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선생이다
황현산 지음 / 난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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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격(品格)’이란 단어를 사전에서 찾으면 두 가지 뜻이 나온다. 첫째, “사람 된 바탕과 타고난 성품”, 둘째, “사물 따위에서 느껴지는 품위”.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뜻풀이를 둘로 나눈 것은 단어가 사람에게 쓰일 때와 사물에 쓰일 때를 구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사람과 사물의 구분에 관계없이 내가 찾고자 하는 뜻은 두 번째에 가까운 듯하니 조금만 더 추적하자면, ‘품위(品位)’란 단어의 여섯 가지 뜻 중에 사람이 갖추어야 할 위엄이나 기품”, “사물이 지닌 고상하고 격이 높은 인상에 주목할 수 있다. ‘위엄(威嚴)’존경할 만한 위세가 있어 점잖고 엄숙함, ‘기품(氣品)’인격이나 작품 따위에서 드러나는 고상한 품격을 나타내는 말이니 품위의 두 가지 뜻은 일맥상통한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품격이라는 단어에서 이렇게 멀리까지 온 것은, 선생의 글에 배음(背音)처럼 흐르는 품격이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규명하기 위한 나의 짧은 추적이다. 그리고 오랜 시간 끝에 내가 다다른 생각을, 구태의연한 정의를 약간 비틀어 말하자면, 문체(style)가 곧 그 사람의 태도(attitude)를 가리킨다고 정리할 수도 있겠다.


훌륭한 에세이가 갖추어야 할 자질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황현산이라는 평론가의 에세이가 갖는 자질이란 평이하지만 엄정하게 골라낸 언어로 상념을 펼쳐내 독자를 어느새 그의 세계로 스며들게 하는 경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글은 목표를 향해 돌진하는 사냥개의 솜씨도 아니고, “열정을 지닌 개인의 과격한 언어들(200)의 전위도 아니지만, 한 걸음씩 천천히 다가가는 문장들은 어느새 핵심에 이르러 과녁을 정확히 맞힌다. 여러 지면에 실렸던 글을 모은 만큼 다루고 있는 주제는 다양하지만, 읽다 보면 어느새 문장들은 문제의 중심에 닿아 있다. 하지만 그 문장들은 과시하는 창(槍)이 아니라 불현듯 꽂힌 비수에 가깝다. 힘을 주었다는 인위적인 시늉 없이 그 힘을 전달하는 문장의 내공이 글에서 풍기는 고고한 향기를 좌우한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 나는 때로 새삼스러운 말들을 읽으면서도 그것을 우리에게 과거의 상처는 너무 악착스럽고, 미래에의 걱정은 갈수록 두터워질 뿐이다. 그래서 현재는 그만큼 줄어들고 눈앞의 삶을 깊이 있게 누리는 것이 용서되지 않는다.”(42)와 같이 표현하는 펜끝을 보며 감탄하는 것이다.


나도 지금을 살고 있는 또 하나의 사람인지라, 모든 글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은 아니었다. 때때로 나는 글을 읽으며 향수(鄕愁)나 보존에 지나치게 기운 견해들이 아닌가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감수성의 필요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문장들을 보며 이성(理性)의 필요를 떠올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와 다름에도 불구하고 눈을 돌리지 못하고 존중의 뜻을 표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의 문장이 가진 고아(高雅)함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문장을 다루는 데서 느껴지는 그의 태도, 어떤 것도 허투루 보고 쓰지 않고자 하는 태도와도 관련된다. 진실을 꿰뚫으면서도 해석의 여지와 반성의 겨를을 누리는 새로운 문체의 개발(201)을 지향하는 그의 문장에 표하는 나의 존중은, 언어를 잘 골라서 문장으로 펼쳐내고 싶은 나의 바람이자 닮고 싶은 문장을 만난 나의 마음이기도 하다.


많은 부분에 밑줄을 치며 읽었지만 내 눈을 오래 사로잡았던 글들은 시의 소용에 대한 글과 문학과 문학적인 것을 이야기한 글이었다. 시적인 가사를 품은 노래와 시를 가름하는 기준, 문학과 문학적인 것을 가름하는 기준은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하려는 고독한 시도들로 귀결된다. 문학은 문학적인 것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289)는 말이나 시인이 시를 쓰는 것은 "사물에 대한 새로운 감수성을 개척한다는 것이며, 그것들을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형식과 이미지를 만든다는 것이다.”(184)는 말들처럼, 중요한 것은 생각을 소비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생산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뜻일 테다. 물론 이러한 견해의 극단이 결국 이전의 오만한 견해들처럼 고급문화와 대중문화를 가를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의 글은 그 지점으로 넘어가지 않으려는 치열함과 겸손을 가졌다.


