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9.22.















예술 도둑완독. 평범한 도둑과 다른 예술적 안목을 가졌다고 자부했던 천재가 행위 자체에 중독되어 잠식당하고, 한낱 장물아비로 전락하기까지의 과정이 상세히 담겼다. 놀랍도록 대담했고 섬세했던 절도가 집착에 허우적대며 그 예리함을 잃었을 때의 추락. 그리고 아들의 애정을 원했던 어머니의 끔찍한 선택. 예술품을 어머니가 어떻게 했는지가 드러났을 때의 충격과 허망함이란. 에필로그까지 읽으면서 정말 많은 노고가 들어간 노작이구나라는 생각을 했고, 중간중간 미술품 절도의 역사나 예술에 대한 관점을 설명하는 부분도 흥미로웠다. 다만 절도의 규모와 시간, 그리고 브라이트비저의 절도 철학(?)을 제외하면 서사에 그만의 독특한 무언가가 있었다고 느껴지진 않았다. 전형적인 전락의 서사로 느껴졌다는 이야기.


예술은 찰스 다윈의 자연선택 이론에 반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이론에 따르면 자연계의 혹독한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비효율성과 낭비를 없애야 한다. 그런데 예술은 기본적인 의식주와 관련 없는 부분에 시간과 노력, 자원을 소비한다.

그럼에도 지구상의 어느 문화에나 예술이 존재하며, 그 형태는 실로 다양하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를 드러낸다는 공통점이 있다. 예술 이론가들은 예술이 이토록 널리 퍼진 것이 인류가 자연선택을 극복했기 때문이라고 믿지만, 사실 예술은 짝을 유혹하는 수단이 된다는 점에서 다윈주의에 부합한다. 예술은 생존의 압박과는 거의 무관하며 여가 시간에 나오는 부산물이다. 인간이 더는 포식자를 피해 도망 다니고 먹을 것을 찾아 헤매지 않게 되면서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복잡한 도구라고 알려진 대뇌를 이용해 상상력을 펼치고 탐구하며 깨어 있는 동안에도 꿈을 꿀 수 있게 되었고 신의 생각을 나눠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예술은 인간의 자유를 상징하고, 진화 전쟁에서 인간이 승리했음을 의미한다. (149)


유니버시티칼리지 런던 신경과학 교수 세미르 제키Semir ZekiMRI 촬영을 이용해 실험 참가자들이 화면에 비친 예술 작품을 보는 동안 뇌에서 일어나는 신경활동을 추적했다. 그 결과 뇌에서 미적 반응이 일어나는 정확한 지점을 알아냈다. 눈 뒤에 위치한 콩알만 한 크기의 엽葉이었다. 그러므로 아름다움이란, 그다지 시적이진 않지만 정확하게 말하자면, 보는 사람의 내측 안와전두피질medial orbital-frontal cortex에 달려 있다. (150)


브라이트비저가 훔치는 담뱃갑과 포도주잔, 그리고 여타 가정용 물건은 실용적인 형태에 아름다움을 간직한 것들로 대부분 1800년대 초기 유럽 산업혁명 직전에 만들어졌다. 그때까지는 모든 물건을 수작업으로 만들었고 거기에는 정교한 솜씨와 막대한 노동력이 들었다. 브라이트비저는 산업혁명 이후 엔진과 전기의 발명, 그리고 대량 생산 시스템 덕분에 사람들의 삶이 수월해졌을지 몰라도 세상은 점차 보기 흉해졌고,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말한다. 예전에는 장인이 제자에게 지식과 기술을 전수하고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지며 서서히 독창적 스타일을 구축해갔다. 요즘은 공장에서 값싸고 하나같이 똑같은 일회용 제품을 찍어낸다. 브라이트비저는 기계가 세상을 점령하기 직전의 시기에 인류 문명이 이미 아름다움과 기술 면에서 최대 정점을 찍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시기의 물건과 작품을 훔친다. 시간은 무자비하게 흘러가지만, 한적한 마을의 작은 다락에서만은 멈추기를 희망한다. (152)


앤 캐서린은 경찰 조사에서 예전에는 브라이트비저의 미학적 안목을 존중했지만, 이 시점부터는 그가 "더러운" 방법을 써서 "병적으로도둑질을 했다고 말한다. 한때는 아름다움을 숭배하며 작품 하나하나를 귀한 손님처럼 대하던 브라이트비저였지만, 이때부터는 마치 사재기를 하듯 그저 무엇이든 끌어모으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었다. 집에 가져오는 물건 대부분은 앤 캐서린의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중 일부는 추하기까지 했다.

