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백의 그림자 - 2010년 제43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ㅣ 민음 경장편 4
황정은 지음 / 민음사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리뷰를 시작하는 가장 나쁜 방법이 있다면 그건 바로 '작가의 말'을 인용하는 것이다(feat. 금정연). 황정은은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전히 난폭한 이 세계에
좋아할 수 있는 (것)들이 아직 몇 있으므로
세계가 그들에게 좀
덜 폭력적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왔는데 이 세계는
진작부터
별로 거칠 것도 없다는 듯
이러고 있어
다만
곁에 있는 것으로 위로가 되길
바란다거나 하는 초
자기애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고
다만
따뜻한 것을 조금 동원하고 싶었다
- '작가의 말' 중에서(171-172p)
파리 테러에 대한 뉴스를 들었을 때, 폭력시위다 과잉진압이다로 왈가왈부하느라 본질이 또다시 지워지고 있는 뉴스를 들었을 때, 내가 처음으로 떠올렸던 것은 바로 저 문장이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 세계는 여전히 난폭하구나, 하고.
작년 겨울 <계속해보겠습니다>로 처음 만나게 된 황정은의 소설은 큰 인상을 남기지 않았었다. 다만 좀더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해보고 다른 작품을 찾았을 따름이다. 그런 내가 그녀의 열성적인 팬이 되었던 이유는, 아마 <百의 그림자>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오늘 책을 다시 펼쳤다. 처음 읽은 것은 도서관 책이었으니 이 책은 처음 펼쳐보는 셈이다. 처음 읽는 마음으로 읽어 내려갔다. 나는 수없이 많은 페이지를 접었고 밑줄을 쳤다. 두 번째 독서의 다른 점은, 처음 읽을 때는 미처 보지 못한 것에 주목할 수 있는 시간을 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다시 읽으면서 주목한 것은, 이 세계의 폭력성이 어떤 방식으로 드러나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가마가 말이죠, 라고 무재 씨가 말했다.
전부 다르게 생겼대요. 언젠가 책에서 봤는데 사람마다 다르게 생겼대요.
그렇대요?
그런데도 그걸 전부 가마, 라고 부르니까, 편리하기는 해도, 가마의 처지로 보자면 상당한 폭력인 거죠.
가마의 처지요?
가마의 처지로 보자면요, 뭐야, 저 '가마'라는 녀석은 애초에 나와는 닮은 구석도 없는데, 하고. 그러니까 자꾸 말할수록 들켜서 이상해지는 게 아닐까요.
- '가마와 가마와 가마는 아닌 것' (38p)
차라리 그냥 가난하다면 모를까, 슬럼이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치 않은 듯해서 생각을 하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라고 무재 씨는 말했다.
언제고 밀어 버려야 할 구역인데, 누군가의 생계나 생활계, 라고 말하면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아지니까, 슬럼, 이라고 간단하게 정리해 버리는 것이 아닐까.
그런 걸까요.
- '오무사' (114-115p)
개체를 무시하고 일반화해 버리는 것, 일부분만을 가지고 모든 것인 양 말하는 것, 그것이 이 세계가 가진 폭력성의 근원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리고 은교와 무재, 전자상가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 상가에는 '가동과 나동과 다동과 라동과 마동으로 구별되는 상가'와 사람들이 있는데, 그냥 '전자상가', '슬럼'이라고 싸잡아 부르는 것, 그래서 별것 아닌 하찮은, 사소한 무리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 그것이 세계가 언어라는 무기로 휘두르는 폭력이 아닐까.
그리고 그림자가 있다. 그림자는 전자상가 사람들에게 짙게 드리워지고, 불쑥 일어나기도 하고, 발을 걸기도, 심지어 그들을 집어 삼키기도 한다. <파씨의 입문>까지 나타나는 황정은 소설의 환상성은, 이 세계의 폭력을 차마 써내려갈 수 없었던 작가의 한 방편이 아니었을까 싶다. 움직이는 그림자의 환상은 그들이 견뎌내는 삶의 쓸쓸함과 아픔을 처연하게, 그리고 생생하게 보여준다. 유곤 씨가 성경을 던져 쥐며느리를 잡는 이유를, 그림자가 일어나는 장면만큼 생생하고 명확하게 보여주는 언어가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무재 씨.
네.
나는 이렇게 차가운 음식 말고 따뜻한 음식이 먹고 싶어요. 국물이요, 먹으면 배가 따뜻해지는, 따끈하고 맑고 개운한 국물이 있는 것을, 듬뿍 먹고 싶거든요, 라고 훌쩍거리며 말하다가 코를 닦고 국수를 마저 먹었다.
- '항성과 마뜨료슈까' (147p)
그들은 따뜻함을 찾는다. 금속처럼 차가운 세계의 폭력에 맞서서, 폭력에 움직이는 그림자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하지만 그들에게 세계에 맞서는 법은 나도 똑같이 느끼고 있다고, 여기도 똑같이 캄캄하다고 공유하고 공감하는 것밖에 없는 듯 보인다. 정전 속에서 컵을 깨뜨린 은교가 무재와 통화하는 장면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내 눈길을 오랫동안 붙잡는다. 그들의 주변을 그림자로 뒤덮어버린 정전 속에서 체념하며 '모르도록 어두워지자'는 은교가 그림자의 심연에 침몰하는 것을 막아주는 것은 '어두워요, 여기도'라고 말하는 무재다.
하지만 이 세계는 여전히 난폭하고 무자비해서, 공감과 연대만으로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렇기에 세계는 전구 하나의 배려가 있는 오무사도, 가동도 무너뜨려 버렸다. '따뜻한 것을 조금 동원하고 싶었다'는 작가의 말은, 그것만으로 이 세계가 나아질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는 한 인간의 희망이 아니었을까.
따라오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따라오는 그림자 같은 것은 전혀 무섭지 않았다.
- '섬' (168p)
그들의 사랑이 어떻게든 이 세계와의 투쟁에서 생존할 수 있게 해줬으면 싶다. 아니, 그냥 견뎌내게만이라도 해줬으면 싶다. 하지만 이 세계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안다. 그래서 내 마음 한 켠에는, 그들은 결국 그림자의 파도에 묻혀버렸을 것이라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이 더 아프고 쓸쓸하게 읽히는 지도.
며칠 전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까지 구입하면서 황정은 소설을 전부 구입했다. 내가 읽었던, 책으로 묶이지 않은 작품만으로도 단편집 하나가 묶일 것 같은데. 하루빨리 새 책이 나왔으면 좋겠다. 난폭한 이 세계의 폭력을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그녀의 이야기가, 나는 듣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