처음으로 돌아와서, 문장의 품격이란 글쓴이의 태도와 관련되는 것이며, 그러한 태도는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온다. 한 권의 책에서 그가 견지한 시선-태도란 사소한 것도 허투루 보지 않으려는 마음일 것이다. 글쓰기가 독창성과 사실성을 확보한다는 것은 바로 당신의 사정을 이해하기 위해 나의 사소한사정을 말한다는 것(176)이라는 말처럼, 사소함에서 다름을 보고 이를 확장시키는 노력이 품격의 한 부분일 것이다. 그런 시선을 가진 사람이 성장통이라는 단어가 젊은 날의 고뇌와 고투를 그 미숙함의 탓으로 돌려버리기도 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젊은 날의 삶은 다른 삶을 준비하기 위한 삶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위한 삶이기도 하며, 어쩌면 가장 아름다운 삶이 거기 있기도(88) 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사소함만 가진 문장은 고졸(古拙)함에 그치고, 이를 합당한 언어와 정직한 수사법으로표현하려는 노력이 함께할 때 문장은 고아함을 입는다. 결국 문체가 가리키는 글쓴이의 태도란 세계를 바라보는 자세와 언어를 다루는 자세를 아우르는 개념일 것이다. 이러한 자세에는 세계의 고통을 더욱 아프게 받아들이는 마음도 있을 거라고 믿으며, 기억과 예술의 윤리를, “인간 의식의 맨 밑바닥까지 진실을 추구하는 작업(84)으로서의 문학을 말했던 그의 모습을 보며 나는 자꾸 아래의 문장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비극은 그다음에 올 것이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죽음도 시신도 슬픔도 전혀 없었던 것처럼 완벽하게 청소되어, 다른 비슷한 사연을 지닌 동네와 거리들이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세련된 빌딩과 고층 아파트들의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그 번들거리고 말쑥한 표정으로 치장”(진은영 시인, 용산 멜랑꼴리아)될 때 올 것이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부끄러움이 무엇인지 모를 것이다.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사람이 불타면, 사람이 어이없이 죽으면, 사람들은 자기가 그 사람이 아닌 것을 다행으로만 여길 것이다. 그러고는 내일이라도 자신이 그 사람이 될까봐 저마다 몸서리치며 잠자리에 누울 것이다. (33)


부고를 들었던 날, 내가 받은 책 중 하나는 말과 시간의 깊이였다. 작고하기 며칠 전 오랜만에 나는 선생의 트위터를 훑다가 악의 꽃번역과 교정을 끝내고 주석을 달기만 하면 된다는 트윗을 보고 반가워하였으나, 반가움은 허망함으로 나를 반겼다. 사 놓고 묵혀둔 지 오래된 책을 이제서야 읽게 된 것을 안타까워하며, 남겨진 책들을 천천히 곱씹으며 내 고유의 문장의 품격을 찾고 싶다고 생각한다. 세상을 지탱하는 곧은 형식들은 차가운 바람 속에 남아 있다.”(241) 어른다운 어른, 존경이 아닌 존중받을 만한 어른도 찾기 힘든 이 시기에 전해온 부고는 안타깝기만 하다. 부디, 영면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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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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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철은 피로사회에선 우울증을, 심리정치에선 빅데이터를 단서로 현대 사회를 진단했고, 투명사회에서는 투명성이라는 개념으로 현대 사회를 진단한다. 그의 다른 저작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듯, 그가 진단하는 현대 사회의 모습은 자기착취, 긍정성, 성과주체와 같은 단어로 대표될 수 있을 것이다. 투명사회에서 그가 주로 주목하는 것은 디지털 매체를 통해 드러나는 커뮤니케이션의 양상이다. 대체로 그의 관점에 동의하나, 나의 좁은 식견으로 몇 가지 주장들은 지나치게 나아간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부정성-타자의 추방으로 인한 긍정성의 과잉으로 대표되는 그의 주장이 이 책에서도 반복되고 있으므로 책의 전반적인 내용을 훑는 것보단 내가 읽으면서 느꼈던 몇 가지 의문점들에 대한 정리로 리뷰를 갈음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1. 전시사회: 사진에 관하여


그때는 그랬지라는 시간적 내용이 바르트에게는 사진의 본질이다. 사진은 과거에 존재한 것에 대한 증서이다. 따라서 슬픔이 사진의 근본 정조가 된다. 바르트에게 날짜는 사진의 일부이다. “왜냐하면 날짜는 삶, 죽음, 세대의 불가피한 소멸을 환기하고 다시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날짜는 사진에 죽음과 무상성을 기입한다. () 전시가치로 가득 차 있는 오늘날의 사진은 이와는 다른 시간 구조를 지닌다. 서사적 긴장이나 소설Roman의 극적 구성을 허용하지 않는, 운명도 없고 부정성도 없는 현재가 사진의 시간 구조를 결정한다. 사진의 표현은 낭만적romantisch이지 않다. (31-32)


저자가 바르트의 사진과 오늘의 사진을 구별짓는 기준은 방식의 차이, 즉 아날로그적 방식과 디지털 방식의 차이다. 아날로그적 방식으로 촬영된 사진은 사멸의 가능성을 가진 반면, 디지털 사진은 불멸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제의가치를 지니고 있던 사진은 페이스북과 포토샵의 시대에 전시가치로 전락한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하지만 촬영과 인화의 방식이 바뀌었다고 해서 사진의 시간성이 상실되었다고 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디지털 방식의 사진도 여전히 과거에 존재한 것에 대한 증서이자, 돌아갈 수 없는 시간에 대한 슬픔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디지털 사진에서 그런 애상의 정조, 즉 부정성의 정조는 전시되는 순간에 오는 것이 아니라 전시된 뒤 시간이 지난 이후에 온다. 한때 페이스북에서 제공한 기능 중 ‘1년 전의 나는 이런 흔적을 남겼습니다.’와 비슷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플랫폼 자체가 전시가치를 우위에 점하도록 하는 형식을 가지고 있으나, 그렇다고 오늘날의 사진에서 바르트의 사진론이 있을 자리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마찬가지의 입장에서 디지털 사진이 지시체와 사진의 연결을 분리시킨다는 다음 글에도 나는 마냥 동조할 수는 없는 것이다.


