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네 이발관 - 혼자 추는 춤 [싱글앨범][디지팩 한정반]
언니네 이발관 노래 / 블루보이 / 2015년 12월
평점 :
품절


7년을 기다렸다. 그들의 감성은 여전했다. 근데 `혼자 추는 춤`보단 `애도`가 더 나은 것 같다. 결국 정규 앨범은 또(또!!!!!) 미뤄졌지만, 이 정도면 조금은 더 기다릴 수 있을 듯. 요약하자면, 나에겐 2015년의 가뭄 속 단비 같은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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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2015-12-17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 듣고 이 글을 쓴 뒤 밤새 두 곡을 반복했다. 아무래도 평이 수정되어야 할 것 같다. `혼자 추는 춤`으로 기운 듯.. 굳이 따지면 그렇다는 거고 사실 둘 다 되게 이발관스러워서 좋다. 얼른 다시 돌아왔으면..
 

A와 B라는 친구가 있었다. A는 B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아니, A가 B를 일방적으로 싫어했다는 말이 맞겠다. 생각해보면 B가 친구들 사이에서 소문이 좋지 않았는데, 나는 A와 친했고 B와도 그냥 나쁘지 않은 사이여서 그냥 그렇게 지냈다. 시간이 지나 나는 군대를 다녀왔고, 다시 A를 만났다. 그때 A가 이런 말을 했다. 다시 생각해보니까 자신이 왜 B를 싫어했는지 그 이유가 기억나지 않는다고, 이유는 기억에서 사라지고 싫어했던 감정만 남았다고.















악스트 3호의 작가는 공지영이었다. 나는 공지영의 소설을 네 권 읽었고, 작가 공지영은 좋게 생각했었다. <즐거운 나의 집>을 읽고 실망하긴 했지만. 그렇지만 나에게는 공지영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이 있었는데, 이번에 책 표지를 보고 곰곰이 생각하니, 내가 공지영에게서 등을 돌린 이유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나는 작가로서의 그녀가 싫었던 것도 아니었고, 페미니스트로서의 그녀가 싫었던 것도 아니었다(더욱이 나는 내가 모르는 것에 있어서는 물러서므로, 페미니즘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대체 뭐란 말인가? 트위터 때문에? 혹시나 싶어 트위터를 보았지만 최근 글에는 리트윗한 것들뿐이어서 관두었다.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봐도 기억이 나지 않아, 이유를 생각하는 일을 관두고 무의 상태로 다시 보기로 했다. 아마 내가 등을 돌렸던 이유는 내용이 아니라 형식 때문이었을 것 같지만, 그 기억 역시 확실하지는 않다. 어찌됐든, 어떤 사람에게나 새겨들을 말은 있기 마련이다. 설령 적이라도.


그럼에도 그러한 소설들이 승승장구하는 이유는 수동적인 여자들을 좋아하기 때문일 것이다. 남자들이 그런 여자를 좋아한다는 말이다. 말을 바꾸면 어떤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게 남성들이고 남성들이 선택한 게 수동적인 여성상을 선택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소위 진보적인 문학을 한다는 사람들조차도 소설 안에서의 여자가 진보적인 건 수용할 수 없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예로 소위 진보 문학권에서도 『토지』를 인정한 적 없잖은가. 『토지』의 서희가 우리 문학의 여자 계보에서 보면 대단히 선진적인 여자가 분명함에도 인정받은 적 없다고 생각한다. (...)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데 나는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모더니티라고 생각한다. 셰익스피어를 지금 읽으면 지금에서의 모더니티가 살아난다. 왜 그러냐면 캐릭터가 시대에 함몰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질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시대가 변하면 그 시절에 맞는 모더니티가 생겨나는 것이 작품의 생명력이다. (...) 우리 소설의 주인공들은 아직 춘향이도 못 넘고 있다. (112쪽)


"저보다 더 늙은 것 같아요, 젊은 작가들이"라는 말에는 뼈가 있었다. 요즘의 한국 소설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이 보여주는 무기력함을 보면 수긍이 되기도 한다. 그녀의 모든 활동들이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정치적인 이념의 영역이지만, 그녀가 자신이 불의라고 생각하는 것을 거침없이 말하고 뛰었던 사람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듯하다. 인터뷰를 천천히 읽으면서 내가 왜 등을 돌렸는지 어렴풋이 짐작이 가는 부분도 있었지만("내가 한국문학에서 그렇게 후진 존재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같은 말을 자기 입으로 하는 건 좀... 나랑은 안 맞는다), 그녀에게 상당히 가혹한 프레임이 씌워지고 대표로 공격받은 것은 사실이다. 그녀의 거침없음을 불편해 하던 사람들에게 등을 돌릴 계기를 부여해준 꼴이라고나 할까... 나에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이런 모든 일들에도 불구하고 거침없음을 유지하고 끌고가는 작가의 모습이었다.