무분별하게 절도를 일삼고 차를 허락 없이 사용해도 앤 캐서린은 브라이트비저를 버리지 않고 자기 아파트로 돌아가지도 않는다. 2001년에는 두 사람 모두 서른 살이 된다. 앤 캐서린은 75일생이고 브라이트비저의 생일은 101일이다. 이 무렵에는 브라이트비저가 특별히 보여주지 않는 한 새로운 물건이 다락에 들어와도 앤 캐서린은 신경 쓰지 않는다. 한때 루브르 박물관의 전시실 하나를 따온 것 같던 두 사람의 다락은 이제 세상에서 가장 비싼 쓰레기장이 되었다. 끝도 없이 물건이 줄지어 들어올 뿐인. (198-199)


이번에는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이미 잃어버린 시간을 되돌릴 수 없어 슬프다. 도둑질을 하던 시간이 아니라, 도둑질을 멈췄던 시간이 아깝다. 브라이트비저는 루벤스의 집 정원에서 깨닫는다. 마지막으로 이곳에 왔을 때가 바로 인생의 정점이었다. <아담과 이브>를 자동차 트렁크에 싣고 차창을 내려 바람을 맞으며 앤 캐서린과 집으로 달리던 그때보다 더 화려한 순간은 다시는 없을 것이다. 젊고, 승리감에 차 있었다.

포스터 침대에 드러누워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상상하곤 했다. 훔친 작품들에 둘러싸여, 아름다움으로 가득 찬방 안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는 장면이다. 그는 떠나겠지만 그의 작품들은 영원히 남는다. 브라이트비저는 늘 다락 안 물건들이 자신의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너무 멀리 갔고 어머니는 알자스 숲에서 불을 지폈다. “한때는 내가 이 세상의 주인이었어요.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지만요." (288)



25.9.23.














신의 축복이 있기를, 로즈워터 씨읽기 시작.


모두에게 유토피아가 되리라고 기대했던 미합중국이 한세기를 맞기도 전에, 노어 로즈워터와 그 부류의 몇몇 사람들은 건국의 조상들이 한 가지 면에서 어리석은 실수를 저질렀음을 입증했다오. 불과 백 년 전의 그 조상들이 각 시민의 재산을 제한해야 한다는 내용을 유토피아의 법률에 넣지 않았다는 거였소. 그들은 값나가는 물건을 사랑하는 계층에 대한 나약한 동정심 때문에, 대륙은 워낙 광대하고 가치가 높은 반면 인구는 워낙 희박하고 진취적이라 행여 어느 도둑이 아무리 손이 빨라도 남에게 작은 불편을 끼치는 짓 이상은 할 수 없을 거라는 느낌 때문에 그런 실수를 저질렀소. (18)


이렇게 해서 한 줌밖에 안 되는 탐욕스런 사람들이 이 나라에서 관리할 가치가 있는 모든 것을 거머쥐고 관리하게 되었다오. 이렇게 해서 야만적이고 어리석고 완전히 부적절하고 불필요하고 유머 없는 미국 계급제도가 창출되었소. 정직하고 부지런하고 평화적인 시민들은 최저임금만 요구해도 즉시 흡혈귀로 분류되곤 했소. 그 이후로 칭찬은 언제나 엉성한 법망을 피해 범죄를 저지르고 막대한 돈을 챙기는 방법을 고안하는 자들의 몫이 되었소. 이렇게 해서 아메리칸드림은 죽은 물고기처럼 허연 배를 내놓고 가스를 가득 품은 채 끝없는 탐욕의 더러운 수면 위로 떠오르더니 대낮의 햇살 아래 펑하고 터져버렸다오. (19)