롤랑 바르트는 사진을 지시체의 발산으로 정의한다. 재현은 사진의 본질이다. 한때 존재했던 진짜 대상에서 빛줄기가 나와 필름에 자취를 남긴 것이 사진이다. 사진은 실재했던 지시체의 준-물질적 흔적을 보존하며, 언제나 자신의 지시체에 순응한다.” () 디지털 사진은 실재의 종말을 알리는 표지가 된다. 그 속에는 실재에 대한 암시가 더 이상 담겨 있지 않다. () 디지털 사진은 하이퍼포토그래피로서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하이퍼리얼리티를 제시한다. 실재는 그 속에서 오직 인용 혹은 파편으로서만 현존한다. 실재에서 따온 다양한 조각들이 서로 연결되고, 상상적인 것과 뒤섞인다. 이로써 하이퍼포토그래피는 지시체에서 완전히 분리된 자기지시적인 하이퍼리얼 공간을 창출한다. 하이퍼리얼리티는 아무것도 재현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제시할 뿐이다. (200-202)



2. 이름은 존경의 필요조건인가


 

존경은 이름과 결부되어 있다. 익명성과 존경은 양립할 수 없다. 디지털 매체를 통해 촉진되고 있는 익명적 커뮤니케이션은 존경심을 대대적으로 파괴하며, 조심성 없고 존중할 줄 모르는 문화의 확산에 함께 기여하고 있다. 악플 역시 익명적이다. 바로 이 점에 악플의 폭력성이 있다. 이름과 존경은 서로 엮여 있다. 이름은 인정의 기반이다. 인정은 언제나 기명적으로 이루어진다. 책임지기, 신뢰하기, 약속하기와 같은 행위 역시 기명성과 연관되어 있다. 신뢰란 이름에 대한 믿음으로 정의할 수 있다. 책임지기, 약속하기 또한 기명적 행위이다. 메시지를 전령과 분리하고 뉴스를 송신자와 분리하는 디지털 매체는 이름을 제거한다. (117-118)


이름이 부여되지 않으면 존경은 부여될 수 없는 건가라는 의문은, 당장 알라딘서재를 이루는 커뮤니티만 보아도 의구심이 드는 대목이다. 막연하게 생각했을 때 존경이란 그 사람의 행동과 언어의 총체로 부여받는 것이 아닌지. 아니면 저자가 여기서 사용하는 이름의 함의가 훨씬 넓은 것인지. 물론 악플을 도래하게 한 원인 중 하나가 익명성이라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너무 쉽게 대립항을 설정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3. 여기에도 메시지의 권력은 있다


블로그, 트위터, 페이스북 등의 매체는 커뮤티케이션을 탈매개화한다. 오늘의 의견사회, 정보사회는 이처럼 탈매개화된 커뮤니케이션의 바탕 위에 세워져 있다. 누구나 정보를 생산하고 송출한다. 커뮤니케이션의 탈매개화로 인해 한때 사회를 대표하는 엘리트, “여론 형성자”, 심지어 여론의 사제로까지 여겨져온 기자는 이제 불필요하고 시대착오적인 존재로 취급될 지경에 이르렀다. 디지털 매체는 모든 종류의 사제 계급을 몰락시킨다. 전반적인 탈매개화는 대표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는다. 오늘날에는 누구나 직접 나서려 하며, 자기 의견을 어떤 중개자도 통하지 않고 직접 발표하고 싶어 한다. 대표는 참가 혹은 발표에의 동참으로 바뀌어간다. (138)


탈매개화로 인해 대의 민주주의는 무너지고, 정치는 즉흥성과 신속성을 요구하게 된다는 게 글의 요지이며, 투명성의 요구가 획일화를 자발적으로 강요하게 한다는 것이 책의 메시지다. 정치의 모든 것이 정말 투명해지는 추세인지에 대한 논의는 차치하고, 이러한 탈매개화가 정말로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에서 사제 계급을 몰락시키고 있는지는 주목해보아야 한다. 모두가 메시지를 직접 낼 수 있는 플랫폼 안에도 유효한, 즉 영향력 있는 메시지를 보내는 메신저는 여전히 존재하며, 그들이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여론 형성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쉽게 볼 수 있다. 새로운 여론 형성자와 기존의 여론 형성자가 대체로 일치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4. 친밀사회-여기도 여전히 극장이다


친밀사회는 제의화된 동작과 격식을 갖춘 행동을 불신한다. 그런 것들은 겉치레이고 진정성이 없다는 것이다. 제의는 탈개인화, 탈인격화, 탈심리화를 촉진하는 외면화된 표현 형식들로 이루어진다. 제의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표현적이지만, 그렇다고 자기를 전시하거나 노출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친밀사회는 심리화되고 탈제의화된 사회다. 그것은 고백의 사회, 노출의 사회, 거리를 모르는 포르노의 사회다. (75-76)


소셜미디어가 심리적 거리를 제거한 공간을 만들어냄에 따라 우리는 모든 것을 전시하고 표현하며, 그럼에 따라 공적 영역은 상실되고 사적 영역만이 남는다는 것이 주장의 핵심이다. 그러나 저자가 말하는 소셜 네트워크에도 여전히 18세기의 세계 극장의 속성이 남아 있으며, 우리는 우리가 보여주고 싶은 것, 또는 보여줘도 괜찮을 법한 것만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 안에도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동안 지켜야 할 예의, 상호작용 의례는 존재하며 여전히 형성 중이다.

