정선, 함께 살게 되었지만 자유로운 영혼으로 규칙을 무시하며 끊임없이 일탈하는 미리내. 정선을 찾아 떠난 여정에서 겪게 되는 일들은 '나'가 스스로를 얼마나 깎아왔는지, 그러면서 타인의 불행을 소비해온 자신을 마주하는 일이다.
사실 나는 오래도록, 내가 정선이에게 무엇을 잘못했는지 생각했다. 그때는 내 잘못을 끊임없이 되새김질하는 것이 나의 잘못된 습관이라는 걸 미처 모르고 있었다. 그러니까, 모든 관계에 귀속된 잘잘못들. 그런 것들을 따지다보면 내가 혼자 세계를 맴도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걸 온전히 인정하게 되었다. (317)
정선이가 배를 퉁퉁 두드렸을 때, 정말 그저 뱃살이 나왔을 뿐이란 걸 믿게 되었을 때, 나는 내가 은근히 정선이의 삶이 내 생각대로 나아가길 바라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내가 누구보다 남의 불행을 소비하면서 스스로를 멸시하는 사람이라는 것도. 왜냐하면, 나는 그런 식으로 멋대로 남을 판단하고 그 사람의 최악을 상상하며 내가 사회에서 받은 온갖 모욕을 감수하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불행 포르노를 즐겨 보았고 내가 미워하는 사람들이 잘못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또 실제로 내가 미워하는 사람들이 잘못되는 광경을 보고 싶어하진 않았다. 왜냐고? 그건 나의 마음에 해가 되는 일이니까. 그러니까 남의 불행을 소비하는 건 상대방을 멸시하는 것만큼이나 내 마음을 스스로 깎아내리는 일이었다. (331)
“설명할수록 내가 깎이는 기분이라 그랬어."
나는 그 말이 사무치도록 이해가 되어서 더 슬펐다. 정선이의 팔을 쓸어내렸다. 부드러운 팔에 내 팔을 대고 마찰하자 서로 다른 피부의 질감이 느껴졌다. 우리에게 무언가가 닿을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것만 같았다. 나는 공유주택에서 원하는 걸 제대로 얻지 못했고 정선이는 어떤 식으로든 원하는 걸 얻은 것 같았다. 그러니까,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 그 미세한 애틋함을 누리는 따뜻한 시절 같은 것들. 그렇게 비로소 나는 내가 머물러 있던 자리에, 나만 머물러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336-337)
25.5.17.
『사랑과 결함』 읽기. 해설 부분과 작가의 말을 다 읽었다.
가족관계에 있어서 경제적 이득을 따지는 손절매나 절연이 어려운 이유는 상대방의 안 좋은 부분을 그와 오랜 시간 관계해온 자신 또한 얼마간 체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를 미워하려면 나 자신 또한 미워해야 하는데, 그렇게만 생명을 지속시키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 예소연의 소설에서 사랑의 불가해함은 이렇게 자기혐오와 생명력의 지난한 반복을 통해 지속적으로 변주된다. (344)
예소연의 소설에는 비슷한 여자들이 자주 등장한다. 이는 계급적 유사함으로 인한 아비투스 때문이지만, 당사자들에게 그것은 몰개성의 표지인 동시에 동일시의 표적이 된다. 문제적 행동을 수정하고 개선해야 한다는 비난 섞인 충고는 자기 자신을 포함한 여성에게 내재화된 검열의 표현이자 여성동성 사회에서 흔히 보이는 고질적인 형태의 애정이다. (3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