노어는 새뮤얼을 낳았고, 새뮤얼은 제럴딘 에임스 록펠러와 결혼했소. 아버지보다 정치에 훨씬 더 관심이 많았던 새뮤얼은 공화당의 막후 실력자로 정력적으로 일했고, 공화당이 후보를 지명할 때면 미친 듯이 빙글빙글 춤을 추며 뜻 모를 바빌로니아어로 유창하게 지껄이는 무슬림 탁발승 같은 후보들, 가난한 사람들이 법 앞에선 그와 로즈워터 같은 자들이 평등하다는 말을 꺼낼라치면 즉시 군대에게 발포 명령을 내릴 후보들을 지명하게 만들었소. (19-20)


엘리엇은 술고래, 유토피아 몽상가, 허울 좋은 성인, 목표 없는 바보가 되었소.

그는 자식을 낳지 않았소.

부디 평안하기를, 친애하는 사촌 또는 아무개 씨. 관대하시오. 친절하시오. 예술과 과학 따위는 무시해도 상관없소. 그런 것들은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소. 가난한 자들의 세심하고 진실한 친구가 되시오. (22)

















서리북 17호 완독. 두 권이 더 나오고 나서야 읽음. 3월부터 읽었는데 잠시 덮어두었다가 잊었다가 이제야 마쳤다. 고전의 강 코너에서 다룬 『마음의 사회』 서평은 인공지능에 대한 이야기였지만 어려웠고(여전히 기호주의와 연결주의가 잘 구분이 되지 않는다), 이만교의 에세이를 보며 책만 쌓아놓는 내가 보여 잠시 안도(?)하기도.


그래서인지 책을 읽는 속도보다 책을 구입하는 속도가 더 빠르다. 읽으면 유익할 책이다 싶으면 일단 구입해 둔다. 나는 이것이 독서에서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가장 읽고 싶은 책을 골라 구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가장 읽고 싶은 책이니까 저절로 읽고 싶어지고, 저절로 읽게 될 테니까. 가령, 내가 갖고 있는 책은 만여 권쯤 될 텐데, 이 중에서 읽고 싶어 구입했지만 아직 못 읽고 있는 책만 천여 권쯤 되는 것 같다. 그중에는 읽고 싶어 구입했지만, 막상 앞부분을 들춰보니 흥미가 줄어 미뤄 둔 책도 몇백권 있다. 그래도 절반 이상은 이제라도 읽어야지 하는 책들이다. (218)



25.9.24.

신의 축복이 있기를, 로즈워터 씨읽기. 챔피언들의 아침식사에 나왔던 그 로즈워터가 맞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읽었다. 물론 거기서는 킬고어 트라우트의 광팬이라는 설정, 그의 석탄 철강 회사가 어느 지역의 땅을 몽땅 사들여 원성을 샀다는 내용 정도만 있지만, 여기서의 로즈워터는 세상 물정 모르는 순박한 주정뱅이 아저씨 정도로 읽히기 때문. 물론 책마다 다른 책에서 나왔던 인물이 나오는 것도, 전작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오는 것도 보니것 월드에서는 흔한 일이다. (타이탄의 세이렌5도살장의 트랄파마도어는 완전 딴판일 정도)


밀퍼드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여기 모인 개자식들을 사랑합니다. 나는 오직 여러분의 소설만 읽습니다. 오직 여러분만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진짜 멋진 변화들을 이야기하고, 오직 여러분만이 인생이란 우주여행이라는 것. 잠깐 지나가는 여행이 아니라 수십억 년 동안 계속되는 항해라는 것을 아는 미친놈입니다. 오직 여러분만이 진정으로 미래를 걱정하는 배짱을 지녔고, 기계가 우리를 어떻게 만드는지, 전쟁이 우리를 어떻게 만드는지, 도시가 우리를 어떻게 만드는지, 단순무식한 생각이 우리를 어떻게 만드는지, 엄청난 오해, 실수, 사고, 재앙이 우리를 어떻게 만드는지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오직 여러분만이 무한한 시간과 거리에 대해, 결코 사라지지 않는 신비에 대해 번민하며, 바로 지금 우리가 다음 십억 년 동안의 우주여행이 천국이 될지 지옥이 될지 결정하고 있다는 사실 앞에서 번민합니다." (28-29)