 

 

이외에도 저자가 벤야민을 빌려 이야기하는 미()와 숭고의 차이는 내가 주워들었던 칸트의 정의와 사뭇 달라서 혼란스러웠으나, 이 책의 핵심적인 논의와는 거리가 있으므로 접어두기로 했다. 읽으면서 느꼈던 것 중 하나는, 현대 사회를 비판할 때에는 항상 근대로의 회귀를 주장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긍정성의 과잉과 성과주체의 자기착취라는 저자의 통찰은 새겨들어야 할 것이지만, 사유와 권력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근대적 질서의 회귀를 주장하는 것으로 비치기 쉽다. 근대로부터 배워야 할 것은 분명히 있지만,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모색해야 하는 것은 새로운 삶의 형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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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8-08-15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병철 저자 책을 읽으면 명확하고 간명한 전개와 추진이 장점이라 그게 대중적 인기와 인지도를 넓힌 요인이기도 할 텐데요. 아무님 의견처럼 저자가 자신이 가진 패로 대립항들을 너무 일직선으로 연결하고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늘 들어요. 그래서 다 읽고 나서 그걸 고민하는 게 장점이라면 장점이고 단점이라면 단점 같달까요? ‘질문을 주는 책‘의 의미가 이런 건 아니라 생각되어서^^;;

아무 2018-08-15 22:19   좋아요 1 | URL
간명한 전개와 추진, 그리고 말하고자 하는 바의 선명함이 한병철을 읽는 즐거움 중의 하나라고도 말씀드릴 수 있을 텐데요. 다만 저자의 사상은 <피로사회>에서 전개한 이야기들이 점차 발전, 심화되는 형태인데 제가 신선함을 잃은 것도 별점에 영향을 준 거 같습니다. 책이 주는 질문이란 아무래도 책을 벗어나거나 거기에서 더 나아가는 질문들이 되어야 할 듯 싶은데, 제가 품은 질문들도 이런 류의 질문들은 아니었던 거 같아요^^;; 뒤에 남은 책들을 제가 찾아볼지에 대한 의구심도 들고..
 

굳건히 세워졌다고 믿었던 정신이 갈대처럼 흔들리는 것은 한 순간이다. 최근 몇 차례 있었던 풍파를 온몸으로 맞으며, 오랫동안 감춰두었던 끝없는 우울과 고독의 심연이 다시 드러나고 있음을 실감했다. 어떤 삶의 태도를 취하든 결국 혼자일 수밖에 없는 자신을 돌아보며, 나는 오래 전 외로움에 대해 썼던 잡스러운 에세이에서 인용했던 노래 가사를 다시금 떠올려야 했다.












너를 떠나 살 수 있을까

나의 가장 오랜 벗이여

나는 네가 없이는 내가 아닐 것 같아

차가운 너의 품 안에서 눈 감으면

어느새 꿈속을 걷는다

- 자우림, 슬픔이여 이제 안녕















누군가의 손을 잡고 있음에도 열 손가락에 걸리는 존재의 쓸쓸함(사랑하는 손)을 온몸으로 느껴야 했던 최승자 시인의 시집을 연달아 읽으며, 그녀의 시 세계 전반에 깔려 있는 괴로움/외로움/그리움/내 청춘의 영원한 트라이앵글(내 청춘의 영원한)로 함몰하는 나를 보는 것은 언제나 고통스럽다. 하지만 고통스러운 과정을 감내하면서 끝까지 읽어낼 수밖에 없는 것은, 허무와 죽음만이 상존하는 세계 한복판에서 자신의 고통을 끊임없이 언어와 이미지로 잡아내려는 시인의 처절한 외침이 토해내는 정서가 나를 끊임없이 붙잡기 때문이다. 김치수 평론가는 첫 시집 이 시대의 사랑에서 사랑이라는 키워드를 잡아냈지만, 난 그녀의 시를 읽을 때마다 외로움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이때의 외로움이란 감상(感傷)으로서의 외로움(loneliness)이 아닌, 모태의 순간부터 죽음에 진입하고 있음을 체감한 시인의 외로움(solitude)에 가깝다. 나를 맴돌고 있는 트라이앵글의 한 축으로서의 외로움이 결국 고독이라는 근원에서 뿜어내는 핏물과 같은 것인지를 생각하며, 여전히 나는 처음으로 만났던 그녀의 시, 외로움의 폭력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첫 만남 이후 너무나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시집을 완독하였지만, 여전히 첫 시를 가장 좋아하고 있는 나를 바라보면서.




