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1.2.

















서리북 18호 읽기 시작. 어느덧 겨울이 성큼 다가왔는데 이제 여름호를 읽고 있다내전이 일어나는 조건에 대한 분석도 흥미로웠고, 역사가 어떻게 흘러가는지(정확히는 국가의 붕괴가 어떤 과정으로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법칙을 고안한 책도 눈길이 갔다(물론 서평자는 이 책의 저자의 데이터베이스에 대해 다소 회의적이다).
















최현진_우리는 지금 얼마나 안전한가


월터가 내세우는 핵심 개념은 '아노크라시(anocracy)'. 이는 완전한 민주주의도, 완전한 독재도 아닌 중간 상태의 불안정한 정치 체제를 말한다. 그녀는 어떤 나라가 내전을 겪게 될지 여부를 예측하는 가장 좋은 지표는 그 나라가 민주주의를 향해, 또는 민주주의에서 벗어나 움직이고 있는지”(32)라고 말한다. 내전은 정치 체제가 안정되어 있을 때보다 민주화 과정이 정체되거나 역행하는 중간단계에서 더 자주 발생한다. (17)


그러나 제도적 취약성만으로 내전이 발발하지는 않는다. 월터는 그 위에 '파벌주의(factionalism)'가 결합할 때 내전 가능성이 급격히 상승한다고 분석한다. 파벌주의란 인종, 종교, 고향, 언어 등 정체성에 기반한 정치적 분열로, 정치 경쟁이 타협이나 합의가 아닌 배제와 대결로 귀결되는 양상을 말한다. 이 파벌주의는 종종 집단의 정체성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종족 사업가(ethnic entrepreneur)'들의 전략과 결합하여 사회 분열을 심화한다. 이들은 공포감을 자극하고 부추겨 유권자 집단을 가두려는 방편으로 민족이나 종교와 같은 정체성 기반의 혐오를 유포하며, 자신의 권력쟁탈전을 정당화한다. (17-18)


중요한 점은, 시민들이 이러한 파벌화 과정을 '정치적 진보''정당한 권리 요구'로 오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월터는 "시민들이 하룻밤 사이에 협소하고 이기적인 파벌로 조직되는 것은 아니다”(83)라고 말하며, 자신들이 공동체를 지키고 정의를 실현하고 있다고 믿는 순간에도 사실은 내전으로 가는 길을 밟고 있을 수 있다고 경고한다. , 내전은 대개 점진적이며, 일상적인 정치 갈등과 분열이 누적된 결과다. 어느 순간부터는 기존의 정치 제도가 더 이상 중재의 기능을 하지 못하고, 대화가 봉쇄되며, 극단주의만이 목소리를 얻는다. (19)


폭력을 촉진하는 또 하나의 핵심 요인은 '지위 격하(downgrading)'이다. 단지 가난하거나 억압받는다고 해서 내전이 발생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일단 권력을 잡았다가 손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볼 때 사람들이 특히 싸움에 나설 가능성이 높았다." (93) 자신들이 누리던 정치적 특권이나 사회적 영향력을 상실했다고 느끼는 집단은 종종 무력 충돌로 반응한다. 이는 이라크에서 수니파 엘리트가 축출되었을 때처럼, 과거의 지위가 현재에 비해 하락했다고 느끼는 경우 강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감정은 단순한 상실감이 아니라 생존의 위협으로 인식된다. (19)


지위 격하는 '희망의 상실'과 연결될 때 더욱 폭력적으로 변한다. 월터는 "한 집단이 미래를 내다보는데 계속 고통만 받을 뿐 아무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유일한 길로 폭력에 주목하기 시작한다" (116)고 말한다. 이 희망 상실은 시위가 실패하거나 체제가 변화 가능성을 보여 주지 못할 때 심화한다. 평화적 시위는 체제를 바로잡으려는 최후의 필사적인 시도"이며, "평화적 변화를 추구하는 낙관주의자들에게 남은 마지막 카드" (122)인데, 이마저도 좌절되면 시민들은 점차 극단으로 내몰린다. 많은 내전은 오랜 평화 시위의 실패 이후에 발발했다. (19-20)
















최정규_무너질 것 같은 국가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

 

터친에 따르면 인류 역사상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사회의 주기적 붕괴 패턴을 만드는 두 개의 힘은 엘리트 과잉생산과 전반적 대중의 궁핍화이다. 위에서 얘기한 의자 뺏기 게임은 점점 늘어나는 엘리트 지망생들과 그 과정에서 점점 늘어나는 탈락자들을 묘사한다. 이 게임이 진행되면서 일부 엘리트들은 의자를 놓고 멀리 돌지 않고 가까이에서 도는 척만 할 수도 있고 노래가 진행되는 동안 다른 경기자들을 슬쩍 밀쳐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려 할 수도 있다. 게임의 룰을 교묘히 어기면서 자리를 차지하려 애쓴다. 여기에 하나를 덧붙여 보자. 게임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구경꾼'들은 더 많은 ''을 내야 한다. 게임은 점점 더 치열해지고, 구경꾼들은 점점 가난해진다. 그렇게 되면 이 장난스럽던 게임은 꽤 현실적인 모습을 갖춘다. (29-30)


