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2.30.















우리가 다시 만날 세계』 완독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분명하지만 멀티버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탓인지 작가가 설정한 두 개의 세계가 어떻게 연결되는 것인지한 세계가 다른 세계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지를 이해하기가 어려웠다백말띠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는 것도 내가 태어나면서 자리하게 된 위치와 관련이 있겠지있었지만 근거 없는 낭설로 한순간에 존재가 지워지는 세계에 대한 안타까움보다 더 크게 들리는 건 삐삐를 통해 전달되는 연대의 목소리.


 

24.12.31.














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 간다』 완독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에 대한 3부가 나에게는 더욱 인상적이었고말미에 등장하는 2045년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불사에 대한 이야기)는 가볍게 읽었다전반적으로 각각의 주제에 깊이 들어가지 않고 개괄만 보여주는 교양 강좌의 느낌강의를 책으로 묶었을 때 내가 느끼던 아쉬움들이 그대로 있었다일례로왜 법의학자가 인권주의자의 향기를 더 강하게 내뿜는” 직업인지 저자의 근거를 명확히 찾기가 어려웠다하지만 3부의 연명의료에 대한 저자의 주장과 사례들은 흥미로웠고나름 의미 있는 독서였다고 마무리할 수 있을 듯하다.

 


  건강보험정책연구원이 2014년 8월 전국의 만 20살 이상 15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임종을 원하는 장소로 57.2%가 집을 선택했다다음은 호스피스 완화의료병원요양원 순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집에서 임종을 맞이하는 것은 매우 힘들다통계청 사망 통계에 따르면, 1989년에는 사망 장소로 집이 77.4퍼센트병원이 12.8퍼센트 비율이었으나, 2012년에는 사망 장소로 집이 18.8퍼센트의료기관이 70.1퍼센트사회복지시설 등의 기타가 11.1퍼센트의 비율을 차지하고 있었다. (223)


  우리나라 통계도 있지만실제 미국 통계를 보면 전체 보건 의료 예산의 10~12퍼센트가 삶의 마지막 기간 1년 동안에 쓰인다마지막 한 달 동안 쓰는 비용이 거의 5퍼센트가 넘는다삶의 마지막을 간신히 유지하는 데 어마어마한 돈이 지출되는 것이다그 어마어마한 돈마지막 비용이 바로 중환자실 비용이다몸의 모든 혈관과 모든 구멍에 줄을 달고 생명을 연장하는 데 드는 비용은 사실 굉장히 비싸다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내가 중환자실에서 가장 많이 느끼는 것은 죽음에 대한 대화가 단절됨으로써 오는 가족 간의 비극그에 대한 안타까움이다특히 죽음을 앞둔 환자가 부모님이라면 어떤 자식이라도 대부분, "우리 부모님 꼭 살려주십시오"라는 이야기를 한다정말 고생 많으셨던 부모님이라서 이렇게 보내드릴 수는 없다는 것이다그런데 이렇게 입원한 경우 대개 말기암 환자이다사실상 죽음에 대한 준비가 필요함에도 환자와 가족은 '죽음'을 두고 대화하지 않는다. (225)


  우리나라는 항암제를 임종 1개월 전에 30.9퍼센트의 환자가 사용한다사실상 임종 1개월 전이면 이제 삶이 얼마 안 남았을 때다이때는 삶의 마지막 정리를 위한 통증 조절이 가장 중요한 시점임에도 불구하고 통증 완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모르핀 사용은 2.3퍼센트에 불과하다그래도 미국은 50퍼센트가 넘는다그렇다면 왜 우리나라는 2.3퍼센트에 불과한 것일까이것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과 국민건강보험 시스템의 문제다. (227)


  물론 우리나라 국민건강보험은 전 세계적으로 비교해 봐도 대만이나 일본을 제외한다면 비할 데 없이 매우 우수한 시스템이다그럼에도 마지막 모르핀 사용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예산을 삭감한다그래서 의사들이 처방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환자가 통증이 심할 경우 이를 처방해서 통증을 없애야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마지막까지 본인의 여러 가지 일들자식들에게 남기는 당부의 말이라든지 삶의 정리라는 것을 할 수 있는데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또 우리나라의 경우 전체 임종 환자의 33.6퍼센트가 응급실을 사용한다이것은 모르핀 사용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통증 억제가 안 되니 무려 3분의 1에 해당하는 환자들이 임종 1개월 전에 응급실행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너무나도 불편한 시스템이 아닐 수 없다. (227-228) 
















소년이 온다』 다시 읽기거의 10년 만에 다시 읽는다그때는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다면 이번엔 전에 구매한(노벨상 수상 전이다특별양장판으로동호의 이야기가 나오는 1장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10여 년 전과 달리 한강 작가의 전작(前作)을 좀더 읽은 뒤에 읽는 소년이 온다는 이전보다 서사적인 측면이 강해진 느낌이 있는데아무래도 광주라는 소재가 뿜는 강렬한 힘 때문일 것이다물론 이를 비추는 한강 작가의 문장은 시신들과 동분서주하는 사람들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동호의 모습을 가리키며 자신만의 인장을 찍는다.

 


25.1.1.

소년이 온다』 읽기어슴푸레하기만 했던 읽기의 기억이 3장의 은숙을 보자 선명하게 떠올랐다생채기처럼 남아 날카로운 통증을 남기고 숨을 몰아쉬게 했던 문장들이 수면 위로 다시 떠오른다.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99)


당신이 죽은 뒤 장례를 치르지 못해,

당신을 보았던 내 눈이 사원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목소리를 들었던 내 귀가 사원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숨을 들이마신 허파가 사원이 되었습니다. (100)


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

네가 방수 모포에 싸여 청소차에 실려간 뒤에.

용서할 수 없는 물줄기가 번쩍이며 분수대에서 뿜어져나온 뒤에.

어디서나 사원의 불빛이 타고 있었다.

봄에 피는 꽃들 속에눈송이들 속에날마다 찾아오는 저녁들 속에다 쓴 음료수 병에 네가 꽂은 양초 불꽃들이. (102-103)



25.1.4.








연희동을 돌다가 합정까지 가서 문지살롱 방문마감 한 시간 전이어서 그런지 사람이 없었다넓고 아늑한 공간과 문지 책들로 가득한 곳음악 선정도 마음에 들었다옛날에 나온 듯한그래서 처음 보는 책들도 많이 있었는데, 문학과지성 작가론 총서가 90년대에 나온 적이 있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보르헤스에 눈길이 가긴 했으나사놓고 또 읽지 않을까봐 망설이다 결국 사지 않았고백은선 시인의 추천 도서만 사서 나왔다다음을 기약하며.





백은선 시인의 추천도서는 킴 투이의 『앰』이었다.

















25.1.5.


소년이 온다』 읽기. 4장을 읽으며 사람이 사람에게 얼마나 난폭하고 잔인할 수 있는지 새삼 실감하며 읽는다계엄 사태 때 종종 보았던, 10년 전의 독서였음에도 잊혀지지 않았던 문장들도 함께.


군인들이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습니다다만 이상한 건그들의 힘만큼이나 강렬한 무엇인가가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양심.

그래요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

군인들이 쏘아 죽인 사람들의 시신을 리어카에 실어 앞세우고 수십만의 사람들과 함께 총구 앞에 섰던 날느닷없이 발견한 내 안의 깨끗한 무엇에 나는 놀랐습니다더이상 두렵지 않다는 느낌지금 죽어도 좋다는 느낌수십만 사람들의 피가 모여 거대한 혈관을 이룬 것 같았던 생생한 느낌을 기억합니다그 혈관에 흐르며 고동치는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의 맥박을 나는 느꼈습니다감히 내가 그것의 일부가 되었다고 느꼈습니다. (114)


모든 사람이 기적처럼 자신의 껍데기 밖으로 걸어나와 연한 맨살을 맞댄 것 같던 그 순간들 사이로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이부서져 피 흘렸던 그 심장이 다시 온전해져 맥박 치는 걸 느꼈습니다나를 사로잡은 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선생은 압니까자신이 완전하게 깨끗하고 선한 존재가 되었다는 느낌이 얼마나 강렬한 것인지양심이라는 눈부시게 깨끗한 보석이 내 이마에 들어와 박힌 것 같은 순간의 광휘를. (115-116)


어떤 기억은 아물지 않습니다시간이 흘러 기억이 흐릿해지는 게 아니라오히려 그 기억만 남기고 다른 모든 것이 서서히 마모됩니다색 전구가 하나씩 나가듯 세계가 어두워집니다나 역시 안전한 사람이 아니란 걸 알고 있습니다.