그녀가 인식하고 있는 세계는 죽음과 어둠이 전부인 곳으로 존재하며, 그 안에서 외로이 살아가는/죽어가는 인간의 모습은 때로는 골수와 핏물이 넘치는 모습으로, 때로는 사지가 절단되어 내버려진 모습으로 그려진다. 살아 있다는 것이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일찌기 나는)는 시인에게 청춘()이란 초록의 무서운 공황이자 귀신 같은 푸르름(무서운 초록)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의 비극은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음에도 서른 살은 온다(삼십세)는 것이며, 예민한 감각을 가진 이가 시인 자신뿐이기에, 너희들 문간에는 언제나/외로움의 불침번이 서 있"음에도 "고독한 시간의 아가리 안에서/너희는 다만/절망하기 위하여 밥을 먹고/절망하기 위하여 성교(과거를 가진 사람들)할 뿐이기에 더 거대하게 다가온다. 그녀의 시가 표출하는 이미지들이 섬뜩하면서 잔혹하고, 때때로 추악한 모습을 띠는 것은 정과리 평론가의 말처럼 죽어가고 있음을 자각하지 못한 너희들을 깨우기 위함일까.

  













즐거운 일기에서도 시인의 인식은 거의 동일한 것처럼 보이지만, 자신에게서 세계 자체로 시선을 돌리는 시편들이 눈에 띈다. 여기에서 시인이 인식하는 세계는 유해 색소의 햇빛에 조금씩 들끓으며/발효하기 시작하는 거대한 반죽 덩어리이자, 입으로는 하루종일 먹었던 온갖 더러움을 게거품처럼 조용히 게워내는 세계이다(여의도 광시곡). 그리고 오늘도 우리는 코리아의 유구한 푸른 하늘 아래 꿈 잘 꾸고 한판 잘 놀아났읍니다.”(즐거운 일기) 시인은 홀로 대낮에 서른 세 알 수면제를 먹고도 잠들 수 없는 사악한 밤의 세계에서(수면제), 어느 한 순간 세계의 모든 음모가/한꺼번에 불타오르(내가 너를 너라고 부를 수 없는 곳에서)는 곳에서 폐광처럼 깊은 잠을잘 수 없고, 항상 깨어서 이 피곤한 컹컹거림(시인)을 멈추지 않는 것이 자신의 숙명임을 받아들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울부짖음은 불발이 예정되어 있는 것이어서, “공포이자 암흑덩어리인 세계는 쥐의 꼬리를 문 쥐의 꼬리(악순환)처럼 악순환을 반복할 따름이다.


세계 각처로 뿔뿔이 흩어져 간 아이들은

남아연방의 피터마릿츠버그나 오덴달루스트에서

질긴 거미집을 치고, 비율빈의 정글에서

땅 속에다 알을 까놓고 독일의 베를린이나

파리의 오르샹가나 오스망가에서

야밤을 틈타 매독을 퍼뜨리고 사생아를 낳으면서,

간혹 너무도 길고 지루한 밤에는 혁명을 일으킬 것이다.

언제나 불발의 혁명을.(겨울엔 바다에 갔었다, 강조는 인용자)


그해 늦가을과 초겨울 사이, 우리의 노쇠한 혈관을 타고 그리움의 피는 흘렀다. 그리움의 어머니는 마른 강줄기, 술과 불이 우리를 불렀다. 향유 고래 울음 소리 같은 밤 기적이 울려 퍼지고 개처럼 우리는 제기동 빈 거리를 헤맸다. 눈알을 한없이 굴리면서 꿈속에서도 행진해 나갔다. 때로 골목마다에서 진짜 개들이 기총소사하듯 짖어대곤 했다. 그러나 197×, 우리들 꿈의 오합지졸들이 제아무리 집중 사격을 가해도 현실은 요지부동이었다. 우리의 총알은 언제나 절망만으로 만들어진 것이었으므로……(197×년의 우리들의 사랑아무도 그 시간의 화상(火傷)을 지우지 못했다, 강조는 인용자)


그 와중에 조용히 죽음은 우유 배달부의 길을 타고 온다.”(무제 2) 여전히 더럽고 오물로 가득 찬, 절망과 고통과 공포와 죽음이 난무하는 세계에서 시인의 외침은 단순히 울부짖음으로 끝나는 것인가. 때로는 죽음 충동의 지배를 받는 것처럼 보이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나는 멈추지 않겠다는 아픈 다짐을 본다. 근원적으로 피비린내나는/이 세상의 고요 속으로/나는 처음으로 내려서겠읍니다.”(하산)와 같은 구절에 보이는 마음가짐에서, 나는 끝내 잠들지 못하고 고통을 이야기하겠다는 다짐을 읽으며 아파하는 것이다.




그녀의 시에서 나타나는 처절한 비극의 언어는 때로는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로, 때로는 극언의 형태로 충격을 안기며 온다. 그것은 이미 죽음이 전체를 덮은 세계 때문이기도, 모태를 벗어난 순간부터 세계에 홀로 내던져진 인간의 존재론적 고독 때문이기도 하다. 언제나 시인은 컹컹대며 현실의 맨얼굴을 말하겠지만, 어떤 언어로도 외로움, 괴로움, 그리움의 트라이앵글을 벗어나지 못할 것을 알기에 그녀의 시가 더욱 아프게 다가온다. 트라이앵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시인뿐만 아니라는 것을, 뒤로 벌렁 누운/거대한 다족류의 벌레와 같은 세계에서 살아가고/죽어가고 있는 피골이 상접한 내 정신(여의도 광시곡)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매번 읽을 때마다 실감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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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8-07-03 02: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무님 넘 오랜만입니다! 최승자 시인 시 읽으면 말씀처럼 절절한 외로움 때문에 읽는 게 괴로울 지경... 님 글도 참 힘든 게 느껴져서 ;_;).... 바다 구경이 필요할 듯!