인생을 살아오며 절절히 느낀 것이 하나 있다. 언제나 똑같은 원칙이 보였다. 그것은 그나마 진실이 모두를 덜 다치게 한다는 것. 진실이 우리를 해칠 것 같고, 바르게 얘기하면 고통을 받을 테니 숨겨야 할 것 같지만, 아니다. 진실만이 우리를 가장 덜 다치게 할 수 있다. (124쪽)


공지영이 바라보는 한국사회는 가혹하고 폭력적이지만, 그녀는 그 안에서도 어떤 희망적인 시선을 놓지 않는 듯하다. 종교의 힘인 것일까? 3호의 작가가 공지영이라는 사실에 걱정이 들었었지만, 나에게는 작가 공지영을 다시 생각해볼 기회를 주었다는 점에서 괜찮았던 것 같다.


서평으로 돌아와서, 이번에 실린 서평들을 읽으며 내가 처음 들었던 생각은 전반적으로 '문학적이다'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확신할 수 없는 것은, 이 표현이 서평에 붙을 수 있는 찬사인가, 비판인가 하는 것이었다. 결국 서평이란 리뷰(review)로써 독자에게 프리뷰(preview)를 제공해야 하는 글쓴이의 외줄타기 같은 것인데, 문학적인 서평은 이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를 생각하면 의문이 남는다. 이는 아직도 내가 서평이 어떤 글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결심이 서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우선 나는 목차를 보고 내가 읽은 소설이 고작 세 편뿐이라는 사실에 절망하였다. 그리고 황현진의 서평을 읽으면서 자신이 쓴 단편이 포함된 책에 대한 서평을 쓰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 이 서평과 서평이 다루는 책은 결국 '나는 왜 쓰는가'에 대한 중언부언이기도 하다. 과연 저 질문에 대한 완벽한 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긴 한 걸까. 난 지금 내가 이렇게 글을 쓰는 이유도 확신할 수 없는데.


쭉 읽으면서 지난 호보다 장르가 다양하지 않구나라고 생각하던 찰나, 만화에 대한 서평(그렇다. 그것도 아직 연재중인 순정만화에 대한 서평이다)이 실려 있어 약간 놀랐다. 정영목 번역가의 <바닷마을 다이어리>에 대한 서평은 영화 <가족의 탄생>과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본 사람이라면 좀더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읽으면서 결국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책과 영화를 끌어온 건가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서평은 조르주 바타유의 <불가능>에 대한 김뉘연 편집자의 서평이었는데(제일 짧아서 그랬던 건 아니다), 최근에 이성복 시집을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들이 쓰여있어 그랬던 게 아닌가 싶다. 시란 "도달할 수 없는 가능성들에 대한 언어적 환기일 뿐"이라는 바타유의 말처럼, 결국 나도 이 시에 도달할 수 없는 건가라는 아득함이 몰려왔다. 결국 나는 '불가능'을 말할 수밖에 없는가. <불가능>을 읽어보고 싶은 밤이었다. 바타유, 바타유...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어디였더라...


볼라뇨의 <2666>에 대한 서평을 읽으면서, 1752쪽짜리 소설을 서평으로 다루겠다는 글쓴이의 분투가 대단하기도 하고, 무모해 보이기도 했다. 결국 이 서평을 통해 전체를 가늠할 수는 없었다. 그건 맹인이 코끼리 다리를 만지는 격이다. 작년에 잠시 불었던 볼라뇨 신드롬을 잠시 생각하며, 그때 구입한 그대로 책장에 꽂혀 있는 그의 처녀작 <아이스링크>를 바라보았다. 저걸 읽고 마음에 들면 <야만스러운 탐정들>을 사야지, 라는 생각으로 샀던 것인데 아직 저 책도 읽지 못한 현재에서, 대작인 <2666>은 나에게 미독이 아닌 비독의 영역으로 도망가는 것이 아닌가 저어하였다. 그렇게 하나둘씩 멀어지는 건가, 하고.