이제는 내가 선생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은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벌레짐승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 (134)

 

나는 싸우고 있습니다날마다 혼자서 싸웁니다살아남았다는아직도 살아 있다는 치욕과 싸웁니다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웁니다오직 죽음만이 그 사실로부터 앞당겨 벗어날 유일한 길이란 생각과 싸웁니다선생은나와 같은 인간인 선생은 어떤 대답을 나에게 해줄 수 있습니까?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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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23.
















딕테해설 완독. 약간은 안개가 걷히는 느낌이지만 완전히 내용을 이해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작가가 그렇게 의도한 부분이 있으니 그걸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도 읽기의 한 부분일 터. 읽으면서 밑줄 그었던 부분들을 정리하며 마무리하려고 한다.



DISEUSE(말하는 여자)


속에서 웅얼거린다. 웅얼웅얼한다. 속에는 말의 고통, 말하려는 고통이 있다. 그보다 더 큰 것이 있다. 더 거대한 것은 말하지 않으려는 고통이다. 말하지 않는다는 것. 말하려는 고통에 대하여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속에서 들끓는다. 상처, 액체, 먼지. 터뜨려야 한다. 배설해야 한다. (13)



클리오 역사


진리는 그 자체 외의 모든 절제를 진실과 함께 포용한다. 그 밖의 시간, 그 밖의 공간, 자체의 시간의 유유한 광휘, 죽음의 유유한 표식을 상관하지 않고, 다른 삶들과 병행한다. 그 자체에게는 전혀 모르게. 그러나 노래하기 위하여. 누구에게 노래하기 위하여. 아주 부드럽게. (38) 


왜 지금 그 모든 것을 부활시키는가. 과거로부터. 역사를, 그 오랜 상처를. 지난 감정을 온통 또다시. 그것은 똑같은 어리석음을 다시 사는 것을 고백하기 위해서다. 지금 그것을 불러일으켜 잊힌 역사를 망각 속에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다. 말과 영상 속에서 또 다른 말과 영상을 조각조각 끄집어내어, 잊힌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대답을 끄집어내기 위해서다. (43) 


목이 잘린 형상들. 낡은. 흉진, 이전의 형상의 과거의 기록, 현재의 형상은 정면으로 대면해 보면 빠진 것, 없는 것을 드러낸다. 나머지라고 말--, 기억. 그러나 나머지가 전부다.


기억이 전부다. 잃어버린 것에 대한 열망. 빠진 것을 지킨다.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부정의 사이에 고정되어 진보의 표시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그 밖의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나면 나이를 먹는다. 단지. 어떤 사람들은 나이가 없다. (48)



칼리오페 서사시

 

당신은 다른 사람들처럼 강제로 주어진 언어를 말합니다. 그것은 당신의 언어가 아닙니다. 비록 당신의 언어가 아닐지라도 당신은 그 언어로 말해야만 한다는 것을 압니다. 당신은 이중 언어 사용자입니다. 당신은 삼중 언어 사용자입니다. 금지된 언어는 바로 당신의 모국어입니다. 당신은 어둠 속에서 말합니다. 비밀 속에서. 바로 당신의 언어를 말입니다. 당신 자신의 언어. 당신은 아주 부드럽게, 속삭여 말합니다. 어둠 속에서, 비밀스럽게. 모국어는 당신의 안식처입니다. 당신의 고향입니다. 당신의 존재 그 자체입니다. 진정으로. 말한다는 것은 당신을 슬프게 합니다. 그리움. 말 한마디를 발설하는 것은 죽음을 무릅쓰는 특권입니다. 당신뿐만 아니라 모두의 죽음을. 법으로 혀가 묶이고 말이 금지된 당신들 모두 하나. 당신은 마음 한가운데에 위는 붉고 아래는 푸른색인, 하늘과 땅을 의미하는 태극; 타이치t’ai-chi 마크를 가지고 다닙니다. 그것은 상징입니다. 속한다는 상징. 목적의 상징. 다시 찾을 수 있다는 상징. 탄생에 의한. 죽음에 의한. 피에 의한. 당신은 그 상징을 당신의 가슴 속에, - 속에, 당신의 - 속에, 당신의 영-혼 속에. (56)


당신은 씁니다. 당신은 쓰고 당신은 말합니다. 가면 속에 숨겨진 음성으로 달을 향해 말을 심고 바람에 말을 실어 보냅니다. 계절의 지나감을 통해. 하늘에 의해 물에 의해 말은 탄생하고 분별이 주어집니다. 한 입에서 다른 입으로 전해져, 한 사람이 읽고 다른 사람이 받아 읽으면서 그 말들은 온전한 의미를 실현하게 됩니다. 바람. 여명 또는 황혼에 진흙의 땅과 이동하는 철새들 남쪽으로 향하는 철새들은 주둥이 메시지의 씨를 위해 귀신의 베일을 씁니다. 통신. 말을 퍼뜨리기 위한. (58)


어머니, 저는 당신을 만나볼 수 있기 위해 꿈을 꿉니다. 잠 속에서는 천국이 가까이 내려옵니다. 어머니, 내 최초의 소리. 최초의 말. 최초의 개념. (60) 



우라니아 천문학


단지 이미지들뿐. 다만. 이미지들.

내가 들은 빗속의 신호들.

비가 눈으로 된 것에 불과한 말하기.

진실이든 진실이 아니든

더 이상 말하기가 가능하지 않다. (83) 



멜포메네 비극


나는 군중들이 나에서 몸으로 조여오는 것을 느낍니다. 이제 목소리는 더 우렁차게 울리고 나는 깨어짐의 파열을 일으키는 단 하나의 몸짓을 듣습니다. 나의 왼쪽 나의 오른쪽으로 다른 쪽을 향한 침묵이 앞으로 전진합니다그들은 이제 깨트립니다, 그들의 소리,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당신이 들었던, 그래서 꿈에서도 잊을 수 없었던 귀에 익은 소리, 깨트리는 소리의 결과. 연기는 대기를 감싸고 점점 피어올라 걷잡을 수 없이 퍼지고 우리는 부분으로 감소되고 뿔뿔이 흩어져 흰색과 회색 속에 가려집니다. 그 속에서 팔 하나가 머리 위로 천천히 올라와 탁한 흰색 속으로 사라집니다. 그리고 거기에선 무릎이 꺾인 다른 다리들이 땅에 엎어지고 온몸이 왼쪽으로 넘어집니다. 눈을 찌릅니다. 그것의 투입은 대기의 공기를 가르기 때문에 하늘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나는 방향감각을 잃고 텅 빈 거리를 달리다가 넘어집니다. 아무도 나를 보지 못했고 나는 걷습니다. 아무 데로나. 탁한 공기가 계속 눈을 찔러 눈물을 흘리며 나는 웁니다. 하늘에 남아 있는 가스 연기가 하늘을 흡수해버렸고 나는 웁니다. 거리는 깨진 벽돌 조각과 파편으로 뒤덮였습니다. 왜냐하면. 꽤 많은 신발짝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는 것을 봅니다. 때로는 그들이 가져온 돌멩이들 틈에 한 켤레가 떨어져 있는 것을 봅니다. 왜냐하면. 나는 찢어진 셔츠가 널려 있는 사이사이를 밟으며 울부짖고 절규합니다. 그들의 자취는 없습니다. 피밖에는. 왜냐하면. 그들 사이를 걷습니다. 그들이 걸었던 보도, 돌멩이가 떨어지듯 그들이 쓰러진 보도, 빗물로는 피가 지워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핏자국은 진하디진하게 남아 씻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우는 군중을 따라갑니다. 그들의 노랫소리, 텅 빈 거리를 따라 끊임없이 이어지는 그들의 목소리를 따라. (94-95)


경찰과 군인들은 누구인지도 모르는 자신들을 복제하여, 당해낼 수 없는 숫자로 배가하여 그들의 임무를 수행합니다. 그들의 직무 이행과 그들에게 주어진 신분은 그들의 고향보다도 더 멀리 나아가, 그들의 어머니와 아버지, 그들의 형과 누이, 그들의 아이들보다도 더 멀리 나아가 그들 자신의 핏줄기보다 더 멀리 나아갑니다. (96)