자신의 삶을 넘어서 타인의 삶에 대해 권력을 행사할 수 있으려면 그만한 지위에 도달해야 한다. 부자는 늘어나는데, 이들이 차지할 수 있는 지위의 수는 고정되어 있으니, 이들 사이의 경쟁이 점점 심해진다. 말하자면 부자가 늘어나면서 엘리트 지망생들이 너무 많이 늘었고, 이들 사이의 자리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지위 경쟁에서 탈락하는 지망생들이 많아진다. 이를 가리켜 터친은 '엘리트의 과잉생산'이라고 부른다. 엘리트의 과잉생산이라 부를 수 있는 하나의 경향이 있다면 그 이면에는 '대중의 궁핍화'라는 또 다른 경향이 병행한다. 경제가 성장하면서 파이도 커지지만, 이중 상위 1퍼센트가 차지하는 몫이 커지면 일반 노동자들의 임금이 전체 파이에서 차지하는 몫은 점점 감소한다. 상대적 임금의 저하, 기대수명의 감소, 그리고 자살, 약물 중독에 따른 절망사의 급증 등은 '대중의 궁핍화'라는 두 번째 경향을 보여 주는 지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원천은 사회의 상층부로 부를 끊임없이 밀어 올리는 '부의 펌프'. (30)


터친에 따르면 지금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바로 이렇다. 1980년대를 시작으로 천만 달러 자산을 보유한 슈퍼 리치의 수가 급증했다. 이후 천만장자의 수는 전체 인구의 0.08퍼센트에서 0.54퍼센트로 증가했다. 같은 기간 자산이 500만 달러 이상인 가구 수는 7, 백만장자의 수는 4배 증가했다. 부자의 수는 증가했지만, 권력을 주는 지위의 숫자는 고정되어 있다. 공적 선거에서 직접 선거 자금을 대는 후보자의 수가 증가하고, 2000년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개인적으로 100만 달러 이상을 쓴 후보가 19명이나 된다. 선거에 승리하고자 하는 비용은 엄청나게 증가했다. 당선된 하원의원의 경우 평균 지출액이 199040만 달러에서 2020235만 달러로 증가했고, 상원의원은 같은 기간 390만 달러에서 2,700만 달러로 크게 늘어났다. 부가 상층부로 집중하면서 엘리트 지망생들이 너무 많이 늘었고 지망생들 사이에서의 자리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낙오되는 지망생들의 불만이 쌓여 갔다.(24-25) (30-31)


그의 이야기 속에서는 엘리트들의 분화와 엘리트 경쟁에서 탈락한 이들의 이야기, 그리고 이들이 지배계급을 해체하고 새로운 질서를 가져올 새로운 대변자로 등장하는 과정은 무척이나 상세하게 다루어지는 반면, 그가 말하는 힘의 다른 한 축인 대중의 궁핍화와 분노는 부분적으로만 다루어진다. 그의 서사에서 대중은 수동적으로 동원되는 대상으로만 다루어진다. 어쩌면 이것이 현실일지도 모르고, 혹은 이들의 움직임을 세분화하고 분석적으로 다룰 데이터가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반복적으로 정치적 불안정을 만들어 내는 과정에서 대중의 분노는 왜 스스로의 목소리로 조직화하지 못하고 탈락한 엘리트들에 의해서만 대변되고 그들에 의해서만 동원될 수 있었는지, 탈락한 엘리트에게 열광한 대중은 정확히 누구인지 (미국의 경우 다시 한번 백인 남성 노동계급인지, 아니면 대타협 시기에조차 배제되었던 이들인지, 혹은 누구였어야 했는지), 대압착 시기 동안 배제된 이들의 목소리는 어떻게 현실에 반영될 수 있는지 등의 질문은 여전히 답을 기다리고 있다. 엘리트 지망생들의 목소리를 통해서만 분노를 반영할 수 있다면, 그것이 불가피하다면, 우리의 역사는 터친의 말대로 같은 패턴을 계속 반복하는 것에 그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반대로 합의에 기초한 제도가 마련되고 그 제도가 부의 펌프의 작동을 막을 수 있다면 (역사는 아주 예외적이지만 이를 해낸 적이 있다), 그리고 그 제도가 더 많은 대중을 포용해 낼 수 있다면, 운명적 반복을 조금은 늦추게 되리라는 작은 희망을 품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34-35)


월가 점령 시위 이후 1퍼센트 대 99퍼센트가 아니라, 0.1퍼센트 대 9.9퍼센트 대 90퍼센트가 문제이며 9.9퍼센트가 새로운 귀족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매튜 스튜어트(Matthew Stewart)더 애틀랜틱기고문에서 9.9퍼센트가 교육과 문화를 독점하면서 나머지 90퍼센트에 대한 문화적,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이들이 새로운 귀족계급으로 등장했다고 진단한 적이 있다. 그에 따르면 9.9퍼센트는 자신들의 지향을 사회 보편적인 지향인 것처럼 만들고, 나머지 90퍼센트의 지향을 잘 대변할 수 있다고 스스로를 내세우는 집단이다.