작가 인터뷰까지 읽었는데 세 시간이 흘렀다. 몇 년 전이었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속도다(아, 옛날이여...). 소설들은 뒤로 미루고, 따로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 야심한 시각에 글을 쓰고 있다. 그런데 소설 다 읽고 따로 리뷰를 쓸 마음이 들긴 할까. 아니, 곧 바쁜 시간이 엄습해서 4호가 나오는 다음 달까지 미루는 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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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12-12 0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쓰셨어요~^^
가끔 뭔지 모르게 휘둘릴적 있죠..
싫다는 건 그만큼 지배받는단 것이기도 해요..^^

아무 2015-12-12 09:23   좋아요 1 | URL
싫다는 건 지배받는다는 것이라는 말이 와닿네요^^ 그땐 뭔가에 휘둘렸던 것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지만 결국 지금부터 다시 찬찬히 보고 판단하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를 떠올리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생각도 들고..

AgalmA 2015-12-12 13: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등을 돌렸어도 서로가 재고할 수 있다면 다시 친구가 될 수 있겠죠. 그 재고에 구구절절 근거를 따진다면 접어야죠. 마음이 있다면 이성의 잣대란 그리 대수로운 게 아니잖아요? 1.2.3....그렇게 재고한다면 그건 교우가 아니라 비지니스겠죠.
헌데 작가는 참 곤란한 상황인 듯. 한 번 돌아선 독자가 작가에게 다시 마음을 주고 책을 사서 혹은 빌려서라도 읽기란 참 어려운 일이잖아요. 독서는 가장 이기적인 교우라고 할 수 있으니. 작가의 일방적 노력이 절대적이죠. 아무님께 공지영 작가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게 했다니 Axt 큰일 했는데요!

<예술가의 항해술>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존 스테제이커에겐 일명 ˝B타령˝이란 게 있어요. 수십 년간 블랑쇼, 바슐라르, 바타유, 바르트 등 첫글자에 B가 들어가는 인물들의 이론만 가르쳐대니 뿔난 원로들과 사서들이 그의 책을 금지하는 사태도 있었다지 뭡니까ㅋㅋ 그런데 전 존 스테제이커 그 심정을 너무 알겠더란 말이죠. 제가 흠모하는 철학자를 그렇게 줄줄이 말하고 있는 그의 강의가 얼마나 듣고 싶은지!

바타유! 바타유!

아무 2015-12-12 09:52   좋아요 2 | URL
경험해본 바에 따르면 한 번 등돌린 작가의 책을 읽어본다는 건 확실히 어렵습니다.. 생각해보면 저는 공지영 소설이 가진 사회적인 힘을 좋아했던 것 같아요. 앞으로 어떤 소설을 낼지, 그 소설을 다시 찾아 읽게 될지는 저도 잘 모르겠지만 예전에 낸 소설들을 다시 찾아볼 거라는 생각은 드네요..

저라는 사람이 과격한 것, 또는 극단의 위치에 서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요즘 같은 세상에 회색분자라고 욕먹기 딱 좋은 사람이죠) 제가 등을 돌렸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드네요. 내용이 가치있어도 그것을 담는 표현이나 형식이 잘못된 것이면 안된다는 생각이 있어서... 아마 그런 것이 옳고 그름을 떠나 등을 돌리게 된 이유가 아닐까 어렴풋이 짐작은 하는데.. 하지만 특히 공지영 작가에게 비난의 화살이 쏠리고, `세 번 결혼하고 세 번 이혼한 여류 소설가`라는 이름을 씌워 별난 사람의 이미지를 만들어 낸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사실 이혼율이 이렇게나 높은 사회에서 이런 프레임으로 비난의 빌미를 준다는 게 우스운 일이기도 하고..

오래 전에 인터뷰 기사에서 본 것 같은데, 그녀가 이상문학상을 받을 때 시상식에 온 작가가 그 전 해 수상자였던 박민규 작가밖에 없었다고 하더라구요(너무 오래 전 이야기라 정확하진 않습니다만..). 다시 생각해보니 작가들이 보여주는 탈정치적인 모습도 보이고, 사회적 목소리를 드높이는 작가에게 우리 사회는 얼마나 가혹한지도 생각해 보게 되네요. 꼭 진보적인 작가에게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니까요.

<예술가의 항해술>은 아직 못 읽었지만, 바타유에 대한 부분은 유심히 보게 될 것 같은...^^ 조만간 읽어봐야겠어요!