엘리엇이 말했다. "이 사람들, 이 미국인들을 보고 무엇을 느꼈는지 아시오? 그들은 더이상 자신을 보살필 능력조차 없다는 거요. 어디에도 쓰일 데가 없기 때문이오. 강 이쪽의 공장, 농장, 광산은 거의 다 자동화되었소. 미국은 이제 이 사람들을 전쟁에도 써먹지 않소. 더이상 실비아, 나는 예술가가 될 거요."

"예술가요?"

"난 이 버림받은 미국인을 사랑할 거요. 비록 쓸모없고 볼품없는 사람들이지만. 바로 그게 나의 예술작품이 될 거요." (56)


정신과 의사는 이 시대에 이 나라에서 정상으로 통용되는 범주를 조사한 끝에, 정상인이란 부유하고 산업화된 사회의 상류계층에서 탈없이 살아가는 사람으로 양심의 소리를 전혀 듣지 못하는 부류라고 결론지었다. (66)


상원의원의 얼굴 가득 고통스런 당혹감과 무력감이 차례로 번졌다. "엘리엇이 돕는 그 사람들의 좋은 점을 하나만 말해보거라."

"그럴 수 없어요."

"그렇겠지."

"그건 비밀이에요." 그녀는 억지스럽게 계속되는 논쟁이 그쯤에서 끝나기를 간절히 원했다.

상원의원은 자신이 얼마나 무자비한지 까맣게 모른 채 실비아를 계속 몰아붙였다. "네가 우리의 친구라면, 그 엄청난 비밀이 무엇인지 말해보거라."

"그건, 그들은 인간이라는 거예요." 실비아는 사람들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이해의 눈빛을 구했으나, 그런 건 전혀 없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무샤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무샤리는 그녀를 향해 소름 끼치도록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탐욕과 욕정이 묻어나는 미소였다.

실비아는 급히 용서를 구하고 욕실로 들어가 울음을 터뜨렸다. (83)


"당신은 사람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이렇게 힘없는 우리를 돕고 있어요. 우린 그걸 알아요. 신의 축복이 있기를. 로즈워터 씨. 잘 자요." (94)


둠즈데이북에서 돈보다 훨씬 더 흔한 처방은 '아와'였다. 이것은 누구나 알 것 같지만 아무도 모르는 이유로 더러운 판잣집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엘리엇이 추천하는 다음과 같은 처방이었다. "잘 듣고 그대로 하세요. 아스피린 한 알을 입에 넣고, 와인 한 잔과 함께 삼키세요." (121)

















만화로 보는 3분 철학1권 완독. 만화로 설명하는 데 이 정도면 훌륭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읽었지만 기억은 가물가물한 게으르게 읽는 제로베이스 철학과 함께 읽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잊기 전에 키워드들이라도 따로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따로 노트를 만들어 정리를 시작. 3권까지 정리가 이어져야 할 텐데



25.9.25.















만화로 보는 3분 철학2권 읽기.

 


















일인칭 가난읽기 시작. 20년 동안 기초생활수급자로 살았던 저자의 이야기가 단편적인 일화들로 펼쳐진다. 당연히 모든 가난은 상대적인 것이고, 저자보다 더 열악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일인칭이라는 제목이 말해주듯 가난과 거기에서 어떻게든 살아내고자 하는 이의 전력투구는 일인칭으로 서술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 그리고 한편으로 쓸쓸했던 것은, 어떻게든 더 배워보고자 아등바등 노력했던 저자의 여정은 대학원 석사(수료)까지였다는 점. 대한민국 사회의 구조에서 나름 똑똑하고 배우고자 노력한 수급자의 최종 위치는 거기까지라는 것으로 읽혔다. 천재였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졌을까?