에라토 연애시


 "나는 다만 어린아이일 뿐입니다. 힘없고 약한, 그럼에도 나의 나약함이 곧 나 자신을 당신 사랑의 희생양으로 바칠 수 있는 용기를 줍니다. , 주님! 과거에는, 순수하고 오점 없는 희생양만이 강하고 힘있는 하느님에게 받아들여졌습니다. 신의 정의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완벽한 희생양이 필요했지만, 사랑의 법은 공포의 법으로 계승되었고 사랑은 나를 희생물로 선택하였습니다. , 약하고 불완전한 창조물. 이 선택은 사랑을 받을 만한 것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사랑이 더 완벽하게 충족되기 위해서는, 그 사랑 자체를 낮추고, 그 자체를 무까지로 낮추어 이 무를 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오 예수님, 나는 압니다. 사랑은 오직 사랑으로만 갚아진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당신에게 사랑을 사랑으로 갚음으로써 나의 가슴을 위로할 길을 찾았습니다." (123)



엘리테레 서정시


죽은 시간. 텅 빈 눌림이 매장된다 다시 소생하기에는 박약하고 기억에는 저항한다. 기다린다. Apel. Apellation. 발굴. diseuse로 하여금 하게 하라. Diseuse de bonne aventure. 그녀로 하여금 불러내도록 하라. 그녀로 하여금 오래 오래 다시 또다시 내려지는 저주를 깨뜨리도록 하라. 그녀의 목소리로, 땅바닥을 꿰뚫고, 타르타로스의 벽을 뚫고 우묵한 그릇의 표면을 빙빙 돌며 긁어내게 하라. 밖으로부터 소리가 들어가게 하라. 그릇의 텅 빔 그것의 잠들어 있음에. 그때까지. (135) 


죽은 낱말들. 죽은 언어. 사용하지 않음으로 해서. 시간의 기억 속에 묻혀버림. 고용되지 않았다. 발설되지 않았다. 역사. 과거. 말하는 여자, 9일 낮과 9일 밤을 기다리는 어머니를 찾아내도록 하라.

기억을 회생시키라. 말하는 여자, 딸로 하여금 땅 밑으로부터 나타날 때마다 샘을 회생시키도록 하라.

잉크가 다 말라 없어지기 전에, 쓰기를 마침내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기 전에 가장 진하게 흐른다. (146)



탈리아 희극


미래가 없다, 다만 시간의 몰려옴이 있을 뿐. 설명할 수 없고, 공허하며, 무형의 시간, 그녀는 그것을 향해 움직이도록 기대될 뿐이다. 앞쪽으로. 앞으로. 그리고 어떻게든 현재를 지나쳐버린다. 망각의 은총으로 스스로를 구제하고 있는 그 현재. 그녀는 그것을 어떻게 정당화시킬 수 있었을까. 현재의 가시성이 없이.

그녀는 실제의 시간을 대치할 수 있다고 자신에게 말한다. 그녀는 자신에게 시간을 앞에 전시하고 그것을 엿보는 자가 된다고. 그녀는 죽음은 절대로 오지 않는다, 올 수 없다고 자신에게 말한다. 그녀는 죽음을 대치할 수 없다는 것을, 실제로 죽지 않고는 그것의 극복이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152-153) 


그녀는 글을 쓸 수만 있다면 계속 살 수 있다고 자신에게 말한다. 그치지 않고 계속 쓸 수만 있다면 하고 자신에게 말한다. 글을 씀으로써 실제의 시간을 폐기할 수 있다면 하고 자신에게 말한다. 그녀는 살 것이다. 그녀 앞에 그것을 전시해놓고 그것의 엿보는 자가 될 수 있다면. (153)



테르프시코레 합창 무용


깨어진다는 것. 깨어진 말로 구술한다는 것. 깨어진 말로 말한다는 것. 깨어진 말로 얘기한다는 것. 깨어진 말을 한다는 것. 깨어진 언어. 피진어. 깨어진 낱말. 말하기 전. 말해지는 대로. 말한 대로. 말해지려던. 말하기 위해. 그러면 말하라 (173) 



폴림니아 성시


엄마 나를 창문으로 올려주세요, 그의 시야로부터 너무 높이 올려다 보는 어린아이. 유리창 사이로 어떤 영상이 이제 검은색 회색들의 희미함, 그녀의 시야 위에 머뭇거리는 그림자들 머리는 가능한 만큼 뒤로 젖혀졌다. 나를 창문으로 올려주세요, 하얀 창틀과 그 사이 유리, 이른 황혼 또는 여명의 빛이 어두울 때, 선은 그림자에 지워지고 집들은 지나가는 빛에 그림자 우물을 드리울 때. 짧다. 밤을 향해 모두 짧다. 골목길은 마지막 집 뒤로 모퉁이를 돌아가는 끝없는 길. 담벽들, 손으로 만든 돌 벌집들 하나하나가 금빛을 품고 광선의 흰색을 반사한다. 창틀과 유리 사이에 아무도 없다. 나무들은 앞으로 다가올 전망을 기다리며 침묵을 고수한다. 만약에 일어난다면. 부동의 침묵을 들어 올리기 위한 부단한 지킴 속에서. 나를 창문으로, 그 그림의 영상으로, 올려주세요. 암석의 무게에 매여 있는 밧줄들을 풀어주세요. 처음엔 밧줄들, 그리고 정적을 깨트리기 위하여 나무 위에 긁히는 소리, 종들이 떨어지자 울림이 뒤따른다. 정적을 깨트리기 위하여 무게를 들고 있는 밧줄이 나무에 긁히는 소리. 종들이 떨어지며 하늘에 소리를 떨친다. (191) 



작품 해설_「『딕테』와 차학경의 예술 세계」(김경년)


딕테는 모두 열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부분 'DISEUSE(말하는 여자)'를 제외하면 각 부분마다 그리스 신화의 시신詩神과 각 시신들이 주관하는 학문 또는 주제가 제목처럼 앞서고, 그다음에는 실제의 역사적 여성(유관순, 저자의 어머니 허형순, 성녀 테레즈, 무성영화 잔 다르크의 수난의 주인공으로 분장한 프랑스 여배우 르네 팔코네티 등)의 사진 또는 그림의 영상이 등장한다. 원문은 영상 다음에 시작되며, 문체는 대부분 시적 산문이라고 할 수 있다. (223) 


따라서 첫 부분은 가장 자서전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가능한 한 최소한의 말을 하기 위해" 또는 '말을 하고 싶은 욕망'의 갈등으로부터 사포와의 접신을 통해 '언제나, 있는 시간은 모두, 좌로, 우로, 배설하는, 말하는 여자'로의 변신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제부터 그는 말 없는 유관순, 어머니(허형순 여사), 잔 다르크, 성녀 테레즈 등 여성의 삶, 즉 여성들의 경험의 연대성을 제시한다. (224)


차학경의 작품에서 언어에 대한 성찰은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딕테에서 가장 눈에 띄는 특수성은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프랑스어와 영어의 병행 사용이 눈에 띈다. 그 밖에도 언어의 유희 같은 패러디, 언어의 잠재적인 모호성 추구, 언어의 분해와 재결합, 언어의 음상音像 또는 형태소를 중심으로 한 연쇄 변화 등 다양한 언어 표현 수단들이 자유자재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언어의 형태소에 따라 변화되는 의미의 변형을 추구하고 있다.

때로는 정례적인 문법에 어긋나는 영어 용법을 볼 수도 있고(예를 들어 선행사가 없는 대명사, 특히 ittheir 등의 사용, 전치사의 생략 등) 때로는 영화의 극본 같은 현재형 묘사, 또는 시제가 부정한 동사 원형들이 나타난다. 이는 문장 전체에 탄력, 그리고 나아가 시간의 한 정에 구애받지 않는 생동성을 부여한다고 할 수 있다. 차학경은 시간과 공간의 없음, 곧 시공의 초월, 그리고 그것의 영원성으로의 연결에 대해 가장 깊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그것이 이런 언어 표현 방식으로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한다. 예를 들면, 문법 카테고리의 하나인 '시제'의 사용을 거부한 것은 '문법이 임의로 한정시키는 시간의 제약성'에 구애받지 않으려는 시도로 보인다. (226-227)


각 부분들이 소설적 이야기로서의 연결성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모든 이야기가 여성 인물들을 다루고 있으며, 나아가서는 사포와 아홉 명의 시신에 역사 속의 실제 인물, 즉 유관순, 저자의 어머니, 잔 다르크, 성녀 테레즈 등을 연결시킴으로써 역사적 연관성과 대응성, 그리고 여성 체험의 연대성을 동서양의 차이 없이 제시한다고 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 이 책은 자신으로부터 시작하는 분산된 세계diaspora 속에 소외된 이방인/소수민족의 존재성, 여성의 체험, 일제 강점기 한민족의 수난, 분단과 민주주의를 위한 수난, 순수한 사랑에의 갈망, 그리고 저자 자신에 대한 자서전적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227)



