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26.
『작은 일기』 읽기. 이토록 실망하고 한탄하게 만드는 세계를 더욱 기민하게 매일 감각하면서도 가능성을 믿는 것이, “이 세계를 깊이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 곰곰이 생각했다. 세계가 못되처먹었다고 말하기는 너무나 쉽지, 라고 나 자신을 돌아보면서.
하지만 이대로 부서지는 게 좋겠다, 이런 사회, 하고 생각할 수가 없다. 많은 이들이 애쓰고 있고, 너무 많은 이들이 어렵고 아프다. (153)
희망을 나는 믿는 것 같지 않은데 그럼에도 세상을 보는 마음엔 늘 모종의 믿음이 남아 있고 이것이 뭘까, 이것을 다른 이들은 뭐라고 부를까, 궁금했던 적이 있었다. 가능성. 너무 평범한 말이라서 그 말을 발견하는 데 오래 걸렸다. 가능성을 믿는 마음, 그걸 믿으려는 마음이 언제나 내게도 있다. 언제나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가능성만을 바랄 수 있을 뿐인 세계는 얼마나 울적한가. 희망을 가지고 그것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기가 너무나 어려운 세계, 그 어려움이 기본인 세계는 얼마나 낡아빠진 세계인가.
너무 낡아서, 자기 경험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세계.
다만 이어질 뿐인.
세상은 죽음을 좋아하지 않는다. 세상은 삶도 좋아하지 않는다. 세상은 세상만을 좋아할 뿐이다.*
하지만.
"그는 열렬히 그러나 저급하게 사랑한다"는 말은 가능하다. "그는 깊이 그러나 저급하게 사랑한다"는 말은 불가능하다. **
내가 이 세계를 깊이 사랑한다. (171-172)
* 크리스티앙 보뱅 『환희의 인간』, 이주현 옮김, 1984BOOKS 2021, 69면.
** 시몬 베유 『중력과 은총』, 윤진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1, 8면.
문학주간 2025 개막 행사에 황정은 작가가 참석한다는 소식을 듣고 사전신청을 할까 생각했었는데, 가고 싶었지만 그날 내가 갈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와중에 매진이 되어 있었다. 정말로 오랜만에 만날 수 있는 기회였기에 아쉽지만, 언제 올지 모를 다음을 기다리며...
25.8.30.
『작은 일기』 완독. “불법 계엄이라는 국가 폭력에 관통당한 경험”(186쪽)을 이렇게 끓어오르는 단단한 문장으로 기록해준 것에 대한 감사함과, 지나온 일들을 다른 의미에서 ‘잊지 않겠다’는 마음가짐, “각자의 자리에서 어떤 정체성으로 어떤 부침을 겪고 있든” 그것을 받아들이고 품을 줄 아는 마음의 품을 지닌 채 함께 저항하겠다는 다짐을 새기며 책을 덮는다. 다음에는 작가의 소설을 만나고 싶다는 바람과 함께.
『단테』 읽기.
25.8.31.
『단테』 완독. 피렌체를 보기 전에 다 읽었더라면 좋았겠다는 생각과, 그러기에 단테가 피렌체에 있었던 기간은 너무 짧았구나라는 생각을 동시에 했다. 『신곡』의 내용이나 단테의 전기를 구체적으로 다루기보다는 단테의 여정을 따라 훑고 가는 느낌. 그렇지만 『신곡』의 이름만 알고 있었던 사람의 입장에서 작품이 얼마나 단테의 삶과 닿아 있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 책이었다. 그 정도로 감상은 마무리하고, 『신곡』을 언제 읽게 될지는…
어려서 잠시 불린 이름이기는 하지만, 이탈리아어로 '지속하다''견디다'의 뜻을 지닌 두란테는 단테의 삶을 정의하는 데 딱 맞는 단어다. 그는 현실의 상황에 정면으로 대결하는 가운데 삶을 이어갔고, 신곡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지옥의 끔찍한 고통의 현장을 참고 견뎌 연옥에 도달하고 천국에 오른다.