기초생활수급자로 사는 동안 나는 다른 형태의 멸균우유들을 받아왔다. 전기요금과 통신요금 일부를 감면받았고, 매달 일반쓰레기 종량제 봉투를 다섯 장씩 지급받았으며, 1인당 5만 원씩 지원된 문화누리카드로 엄마와 가끔 영화를 봤다. 무료 급식, 수학여행비 지원, 대학교 장학금과 생활지원비가 있어서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EBS 교재는 다른 참고서의 반값 정도였고, 개중 수능 연계 교재는 사회적 배려 대상 학생을 위해 과목별로 몇 권씩 학교에 납품되었다. 학생들이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선택 과목의 교재도 항상 여분이 있었다. 나는 이것을 '가난하니까 공짜 교재로 공부해라'라는 값싼 동정이 아니라, '너는 공부할 권리가 당연히 있으니 과목을 잘 고르렴' 하는 부드러운 격려로 느꼈다. 교무실에서 받아 온 것이 멸균우유가 아니라 수능 교재가 되었을 즈음, 나는 그것이 여전히 무거웠지만 짜증이 나지는 않았다. 동시에 가난에 체념한 나머지 이 "작은 선물들"에 순응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14-15)


노골적인 냉대와 마뜩잖은 동정의 눈빛은 한번 겪으면 잊기 힘들다. 나는 그 눈빛이 어리는 전조를 파악할 수 있는 어른으로 자랐다. 눈빛은 미간에서 시작했다. 억지로 웃는 입꼬리로는 숨길 수 없는 가난에 대한 혐오가 서린 미간. 눈이 먼 아빠를 부축해 행정복지센터에 가는 날마다 진지함을 가장한 그 미간을 보았다. 직원은 초등학생인 나를 자기 자리 앞에 세워두고 질문했다. 아버지가 진짜 눈이 안 보이는 게 맞지? 어머니가 진짜 교통사고 때문에 정규직으로 일하지 못하시는 것도? 지난달에 행정복지센터에서 받은 쌀은 진짜 네가 먹었고? 너 진짜 이 집에서 사는 거 맞지. 그치? 그들은 내게 진짜가 맞느냐고 되풀이해서 물었다. 가난이 '진짜'가 아닐 수가 있나. '가짜' 가난을 만나면 따지고 싶다. 할 짓이 없어서 가난을 도둑질하느냐고, 하다하다 가난마저 진정성 배틀을 붙이는 거냐고. (18)


원한 적 없는 가짜 동정이 모르는 손길과 함께 느닷없이 찾아오기도 했다. 친구들과 주공아파트 놀이터에서 소꿉놀이를 하고 있던 어느 날, 스피커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아파트 대로변으로 나갔다. 곧 트럭 한대가 우리 앞에 서더니 남자 두어 명과 박근혜가 내렸다. 그는 덥석 내 손을 잡고 흔들며 밝게 자라는 아이여서 고맙다고 했다. 이후로도 종종 자신을 정치하는 아저씨라고 소개하는 사람들이 다가와 내 머리를 함부로 쓰다듬고는 했다. 지금도 나는 재해 지역이나 쪽방촌에서 생수며 연탄, 반찬 등을 나르는 정치인들의 사진을 보면 끔찍하다. 새것이어서 유난히 빨간 목장갑과 일부러 묻힌 듯 재가 거뭇거뭇한 기름진 얼굴들. 그들이 동정마저 전시하는 동안 가난한 이들이 죽고 더 가난한 이들이 태어난다. (18-19)