AgalmA 2015-12-12 15:13   좋아요 2 | URL
해외엔 마르케스도 결혼 3번, 그 이상인 작가도 많죠. 결혼 2번은 아주 흔해서 얘기거리도 안되고ㅎ 누군 그 정도 해도 되고 누군 안되고 그런 게 있습니까. 특히나 매우 사적인 일을 공적으로 비난하는데 누구 윤리를 말하는지 우스워지는 대목입니다. 작가들 이혼은 빈번한 일이기도 한데 그걸 특이사항으로 볼 정도인가요. 일반인 재혼도 많은 마당에. 공지영 작가 이혼에 대한 가타부타는 아주 많은 레이어들이 깔려 있다고 봅니다.
뿌리깊은 가부장제 의식, 여성 사회 참여에 대해 우습게 보는 일(이외수 작가 트윗과 좀 다른 맥이 있지 않나 싶죠), 유명세에 대한 시기와 폄훼, 글과 현실 동종에서 품위를 바라는 대중적 기대심리...참 많은 게 섞여있죠. 모두들 자신은 있는 그대로(이상인 걸 알면서) 봐주길 바라며 작가라면 이름값 하라는 식은 우리 안의 또다른 엘리트주의 아닐까요.
공지영 작가 소설이 제겐 대체로 다 취향에 맞지 않지만(노력해도 이건 참^^;;) 한 인간으로서, 작가로서, 사회인으로서, 여성으로서 노력하는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작가면 뭘 무조건 옳고 제대로 해! 식의 채찍질... 우리 자신부터 돌아보고 말해야 될 테죠. 작가도 시행착오를 겪으며 좌충우돌하는 인간이잖아요. 이리 말해도 저도 종종 경솔할 때 많죠. 작가에게도, 친구에게도.

[그장소] 2015-12-12 14: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뭐 ..떠올릴 만한 근거가 당장은 주변에 없으므로..
왜였는지도 기억이나지 않을 수있죠..언젠가 그모든것이
번개가 치듯 연쇄적으로 떠오를 수도 있겠고..영영 깊이 가라앚을 수도 ..있는 ..거죠.
불현듯 ㅡ떠오르는게 기억인 거거든요.. 꺼내려 않해도..^^
애쓰지 마시길~^^
 
대성당 (무선) - 개정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9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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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것은 정확히 말하면 세계문학전집 판본이 아니고, 그 전에 나온 판본(2007년)이었다. 어렸을 때 읽었던 모파상이나 오 헨리의 단편을 제외하면 외국작가의 단편집을 읽은 것은 이번이 처음인데, 읽으면서 느꼈던 것은 한국문학에서 말하는 단편과 외국문학에서 말하는 단편은 장르가 아예 다른 것 같다는 것이었다. 외국문학이 단편(short story)이라는 이름처럼 짧은 이야기를 통해 한 단면을 보여주는 스케치라면, 한국문학의 단편은 삶의 한 단면을 더 깊게 파고들고자 하는, 일종의 짧은 장편(novel)을 지향하는 소묘와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일 수도 있겠지만, 카버의 <대성당>을 읽은 뒤 내가 했던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대성당>에는 총 열두 편의 단편이 실렸다. 각 단편들의 분량은 제각각이라 '이거 장편(掌篇)소설인가?'하고 생각했던 이야기도 있고, 길다는 생각이 들었던(물론 분량을 확인해보니 단편의 분량이었다) 이야기도 있었다. 각기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고, 다른 환경에서 살고, 다른 인간관계를 맺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 읽고 나서 이 열두 편에 나오는 인물들의 삶은 하나로 통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한숨을 쉬더니 몸을 뒤로 기댄다. 그녀는 손을 내게 내맡겨둔다. "이렇게 말할 거예요. '꿈은 아시다시피 빨리 깨면 좋은 거지요.' 그렇게 말할 거예요." 그녀는 무릎까지 치마의 주름을 편다. "누가 물으면 그렇게 대답할 거예요. 하지만 이젠 그렇게 묻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그녀는 다시 숨을 내쉰다.

- '굴레' (p310)


굳이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미국 중산층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들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중산층'이라는 말이 얼마나 폭력적인 말인지, 얼마나 에둘러 하는 말인지를 생각하면 이렇게 정리하고 싶지는 않다. 작가가 잠시나마 보여주는 이들의 생활은, '중산층'이라는 말로 묶어버리기엔 너무나 개별적이기 때문에.


내가 읽은 바에 따르면, 카버의 단편들은 이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여기서 이것이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무의미한 것 같다. 그저 작가가 스케치하는 사람들의 모습, 삶의 모습을 따라가며 읽다 보면,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쓸쓸함과 아련함, 찌르르한 떨림이 온다. 이 글을 쓰면서도 읽은 느낌을 어떻게 써야할지 고민이 많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빵 한 조각을 내놓는 일밖엔 없는 것 같다.


