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9.15.
『챔피언들의 아침식사』 읽기. 내가 이 맛에 보니것을 읽었었지, 라는 생각을 하며 읽었다. 선형성은 찾기 어려워도 이렇게 엉망진창인 세계에서 웃음을 찾을 수 있다면야.
트라우트는 겁에 질린 나머지 42번가의 그 자리에 그대로 못박혀 있었다. 나는 그에게 살 만한 가치가 없는 삶을 주었지만, 동시에 삶에 대한 강인한 의지도 주었다. 지구라는 행성에서는 흔한 조합이었다. (107)
킬고어 트라우트는 한때 '바로 너 말이야'라는 제목의 단편소설을 쓴 적이 있었다. 그 소설의 배경은 하와이제도로, 미들랜드시티에서 드웨인 후버의 추첨에 운좋게 뽑힐 사람들이 가게 될 곳이었다. 고작 사십 명 정도의 사람이 하와이의 땅 전부를 소유하고 있었고, 트라우트는 소설에서 그들이 자신의 재산권을 완벽히 행사하도록 했다. 그들은 모든 것에 무단 침입 금지 표지판을 붙여놓았다.
이는 하와이에 사는 다른 수많은 사람들에게 끔찍한 문제를 일으켰다. 그들은 중력의 법칙 때문에 땅 위의 어딘가에 붙어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물속으로 들어가 앞바다에서 까딱거려야 했다.
그런데 그때 연방정부에서 비상 대책 프로그램을 내놓았다. 재산이 없는 모든 남자와 여자와 아이에게 헬륨이 가득 든 커다란 풍선을 주었다.
모든 풍선에는 하네스가 달린 케이블이 연결되어 있었다. 풍선의 도움으로 하와이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소유한 땅에 붙어 있지 않고도 하와이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었다. (108-109)
"진지하게 하는 말인지 모르겠군요." 운전사가 말했다.
"인생이 진지한 것인지 알기 전까지는 저도 답을 모를 겁니다." 트라우트가 말했다. "인생이 위험하다는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인생은 큰 상처를 주기도 하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생이 꼭 진지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125)
툴러의 롱 플래그를 다시 쓰기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양면이 모두 끈적거리기 시작했다. 오래 방치하면 이렇게 되나 싶기도 하고, 뜯지 않은 것이 하나 더 있는데 어떻게 하나 싶기도 하고...
25.9.16.
『챔피언들의 아침식사』 읽기.
한번은 뉴욕 주지사인 넬슨 록펠러가 코호스의 한 식료품점에서 트라우트와 악수를 한 적이 있었다. 트라우트는 그가 누구인지 전혀 몰랐다. 알았더라면 그런 사람이 자기 같은 SF 작가 바로 옆에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을 것이다. 록펠러는 한낱 주지사에 불과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 행성의 그 지역에만 존재하는 법 덕분에 록펠러는 지구 표면의 광대한 지역뿐만 아니라 표면 아래의 석유와 다른 귀중한 광물도 소유할 수 있었다. 그는 웬만한 나라들보다 행성을 더 많이 소유하거나 지배했다. 갓 태어났을 때부터 정해진 운명이었다. 그는 그런 터무니없는 소유권을 지닌 채로 태어났다.
"어떻게 지내나요, 친구?" 록펠러 주지사가 그에게 물었다.
"똑같죠, 뭐." 킬고어 트라우트가 말했다. (149)
트라우트는 편안히 앉아서 방금 그 대화에 대해 생각해봤다. 그는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었는데, 아주 늙은 노인이 되기 전까지는 그것을 쓸 짬을 내지 못했다. 존재들이 소리에 완전히 매혹되어 언어가 계속 순수한 음악으로 바뀌는 행성에 대한 이야기였다. 단어는 음표가 되었다. 문장은 멜로디가 되었다. 단어의 뜻을 알거나 상관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에 그들의 언어는 정보 전달이라는 역할은 전혀 하지 못했다.
그래서 정부와 상업계의 지도자들은 일이 제대로 굴러가게 하기 위해 음악으로 바꿀 수 없을 만큼 추한 어휘와 문장 구조를 가진 새로운 언어를 시종일관 만들어내야만 했다. (155)
25.9.17.
『챔피언들의 아침식사』 읽기. 여전히 이야기는 종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뜬금없는 유머나 블랙코미디가 곳곳에 배어있다. 드웨인과 트라우트의 이야기가 주인 듯하지만 아닌 듯도 하고. 중간중간 나오는 트라우트의 단편들에 더 관심이 간다. 처음부터 창조자인 작가가 화자로 등장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를 하더니, 갑자기 피조물들의 세계 한복판에 등장해서 잠시 놀랐다. 메타소설적 요소를 새롭게 활용한 것일까?