작품 해설_「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이름」(권영민)


'딕테'라는 작품 제목은 '받아쓰기'라는 특별한 글쓰기 방식을 의미한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복합적이면서 이중적 성격이 강하다. 받아쓰기의 행위는 모든 글쓰기의 출발이면서 동시에 글쓰기라는 행위 자체의 본질적 속성을 그대로 말해준다. 일반적으로 받아쓰기'라는 행위에서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글쓰기의 주체적 의지가 제대로 반영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말해주는 자가 언제나 우위에 있고 그것을 받아쓰는 자는 언제나 말하는 대로 '받아쓰기'만 하면 된다는 의미에서 받아쓰기가 갖는 주체의 수동성을 암시한다. 하지만 이러한 '받아쓰기'의 행위는 인류의 역사 자체가 가지는 다양한 전승의 의미를 포함한다. 신화는 일종의 '받아쓰기'를 통해 후대에 전승된다. 그것은 단순한 수동적 글쓰기가 아니라 인간의 기억을 만들어내고 그에 따라 행동을 지배한다. 그러므로 신화는 인간 사유의 근원적인 상징이 되는 것이며 인간의 모든 글쓰기는 결국 이 신화를 '받아쓰기' 하는 데에서 생겨난 다양한 이야기의 변형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231-232)


딕테에서 독자들이 당혹해할 수밖에 없는 특징은 목소리가 다른 화자의 진술이 서로 뒤섞인 다양한 삽화가 어떤 규칙 없이 결합되고 있는 점이다. 그러므로 스토리를 지닌 어떤 내용의 서사적 연결이나 의미의 맥락을 따지기가 쉽지 않다. 더구나 여기저기에 다양한 사진이 끼어들어 읽기를 방해한다. 사진은 그 텍스트 자체가 특정 시간에 정지된 이미지를 독자에게 보여준다. 사진 속의 이미지는 침묵이면서 동시에 침묵하는 언어다. 이러한 복잡한 구조는 때로는 몽타주의 기법으로, 때로는 콜라주의 파격처럼 서로 겹치는 메시지와 이미지의 착종으로 서사 공간 자체를 입체화한다. (233)



24.12.24.














희랍어 시간다시 읽기. 여자와 남자의 이야기가 번갈아가며 전개되고 말과 시력을 잃어버린(잃어가는) 인물들의 이야기에서 세공된 문장들을 감탄하면서 읽게 된다. 드디어 단둘이 만나게 되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남자의 모습에서 멈춤.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보았는데, 영화관에서 자꾸 큰 소리로 속닥거리는 남자 때문에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영화는 소설을 충실히 재현해냈다는 생각이 들었고, 킬리언 머피가 연기한 빌 펄롱도 내면을 표현하는 표정 연기가 영화에 깊이 빠져들게 해 감탄하면서 보았다. 네드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잊고 있었어서 집에 와서 다시 소설을 훑었고, 이 작품은 역시 소설이 훨씬 좋구나, 라고 생각하며 책을 덮었다. 맡겨진 소녀(영화는 말없는 소녀)는 영화를 먼저 보고 소설을 나중에 보았었는데 그때는 감상이 정반대였던 기억이...


펄롱을 괴롭힌 것은 아이가 석탄 광에 갇혀 있었다는 것도, 수녀원장의 태도도 아니었다. 펄롱이 거기에 있는 동안 그 아이가 받은 취급을 보고만 있었고 그애의 아기에 관해 묻지도 않았고그 아이가 부탁한 단 한 가지 일인데수녀원장이 준 돈을 받았고 텅 빈 식탁에 앉은 아이를 작은 카디건 아래에서 젖이 새서 블라우스에 얼룩이 지는 채로 내버려두고 나와 위선자처럼 미사를 보러 갔다는 사실이었다. (99)


생각해보면 올해는 영화를 책보다 더 자주 보았던 것 같은데(무비랜드를 알게 된 것과도 관련이 있다), 영화에 대한 감상들을 각각 적어서 투비에 연재해볼까라는 생각도 해보았으나 전혀 실천하지 못했다. 여러모로 기록과 정리, 리뷰에 있어서는 만족스럽지 못했던 한 해. 내년에는 좀더 열심히 읽고 써야겠다는 생각을 또 한다. 투비컨티뉴드...



24.12.28.


희랍어 시간완독. 언어를 가졌으나 상실한 이와 시력을 상실해가는 이의 묘한 만남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세계를 향해 자신을 표현할 수단을 상실해 내면으로 침잠해가는 이와 세계를 이해할 수단을 상실해 세계와 소통할 수 없어 내면으로 침잠하는 이. 두 사람이 처음으로 교감하는 마지막 부분의 이야기가 아득하면서도 아름답게 시처럼 펼쳐진다. 분명하게 묘사되는 사건이 없음에도 다 읽고나면 여운이 남게 되는 작품.


가끔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나요.


우리 몸에 눈꺼풀과 입술이 있다는 건.


그것들이 때로 밖에서 닫히거나,

안에서부터 단단히 걸어잠길 수 있다는 건. (161)


마모된 거대한 톱니의 일부를 만지듯 그녀는 자신의 입술을 쓸어 본다. 오래전에 퇴화된 기관을 기억하듯, 말들이 떨며 솟아오르던 경로를 머릿속으로 더듬는다.

자신이 말을 잃은 것이 어떤 특정한 경험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다.

셀 수 없는 혀와 펜 들로 수천 년 동안 너덜너덜해진 언어. 그녀 자신의 혀와 펜으로 평생 동안 너덜너덜하게 만든 언어. 하나의 문장을 시작하려 할 때마다 늙은 심장이 느껴졌다. 누덕누덕 기워진, 바싹 마른, 무표정한 심장. 그럴수록 더 힘껏 단어들을 움켜쥐었다한 순간 손아귀가 헐거워졌다. 무딘 파편들이 발등에 떨어졌다. 팽팽하게 맞물려 돌던 톱니바퀴가 멈췄다. 끈덕지게 마모된 한 자리가 살점처럼, 숟가락으로 떠낸 두부처럼 움푹 떨어져나갔다. (165)


어두운 초록색 흑판에 백묵으로 문장을 쓸 때 나는 공포를 느껴요.

방금 내가 쓴 글씨지만, 십 센티미터 이상 눈에서 떨어지면 보이지 않아요.

암기한 대로 소리내어 읽을 때 공포를 느껴요.

태연하게 내 혀와 이와 목구멍으로 발음된 모든 음운들에 공포를 느껴요.

내 목소리가 퍼져나가는 공간의 침묵에 공포를 느껴요.

한번 퍼져나가고 나면 돌이킬 수 없는 단어들. 나보다 많은 걸 알고 있는 단어들에 공포를 느껴요. (167)















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 간다읽기 시작. 법의학이란 무엇이고 어떤 학문인가를 다양한 사례를 통해서 쉽게 보여준다. 통상 우리는 범죄와 연결짓곤 하지만 사실 일상의 모든 죽음과 관련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어비읽기. 치킨 런쿵후하는 자세를 읽음.

치킨 런은 자살하려 했지만 우연히 치킨 배달부에게 구해진 남자와 비좁은 방에서 겨우 살아가다 사람을 구했다는 이유로 자살을 도와주게 된 치킨 배달부의 반복되는 자살 실패담. 나란히 병원에 실려가는 장면에서 씁쓸한 웃음을 짓게 된다.

쿵후하는 자세는 할 일이 없이(아마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계속 자전거를 타고 떠도는 화자에게 끊임없이 무엇을 하고 있냐고 시비를 거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처럼 읽힌다. 어쩌면 잠시 나만의 쿵후를 하기 위한 자세를 잡고 있었을 뿐인데 아니꼬운 눈으로 지금 뭐하는 거냐며 시비를 거는 세계. 이 세계가 규정한 을 하고 있지 않으면 의심스런 눈초리로 바라보는 세계를 배회하는 이에 대한 이야기.



24.12.29.


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 간다읽기. 2부는 생명의 시작과 죽음의 정의가 어떻게 변해왔는지부터 시작해 안락사 논쟁에 대한 이야기까지 접근한다. 교양 강의의 성격상 각각의 주제를 아주 깊이 있게 다루지는 않는 편. 그래도 보라매병원 사건’, 사망 원인과 사망 종류의 차이, 죽음의 변천사 같은 내용은 흥미롭게 읽었다. 이제 3부만 남겨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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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5.

