"뭘 좀 드셔야겠습니다." 빵집 주인이 말했다. "내가 갓 만든 따뜻한 롤빵을 좀 드시지요. 뭘 좀 드시고 기운을 차리는 게 좋겠소. 이럴 때 뭘 좀 먹는 일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될 거요." 그가 말했다.

-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p141)


가장 좋았던 단편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과 '대성당', '열'이었다. 생각해보니, 이 세 단편의 공통점은 '공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롤빵으로 나타나는 위로와 공감, '열'로 나타나는 이별의 아픔을 들어주고 위로해주는 웹스터 부인, 맹인과 함께 '대성당'을 그리며 얻게 되는 이해와 공감. 김연수 소설가의 말처럼 그간의 카버 작품과 달리 '낙관적이고 희망적'인 작품들에 끌렸다고 해야 할까. 치밀한 분석과 집착은 보이지 않았지만, 단순한 스케치만으로도 분위기를 형성하는 것에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는 물론 '리얼리즘의 대가'로 불리는 카버의 치밀한 묘사력이 있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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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12-09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회화로 치자면, 제게 카버는 인상파죠. 화가가 보여주는 그 날의 빛, 터치 같다고 할까.
한국 단편이 주로 신춘문예나 등단용으로 활성화돼서 카버식의 단편을 미완성으로 보는 시선이 많았다고 생각해요. 그간 한국 단편은 굉장히 편향적이었죠. 그러니 문단 중심주의, 작가 중심주의가 나올 수밖에 없었던 거고. 요즘은 달라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다행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작가 만큼이나 독자도 다양한 시각과 이해력을 갖춰야 안정적으로 나아지겠죠.

아무 2015-12-09 23:53   좋아요 1 | URL
인상파라는 표현이 스케치보다 확 와 닿네요^^ 확실히 카버의 단편이 신춘문예에 투고되었더라면 지금도 등단작이 되기는 힘들 것 같은... 요즘의 한국 단편들을 보면 미니멀리즘보단 복잡함을 추구하는 경향 같은 게 보이기도 해요.
그나저나 오늘 서울 올라오면서 빨간책방을 듣는데, 이동진 씨가 저랑 똑같이 세 편을 꼽아서 조금 놀랐습니다. 소오름...;; 몇 편을 다시 보고 있는데, 다시 읽을수록 새롭게 보이는 것들도 있고..^^
 
백의 그림자 - 2010년 제43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민음 경장편 4
황정은 지음 / 민음사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리뷰를 시작하는 가장 나쁜 방법이 있다면 그건 바로 '작가의 말'을 인용하는 것이다(feat. 금정연). 황정은은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전히 난폭한 이 세계에

좋아할 수 있는 (것)들이 아직 몇 있으므로

세계가 그들에게 좀

덜 폭력적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왔는데 이 세계는

진작부터

별로 거칠 것도 없다는 듯

이러고 있어

다만

곁에 있는 것으로 위로가 되길

바란다거나 하는 초

자기애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고

다만

따뜻한 것을 조금 동원하고 싶었다

- '작가의 말' 중에서(171-172p)


파리 테러에 대한 뉴스를 들었을 때, 폭력시위다 과잉진압이다로 왈가왈부하느라 본질이 또다시 지워지고 있는 뉴스를 들었을 때, 내가 처음으로 떠올렸던 것은 바로 저 문장이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 세계는 여전히 난폭하구나, 하고.


작년 겨울 <계속해보겠습니다>로 처음 만나게 된 황정은의 소설은 큰 인상을 남기지 않았었다. 다만 좀더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해보고 다른 작품을 찾았을 따름이다. 그런 내가 그녀의 열성적인 팬이 되었던 이유는, 아마 <百의 그림자>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오늘 책을 다시 펼쳤다. 처음 읽은 것은 도서관 책이었으니 이 책은 처음 펼쳐보는 셈이다. 처음 읽는 마음으로 읽어 내려갔다. 나는 수없이 많은 페이지를 접었고 밑줄을 쳤다. 두 번째 독서의 다른 점은, 처음 읽을 때는 미처 보지 못한 것에 주목할 수 있는 시간을 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다시 읽으면서 주목한 것은, 이 세계의 폭력성이 어떤 방식으로 드러나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가마가 말이죠, 라고 무재 씨가 말했다.

전부 다르게 생겼대요. 언젠가 책에서 봤는데 사람마다 다르게 생겼대요.

그렇대요?