아무 2018-07-03 20:35   좋아요 1 | URL
따뜻한 환대 감사합니다^^ 말씀처럼 그냥 읽어도 괴로운 시를 휑한 마음으로 읽는 건 참 고통스러울 정도였지만, 그런 마음 상태가 아니었으면 두 권을 연달아 읽을 일도 없지 않았을까 싶어요. 최승자 시인도 외로움에서 벗어나고자 이렇게 몸부림치는 듯한 시를 쓴 건 아닐 거라고 생각하며, 문득 어깨에 손을 올려 사람을 놀라게 하는 벗 같은 존재라고 여기며 보내려고 합니다. 바다를 보며 뻥 뚫리는 기분도 느끼면서.. ^^;;

2018-07-04 01: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7-06 19: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7-22 14: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01 19: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공쟝쟝 2021-12-22 11: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맙소사, 링크타고 와서 읽었습니다. 아무님은 정말 평론가 같으시네요. 요즘 최승자 에세이 다시 나오고 있는거 같죠. <이 시대의 사랑>은 제게도 최고의 시집입니다. 나중에 에세이 읽고나면 한번 더 읽으러 올께여 ㅎㅎㅎ

아무 2021-12-23 00:00   좋아요 1 | URL
과찬이십니다😆 뭔가를 쓸 때마다 항상 걱정하는 것이 두 가지인데, 하나는 ‘내가 이걸 잘 이해해서 쓰는 건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너무 어렵게 쓰고 있는 건가?‘하는 것이에요😅 어려운 것, 혹은 감정이나 상념처럼 언어로 잘 표현하기 어려운 걸 쉽게 풀어서(또는 빗대어서) 쓰는 능력을 갖는 게 제 목표 중 하나입니다 ㅎㅎ.. 에세이는 딱 두 꼭지만 읽어보았는데 여전히 좋았어요. 내년에 다 읽고 다룰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공쟝쟝님 건강 조심하시고 얼마 남지 않은 올해 잘 마무리하시길 바랄게요🥳 북튜브도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공쟝쟝 2021-12-23 12:39   좋아요 1 | URL
어렵게쓰는 것도 능력이예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ㅋㅋ 하지만 잘 풀어쓰고 싶은데 어렵게 써진다면 더 연마 하셔야…(응?) 북튜브… 아무님 보지 마세요 ㅋ 그거 보지말고 책보고 글써요 ㅋㅋㅋ 자주 많이 쓰라고요!! 주간 아무르 홧팅!!

아무 2021-12-24 17:28   좋아요 1 | URL
유튜브는 잘 안 봐도 북튜브는 나름 챙겨보는 것들이 있답니다... ㅎㅎ 연말 업무폭탄들만 잘 처리하고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혼자이든 여럿이든 평안한 크리스마스 연휴 보내시길😁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벨 훅스 지음, 이경아 옮김, 권김현영 해제 / 문학동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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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주어진 것이 과연 온당한지 돌아보는 것, 아니라면 기꺼이 내려놓는 물결에 동참하는 것. 긴 이야기 끝에 도달한 곳은 자신을 철두철미하게 돌아볼 수 있는 ˝예민한˝ 이성과 감각에의 요구. 다만 나에겐 더 정교한 언어가 여전히 필요하다. 예민함을 받쳐줄 더욱 세밀한 언어의 칼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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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스터리츠 을유세계문학전집 19
W. G. 제발트 지음, 안미현 옮김 / 을유문화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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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스터리츠의 근저를 이루는 의 관찰기는 북미산 너구리에 대한 관찰로 시작된다. “() 분명히 녀석은 아무 특별한 이유도 없는 이런 행위를 통해 자신의 행동과는 무관하게 빠져든 이 잘못된 세상에서 빠져 나오려는 것 같았다.”(8) 뒤에 이어지는 아우스터리츠의 건축사를 읽다 보면 너구리 이야기는 사족처럼 느껴지지만, 아우스터리츠의 탐원기(探源記)를 다 읽고 저 문장을 다시 보았을 때 밀려오는 상념이란 이런 것이다. 그의 이야기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말하는 부분이 아닌, 여기부터가 시작이었구나, 하는 생각.

 

정체성은 우리가 지나온 시간이라는 선을 톺아보며 구성하는(또는 구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유년 시절의 기억을 상실한 아우스터리츠에게 정체성 찾기의 길은 요원하다. 물론 그러한 내력을 가진 그였기에 공간에 상흔처럼 새겨진 시간성을 추적할 수 있게 되었으니 독자로서는 감사한 일이지만, 기록된 바도, 전해진 바도 없스스로는 어떤 기억의 능력도 갖고 있지 않은 수많은 장소와 물건 속에 달라붙어 있는 이야기들(30)을 기록할 수 있게 된 대가로 얻게 된 매우 위험한 감정의 소용돌이(40)는 그를 불안정한 외줄로 내몬다. 그의 감정을 일렁이게 했던 정거장이라는 공간이 떠남과 머묾의 이중주가 새겨진 장소라는 사실은, 그가 자신의 근원을 찾아 헤매는 기행이 안착하는 일 없이 계속될 것이라는 암시다. 결국 소설에 기록된 그의 삶을 끝까지 따라간 나에게 남은 그의 정체성은 그가 언제나 들고 다녔던, 이후의 그의 모든 삶을 요약하는 베라의 정확한 표현(192)인 륙색이었다.