머릿속에 나쁜 화학물질을 가지고 있는 문제에 관한 한 드웨인은 분명 혼자가 아니었다. 역사를 통틀어 그와 같은 문제를 지닌 사람은 수도 없이 많았다. 이를테면 그가 태어난 이후 봐도 독일이라 불린 나라의 사람들은 한동안 나쁜 화학물질로 머릿속이 가득 차서 사람을 수백만 명씩 죽일 수 있는 공장을 지었다. 그 사람들은 기차로 운송되었다. (183-184)
이것은 누구나 각자의 비용을 스스로 부담해야 하는 나라에서 일어난 일이었고,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값비싼 일은 바로 병에 걸리는 것이었다. 패티 킨의 아버지 병원비는 드웨인이 하와이 주간이 끝나고 부담할 하와이 여행 비용의 열 배였다. (186)
드웨인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것은 지난 수년 동안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돈이나 구조물이나 여행이나 기계-혹은 다른 측정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를 제외하면 미들랜드시티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이 무슨 말을 입 밖으로 내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모두에게는 분명히 규정된 자신만의 역할이 있었다-흑인으로서, 자퇴한 여고생으로서, 폰티액 딜러로서, 산부인과 의사로서, 가스변환점화기 설치기사로서. 만일 누군가가 나쁜 화학물질 등의 이유로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삶을 살게 되더라도 다른 모든 이는 그가 어쨌거나 기대에 부응하며 살고 있다고 계속 상상했다.
미들랜드시티에 사는 사람들이 자기 동료의 정신이상을 늦게 감지하는 것은 주로 그 때문이었다. 그들은 하루 만에 크게 변하는 사람은 없다고 고집스레 상상했다. 그들의 상상력은 끔찍한 진실이라는 덜커덩거리는 기계에 달린 플라이휠이었다. (195-196)
미국을 실제 삶과는 아무 관련도 없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그토록 위험하고 불행한 나라로 만들고 있는 게 무엇인지 이해하고 나서부터 나는 이야기 짓기를 멀리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인생에 대해 쓸 것이다. 어떤 사람이든 다른 사람과 똑같이 중요하게 취급될 것이다. 또한 모든 사실이 똑같이 중요한 무게를 지닐 것이다. 아무것도 제외하지 않을 것이다. 남들이야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다. 나는 대신 질서에 혼돈을 부여할 것이고, 실은 이미 그렇게 한 것 같다.
만일 모든 작가가 그렇게 한다면 문학에 종사하지 않는 시민들은 우리를 둘러싼 세상에 질서 같은 건 없으며, 대신 우리가 혼돈의 요구에 적응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될지도 모른다.
혼돈에 적응하는 일은 어렵지만 가능하다. 내가 바로 살아 있는 증거다. 가능하다. (284)
25.9.18.
『예술 도둑』 읽기 시작. 브라이트비저의 삶과 행적은 흥미롭지만, 아직까지는 책의 특별함을 느끼지 못했다. 탐미적 욕구와 천재(天才)가 만났을 때 어디로 나아가는지에 대한 이야기. 다만 인물 자체의 유년 시절과 심리는 평범해 보였기에.
브라이트비저의 맹점은 다른 사람의 평가를 의식한다는 점이다. 자신이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단순한 도둑 취급을 받는 이유는 예술계 관계자들과 경찰, 심리학자들이 모두 미학적으로 무지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스탕달 증후군이 얼마나 강력할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참으로 답답한 일이다. 마음을 밖으로 꺼내 보여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70)
그러나 이들이 '성공한 도둑'이 되는 데 크게 일조한 불편한 진실이 한 가지 있다. 그저 관람객의 양심을 믿고 보안에 신경 쓰지 않는 박물관이 충격적일 정도로 많다는 점이다. 특히 지방에 있는 박물관들은 더 그렇다. 사실 박물관 보안에는 모순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 박물관은 작품을 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공유하기 위해 존재하며 관람객은 거창한 보안 장치의 방해 없이 가능한 한 작품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박물관 절도 사건을 거의 완전히 뿌리 뽑을 수 있는 손쉬운 방법이 있다. 작품을 저장고에 넣고 문을 잠근 뒤 무장 경비를 세우면 된다. 하지만 이러면 당연히 박물관도 사라진다. 박물관이 아니라 은행이 된다. (85-86)
『챔피언들의 아침식사』 읽기. 드디어 세 인물이 한 자리에 모였다. 드웨인 후버와 킬고어 트라우트, 그리고 세계의 창조자 커트 보니것.