그런데도 그걸 전부 가마, 라고 부르니까, 편리하기는 해도, 가마의 처지로 보자면 상당한 폭력인 거죠.

가마의 처지요?

가마의 처지로 보자면요, 뭐야, 저 '가마'라는 녀석은 애초에 나와는 닮은 구석도 없는데, 하고. 그러니까 자꾸 말할수록 들켜서 이상해지는 게 아닐까요.

- '가마와 가마와 가마는 아닌 것' (38p)


차라리 그냥 가난하다면 모를까, 슬럼이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치 않은 듯해서 생각을 하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라고 무재 씨는 말했다.

언제고 밀어 버려야 할 구역인데, 누군가의 생계나 생활계, 라고 말하면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아지니까, 슬럼, 이라고 간단하게 정리해 버리는 것이 아닐까.

그런 걸까요.

- '오무사' (114-115p) 


개체를 무시하고 일반화해 버리는 것, 일부분만을 가지고 모든 것인 양 말하는 것, 그것이 이 세계가 가진 폭력성의 근원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리고 은교와 무재, 전자상가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 상가에는 '가동과 나동과 다동과 라동과 마동으로 구별되는 상가'와 사람들이 있는데, 그냥 '전자상가', '슬럼'이라고 싸잡아 부르는 것, 그래서 별것 아닌 하찮은, 사소한 무리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 그것이 세계가 언어라는 무기로 휘두르는 폭력이 아닐까.


그리고 그림자가 있다. 그림자는 전자상가 사람들에게 짙게 드리워지고, 불쑥 일어나기도 하고, 발을 걸기도, 심지어 그들을 집어 삼키기도 한다. <파씨의 입문>까지 나타나는 황정은 소설의 환상성은, 이 세계의 폭력을 차마 써내려갈 수 없었던 작가의 한 방편이 아니었을까 싶다. 움직이는 그림자의 환상은 그들이 견뎌내는 삶의 쓸쓸함과 아픔을 처연하게, 그리고 생생하게 보여준다. 유곤 씨가 성경을 던져 쥐며느리를 잡는 이유를, 그림자가 일어나는 장면만큼 생생하고 명확하게 보여주는 언어가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무재 씨.

네.

나는 이렇게 차가운 음식 말고 따뜻한 음식이 먹고 싶어요. 국물이요, 먹으면 배가 따뜻해지는, 따끈하고 맑고 개운한 국물이 있는 것을, 듬뿍 먹고 싶거든요, 라고 훌쩍거리며 말하다가 코를 닦고 국수를 마저 먹었다.

- '항성과 마뜨료슈까' (147p)


그들은 따뜻함을 찾는다. 금속처럼 차가운 세계의 폭력에 맞서서, 폭력에 움직이는 그림자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하지만 그들에게 세계에 맞서는 법은 나도 똑같이 느끼고 있다고, 여기도 똑같이 캄캄하다고 공유하고 공감하는 것밖에 없는 듯 보인다. 정전 속에서 컵을 깨뜨린 은교가 무재와 통화하는 장면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내 눈길을 오랫동안 붙잡는다. 그들의 주변을 그림자로 뒤덮어버린 정전 속에서 체념하며 '모르도록 어두워지자'는 은교가 그림자의 심연에 침몰하는 것을 막아주는 것은 '어두워요, 여기도'라고 말하는 무재다.


하지만 이 세계는 여전히 난폭하고 무자비해서, 공감과 연대만으로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렇기에 세계는 전구 하나의 배려가 있는 오무사도, 가동도 무너뜨려 버렸다. '따뜻한 것을 조금 동원하고 싶었다'는 작가의 말은, 그것만으로 이 세계가 나아질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는 한 인간의 희망이 아니었을까.


따라오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따라오는 그림자 같은 것은 전혀 무섭지 않았다.

- '섬' (168p)


그들의 사랑이 어떻게든 이 세계와의 투쟁에서 생존할 수 있게 해줬으면 싶다. 아니, 그냥 견뎌내게만이라도 해줬으면 싶다. 하지만 이 세계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안다. 그래서 내 마음 한 켠에는, 그들은 결국 그림자의 파도에 묻혀버렸을 것이라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이 더 아프고 쓸쓸하게 읽히는 지도.