나는 돌아오는 길에는 항상 리버풀 스트리트 정거장 동쪽 끝에서 내려 한두 시간 그곳에 머물렀고, 아침 일찍부터 벌써 피곤한 다른 여행객들과 노숙자들과 함께 벤치에 앉아 있거나 난간에 기댄 채 서 있으면, 그때 내 속에서 지속적인 당김, 혹은 일종의 심장의 고통 같은 것이 느껴졌는데, 그것은 흘러간 시간의 소용돌이에서 나온 것임을 예감하기 시작했어요, 라고 아우스터리츠는 말했다. (143-144)

 

개인의 기원을 찾아 장소를 끊임없이 수색하던 그의 방랑은 건축사라는 그의 전공과 결합하여 인간이라는 종의 시간 탐색으로 확장된다. 인간이 구축한 공간에 켜켜이 쌓인 시간의 배음을 탐색하는 작업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확한 표현일 것이다. 꾸준하면서 집요해 보이기도 하는 발자취는 인간의 탐욕과 잔혹함으로 귀결되는데, 브렌동크 요새로 대표되는 별 모양의 방어 시설에서 테레지엔슈타트로 이어지는 공간사()의 끈은 세상은 19세기의 종식과 더불어 끝난 것(156)이라는 그의 시간론과 상통한다. 그것은 36도라는 온도를 끊임없이 유지하며 살아가는 인간이라는 종의 숙명인지도 모른다.인간이 항상 빠져 있는 약간 열에 들뜬 상태(105)라는 마술적 경계가 부여하는 나방과 같은 숙명. 그 와중에 공간에 남겨진 개별적 존재로서의 개인사()는 끊임없이 시간의 권위에 저항하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시간과의 부딪침으로 자신의 존재를 전달할 뿐이다. 그것을 들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이 소설이 처음부터 끝까지 진술 또는 진술의 진술이라는 방식을 택한 것은, 공간에 달라붙어 있는 이야기들이 시간과 부딪치며 전해지기 때문이고, 그렇게 전해지는 이야기들은 파편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건축사 또는 문명사라는 이름으로 그어진 선에서 벗어난, 그래서 시간에 의해 한 번도 건드려지지 않은 다른 사물들(113)의 말들은 진술 또는 증언의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고, 이러한 진술들은 (미처 다 읽지 못한) 공중전과 문학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고와 감정의 작동 능력이 마비된 형태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아우스터리츠의 회상이 선형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끝없이 곁가지를 치며 주변 인물과 장소로 확장되는 이유이기도 하고, 그의 이름이 아이러니를 품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폴레옹이 거둔 뛰어난 승전의 장소이자, 스스로 가장 사소한 것까지 주목했다고 믿는 사람들까지도 이미 다른 사람들에 의해 자주 무대 위에서 이리저리 옮겨 다닌 소도구 역할을 하(82) 역사 속 장소는 끊임없이 가장자리를 일각으로 끌어 올리려 헤매던 그의 모습과 대조되는 것이다. “수면 위로 드러난 이름 아래 차갑게 잠겨 있는 이름들을 침잠시키는 역사-시간의 폭력이랄까. 시간의 무자비함 앞에서 그는 한 권의 책을 결코 완성할 수 없었고, 무한히 확장되는 페이지들이 반감과 구역질을 안겨주었지만, “그럼에도 독서와 글쓰기는 항상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일(137)이었다. 모든 것을 추구(芻狗)¹와 같이 여기는 시간의 물결 앞에 모든 시도는 끝에 이르면 무위로 남겠지만, 실패의 연속 사이에서 휘둘리고 있음에도, 자신의 근원을 찾아간 몰다우 강에서 바라본 도시가 "꼭 그려진 그림 속의 니스 칠처럼 지나간 시간의 구불구불한 틈과 균열에 의해 관통되고 있는 것처럼"(180쪽) 보임에도 호명을 멈추지 않는 그의 모습은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어떤 이의 그것과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그녀가 가진 것은 파편들이었다. 문장이라기보다는 목소리였고 모으려고 할수록 멀어지고 흩어지는 메아리들이었다. () 수만 권의 책들, 유명하고 위대한 이름들. 그것들은 일각一角이었다. 일각에 불과했다. 수면 위로 드러난 이름 아래 차갑게 잠겨 있는 이름들이 있었고 그중에 실리가 있었다. () 얼마나 난처하고 허망한가. 허망하지만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게 필요했다. 모든 것이 사라져가는 이때. 어둠을 수평선으로 나누는 불빛 같은 것, 저기 그게 있다는 지표 같은 것이.

그 아름다운 것이 필요했다.