대중의 목소리가 9.9퍼센트가 마련해 놓은 논리의 틀에 담겨서 9.9퍼센트의 입을 통해서만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직접 정치적 공간에 의견을 반영하고 의제화할 수 있으려면, 스스로의 목소리를 담아낼 논리와 그것을 전달할 힘이 필요하다. 한편으로 이는 자원과 역량의 문제이고 평등의 문제다. 다른 한편으로 배제된 이들의 목소리를 담아낼 통로가 마련될 수 있을지가 관건이라면, 이는 민주주의의 문제다. 평등과 민주주의,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여기에 실낱같은 희망이 있다. (35-36)
















백승욱_냉전사 쓰기의 난점, 냉전적 서사로 회귀할 함정

 

베스타의 작업은 냉전 공간을 전 지구로 확장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이런 공간적 확장과 더불어 냉전의 이해를 위한 출발 시기를 우리 예상보다 훨씬 앞으로 당긴다. 보통 이야기하는 냉전의 출발점은 1947년의 처칠과 트루먼의 냉전 시대 발언, 1949년 중국 공산당의 건국 또는 1950년의 한국전쟁, 아니면 그 모든 구도의 출발점이라 할 1945년의 얄타회담이나 포츠담회담 정도일 것이다.

그렇지만 베스타는 냉전 역사의 출발점을 1890년대까지 앞당긴다. 미국과 러시아의 부상, 사회주의 세력의 형성 등 냉전의 핵심적 특징은 상당히 오래전에 형성되기 시작했고, 냉전사의 서술은 사실 '장기 20세기'의 서술과 같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되면 냉전이라는 쟁점은 우리에게 익숙한 체제 대결이나 이데올로기 대결의 차원을 넘어서서 더 큰 질문을 담는 역사 연구 과제가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난 한 세기는 그에 앞선 시대와 어떤 차이점을 보이며 그 시대는 어떻게 '냉전'이라는 핵심적 특징을 안게 되었는가? 그리고 그 시대의 종결은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를 이해하는 데 어떤 함의를 주는가? 이런 물음들을 '세계사'적 냉전 접근을 통해서 묻는다. (40)


중국 현대사 전문 연구자 배경을 지닌 베스타의 냉전 인식에서 독특한 점은, 중국 현대사에서 '마오쩌둥 시기'라고 할 수 있는 사회주의 건설기를 분석해 볼 의미가 없는 '암흑기'로 취급해 거의 통째로 무시한다는 점이다. 한국사에 대해서도 단편적 지식을 통해 한국의 근대적 성과에 대한 높은 평가가 확인된다. (43)


냉전의 지구사에 이어 냉전에서도 베스타의 업적이 가장 돋보이는 부분은 비서구(소위 '3세계)에서의 냉전, 특히 1970년대 (베스타가 '브레즈네프 시대'라고 이름 붙인) 이 지역에서의 냉전이다. 유가 인상에 힘을 얻은 소련이 미소 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군사적·정치적 영향력 확장을 주도하고 소련 공산당 국제부가 1930년대 코민테른을 연상시키는 글로벌한 개입 전략을 전개한 이 시대가 어떻게 특정 지역에서 '냉전''열전'으로 전환시켰는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함을 베스타의 연구를 통해 잘 알게 되었다. 냉전은 이 분석을 좀 더 넓게 확장해 중동,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인도 등지에서 미국과 소련의 냉전적 경합이 각 지역의 특수성과 결합해 어떻게 독특한 궤적을 형성했는가를 보여 준다. 이런 지역 서술에서 베스타는 분석을 다면적으로 복잡화하고 전지구적 맥락 속에 위치 지움으로써 값진 성과를 낳았다. (43-44)


이 지역과 구분되게 그다음 베스타가 냉전에서 분석하는 중요한 지역은 냉전의 한 주축인 미국, 그리고 미국 영향하의 유럽(마셜 플랜을 계기로 해서)이다. 여기서 베스타의 분석은 구도의 복잡화,'미국이라는 외적 요인'과 유럽 각국 정치의 복잡성의 뒤섞임, 미국 내에서도 여러 세력과 행위자들의 복합성의 결합이라는 차원을 검토한다. 그럼으로써 냉전이 어떻게 20세기 중후반 독특한 '국가 간 체계' 질서를 구성해 냈고, 그 영향하에 각 지역이 각자의 길을 모색해 갔는지를 보여 준다. (44-45)


이 두 지역과 대조되는 세 번째 서술 대상은 소련 그리고 소련 영향하의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이다. 그런데 여기 오면 앞서 두 지역을 분석하던 베스타의 태도는 상당히 달라져 아주 단순해진 구도로 이 지역들을 분석하는 것이 확인된다. 분석의 시야는 대체로 소련 '스탈린의 음모'나 마오쩌둥의 폭력적 권력욕에 초점을 맞추는 전체주의적 관점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동유럽의 2차대전 이후의 역사, 소련 현대사, 중국 사회주의사는 한 독재자의 '의도''발언'을 중심으로 그 의지의 관철, 그리고 필연적인 붕괴의 역사처럼 그려진다.