며칠 전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까지 구입하면서 황정은 소설을 전부 구입했다. 내가 읽었던, 책으로 묶이지 않은 작품만으로도 단편집 하나가 묶일 것 같은데. 하루빨리 새 책이 나왔으면 좋겠다. 난폭한 이 세계의 폭력을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그녀의 이야기가, 나는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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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싫어서 오늘의 젊은 작가 7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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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지 않고 맞서 싸워서 이기는 게 멋있다는 건 나도 아는데...... 그래서, 뭐 어떻게 해? 다른 톰슨가젤들이랑 연대해서 사자랑 맞짱이라도 떠? (12p)


'우리는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한다.'는 말이 있다. 말하자면 관성의 법칙 때문일 것이다. 이 사회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냥 불평만 할 뿐, 하루하루를 관성처럼 살아가는 것. <한국이 싫어서>는 그런 많은 사람들의 모습과 닮았다.


<표백>이 '못 살겠다. 갈아보자.'의 소설 버전이라면, <한국이 싫어서>는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의 소설 버전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 책에서 독자들에게 꾸준히 이야기를 전하는 인물은 계나이고, 소설은 계나가 겪었던 일들을 회상하며 말해주는 고백체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다보니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과 사건들은 계나의 시선을 거쳐 우리에게 전해지고, 책을 읽다보면 헬조선이나 N포 세대와 같은 말들이 머리에 맴돌면서 계나에게 동조하고, 그녀를 부러워하기 쉽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정말 냉철한 눈으로 보아야 하는 것은 정말 싫은 한국 사회가 아닌 계나다.


중년 남자들이 「빙고」를 부르는 이유는 다들 너무 힘들어서 아닐까. 다들 이 땅이 너무 싫어서 몰래 이민을 고민하는 거지. 그걸 억지로 부정하고 자기 자신한테 최면을 걸고 싶은 거야. "모든 게 마음먹기 달렸어."라고, "쉽게만 살아가면 재미없어."라고. 그런데 이민을 가면 왜 안 되지?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어. (25p)


자신이 치열한 한국 사회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 계나는 주변 사람들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호주로 떠난다. 여기까지는 '헬조선을 뜨고 싶다.'는 사람들의 푸념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하지만 소설은 계나가 호주에 가서 잘 살았습니다라는 얘기를 해주지 않는다. 호주로 떠난다고 인생이 만만해지거나 살기가 나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허희 평론가의 말을 빌리자면, '자본과 달리 사람이 월경할 때는 막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비행기 운항 요금 따위가 아니라, 자기 신체를 둘러싼 법적 자장, 권리와 의무를 모조리 내놓는 것이다.'


이 소설은 '그래, 한국 정말 싫지. 이 나라는 정말 잘못됐어. 차라리 다른 나라로 뜨는 게 낫지.'라며 요즘 풍토에 동조하는 소설이 아니다. 물론 이 책이 열광적인 반응을 얻은 것에는 '맞아, 한국 정말 싫어.'라며 공감하게 되는 것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다시 한번 묻고 싶다. 그렇게 한국을 떠난 계나는 정말 한국 사회가 아무것도 해주지 않은 것 말고는 잘못이 없는 사람인가?


모르겠어. 그냥 걔가 결혼을 가볍게 생각했을지도 모르지. 어쨌든 이슬람 국가 남자잖아. 연애용 아내, 사업용 아내, 자식을 낳기 위한 아내, 이렇게 아내를 여러 명 둘 참이었는지 누가 알아. (93p)

 

내가 보기에는 계나야말로 한국 사회의 분위기와 너무나도 잘 맞는 한국적인 인물의 전형이다. 호주나라 게시판에서 열폭하는 사람들을 보며 충고하는 그녀의 말에는 '나는 당신들과 달라.'라는 생각이 깔려있지만, 그런 그녀가 인도네시아 남자친구를 보는 시선이나, 동생의 베이스 치는 남자친구를 보는 시선은 오늘날의 한국 사람들의 시선과 뭐가 다른가. 행복을 '자산성 행복'과 '현금흐름성 행복'으로 구분하는 모습 역시 효율성과 경제성에만 눈길을 보내는 시선과 전혀 다르지 않다. 호주를 떠나 시민권까지 얻은 그녀에겐 여전히 한국적인 관성의 흐름이 존재한다. 여기서 결국 말하려는 것은, 우리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한국적인 관성이 사실은 이 세계를 지배하는 관성이라는 것이 아니었을까.


나더러 왜 조국을 사랑하지 않느냐고 하던데, 조국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거든. 솔직히 나라는 존재에 무관심했잖아? 나라가 나를 먹여 주고 입혀 주고 지켜 줬다고 하는데, 나도 법 지키고 교육받고 세금 내고 할 건 다 했어.