나 자신으로 말하자면, 나는 나 혹은 다른 어떤 인간에게도 성스러움은 없으며, 우리는 모두 충돌하고 충돌하고 또 충돌할 수밖에 없는 운명의 기계일 뿐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충돌 말고는 할일이 없어진 우리는 충돌의 팬이 되어버렸다. 때로 나는 충돌에 대한 좋은 글을 썼고, 그것은 내가 관리가 잘되어 있는 글쓰기 기계라는 뜻이었다. 때로 나는 나쁜 글을 썼고, 그것은 내가 관리가 잘되어 있지 않은 글쓰기 기계라는 뜻이었다. 나는 폰티액이나 쥐덫이나 사우스벤드 선반과 마찬가지로 성스러움을 조금도 품고 있지 않았다. (297)
이제 삶은 지구를 아주 단단히 감싸고 있는 중합체(重合體)이므로, 사람에 대한 모든 이야기의 적절한 결말은 바로 그와 같은 약어가 되어야 마땅할 것 같은데, 지금 내가 큰 글자로 써보고 싶어서 쓰는 그 약어는 다음과 같은 모양이다. (307)

덧붙이자면 우리는 모두 공의 표면에 달라붙어 있었다. 우리의 행성은 공 모양이었다. 우리가 왜 떨어지지 않는지 다들 어느 정도 이해하는 척했지만 제대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정말 똑똑한 사람들은 사람들이 달라붙어 있는 표면의 일부를 소유하는 것이 부자가 되는 최고의 방법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알았다. (326)
25.9.21.
『챔피언들의 아침식사』 완독. 보니것의 팬이 아니라면 끝까지 책을 읽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을 하며 책을 덮었다. 끊임없이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새로운 인물들, 종잡을 수 없는 전개와 딴소리는 보니것의 장기이지만, 주된 흐름이 있는 듯한 『제5도살장』 이나 『고양이 요람』 과는 달리 이 소설은 스스로 창조한 세계에 친히(?) 내려와 피조물과 함께 하는 작가까지 실험적인 요소가 넘친다. 그래도 유머 코드가 맞는다면(그리고 블랙 유머 코드도 맞는다면) 세계에 대한 보니것의 촌평을 읽는 재미로 읽기엔 충분하다.
그리고 어쩌고저쩌고.
나는 리얼리즘 소설이 사소한 것을 꼬치꼬치 파고든다는 킬고어 트라우트의 의견에 동의한다. 트라우트의 소설 『전 은하계의 기억 은행』에서 주인공은 길이가 200마일이고 지름이 62마일인 우주선을 타고 있다. 그는 자기 동네의 공공도서관에서 리얼리즘 소설 한 권을 빌린다. 그는 그걸 60페이지쯤 읽다가 다시 반납한다.
사서가 그에게 왜 그 책이 마음에 들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그녀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저는 인간에 대해 이미 다 알고 있거든요."
그리고 어쩌고저쩌고. (374)
그리고 트라우트는 계단을 발견했으나 그것은 엉뚱한 계단이었다. 그것은 로비와 원무과와 선물가게 같은 곳이 아니라 사람들이 온갖 상처로부터 회복하는 데 성공하거나 실패하고 있는 복잡한 방들로 그를 이끌었다. 그곳의 많은 사람은 잠시도 쉬지 않는 중력에 의해 지구로 내던져진 이들이었다. (379)
"트라우트 씨─킬고어─"내가 말했다. "제 손에는 완전함과 조화와 자양분의 상징이 들려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함의 측면에서 보자면 동양적인 것이지만, 킬고어, 우리는 중국인이 아니라 미국인입니다. 우리 미국인에게는 선명한 색깔에 삼차원적이며 흥미진진한 상징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노예제도나 대량 학살이나 범죄적인 태만처럼 우리 나라가 저지른 커다란 죄에, 혹은 겉만 번드레한 상업적 탐욕과 교활함에 오염되지 않은 상징에 굶주려 있습니다.
고개를 드세요. 트라우트 씨." 나는 이렇게 말하고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킬고어─?"
그 노인은 고개를 들었는데, 그는 내 아버지가 홀아비였을 때─아주 늙은 노인이었을 때의 지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내가 손에 사과를 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3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