탈냉전 시기, 특히 소련 해체와 각 지역의 문헌 자료의 공개 이후, 냉전 시대 사회주의 국가들의 흑역사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그 사회주의 시기에 대한 재조명과 재평가가 중요한 역사적 과제가 되고 있음을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다. 요점은, 그 시기를 현재적 관점에서 보려면, '독재자의 사악한 의도'라는 단순한 전체주의적 시야를 벗어나 베스타가 제3세계나 미국과 연관된 지역에 적용한 성과를 거둔 '복잡성과 글로벌 맥락'이 이 세 번째 지역에도 비슷하게 적용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45)


베스타의 서술을 따라가다 보면 공산주의 세력의 등장으로부터 냉전의 형성과 냉전의 붕괴로 이어지는 과정은 매우 필연적이며, 이는 공산주의자들의 도발과 미국의 수동적 대응의 과정처럼 읽힌다. 그렇지만 앞서도 언급한 최근의 연구 동향, 그리고 케임브리지 냉전사에서도 확인되는 새로운 접근은 2차대전 종결 시점에서 냉전이라는 진영 대립이 지금 생각처럼 그렇게 당연하고 필연적인 것은 아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베스타의 설명 방식은 악의적 소련과 순진한 미국이라는 구도로서 얄타 시기를 다루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최근의 분석은 이 얄타 구상의 형성을 그보다 훨씬 복합적이고 글로벌한 구도로 분석할 수 있음을 확인시키고 있다. 베스타가 '냉전 맹아'의 필연적 확장 발현이라는 관점에서 20세기사를 설명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렇게 되면 가볍게 지나치는 것이 2차대전 추축국, 특히 독일 히틀러 국가의 등장과 위협이라는 문제이다. 1차대전 종결의 실패가 2차대전의 독일의 도발로 다시 이어졌고, 그러면 2차대전 종결 방식은 어떻게 독일의 위협(부차적으로 일본의 위협)을 불가능하게 만들 것인가가 우리가 아는 냉전 형성의 중요한 출발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 (48-49)


이 책을 집필한 2017년의 시점에 베스타는 유럽의 미래에 대해 낙관적 모습을 보이는 듯하다. 하지만 10년 정도가 지난 현재 시점에서 유럽과 독일의 미래를 보자면, 독일을 위한 대안(Alternative für Deutschland, AfD) 등 다양한 극우 세력의 약진과 위협은 작은 문제가 아니고 이는 냉전 시대 이해와 뗄 수 없는 질문이다. 이런 변화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트럼프의 재등장과 밀접한 관계에 있고 결국 NATO 형성기의 질문을 불러낸다. 193233.1 퍼센트 득표로 집권에 성공한 히틀러의 길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유럽은 20퍼센트 지지율을 넘어서 나치당 궤적을 따라가는 듯 보이는 AfD의 약진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그리고 이는 왜 냉전의 종식 이후에 등장한 것일까. (49)


냉전 해체 이후, 그리고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세계는 균질적이지 않다. 상대적으로 안정적 지대로부터 완전히 무정부적 정글의 지대까지 분화하고 있고, 이 현실 또한 얄타 구상으로부터 시작한 2차대전 종결 질서에 대한 이해 없이 분석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여기서도 중요한 논점 중 하나는 2차대전 전후 처리에서 독일과 일본의 처리 방식의 차이가 왜 발생했고, 그것이 이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문제다. 독일은 군정 체제로, 일본은 총사령부하의 내각 부활 방식으로 점령이 이루어졌다. 이를 시작으로, 1951년 강화조약이 체결된 일본(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대비해 독일의 경우 강화조약은 1991년 통독 이후에야 가능했다. 유럽의 전후 체제가 소련을 지목하면서 실질적으로는 독일을 유럽의 틀 속에 가두는 '이중 봉쇄'로 작동했다면, 동아시아는 미국과의 개별적 군사동맹 체제로 일본의 관리가 이어졌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동아시아의 안보적 질서가 중국의 반대로 1951(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1953(한국전쟁 정전협정), 1954(제네바회담)이라는 계기에 어떻게 중단되어 이 지역의 현재적 쟁점이 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동서 냉전의 비교 연구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50)


결국 냉전 시대를 다시 묻는 이유는, 이 시대를 자기 방식으로 끌어가고자 한 두 세력 즉 미국과 소련 공히 19세기 위기를 돌파하는 각자의 대안이 경합을 벌인 이 시대에 어떤 나름의 해결책이 모색되어 일정 시기 특정한 질서가 유지되었는가를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 질문의 핵심은 19세기 위기를 낳은 '자기 조정적 시장경제'의 무오류성이라는 신화를 유지할 수 있는지, 인민 주권의 시대를 정치의 틀 속에 어떻게 담아낼 수 있는지, 그리고 식민주의 시대를 탈피해 민족자결의 틀을 어떻게 수립할 것인가였다고 할 것이다.

냉전의 두 진영은 이 문제를 나름의 방식으로 대응하기 위한 시도를 보였는데, 서로 접속하지 않는 떨어진 분리-독립된 공간에서 작동해 온 것이 아니라, 우리 오해와 달리 내적으로 영향을 받고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면서 상대적으로 분리된 듯한 착시효과를 주는 통일된 체계 내에서 작동해 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한 축의 붕괴는 다른 한 축의 승리가 아니라, 두 세력을 묶은 한 시대의 종료와 위기의 재도래로 인식되어야 하는 것이다. 냉전사를 연구하되 냉전적 사유에서 벗어날 필요는 이 때문에 제기되는 것이고, 베스타의 냉전을 읽으면서 지속적으로 느끼는 아쉬움도 여기에 기인한다. (53-54) 



25.11.3.

서리북 18호 읽기. 김용구라는 정치학자의 생애도 흥미로웠지만, 오늘날의 연구자들의 모습을 꼬집는 글쓴이의 촌평이 더 인상적으로 남았다. <미키 17>에 대한 글은 나도 본 영화에 대한 평이니만큼 더 흥미롭게 보았는데,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재생산에 대한 논의, 금융 자본주의와의 연결점 등은 영화를 보며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애초에 영화에 대한 인상이 강하게 남지 않아서 그랬나.