내 고국은 자기 자신을 사랑했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그 자체를. 그래서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 줄 구성원을 아꼈지. 김연아라든가, 삼성전자라든가. 그리고 못난 사람들한테는 주로 '나라 망신'이라는 딱지를 붙여 줬어. 내가 형편이 어려워서 사람 도리를 못하게 되면 나라가 나를 도와주는 게 아니라 내가 국가의 명예를 걱정해야 한다는 식이지. 내가 외국인을 밀치고 허둥지둥 지하철 빈자리로 달려가면, 내가 왜 지하철에서 그렇게 절박하게 빈자리를 찾는지 그 이유를 이 나라가 궁금해할까? 아닐걸? 그냥 국격이 어쩌고 하는 얘기나 하겠지. 그런 주제에 이 나라는 우리한테 은근히 협박도 많이 했어. 폭탄을 가슴에 품고 북한군 탱크 아래로 들어간 학도병이나, 중동전쟁 나니까 이스라엘로 모인 유대인 이야기를 하면서, 여차하면 나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눈치를 줬지.

(170-171p)


한창 이 작품이 인기가 있을 때 SNS에도 많이 떠돌았던 문구인데, 책을 읽고나서 다시 보니 '대한민국'에 다른 나라 이름을 붙이면 그들의 푸념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고 한국 사회의 문제가 세계 보편적인 것이라고만 치부할 문제는 아니지만(주로 여당에선 세계적으로 이렇지만 우리는 선방하는 겁니다라고 말하는 것 같다),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한국이라는 이름의 세계만 폭력적인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세계는, 원래가 폭력적이다. 다만 그것이 옷을 바꿔 입었을 뿐. 폭력의 강도나 모양새가 다를 수는 있겠지만 그 본질은 동일하다. 그렇기에 나는 작가가 계나의 손을 들어주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이 소설을 읽으면서 별로 통쾌하거나 하지 않았던 것은, 이 소설이 보여주는 소재나 형식이 결국 '푸념'의 모습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표백>은 '반항'의 방식을('저항'이 아니다) 취했기 때문에 그 가능성 여부와 상관없이 통쾌함을 느꼈다면, <한국이 싫어서>가 보여주는 '푸념'의 방식은 한숨만 깊어지게 한다. 푸념하는 건 나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니까. 하지만 여전히 인터넷 상에서 떠도는 '헬조선' 열풍을 이런 식으로 풀어냈다는 점에는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도서관에 예약신청을 한 지 두 달만에 받은 책이었는데, 2주 내내 펴고 있지 않다가 반납 안내 문자를 받고 부랴부랴 읽었다. 다른 그의 소설처럼 술술 읽히는 문장이 이 책을 읽는 또다른 재미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지긋지긋해서 눈을 돌리려 했던 한국 사회의 현실들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는 점에서 한숨만 늘어가는, 고민들 때문에 잠이 오지 않는 그런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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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11-17 0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법칙 책 보고 왔더니 ˝관성의 법칙˝ 얘길ㅎ;;....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관련된 ˝붉은 여왕의 법칙˝이란 게 있더군요. 치타를 피하려면 영양이나 얼룩말은 그 2배로 빨리 달려야 한다는. 살아남기 위해서. 이민은 그런 달리기 같은 방법이기도 했을 겁니다.
모두가 달리고 있는 세계.
미셸 우엘벡 <복종>을 다시 훑어보다가 그나마 한국에서는 장강명 작가가 비슷한 스탠스이지 않나 싶었습니다. 우엘벡보다 장강명 작가가 적을 두지 않는 처세도 있는 것 같고요. 기자 출신이라 그런가a;
우엘벡이 유럽의 허위를 찍어대듯이 장강명은 한국의 부조리함들을 씹어주죠.
딱한 것은 쓰는 자도, 읽는 자도 후련하지 않다는...세상이 그래서 그런가...

아무 2015-11-17 07:55   좋아요 0 | URL
붉은 여왕의 법칙은 이 책 앞부분에 나오는 톰슨가젤 이야기와 연결되는 부분도 있는 것 같아요. 허희 평론가는 해설에서 톰슨가젤이 사자와 연대해서 우리를 부숴야한다고 말하지만, 그게 가능하긴 한 건지...
우엘벡의 소설은 아직 <소립자>밖에 못 읽었지만 장강명 소설과의 비슷함이 많이 느껴지네요. 후련하지 않은 것도 그렇고.. 눈과 귀를 닫는 게 속 편하다는 생각이 끊이지 않는 요즘입니다. 맘대로 닫지 못해 뉴스를 보며 시름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