같은 금곡주공에 살았어도 복도 가장 끝 호에 사는 아이들은 곧 탈출할 애들이었다. 끝 호에는 방이 하나 더 있었고, 그 평수에 사는 이들은 대체로 1년을 넘기지 않고 주공을 떠났다. 오래도록 남게 된 아이들은 고통의 서열을 셈하는 데에 점점 능숙해지고 익숙해졌다. 전세 사는 아이가 월세 사는 아이를 깔봤고, 아파트 평수로 최고의 상태와 최악의 처지를 따졌다. 악한 어른이 아이들을 조종한 결과가 아니었다. 주위의 평범한 어른들을 보며 자연히 터득한 아이들 나름의 '지혜'였다. 몇 년 후 성인이 되어 '휴거'('휴먼시아 거지'의 준말. LH 공공임대아파트 휴먼시아 거주자에 대한 멸시이자 '거지'로 멸칭되는 빈곤층에 대한 낙인과 혐오를 동시에 드러내는 표현이 아닐 수 없다)라는 말이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한다는 기사를 읽었을 때, 임대아파트 주민들의 출입구가 따로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나는 죄책감을 느꼈다. 혐오가 탄생하는 데 일조한 것 같아서. 이 죄책감이 모두의 것이 될 때쯤엔 세상이 바뀔까. 나는 회의적이다. (27-28)


책을 사거나 학원에 다니면 '진짜 가난'한 것은 아니라고 따지는 사람이 있을 것을 안다. 하루 벌어 하루 먹는 것이 힘에 부치는 가난이 있다는 사실도 안다. 그렇다고 내가 엄마의 삯과 몸과 시간을 먹어치우며 학원을 다닌 2000년대에도 여전히 가난의 탈출구가 '교육'이었다는 점이 '가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기초생활보장 수급비를 받는 우리 집의 유일한 잉여는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무릎이 아작 난 엄마로부터만 나왔다. 엄마는 돈 안 버는 나와 눈도 안 보이고 돈도 못 벌며 술도 마시는 아빠 중에 나를 잉여의 수혜자로 택해 학원에 보냈다. 이것을 기초생활수급비를 계속 받을 수 있는 선에서만 임노동을 했던 엄마가 벌인 국가 복지에 대한 기만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만약 누군가 그렇다고 한다면 달게 받아들이겠다. (30)


수급비는 생활의 최저 수준을 가정한다. 이보다 더 가난하지 않으려면 일을 해야 한다. 그런데 일정 금액 이상의 수입이 생기면 수급비가 낮아지고, 그러면 보탬이 되던 월급은 줄어든 수급비를 채우는 수단이 되어버려 결국 생활의 수준이 빠르게 떨어진다. 엄마는 수급비를 받지 않아도 되니 돈을 더 벌길 원했지만, 교통사고를 당한 경력단절 여성에게 허락되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내 눈에 엄마의 노동은 엄마의 팔꿈치나 무릎 그 자체로 보였다. 그런 엄마의 뼈를 갈아 넣은 시간 속에서 나는 부지런해야 했다. (31)


2003년 기초생활수급자에 '합격'할 수 있는 3인 가구의 월 최저생계비는 81만 원이었다. 아빠는 노동 능력이 없었고 엄마는 단기 아르바이트를 쉬지 않고 했는데, 엄마의 노동 소득이 최저생계비를 넘었다면 수급자에서 '탈락했을 것이다. 그 이하의 노동 소득이 기초수급 가구에 100퍼센트 '추가' 소득이 되는 것도 아니다. 정해진 공제 비율에 따라 적지 않은 액수가 기초생활급여에서 차감되기 때문이다. 수급자 가구의 마음은 복잡해진다. 어정쩡하게 수급 기준을 넘는 일자리를 얻어 수급자에서 '탈락'하면, 기초생활 급여에서 차감은 되지만 적게나마 보탬이 되었던 수준의 벌이를 할 때보다 한 달 가용 생활비가 적어지기 때문이다.

2022년 청년 수급자를 대상으로 한 뉴스타파의 탐사보도가 이러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공제 대상이 되는 40만 원 이상의 일자리는 구하지 않는 편이 낫고, 혹 버젓한 아르바이트 소득이 생기면 가족의 수급권을 잃게 할 수 있기 때문에 몰래바이트'를 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33-34)


한편, 이런 식으로 가난을 '수급'이라는 제도적 관점으로만 바라보면 시야가 좁아진다. “가난한 사람이 공공부조의 수급자로 구획되면서 가난은 특정한 양식과 문법 안에 고이고" 말기 때문이다. “빈곤이 '우리의 삶'에서 '저들의 문제'로 고립되면서 취약계층에 대한 관심을 호소하는 메시지가 빈곤을 끝장내자는 결의를 압도해"버리는 것이다. (34-35)


새로 취임한 젊은 남자 정교수는 석사논문을 쓰지 않고 수료를 택한 나를 못마땅해하며 충고했다. 다들 힘들어도 학위논문까지는 씁니다. 수료만 하는 것은 의미 없는 짓이에요. 열심히 일과 공부를 병행해서 '겨우' 수료하는 것을 전부 '의미 없는 짓'으로 눙치는 그가 야속했다.