 















옥창준_오지의 지질학자가 남긴 연구 기록


요즘 연구자들은 시대를 꿰뚫는 거대한 질문에 대한 탐구보다는 각자의 관심사에 더 집중한다. 조금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세계 학계의 중심부인 미국에서 최근 유행하는 주제에 맞추어 자신의 '연구 핏'을 조정하고, 이와 관련된 다양한 스펙을 이르면 학부 때부터 준비하고는 한다. 이렇게 하면 더 좋은 대학원에 들어가고, 더 유명한 저널에 논문을 싣고, 인용 횟수가 많은 논문을 쓸 수 있을지는 몰라도, 나라면 이런 부류의 연구자가 쓴 회고록을 굳이 따로 찾아 읽고 싶지는 않을 듯하다. 연구자의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의식의 탄생을 시대라는 맥락과 개인의 삶과 연결 지어 해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58)


김용구는 루소의 사상에서 전쟁과 '전쟁 상태(L'état deguerre)'를 구분했다는 점을 더 의미 있게 보았다. 실제 전쟁과 구분되는 잠재적 전쟁을 뜻하는 전쟁 상태라는 개념은 한반도에서 냉전을 경험한 김용구에게 그 현실을 잘 설명해 주는 틀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같은 루소를 읽었더라도, 국제정치의 중심에서는 권위체가 없는 상태를 규명하고 이를 이론화하는 것이 중요했다. 반면, 국제정치의 주변이었던 한반도에서는 현실을 이해하게 해주는 개념이 더 중요했을 것이다. 더 나아가 김용구는 루소를 빌려 전쟁상태를 평화 상태로 바꾸는 방법까지 함께 고민했다. (60)


1960년대 근세한국외교문서총목이 주로 문서의 수집과 정리에 가까웠다면, 30년이 지난 후 김용구는 한반도를 둘러싼 외국세력들이 매우 독특한 정신적 특성을 보이고 있음을 더욱 강하게 의식했다. 그는 서구의 몰락을 쓴 오스발트 슈펭글러의 사상을 빌려 먼 곳의 상대를 정복하려는 욕망, 탐험을 향한 집착, 더 많은 생산을 위한 발전, 신속한 이동을 위한 기계 발명의 욕구를 지녔다는 측면에서 유럽 문명은 괴테의 파우스트에 등장하는 파우스트(Faust) 박사와 비슷하다고 보았다.(227)

그리고 20세기 주도 국가인 미국은 유럽 문명권에 속하면서도 스스로를 특별하다고 여기는 미국 예외주의를 주장한다고 보았다. 러시아는 유럽에서의 소외감을 아시아에서 보상받고자 했으며, 이는 19세기 러시아가 한반도로 진출한 배경에서도 잘 드러난다고 분석했다. 전통적인 사대교린 질서에 익숙한 중국을 중심으로 한 유교 문명권의 변화, 그리고 유교 문명권 바깥에서 활동하면서 '탈아입구'에 성공한 일본의 사례는 한반도를 둘러싼 외교사가 단순히 국가들 간의 대립이 아니라 문명들 간의 이중, 삼중의 대립이라는 점을 잘 보여 주었다. 한반도는 주변에 위치해 있어, 오히려 문명의 충돌 속에서 작동하는 세계사의 조류를 가장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는 장소였다. (64-65)


그러나 한국은 김용구의 표현대로 주변 지역에서 정신이 가장 낙후된 '오지(奧地, borderland/hinterland)'였다. 오지는 슈펭글러가 말한 '가정(假晶, Pseudomorphosis)' 현상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현장이었다. 가정 현상이란 광물학에서 가져온 말로, 외래 문화가 겉으로는 전파되는 듯 보이지만, 실제 내부에서는 이에 저항하는 문화가 축적되는 현상을 지칭했다. (111) 한반도는 유럽 제국주의의 전 세계적 팽창 지역 중 오지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폭력을 직접적으로 경험했고 그만큼 이에 대한 저항도 컸다. 그 결과 서양의 사고방식과 개념을 표면적으로는 수용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본래의 의미가 '가정'되는 현상이 자주 일어났다. (65)



한윤아_시간 축적의 악몽, 유예된 정치적 상상: <미키 17>

(*영화 <미키 17>의 스포일러가 있음*)


첫 장면에서 귀에 걸린 또 다른 부분이 있는데, '냉동고기 꼬치(meat popsicle)'라는 표현이다. 'popsicle'은 아이스바나 얼음과자인데, SF 장르에서 종종 극저온으로 여행하는 사람, 냉동 인간을 표현하는 말로 나온다. 물론 경멸적으로 부르는 클리셰이다. (76)


우리 시대가 생산해 내는 돈의 가치는 과연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모바일 통장과 주식 차트, 부동산 가격의 숫자들이 실상 아무런 실물 가치를 재현하지 못한다는 공공연한 체제 비밀에 의문을 가지지 못한 채, 억과 조라는 단위는 일상에서도 자주 언급된다. (79)