한편 '알리기에리'라는 성의 기원이 된 라틴어 '알리게르aliger'는 '날개 달린'이라는 뜻이다. 날개의 이미지는 단테의 글에서 자주 등장한다. 예컨대 연옥에 오른 단테는 독수리의 발톱에 채여 하늘로 오르는 꿈을 꾸면서 천국의 섭리와 은총의 신비한 힘이 이끄는 상승의 힘을 느낀다(「연옥」 9곡 28~30행). 참고 견디는 상승의 힘은 날개에서 나온다. 그는 "내게 빛과 희망을 주었던 / 길잡이를 따라서 강한 욕망의/깃털과 날렵한 날개로 날아가야 한다"(「연옥」 4곡 28-30행)라고 다짐한다. "날개penne"는 펜과 더불어 사랑의 의미도 지닌다. 이름과 성이 잘 어울려 구원을 꿈꾸는 작가 단테의 기본 모습을 그려준다. (38)
내세 여행기 『신곡』을 채우는 것은 본 곳에 대한 기억과 보지 못한 곳에 대한 상상이며, 또 그 둘을 왕복하는 단테의 펜촉이다. 단테는 거짓말을 하지 않고 허세를 부리지도 않으며 강요하지도 않는다. 본 것을 보았다고 말할 뿐이다. 그런 면에서 그의 내세는 상상보다는 비유로 이루어진다고 해야 한다. 발명으로서의 상상보다는 다시 말하기(또는 재현)로서의 비유, 전자는 없는 것을 있게 하는 반면, 후자는 있는 것을 다시 (다른 방식으로) 있게 한다는 차이가 있다. 우리가 신곡에서 읽는 상상의 내세는 단테가 직접 본 현실의 비유이자 재구성이다. (61)
청신체는 글자 그대로 '맑고 새로운 문체'라는 뜻이다. '돌체dolce'의 뜻은 달콤함과 부드러움이지만, '맑다'는 뜻의 '청'으로 옮긴 것은 무난하다. '돌체'의 함의는 깊고도 넓지만, 사랑의 태도로 요약할 수 있다. 가슴속에 들어온 사랑은 부드럽고 달콤한 말을 속삭인다. 마음을 모아 그 말을 받아쓰면 그것이 곧 시가 된다. 이것이 청신체 시인의 시작 방법이다. 그러므로 사랑을 내면에 들이는 일이 출발이고, 마음을 모으는 일이 다음이며, 받아 말하고 쓰는 일이 최종이다. 마음을 모으고 받아써야 할 사랑. (77)
그렇게 마음에서 나와 언어로 드러나는 시는 새로운 내용과 형식을 지닌다. 새로운 내용이란 지금까지 말한 지성의 영혼을, 새로운 형식이란 '고귀한 속어volgare illustre'를 가리킨다. 단테는 중앙의 보편언어였던 라틴어가 아니라, 지역의 특수 언어였던 이탈리아어로 창작했다. 학술서와 편지는 라틴어로 썼지만, 내면 표현에 집중하는 창작에서는 이탈리아어를 선택했다. 라틴어는 책을 통해 배우는 문법적 언어인 반면, 이탈리아어는 어머니의 음성이 그대로 젖어들어 본능처럼 새겨진 언어였다. (78)
단테는 인간 언어의 가능성과 한계에 동시에 직면했다. 그는 스스로 주변의 사물과 맺는 무매개적인 관계에서 언어를 자아냈다. 대상과 그 대상을 실어 나르는 언어가 있을 뿐인 지극히 단순한 구조에서 그의 문학이 출발한다. 이런 생각 위에서 나는 단테의 문학이 비유의 기반 위에 서 있고, 그의 언어가 상징성의 영역에 들어앉아 있다는 전통 주류 비평에서 벗어난 가느다란 지류를 탐사하고자 했다. (2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