- 황정은, 명실중에서

 

홀로코스트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소설이 이에 국한되지 않는 것은, 시간이라는 이름의 보편성이 할퀴고 간 자리를 기록하려는 아우스터리츠-제발트의 집념 때문이기도 하고, 이를 표현하는 문장들이 품고 있는 애수와 처연함 때문이기도 하다. 엄혹한 역사가 진행 중인 현실을 마주하려는 그의 문장이 이런 감정을 빚어내는 것은 잠겨 있는 이름들에 대한 애도의 표시이자, 압도하는 시간의 폭주를 바라보는 작가의 회의 때문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들이 취하는 기록자로서의 태도는 이민자라는 특수성에 기인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우리는 그 이름들과 무관한가. “() 이 세상을 이렇게 어둡게 하는 것은 무엇이었나요? 하고 말했어요. 일라이어스가 그녀에게 대답했지요. 잘 모르겠소, 여보, 난 모르오.”(73) 평생을 자신이 믿었던 세계의 섭리 속에 살다가 무너져버린 일라이어스처럼, 우리 역시 아우스터리츠와 다를 바가 없다. 다만 공간에 새겨진 이름을 발견할 감각을 기르지 않았을 뿐. 결국 우리 모두는 자신의 행동과는 무관하게 빠져든 이 잘못된 세상속에 있기에, 난처하고 허망하지만 아름다운 것을 필요로 한다. 설령 그것이 아무것도 바꾸지 못할지라도.

 

아우스터리츠의 진술은 자신의 아버지와 마리 드 베르뇌유를 찾을 것이라는 다짐으로 끝난다. 이 작업은 현실의 그림자가 무에서부터 감광지에 나타나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과 같이 붙잡으려 하면 너무나도 빨리 사라져 버리는 기억(87-88)이기에, 아우스터리츠의 여정은 결코 끝나지 않고 언제나 진행형일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내가 떠올린 것은 종종 인간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떠올리는, 끊임없이 바위를 밀어 올리는 시지프의 모습이었다. 허망하며 허망하고, 이미 그 끝이 예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호명하기를, 기억하기를 멈출 수 없는 것은 그것마저 없다면 무너질 것이라는 윤리적 감각의 외침 때문이다. 다만 어떤 방식으로 그들, 또는 당신을 불러야 할지 그 자세를 생각할 따름이다..



¹ 천지는 어질지 않아 만물을 추구와 같이 여긴다.”(노자, 도덕경) 추구(Straw Dogs)는 존 그레이의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의 원제이기도 하다.



덧붙임) 행복한 책읽기책읽기의 괴로움

오랫동안 나에게 아우스터리츠는 숙제와 같은 책이었다. 제발트 읽기라는 다짐이 긴 시간 동안 미뤄지고 있다는 반성의 외침이기도 했다. 결국 불현듯 손에 집게 된 이 책을 다 읽은 뒤 내가 느꼈던 감정은 김현 평론가의 책 제목들과 같았다. 때로 한 페이지가 넘게 이어지는 제발트의 문장들을 읽어나가는 것은 나아가기를 포기하고 싶을 만큼 괴로웠으나, 현기증. 감정들에서 내가 담고 있던 물음표가 느낌표로 바뀌는 순간을 경험했으니 행복한 책읽기였다고 회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고생 끝에 낙이 온다.’와 같은 구태의연한 말로 표현될 수 없는 것으로, 어떤 감정이 다른 감정을 상쇄할 수 없는 상태이다. 단순한 공존이라고도 할 수 없는 이 감정의 뒤섞임은, 내가 다시 이 책을 펼쳐볼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알다시피 모든 강들은 필연적으로 양쪽으로 경계를 갖지요. 그렇게 본다면 시간의 강변이란 무엇일까요? 유동적이고 상당히 무겁고 투명한 물의 특성에 상응하는 시간의 특성이란 무엇인가요? 시간 속으로 잠기는 사물들은 시간에 의해 한 번도 건드려지지 않은 다른 사물들과 어떤 차이가 날까요? 빛의 시간과 어둠의 시간이 동일한 원 속에서 나타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나요? 왜 시간은 한 곳에서는 영원히 정지하거나 점차적으로 사라지고, 다른 장소에서는 곤두박질을 치나요? 우리는 시간이 수백 년 혹은 수천 년 동안 일치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을까요, 라고 아우스터리츠는 말했다. (113-114쪽)

그들의 체온은 포유동물이나 고래, 전속력으로 달리는 오징어의 체온과 마찬가지로 36도에 해당한다고 했어요. 36도는 자연에서 가장 이상적이라고 입증된 수위계, 즉 일종의 마술적 경계로, 인간의 모든 불행은 언젠가 이 규범에서 이탈한 것과 인간이 항상 빠져 있는 약간 열에 들뜬 상태와 관련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고 알폰소는 말했지요, 라고 아우스터리츠는 말했다. (1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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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6-21 14: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무님의 리뷰, 정말 오랜만에 봅니다. ^^

아무 2018-06-21 17:30   좋아요 0 | URL
유령처럼 그동안 보내온 건 저의 게으름 탓입니다^^;; 변명 같지만 생업과 독서를 병행한다는 건 많은 의지를 필요로 하더라구요.. 그나마 2년째가 되니 책을 읽을 여유는 어떻게든 마련했는데 이를 정리할 짬을 내기는 정말 어려운 것 같습니다. 독서에도 체력과 근육이 필요하다는 걸 하루하루 실감하며.. 그래서 꾸준히 서재 활동을 이어가시는 cyrus님 같은 분들이 대단하시다고 느낀 날이 많았던 지난날이었습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