한 번도 차려입고 수업에 가지 못했던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멀쩡한 원피스를 입고 간 날은 종강일이었다. 갖춰 입은 모습이 보기 좋다던 그에게 일을 해야 해서 결국 학업을 잠시 쉬기로 결정했다고 말하자 그가 물었다. 그쪽을 선택하는 게 행복하고 현명한 선택입니까? (그는 늘 돈 버는 일을 그쪽 또는 그런 방법이라며 지시 대명사로 칭했다. 돈이라는 말을 입에 담기에도 저어된다는 듯이.)

 

글쎄, 나는 행복과 현명이 저토록 부드럽게 연결되는 삶을 살아본 적이 없고, 그쪽이 아니라 이쪽에 과연 행복과 현명이 있는지는 해보지 않아 알 수 없다. 그렇게 멈춘 나의 최종 학력에는 필히 괄호가 붙는다. 문학 석사(수료). (62-63)



25.9.26.

신의 축복이 있기를, 로즈워터 씨읽기.


엘리엇이 말했다. "어쩔 수가 없었소. 다른 사람은 절대 안된다고 메리가 고집을 부렸다오."

"." 실비아는 마음을 놓았다.

무샤리는 쉽게 실망하지 않았다. 법정에서 세례는 엘리엇이 자신을 메시아라 생각한다는 증거로 내세우기에 충분했다.

엘리엇이 말했다. "메리에게 분명히 말했지.” 무샤리의 마음에는 역회전을 방지하는 톱니바퀴가 달려 있어 이번에 엘리엇이 하는 말은 증거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상상력을 아무리 발휘해도 난 종교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내가 어떤 일을 해도 천국에선 중요하게 안 볼 거라고 말이오. 하지만 그녀는 막무가내였소."

"뭐라고 말할 건가요? 어떻게 할 참이에요?"

"...... 모르겠소." 바로 그 순간 마법에 걸린 듯 후회와 피곤함이 눈 녹듯 사라졌다. 그의 입술에 묘한 미소가 흘렀다. "우선 그녀의 오두막으로 가야겠지. 그리고 아기한테 물을 뿌리면서 말하겠소. '안녕, 아가들아. 지구에 온 걸 환영한다. 여긴 여름엔덥고 겨울엔 춥단다. 그리고 둥글고 축축하고 붐비는 곳이지. 여기선 고작해야 백 년 정도밖에 못 산단다. 아가들아, 내가 아는 단 하나의 규칙을 말해줄까? 제기랄, 착하게 살아야 한다." (145-146)



25.9.27.

신의 축복이 있기를, 로즈워터 씨읽기. 엘리엇에서 갑자기 프레드 로즈워터로 넘어가 이야기가 전개되기 시작한다.


프레드가 목수에게 상기시켰다. "간단히 서명만 했는데도 꽤 큰 재산이 보장되었잖아? 그게 생명보험의 기적이라니까. 최소한 신부에게 그 정도는 해야지."

배관공들이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프레드는 나가는 그들을 보고 낙담하지 않았다. 어딜 가든 그들도 양심이란 걸 가지고 다닐 테고, 앞으로도 항상 뉴스스토어에 들를 테니까.

그리고 이곳에 왔을 때는 항상 프레드가 있을 테니까.

"이 직업에서 가장 기쁠 때가 언제인지 아나?" 프레드가 목수에게 물었다.

"몰라."

"어떤 사람의 신부가 찾아와 이렇게 말할 때라네. '당신에게 아이들과 내가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신의 축복이 있기를, 로즈워터 씨." (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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