딕테읽기. 엘리테레 서정시탈리아 희극읽기.


 

24.12.17.


딕테본문 완독. 테르프시코레 합창 무용폴림니아 성시를 읽음. 뒤로 갈수록 혼란스러워지는 글들과 마주하기. 주석을 보면서 읽어도 무슨 의도인지, 어떻게 읽어야 할지 감이 오지 않는 혼란스러운 글들의 연속이다. 해설을 보면 정리할 수 있을까?

 


24.12.20.


부고를 들음. 처음으로 자신의 천수를 다 누리지 못하고 일찍 떠난 이의 장례식장에 있을 때의 심란함에 대하여. 생각해보면 여태껏 내가 갔던 장례식장은 천수를 누렸거나 노년에 접어든 분들의 장례식이었는데, 정말이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은 이의 장례식장은 그것과 너무나도 달랐다. 식장에 내내 감돌던 침통함과 절절함. 친구에게 어떻게 위로를 건네야 할지, 이 안타깝고 슬픈 마음이 어떻게 말해야 전달이 될지 모르겠는 막막함. 평소보다 오래 있었지만 시간이 늦어 발걸음을 떼야 했던 장례식장을 나오며, 끝까지 자리를 지킬 생각으로 왔던 친구의 다른 친구들을 보며 나의 장례식엔 끝까지 자리를 지킬 사람들이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죽음에 대한 생각이 계속 맴돌았던 시간들.



24.12.22.


한 주는 내내 앓았고(앓느라 가려고 했던 14일의 국회도 가지 못했다), 한 주는 일에 치이고 사건과 정해진 일정 들을 지나느라 읽기에 소홀하느라 결국 100자평을 작성할 기한을 놓쳤다. 허나 읽는 중에도 이 책에 대한 내 감상을 어떻게 표현할지 막막하기만 했고... 뒤의 해설과 후기를 보면 길이 보일지 생각하는 중. 인터넷으로 다른 사람들의 후기를 찾아보기도 하고 스크랩해 놓기도 했다. 그것들이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될까?



열심히 찾았던 글들 중 하나만 스크랩으로 남겨놓았다. 차차 정리할 것들.

https://brunch.co.kr/@lilybath/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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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02.















사랑에는 사랑이 없다완독. 페소아의 불안의 서(봄날의책)에 대한 글로 마무리. 잠들기 전의 상태에서 썼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시작한 글이 인상적이었다. 불안의 책(문학동네)을 예전에 읽으면서 밑줄을 수도 없이 긋고 그걸 정리해보겠다면서 일일이 적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제풀에 지쳐 어느 순간 읽기를 멈추고 그대로 덮어두었더랬다. “가장 무방비한 감각과 감정을 기록하는작업. 그 작업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불안정한 들과 나와 나 사이에 있는, 신이 망각한 빈 공간속의 를 마주하는 시간. 페소아의 수많은 이명들은 그것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작업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 페소아의 이명에 관한 책도 많이 사두었는데 여전히 읽을 엄두는 내지 못했다. 리스본에서도 인상깊었던 장소들 중 하나가 페소아 박물관이었는데.


어떤 이유에서였건 수면 직전에 씌어졌을 이 책은 어느 정도까지의 각성 상태에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지를 입증하려는 듯하다. 동시에, 지독한 각성 상태가 잠과 꿈과 가장 흡사하다는 것도 입증을 하려는 듯하다. 또한, 불안의 서의 페르소나인 '소아레스'를 이미 미쳐 있는 자이자 미쳐버린 지 너무나 오래되어 도리어 정상에 가까워진 자라고 간주할 수도 있겠다. 보통의 사람들이 정상적인 척을 하는 상태로 살아가고 있다고 파악할 때, 그런 사람들에게는 이미 관성이 되어 버려 감지할 수 없는 것까지를 볼 수 있는 '진짜 인간'의 상태. 이미 미친 사람만이 도달할 수 있는 각성 상태. (209)


어쩌면 이 책이 "잠을 위한 찬가"가 아닐까. "나는 잠자는 듯이 글을 쓴다." "많은 사람들이 오직 지루하기 때문에 일을 하듯이, 때때로 나는 아무 할 말이 없기 때문에 글을 쓴다. 나는 꿈꾸는 상태에 빠진다. 생각하지 않는 자라면 그런 백일몽 속에서 자신을 잃겠지만, 나는 글을 쓰면서 나를 잃는다. 나는 산문으로 꿈을 꿀 수 있기 때문이다." 참혹하고도 가열찬 불안과 상념이 범람할 때에 그리하여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만 같은 상태가 될 때에, 그 무게로부터 완전히 달아날 수 없다면, 달아나는 일과 가장 닮은 행위는 그것에 대하여 무방비하게 감각하고 그걸 기록하는 일일 것이다. (210)


어설픈 현자들이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가는 여정이 곧 삶이라고 우리를 속여왔지만, 실은 내가 누구인지를 망각해야 하는 여정이 곧 삶일지도 모른다. 나를 맴도는 어설프고 주눅 든 나, 나에게 해로운 것만을 달콤하게 권하는 협잡꾼인 나, 나에게 위선 아니면 위악만을 가르치는 감독인 나, 나에게 거짓 눈물과 거짓 한숨과 거짓 웃음을 사탕처럼 던져주는 사육사인 나, 그래서 무엇을 하며 살아도 어딘지 모를 불안과 불쾌감을 그림자처럼 질질 끌고 다녀야 하는 나. 그 모습을 비웃는 구경꾼인 나. 그런 나와 결별을 하기 위해서는 내가 나라는 사실을 포기하는 것만이 방법일지도 모른다. 꽃나무가 더 이상 꽃나무이기를 포기하는 꽃 지는 계절처럼, 장마가 더 이상 장마이기를 포기하는 쨍한 다음 날 아침의 맑은 하늘처럼. 포기와 체념의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을 알려면 막연한 낙관이 아니라, 더 현명한 환멸에 도착한 이후여야 하리라. (212-213)


불안의 서는 불안에 대한 갖은 해명에 지쳐 있는 누군가를 위한 책이다. 불안함에 대하여 충분히 숙고하여 불안의 편에 서 있지만 그 입장마저도 어딘지 모르게 불안한 누군가를 위한 책이다. 나와 나 사이를 커다란 괘종 시계의 추처럼 똑딱이며 왕복운동을 하고 있어서 그 현기증마저 이제는 관성이 되어버린 누군가를 위한 책이다. 가끔은 나와 내가 나란히 벽에 기댄 채 헐렁하게 손을 잡고 앉아서, 창문으로 들어온 네모난 햇빛이 시간과 함께 조금씩 움직여 나와 나의 테두리를 온전히 가두는 느낌을 아는 누군가를 위한 책이다. 왜냐하면 이 책은 세상의 모든 현혹으로부터 완전하게 비켜서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현혹의 무상함을 일깨우기 위해 독자를 현혹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 책은 깨달음을 전달하기 위하여 독자를 현혹하지 않은 채 불모의 사막지대를 펼쳐 보이고야 만다. '이 아무것도 없는 사막이야말로 아름답기 그지없구나'라는 감동을 독자는 굳이 느낄 필요가 없다. 단지, 모든 고백은 "내 비루한 존재가 삶 앞에서 자신을 위장한다는 현상을 견디기 위하여 적혔을 뿐이니까. (215-216)


에필로그의 마지막 말은 오랫동안 기억하게 될 것 같다. 어느 부분에선 작가의 생각의 흐름을, 그것을 표현한 문장의 결을 따라가기 어려웠지만, 사랑이 으레 그러하듯 그것을 나의 문장으로 읽어내는 것도 내 몫이다. ‘사랑이 아닌 사랑함에 대해 고민해보았던 시간들.


내가 궁금했던 것은 사랑에 대한 개념이 아니라 사랑함에 대한 것이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사랑함은 사랑과는 다른 얼굴이어야 한다. 사랑은 사랑을 재배하는 능력이어야 한다. 사랑을 돌아보고 돌보는 것이어야 한다. 사랑을 사랑해온, 사랑을 명사로 고정하는 사랑의 담론들에 비켜서서, 사랑이 더 이상 감정의 영역에 머물러 있게 내버려두지 않아야 한다.

우리가 학습해온 사랑은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 힘도 없다. 하지만 사랑함은 그렇지 않다. 삶이 사랑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삶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세상이 사랑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세상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223)



24.12.03.
