봉준호 감독의 영화에는 일종의 무대이자 공기처럼 파시즘이, 혹은 괴상하지만 정교하게 디자인된 파시스트 캐릭터가 등장해 왔다. <살인의 추억>(2003)의 전두환 정권, <괴물>(2006)의 미국 제국주의와 대리자들, <설국열차>(2013)'엔진의 아버지'라 불리는 기술 엘리트 월포드, <옥자>(2017)<기생충>(2019)의 자본가 등, 얼굴과 성격과 직업을 바꿔 가면서 계속해서 출몰한다. 그의 영화를 하나의 세계관으로 묶어 본다면, 어쩌면 그 파시스트들은 사라지지 않는 삶의(영화의) 조건이며, 영화의 서사는 궁극적으로 그들을 제거하는 데 계속해서 (어쩌면 일부러) 실패하고 있다. 영화 말미, 미키를 복사하던 프린트기가 파시스트를 복사하는 악몽 같은 장면은 세계를 이어가기 위해 어쩌면 그를 없애지 않겠다는 의지로 읽히기도 한다. 이런 배경 속에서 이야기들은 서민의 직업적 사명감, 가족의 책임감, 아나키스트의 허세 등 작은 감정들이 우연하게 지속적으로 마주하는 모순에 반응하다 각성하는 방식이다. <미키17>의 경우 이 둘의 캐릭터 대결이 굉장한 볼거리를 주는 데다, 상황적으로 현실의 파시스트들과 겹쳐 가며 웃음을 중폭한다(독재자 사령관, 그를 조정하는 아내와 검은 뿔테 안경을 쓴 민머리 2인자 등). 그럴수록 미키의 삶의 비극과 행성을 지구화한다는 괴상한 계획을 만들어 낸 구조는 리무진 밖의 소음보다 더욱 뭉개져서 흩어진다. (80-81)


실비아 페데리치와 낸시 프레이저 등은 자본주의야말로 역사적으로 형성될 때부터 여성과 연결되어 있는 재생산을 보이지 않는 영역으로 만들고 그것을 수탈하면서 관리해 왔다고 설명한다. 우리 시대 낙태금지법이나 동성애 혐오가 다시 의제로 부상하는 것도 무관하지 않다. 다시 말해 여성의 자궁을 통제하려는 건 경제위기를 의미한다. 인구라는 요소가 생산과 가치의 모든 계산을 흘어버리는 핵심적인 변수이기 때문이다. <미키 17>의 인간 복사기는 재생산 '관리'를 위한 도구로 기술이 윤리 '어쩌고저쩌고' 하든 말든 이미 인간의 가치 분류가 끝났으며, 현재 기술이 인간 해방을 위해 복무하지 않음을 나타내는 상징이기도 하다. (82)


행성 연설 장면은 사실, 남아 있는 갈등 요소를 억지로 봉합하고 슬로건을 외치는 아침 조회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다. 서로 눈을 맞추고 박수를 치며, 웃는 서로를 교차하는 편집, 그들이 모두 바라보는 가운데 '문젯거리' 프린터를 폭파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이러한 숏(shot) 이미지의 배치는 미국의 문화 다양성을 재현하는 편집의 관습이기도 하다. 그러나 각 문화의 복잡한 맥락이나 현실적인 문제들은 숏과 숏 어딘가에서 재현되지 못하고 숨어 들어간다. 미키가 영원히 고통의 삶을 이어가야 하는 이유, 시간의 형벌을 받는 이유는 파시스트의 죽음과 함께 간단히 소거되어 버린다. 결국 마지막 장면은 파시스트가 사라지면 불평등이 사라질 것이라는 가짜 약속을 재확인하는 시간일 뿐, 행성 개척의 자본주의를 폭파하지 못했고, '상호 감염'의 민주주의는 어떻게 실현되는지 상상을 봉쇄했다. (84-85)



25.11.5.
















영화 <세계의 주인>을 보았다. 요동치고 벅차오르는 감정을 겨우겨우 달래며 보았다. 책을 읽었을 때만 쓰려고 했지만 오늘은 영화를 본 날짜를 기억하기 위해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직도 Sheep may safely graze를 들으면 마음이 일렁일 정도.

 



25.11.9.















카페 인텔리젠시아에서 과학산문을 읽고, 영화 <세계의 주인>을 다시 보았다. 키링이 탐났었으나 이미 소진되어 받지 못하고, 쪽지 굿즈를 받았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나의 감정을 더 이상 주체하지 못하게 만든 쪽지.





과학은 답이 있는 문제를 다룹니다. 근대과학은 물리학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물리는 세상을 시간과 공간, 그리고 그 속에서 움직이는 물질로 기술합니다. 주어진 순간에 물질이 배열된 상태를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한순간 우주에는 하나의 사건만 일어나야 합니다. 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과는 어느 한 순간 오직 한 장소에 있습니다. 수능 물리 시험문제의 정답이 반드시 하나만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물체의 위치에 대한 문제를 풀었는데 답이 두 개 나온다면 뭔가 잘못되었거나 둘 중 하나의 답을 버려야 합니다. 답이 아예 없다면 물체가 있을 위치가 없다는 이야기이니까 물체는 존재조차 할 수 없습니다. (81)


과학은 인과율을 가정합니다. 특별한 결과에는 특별한 원인이 있어야 하죠. 물체의 속도가 변한다면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뉴턴은 그 이유를 ''이라고 불렀습니다. 인과율은 결과에 대한 원인이 반드시 있다고 말해줍니다. 원인에 대한 질문,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결국 과학의 질문에는 답이 있습니다. 때로 어떤 질문은 답을 모른 채 오랜 시간이 지나기도 하는데, 대개 질문이 틀려서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81-82)