딕테읽기. 서문?에 해당하는 것처럼 보이는 딕테(Dictee, 받아쓰기)에서 몇 차례 길을 잃고 더듬더듬 읽는다. 천주교의 미사와 화자의 의식의 흐름이 뒤섞인 듯한 파편적인 글들. 겨우겨우 졸음을 쫓으며 읽다가 문득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니 말도 안 되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고... 한 순간에 과거로 회귀하는 듯한 소식들을 끊임없이 찾아보느라 잠이 다 달아나버렸다. 한 사람이 이렇게나 우리 시대를 퇴행시킬 수 있다는 것에 허망함과 환멸을 느끼며. 그것을 어떻게든 일단 막아냈다는 것에 안도하며.


각 장의 제목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홉 뮤즈와 그들의 고유 예술 영역을 차용하여 명명한다. 기억의 여신 므네모쉬네(Mnemosyne)가 아흐레 동안 제우스(Zeus)와 동침하여 아홉 명의 뮤즈 신을 낳듯, 책의 구성은 가톨릭 의식인 ‘9일간의 기도(novena)’로 이루어져 있다. 차는 기도 의식을 관장하는 인물이자 작가 자신을 대변하는 여주인공 화자 말하는 여자를 소개한다. 유관순과 잔 다르크, 만주 태생인 차학경의 어머니 허형순 여사와 성 테레사가 있다. 언어와 문화의 경계에 선 여성들이자 주체적 인물이다. 이들 목소리를 빌려 자신이 경험한, 디아스포라적 삶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 「딕테가 돌아온다, 하퍼스 바자, 2024.11.07.

(https://www.harpersbazaar.co.kr/article/1872954)



24.12.04.


딕테계속 읽기. 제우스와 므네모시네의 아홉 딸들의 이름이 목차처럼 나오는데 그 중 클리오 역사에는 유관순의 이야기가 나온다. 유관순의 서사와 기억과 기록에 대한 조각들. 앞선 글에 비하면 읽기에는 수월하나 송곳처럼 드러나는 단상들에서 멈칫멈칫한다. 시적인 것 같기도, 무의식 같기도 한 것. 어제의 여파인지 어떤 구절에 오랫동안 눈이 머물렀다. 기록하고 끊임없이 기억하는 이유.


왜 지금 그 모든 것을 부활시키는가. 과거로부터. 역사를, 그 오랜 상처를. 지난 감정을 온통 또다시. 그것은 똑같은 어리석음을 다시 사는 것을 고백하기 위해서다. 지금 그것을 불러일으켜 잊힌 역사를 망각 속에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다. 말과 영상 속에서 또 다른 말과 영상을 조각조각 끄집어내어, 잊힌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대답을 끄집어내기 위해서다. (43) 



24.12.05.


딕테계속 읽기. 칼리오페 서사시는 작가의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처럼 구성되어 있다. 만주에서 작가 자신처럼 이방인이었던 어머니의 삶이 꿈과 같은 몽환적인 장면들과 얽힌다.



24.12.06.















오늘 받은 책 중엔 어떤 어른이 있었는데, 책 상태를 확인하고자 펼쳤다가 인쇄된 사인의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며칠 사이 찾아온 이 난장의 겨울에서 어떤 어른이 되어야 할까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는 문장들.



딕테계속 읽기. 멜포메네 비극에는 분단 이후 1962년의 사건이, 오빠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때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각하며 읽어내려 노력해보고, 군인과 경찰이 나오는 대목에선 자꾸 계엄령과 군인들의 모습이 상기된다.


경찰과 군인들은 누구인지도 모르는 자신들을 복제하여, 당해낼 수 없는 숫자로 배가하여 그들의 임무를 수행합니다. 그들의 직무 이행과 그들에게 주어진 신분은 그들의 고향보다도 더 멀리 나아가, 그들의 어머니와 아버지, 그들의 형과 누이, 그들의 아이들보다도 더 멀리 나아가 그들 자신의 핏줄기보다 더 멀리 나아갑니다. (96)



24.12.08.














어비읽기. 내가 읽었던 김혜진 작가의 장편들이 연상되는 단편들이 몇 개 보인다. 초기 단편집이어서 내가 읽은 이후의 작품들과 구별되는 건 블랙코미디적인 요소들. 바틀비의 후계인가 생각했지만 먹방 bj가 된 어비(어비)아웃포커스의 엄마, 한밤의 산행의 소년이 그렇다. 마냥 웃을 수 없는 건 이들이 처한 문제가 겨냥하는 것은 결국 이 세계, 생존을 위한 투쟁이 디폴트가 되어버린 구조이기 때문.



딕테에라토 연애시를 읽다가 뭔가 이상하다 싶어 보니 페이지 번호는 순서대로인데 페이지가 서로 바뀌어 인쇄된 부분들이 있어 연결이 되지 않았다. 발견한 만큼은 알라딘에 문의를 남겨놓았는데, 애초에 파편적인 텍스트라 내가 미처 발견 못했는데 더 많은 곳에 뒤죽박죽이 된 페이지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만 커졌다. 북펀딩으로 받은 도서가 이렇게 오다니... 에라토는 성녀 테레즈에 대한 이야기.




) 오늘(24.12.10.) 아침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으나 일하는 중이어서 받지 않았는데 문의한 내용에 대한 문자가 와 있었다. “원서 자체가 그렇게 되어 있다라는 이야기... 궁금한 점은, 원서는 아마도 영어이거나 프랑스어일 것으로 보이는데 페이지의 내용을 작가가 뒤죽박죽으로 섞은 것이 이렇게 구현이 될 수 있는가... 라는 것이다. 뒤의 해설까지 읽으면 그 의도와 편집에 대해 알 수 있을까? 혹시 몰라 문의한 내용과 해당 페이지를 캡처해서 올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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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8.














사랑이라니, 선영아읽기. 점차 선영과 진우와 광수의 삼각관계가 서서히 드러나는 중. 이토록 평범한 미래를 읽고 난 후에 다시 읽으니 이토록 평범한 미래에는 김연수 특유의 고유어 사용도 많이 줄었고, 사건에 들어가기 전 상념처럼 서술되는 사변들도 줄었다. 그동안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


쫀쫀하다'는 말은 원래 옷감의 발이 대단히 고르고 곱다는 뜻이다. 쫀쫀한 인간들이 가장 살차게 구는 게 조금 삐져나온 보풀이다. 아직은 비인지 눈인지 구별하기 힘든 진눈깨비가 흩날리던 11월의 어느 일요일 오후, 광수는 꽃보다 아름다운 신부와 결혼식을 올렸다. 그렇다면 꽃이 아니라 신부만 바라봤더라면 좋았을 텐데, 광수는 그만 부케를 보고야 말았다. 친구 명희를 향해 선영이 던지려던 부케의 오른쪽 윗부분에 부러진 채 달랑달랑 매달린 팔레노프시스 한 송이가 광수의 마음에 재를 뿌렸다. 그건 새로 산 스웨터의 오른쪽 어깨 부분에 삐져나온 털실 한 올과 비슷했다.

쫀쫀하다'의 반대말은 얼멍얼멍하다'. 얼멍얼멍한 스웨터라면 그 털실 한 올은 옷의 일부가 되고 쫀쫀한 스웨터라면 불필요한 보풀이 된다. 그러므로 모든 게 보풀 때문이었다고 악쓰면 악쓸수록 자신이 얼마나 쫀쫀한 인간인지 드러날 수밖에 없다. 다들 알겠지만, 그건 사람 됨됨이의 문제지, 불길한 예감의 문제가 아니다. 삶이 왜 죽음과 같은 절망에 이르는지 아는가? 그건 스스로 무덤을 팠기 때문이다. 미안하지만 세상에 팔레노프시스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란 없다. 광수는 그 사실을 몰랐다. (11)