이제 중요한 순간입니다. 아이가 자신을 믿을 수 있다면, 방안에 열쇠가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겁니다. 용기가 있다면 문을 부수고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문제 밖으로 나가기'입니다. 밖으로 나갈 용기는 방안에 답이 없다는 확신에서 옵니다. 모든 가능성을 철저히 탐색했기 때문이죠. (85-86) 


답을 찾기 위해서는 모든 가능성을 탐색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문제와 관련된 내용을 모두 알고 이해함은 물론, 지겹도록 반복되는 고된 작업을 수행해야 합니다. 이런 일을 '노가다'라고 부른다면 그 분야의 노가다를 즐겁게 하는 사람이 천재입니다. 과학의 창의성은 노가다에서 나옵니다. (87)


1800년대 말 조선을 방문했던 영국의 여행가 겸 지리학자 이저벨라 버드 비숍은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조선인이 활짝 웃고 있다면 뭔가 단단히 잘못된 것이다.

 

조선을 여행중이던 비숍은 어느 날 배를 타고 이동할 예정이었지만 문제가 생겨 당장은 배를 띄울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상황을 전하러 온 이는 너무도 난처한 나머지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말의 내용과 행동의 극심한 부조화에 처음에는 혼란스러웠겠지만, 세계 각국을 여행하며 세상에는 다양한 문화가 있음을 몸소 겪어왔던 비숍은 그 사람이 이상한 게 아니라 조선인이 으레 그렇다는 점을 파악했던 모양입니다. (92-93)


관찰하되 판단하지 않는 것, 그리고 열린 태도로 데이터를 수집한 다음 패턴을 찾아내는 것. 조선인의 웃음을 대하는 비숍의 태도는 과학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태도를 지녔기에 그녀는 단순한 여행가 이상의 존재로 남은 것이죠. 1894년 비숍의 방문으로부터 70여 년 뒤 우리를 관찰한 또다른 기록으로 폴 크레인의 Korean Patterns(한국의 방식들)라는 책이 있습니다. <알쓸별잡> 촬영차 들렀던 미국 뉴욕의 한 헌책방에서 이 책을 발견했어요. 1장은 한국에 관한 전반적인 소개이고, 뒤이어 본격적으로 내용이 전개되는 2장의 제목은 'The Importance of Kibun(기분의 중요성)'입니다. 한국인에게 기분이란 내면의 감정, 체면, 사람으로서 인정받고 있다는 인식, 주변 사람들에게 받는 존중 등이 복합된 것이며, 기분이 심리 상태는 물론 신체의 기능까지도 크게 좌우한다고 적었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가장 흔한 인사, '안녕하세요' '안녕히 가세요' '안녕히 계세요'는 몸뿐 아니라 마음의 평안을, '기부니'가 좋으시기를 바란다는 뜻일지도 모릅니다. 때로는 타인의 시선으로 나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93)


지하철에서 책을 읽을 수 있는 것은 금속활자 인쇄술의 발명 덕분이라고 하더군요. 인쇄술이 보편화되기 전 필사본은 너무나 귀한 것이라 개인이 소유하기 힘들었고, 크기가 커서 휴대하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손으로 쓴 글을 빨리 읽기는 어렵기에, 인쇄술 시대 이후에나 속독이 보편화됩니다. 더구나 필사 문화에서 책은 하나의 사물이라기보다 이야기하는 방식의 일종으로 간주되었다고 합니다. 필사본에는 제목 페이지가 대개 없고, 보통 'incipit(시작)'이나 '서두의 말', "친애하는 독자여와 같이 시작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구술 문화의 유산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책은 아직 물건이 아니었던 것이죠.

인쇄술이 보편화되자 휴대 가능한 종이책이 대량으로 보급됩니다. 인쇄된 책은 손으로 쓰기 힘든 작은 글씨로 제작 가능했죠. 제목 페이지는 구술 시대에 거의 존재하지 않다가 인쇄와 함께 나타납니다. 인쇄술 초기에는 제목 페이지에도 여전히 구술의 흔적이 있었답니다. 1534년 출판된 토머스 엘리엇의 책 The Boke Named the Governour(통치자의 책)의 제목 페이지를 보면 제목을 이루는 글자들의 크기가 제멋대로고, 저자 이름이 하이픈으로 쪼개져서 줄을 바꿔 쓰여 있기까지 합니다. 아직 글을 시각적으로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지만 이제 적어도 책은 사물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책은 개인의 소유물이 되었고 사람들은 자신만의 공간에서 책을 빨리 혼자 조용히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묵독默讀, 그러니까 소리 내지 않고 눈으로만 책을 읽는 방법이 널리 퍼진 것은 인쇄술의 결과랍니다. 제가 지하철에서 조용히 책을 읽을 수 있는 이유이죠. (100-101)


책의 오류는 중쇄에서 바로잡을 수 있지만, 논문의 출판은 한 번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연구를 하는 것은 인류의 지식을 함께 체계적으로 쌓아올리는 것이라서 누가 한번 잘못된 벽돌을 놓으면 그 위에 쌓는 모든 벽돌이 흔들릴 수 있죠. 그래서 논문의 오류는 책에서처럼 슬쩍 바로잡지 못합니다. 논문에 잘못된 것이 있었음을 알리는 정정공지 Erratum를 다시 한번 발행합니다. 단순한 실수라면 수주 만에 정정하지만, 드물게는 수 년 뒤에야 정정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자 입장에서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본인이 잘못했다는 것을 수용하고, 알리고, 기록에 남기는 거죠. 동료 연구자들과 후학들에게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지 않기 위해서, 본인의 치명적인 실수를 스스로 지적하는 그런 정정공지에는 저자의 당혹감이 배어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떤 숭고함 같은 것도 느껴집니다. (113-114)


흰색은 빈 공간의 색이기도 합니다. '전자'는 원자 주위를 돌고 있는 작은 입자입니다. 사실 세상은 전자로 빈틈없이 가득차 있습니다. 그런데 왜 주위를 둘러봐도 전자가 보이지 않을까요? 물리학은 세상이 무언가로 빈틈없이 가득하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물고기는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는 물의 존재를 알기 힘듭니다. 공기 방울, 그러니까 물의 부재가 생기면 비로소 그 존재를 간접적으로 인식하게 됩니다. 전자의 부재로 생긴 빈 공간은 '양전자'라는 새로운 입자가 됩니다. 양전자는 반물질反物質의 하나입니다. 이렇게 빈 공간은 그 자체로 실체가 됩니다. 흰빛의 본질은 색으로 빈틈없이 가득한 것입니다. 따라서 흰 캔버스는 '색의 부재'이자 '그림의 부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화가는 흰색의 부재로 색을 만듭니다. 화가는 흰 공간의 부재로 그림을 만듭니다. 이렇게 부재는 실체가 됩니다. (121-122)


칸딘스키는 흰색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죽은 것이 아닌 가능성으로 차 있는 침묵이라고요. 흰색은 시작하기 전의 무, 태어나기 전의 무라고도 했습니다. 칸딘스키는 물리학의 혁명이 일어나던 20세기 초에 활동했습니다. 당연히 과학기술의 영향을 많이 받았죠. "원자의 분열은 나의 정신에서 전 세계가 허물어지는 것과도 같았다. 갑자기 단단한 장벽이 허물어졌다며 양자역학이 야기한 과학혁명에 흥분했던 사람입니다. 그에게 흰색은 모든 색을 품은 가능성이자 '백색소음'의 침묵이었습니다. (123)


백색소음white noise은 소음의 일종입니다. 소리는 '진동수'에 따라 음의 높낮이가 바뀝니다. 진동수란 1초 동안 소리의 파동이 진동하는 횟수입니다. '도레미파솔라시도'는 각각 진동수가 다른 음들입니다. 모든 진동수의 소리가 한꺼번에 울린다면 그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소음이 될 겁니다. 이것을 백색소음이라고 합니다. 앞서 빛을 '백색광'이라고 부를 때 정확히 같은 의미로 사용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백색광은 모든 색을 가진 빛이고, 색은 빛의 진동수가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123-124)


침묵과 무음無音은 다릅니다. 침묵 안에는 백색소음이 담겨 있습니다. 벽을 흡음재로 감싸 소리를 완전히 제거하는 무향실에 들어가보셨나요? 완벽한 무음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듭니다. 대부분의 인간은 일상에서 무음의 상태에 놓여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고요한 장소에서 귀기울이고 있으면 설명하기 힘든 미세한 소리가 들립니다. 이미세한 배경음이 백색소음입니다. 우리는 이런 소음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죠. 침묵은 흰색의 소음과 관련 있습니다. 한강 작가는 (문학동네, 2025)에서 하얀 조약돌을 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침묵을 가장 작고 단단한 사물로 응축시킬 수 있다면 그런 감촉일 거라고 생각했다(83). 침묵의 감촉이 희다는 뜻일까요? (124)


'''하얀'''으로 표현될 수 있지만, 이 둘은 같지 않습니다. 솜사탕처럼 깨끗하기만 한 '하얀'과 달리 ''에는 삶과 죽음이 소슬하게 함께 배어 있(174)기 때문입니다. 죽은 사람의 육체는 대개 흰 천으로 덮습니다. 유령도 종종 흰 천을 뒤집어쓰고 등장합니다. 흰색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고통은 죽음의 가족이죠. 그래서인지, 고통에 색이 있다면 흰색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는 어린 시절 건강이 좋지 않았습니다. 고열로 고생하는 동안 세상이 하얗게 보이던 기억이 납니다. 이럴 때면 시간의 감각이 날카로워지죠. 통증을 견디는 동안, 한 방울씩 떨어져내리는 시간은 면도날을 뭉쳐 만든 구슬들 같(11)습니다. (124-125) 


이제 '' 이야기를 정리하겠습니다. 사실 '' 이야기를 깔끔하게 마무리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14)습니다. 눈치채셨겠지만 이 글에는 한강의 에서 가져온 문장들이 있습니다. 볼드체로 나타냈습니다. ''을 소재로 한 글에 을 섞어주면 흰 얼룩이 생기지 않을까 기대했습니다. 얼룩이 지더라도 흰 얼룩이 더러운 얼룩보단(14) 나을 테니까요. 얼룩은 불완전한 흰색일 수도, 부주의한 검정일 수도 있습니다. 빛이 어둠이 없는 것일 수도, 색으로 충만한 것일 수도 있는 것처럼 말이죠.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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