일단 온 존재가 완전히 비워지면 사랑에 빠진 사람은 그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사랑은 ''를 무한히 확장시킨다. 사랑에 빠졌을 때, ''는 질투로 몸이 달아 자살을 떠올리는 심약한 청년이 되기도 하고 어떤 투정이라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너그러운 성자가 되기도 하고 청소차가 지나가는 새벽 거리를 비스듬히 누워서 바라보는 페인이 되기도 한다. ''는 레너드 코헨의 노래처럼 권투 선수와 의사와 운전수가 될 수도 있고 안치환의 노래처럼 그대 뺨에 물들고 싶은 저녁노을이나 그대 위해 내리는 더운 여름날의 소나기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랑이 끝나면 이 모든 가능성이 사라진다. 사랑의 종말이 죽음으로 비유되는 까닭은 그 때문이다. 사랑이 끝나고 나면 우리는 원래의 자신으로 되돌아가는데, 그러면서 무한히 확장됐던 '는 죽어버린다. 진우의 말처럼 한번 끝이 난 사랑을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죽음은 비가역적인 과정이다. 사랑의 종말도 그와 마찬가지다. 확장이 끝난 뒤에는 수축이 이어지 게 된다. 사랑이 끝나게 되면 우주 전체를 품을 수 있을 만큼 확장됐던 ''는 원래의 협소한 ''로 수축된다. 실연이란 그 크나큰 '를 잃어버린 상실감이기도 하다. (46)


세상의 다른 모든 일들은 나이든 사람들이 잘하지만 사랑에 빠지는 일만은 모험을 겁내지 않는 젊은이들의 전공 분야다. 젊은이들은 아직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기 때문에 자신이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는 사랑을 찾아 헤매는 것이다. (47-48)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사랑이라는 관계에서 혼자서 빠져나올 때마다 뭔가를 빼놓고 나온다는 점이었다. 그리하여 사랑이 되풀이될수록 그 관계 속으로 밀어넣을 만한 게 많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그때쯤이면 누구나 자신이 누구인지 더이상 헷갈리지 않게 되는데, 그건 이제 불타는 사랑이란 자신보다 더 어린 사람들의 몫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나이가 됐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미 소진됐기 때문에 더이상 사랑에 소진될 수 없을 때, 우리는 사랑 외에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나서게 된다. 그래서 인류는 실연의 상처로 멸망하지 않고 여기까지 그럭저럭 굴러온 셈이다. (48)



24.11.25.

사랑이라니, 선영아완독. 한 줄로 정리하자면, 이 당시 김연수 작가의 사랑론과 두 남자의 찌질한 사랑 이야기의 이중주.


하지만 어떤 사람을 향해 "사랑해"라고 말한다면 그건 이미 자신이 누구인지 생각해봤다는 뜻이다. 사랑을 고백하는 일은 아무도 없는 나이트클럽 무대에서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단 한 사람만을 위한 춤을 추는 일과 흡사하다. 이때 자신이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 한눈에 드러날 수밖에 없는데, 애정이 없다면 도저히 눈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다. “사랑해", 그 대담한 말을 통해 우리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간단하다. 나는 네가 누구인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먼저 누구인지 보여주겠다. 이번에는 네가 너를 보여줄 차례다. 그래서 "사랑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둘 중 하나다. 기꺼이 자신을 드러내거나 못 들은 걸로 치거나. 못 들은 걸로 치겠다, 그건 나한테 네가 누구인지 설명하지 마라, 우리 사이는 사회적인 관계다'라는 뜻이다. (63-64)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만 할 단계는 나이트클럽 플로어를 비비며 강종거리기 바로 직전이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려면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며 연습하게 마련이다. 나이트클럽 화장실에서 연습하든, 자기 방에서 러닝셔츠 바람으로 연습하든, 연습할 때는 객관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비춰줄 거울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자신의 눈이 아니라 '그 사람'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봐야만 하기 때문이다. 거울을 들여다볼 때, 우리는 천산지산 갈라졌던 자신의 정체성을 추슬러 하나의 ''로 끼워맞추는 조련찮은 수고를 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사랑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건 온전한 하나의 정체성을 되찾는다는 뜻이다. (64)

 

그러므로 다시 한번, "사랑해"라고 말한다는 건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냈다는 뜻이다. 사랑의 대상보다 자신을 먼저 사랑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기형도는 그 집 앞이라는 시를 이렇게 끝냈다. "이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네/그토록 좁은 곳에서 나 내 사랑 잃었네." 비가 2에서는 이렇게 끝을 냈다. "세상은 온통 크레졸 냄새로 자리잡는다. 누가 떠나든 죽든/우리는 모두가 위대한 혼자였다. 살아 있으라, 누구든 살아 있으라." 왜 기형도는 이 세상 누구와도 닮지 않은 위대한 혼자에 대한 얘기로 시를 끝맺었을까? 사랑이 끝나면 자신에 대한 사랑만이 남게 되기 때문이다. 애당초 "사랑해"라고 말하기 위해 거울을 보며 연습할 때 봤던 그 얼굴을 향한 사랑만이. 1982828, 기형도는 일기장에 "언제나 나는 진실로 연애다운 사랑을 할 것인가"라고 썼지만, 그런 점에서 그는 늘 연애중이었다. (66)


그러므로 다시 한번, "사랑해"라고 말한다는 건 자신을 먼저 사랑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자신을 먼저 사랑해야만 '진실로 연애다운 사랑'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뜻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의 운명을 추구하는 것…… 자신의 자아를 저 밑바닥까지 찾아 헤매는 것이다"라고 말한 사람은 울리히 벡과 엘리자베트 벡-게른스하임 부부다. 우리는 사랑의 학교에 앉아 현대사회라는 불확실한 무방비도시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우게 된다. 세상을 바꾸는 건 이 학교의 모범생들이다. 이 모범생들은 꽃다발과 샴페인과 밸런타인 카드가 있던 자리에 대중심리서와 부부클리닉과 자기계발서를 갖다놓는 식으로 신학기 환경미화 활동을 끝맺는다. 그리하여 우리는 탈낭만적인 사회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67)


"그럼 어렵게 얘기해줄까? 이타심은 아래를 향한 감정이야. 타인을 사랑하는 감정이라고. 그럼 이기심은 뭐냐? 위를 향한, 자신을 사랑하는 감정이야. 이렇게 자존심 상해서 살 수 없으니까 고쳐 달라. 이게 바로 이기심이야. 왜 나만 이렇게 살아야 하느냐? 알겠어? 나는 80년대에 데모했던 새끼들 대부분이 그런 심정으로 돌 던졌다고 생각해. 자기가 얼마나 대단한 인간인지 보여주려고. 그러니까 사회가 이 모양 이 꼴인 것 아니겠어?" (81-82)


우리는 서로에게 영원한 타인이다. 우리는 자신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완전히 알 수는 없다. 혼신의 힘을 바쳐 사랑한다고 해도 우리가 모르는 부분은 영영 남게 된다. “너는 절대로 알지 못한다"를 영어로 작문하라면 "You never know"가 될 것이다. 하지만 대화에서 관용적으로 쓰일 때, 이 문장은 '어쩌면' 혹은 '아마도'를 뜻한다.

질투란 상대방에 대해 모든 걸 알게 됐다고 생각한 게 착각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그러니까 어쩌면이나 '아마도'라는 부사로 시작되는 문장이 하나둘 마음속에서 떠오를 때, 부록처럼 따라오는 감정이다. 그리고 후보선수가 주전선수에 대해 늘 그런 마음을 갖듯이 딸린 감정은 본래 감정을 위협하고야 만다. 그래서 때로 질투는 사랑을 강화시키는 게 아니라 파탄내기도 한다. (89-90)


사랑이 입을 열면, 그 안에서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한다.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이다. 사랑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됐다면 거기서 멈춰야만 한다. 너무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 즉 너무 알려고 하지 말아야만 한다. 너무 사랑한다는 말은 상대방의 정체성마저 요구하는 일이다. 그건 무방비도시의 어둠 속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는 너무 무리한 요구다. 현대적인 사랑의 방식이란 우리가 절대로 알지 못하는 게 있다는 걸 받아들이는 일이다. ‘아마도' 혹은 '어쩌면'으로 시작되는 문장의 본뜻이 'You never know’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일이다. 누구도 다른 사람이 될 수는 없다. 그걸 모르면 누구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다. 누구도 다른 사람이 될 수는 없다. 누구도 다른 사람의 삶을 대신 살아갈 수는 없다. 누구도 다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 (90-91)


기억이 아름다울까, 사랑이 아름다울까? 물론 기억이다. 기억이 더 오래가기 때문에 더 아름답다. 사랑은 두 사람이 필요하지만, 기억은 혼자라도 상관없다. 사랑이 지나가고 나면 우리가 덧정을 쏟을 곳은 기억뿐이다. (105)


모든 게 끝나면 유통기한이 지난 식료품처럼 사랑했던 마음은 반품시켜야만 하지만, 사랑했던 기억만은 영수증처럼 우리에게 남는다. 한때 우리가 뭔가를 소유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증거물. 질투가 없는 사람은 사랑하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억이 없는 사람은 사랑했다는 증거를 제시할 수가 없다. (105-106) 


자신이 진정으로 살아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당장 죽어도 좋다는 느낌이 들 때다. 그때 삶은 죽음을 뛰어넘는다. 삶이 죽음이라는 엄청난 장애물을 뛰어넘는 데 지렛대로 사용하는 게 바로 사랑이다. 외계인이 없다면 멀더의 존재 이유가 사라지는 것처럼 사랑은 장애물을 뛰어넘어야만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그 사실을 알았기에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장애물을 만난 두 연인의 사랑을 다룬 영화 페드라를 수입한 한국의 영화 관계자는 '죽어도 좋아'라는 제목을 붙였던 것이다. (106)


사람들은 저마다 그 수많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지만, 그 수많은 사람들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큰 존재다. 예컨대 1천 송이의 꽃이 있다고 치자. 한 송이 꽃은 1천 송이 중 하나의 꽃에 지나지 않지만, 그 한 송이 꽃이 없다면 999송이의 꽃은 존재할지언정 1천 송이의 꽃은 존재할 수 없는 법이다. 사랑을 한다는 건 그 한 송이 꽃을 통해 1천 송이의 꽃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통해 자신도 1천 송이의 꽃이 되는 한 송이 꽃이라는 사실을 납득하는 일이다. (118-119)


소설 사랑이라니, 선영아의 몇 부분은 일종의 '어휘용례사전'처럼 읽히는 데가 있다. 가령 그가 진눈깨비를 두고 아령칙하다'라는 형용사에 어울리는 물질"(10)이라고 정의할 때, 혹은 광수의 캐릭터를 설명하는 데 쓰인 쫀쫀하다'라는 형용사와 그 반대의 뜻인 '얼멍얼명하다라고 하는 두 단어로 소설 전체의 주제를 개관할 때, 나아가서는 알다'라는 의미의 영어 단어 ’know'를 플라톤의 향연과 성경 창세기로까지 소급하여 어원학적 설명을 시도할 때, 우리는 혹시 이 소설이 몇 개의 어휘를 중심 얼개로 삼은 어휘도상학적 소설은 아닌지 의아해할 지경에 이른다. 왜냐하면 이 각각의 어휘들에 따라 인물들이 배치되다시피 하고 있고, 소설의 주제 역시 이들 어휘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144-145)


사실 광수는 '쫀쫀하다'. 그리고 그의 짝패(double)인 진우는 '아령칙하다' 혹은 얼얼하다'. 광수는 ’know'의 의미를 과신한다. 반면 진우는 ‘know'의 의미를 알맞게 폄하할 줄 안다. (145)



24.11.26.















사랑에는 사랑이 없다마저 읽기. 4부는 시집 또는 책에 대해 작가가 쓴 글이 실려 있는데, 읽어본 적이 없는 이병률 시인의 시집에 대한 글보다는 최승자 시인에 대한 글이 더 피부에 와 닿는다. 이 시대의 사랑즐거운 일기에서 내 머리를 후려쳤던 강렬하고 날선 언어들은 이후의 시집들에서 점점 사그러들었는데, 내가 앞의 두 권 외의 다른 시집들을 읽었지만 머릿속에 거의 남아있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오래 전 작가가 이 책에서 다룬 시집 빈 배처럼 텅 비어를 펼쳤을 때도 치열함보다 달관(또는 체념)의 정서가 흐르는 듯하여 오래 읽지 못하고 덮어두었었다. 김소연 시인의 글에서도 시집 한 권보다 시 세계 전반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이런 글을 볼 때마다 나는 내가 미처 못 보았던 최승자의 아프면서 날카로운 시적 언어를 보는 동시에 이를 탐독했던, 정서적 혼란과 온갖 실존적 고민은 다 짊어진 것처럼 살고 있던 과거의 나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간 최승자에게 바쳐졌던 찬사와 걱정 들은, 그가 이 세계에 일체의 편승도 하지 않았다는 염결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 결함을 알아보는 이는 많았어도, 그 염결함을 잘 이해하는 이는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우리들은 최승자의 시세계에 전적인 탑승을 하지 않음[못함]으로써, 이 세계에 편승하고 있었던 우리의 염결하지 못함을 되려 염결하게 지키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183)


마지막으로, 실패한 한 남자 곁에

한사코, 실패한 한 여자가 눕는다.

-「문명부분

 

"마지막으로, 실패한 자곁에 "한사코, 실패한" 자가 나란히 눕는 일. 이것은 사랑의 진짜 장면이 아닌가. 낭만주의적 꿈도 아니고, 위악이거나 자학도 아니고, 에로스니 필리아니 아가페니 등으로 구분할 필요도 없는, 사랑하는 연인들만의 비밀한 실제 모습이 아닌가. 한 남자가 마지막 실패를 하고서 누워 있을 때, 필사적이고도 계속적으로 한사코 실패를 거듭해온 한 여자가 곁에 가서 눕는 일. 최승자의 사랑은 이런 것이었다. "너는 날 버렸지,/이젠 헤어지자고/너는 날 버렸지"로 시작하여 "나쁜 놈, 난 널 죽여버리고 말 거야/널 내 속에서 다시 낳고야 말 거야"를 거쳐서, "오 개새끼/못 잊어!"로 끝을 맺은 Y를 위하여는 이 맥락에서 다시 읽혀야 할 것이다. "죽여버리고 말"겠다는 말 뒤에 "다시 낳고" 말겠다는 말이 이어지고, "개새끼"라는 말 뒤에 "못 잊어"가 이어지는 시인의 도저한 사랑. (188-189)


이렇게 최승자는 여성이라는 주체가 얼마나 아프게 탄생되어야 했는지를, 사랑의 서사를 통하여 아픈 모습 그대로, 실패한 모습 그대로 드러냈던 시인이었다. 아버지를 초월한 여성, 남성의 타자가 아닌 주체로서의 여성, 여성으로 다시 태어나는 여성으로서 출생신고를 한, 우리 시대의 첫번째 시인이었다. 시인은 악을 쓰며 산고를 치르는 어미였고, 동시에 공포 속에서 태어나고 있는 아기였고, 동시에 아기를 받아 안던 산파였다. 혼자서 그렇게 태어났다. (190) 


최승자가 이끌었던 1980년대의 시는 "시적 화자라는 하나의 가면persona이 없어져버렸"던 것이 가장 주목할 만한 공통분모였다. “기존의 시적 관습보다는 자기 진술의 진실성에서 시적 감동의 근거를 마련하고자" 했다. 이 민얼굴의 시들은 "진실의 추한 모습을 드러낸 용 기와 순수에만 가치를 둘 수는 없다. 발설된 추의 세계와 발설하는 자의 용감하고 아름다운 태도, 이 둘의 격차'가 주는 충격이 최승자 시의 진짜 가치이기 때문이다. 이 격차에 관해서라면, 이 시집도 여전한 가치를 지닌다. 지독하고 치열했던 열기가 사라진 자리에 표표하고 괴이한 권태가 자리 잡은 것이 다를 뿐이다. (195-196)


파국의 파토스가 문학의 귀결점이라는 사실에 그 많은 시인이 동의해왔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파국의 파토스를 끝까지 수행해온 시인을 우리는 목격해본 적이 없다. 최승자는 끝까지 살아남아, 이 길에서 이탈하지 않은 유일한 시인이 되어 있다. "그가 겪은 정신적 위기는 개인적 위기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이 땅의 시가 멀지 않아 감당해야 할 위기이기도" 하다는 걸, 우리는 최승자의 곁에서 예감할 수 있다. (204-205)


최승자의 시세계를 부정의 시학 또는 비극의 시학으로 읽는 것은, 방법적 부정과 방법적 비극으로 읽는 것은, 비천한 시어와 비천한 주체의 카니발로 읽는 것은, 추한 현실을 지독한 직시로 보여주었다고 읽는 것은 대부분 정당하지만 부분적으로는 부당하다. 부정과 비극이, 비천함과 추함과 독함이 어떤 원리에 의해 작동되었으며 어떤 예감에 의해 추동되었는지, 지금에 와서야 실마리가 제대로 보이는 까닭이다. 최승자만의 혹독한 예감이 리얼리티가 되어 있는 지금, 최승자가 '아픈 자'라면 우리는 병들었지만 아프지 않은 자라고 표현해야 옳지 않을까. 최승자가 혹독한 예감에 시달리는 예민하고 건강한 시인이었고 자신의 상태에 대한 자각이 누구보다 정확했고 지금도 그러하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지금의 우리는 도대체 누구일까. (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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