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와 B라는 친구가 있었다. A는 B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아니, A가 B를 일방적으로 싫어했다는 말이 맞겠다. 생각해보면 B가 친구들 사이에서 소문이 좋지 않았는데, 나는 A와 친했고 B와도 그냥 나쁘지 않은 사이여서 그냥 그렇게 지냈다. 시간이 지나 나는 군대를 다녀왔고, 다시 A를 만났다. 그때 A가 이런 말을 했다. 다시 생각해보니까 자신이 왜 B를 싫어했는지 그 이유가 기억나지 않는다고, 이유는 기억에서 사라지고 싫어했던 감정만 남았다고.















악스트 3호의 작가는 공지영이었다. 나는 공지영의 소설을 네 권 읽었고, 작가 공지영은 좋게 생각했었다. <즐거운 나의 집>을 읽고 실망하긴 했지만. 그렇지만 나에게는 공지영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이 있었는데, 이번에 책 표지를 보고 곰곰이 생각하니, 내가 공지영에게서 등을 돌린 이유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나는 작가로서의 그녀가 싫었던 것도 아니었고, 페미니스트로서의 그녀가 싫었던 것도 아니었다(더욱이 나는 내가 모르는 것에 있어서는 물러서므로, 페미니즘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대체 뭐란 말인가? 트위터 때문에? 혹시나 싶어 트위터를 보았지만 최근 글에는 리트윗한 것들뿐이어서 관두었다.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봐도 기억이 나지 않아, 이유를 생각하는 일을 관두고 무의 상태로 다시 보기로 했다. 아마 내가 등을 돌렸던 이유는 내용이 아니라 형식 때문이었을 것 같지만, 그 기억 역시 확실하지는 않다. 어찌됐든, 어떤 사람에게나 새겨들을 말은 있기 마련이다. 설령 적이라도.


그럼에도 그러한 소설들이 승승장구하는 이유는 수동적인 여자들을 좋아하기 때문일 것이다. 남자들이 그런 여자를 좋아한다는 말이다. 말을 바꾸면 어떤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게 남성들이고 남성들이 선택한 게 수동적인 여성상을 선택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소위 진보적인 문학을 한다는 사람들조차도 소설 안에서의 여자가 진보적인 건 수용할 수 없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예로 소위 진보 문학권에서도 『토지』를 인정한 적 없잖은가. 『토지』의 서희가 우리 문학의 여자 계보에서 보면 대단히 선진적인 여자가 분명함에도 인정받은 적 없다고 생각한다. (...)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데 나는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모더니티라고 생각한다. 셰익스피어를 지금 읽으면 지금에서의 모더니티가 살아난다. 왜 그러냐면 캐릭터가 시대에 함몰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질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시대가 변하면 그 시절에 맞는 모더니티가 생겨나는 것이 작품의 생명력이다. (...) 우리 소설의 주인공들은 아직 춘향이도 못 넘고 있다. (112쪽)


"저보다 더 늙은 것 같아요, 젊은 작가들이"라는 말에는 뼈가 있었다. 요즘의 한국 소설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이 보여주는 무기력함을 보면 수긍이 되기도 한다. 그녀의 모든 활동들이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정치적인 이념의 영역이지만, 그녀가 자신이 불의라고 생각하는 것을 거침없이 말하고 뛰었던 사람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듯하다. 인터뷰를 천천히 읽으면서 내가 왜 등을 돌렸는지 어렴풋이 짐작이 가는 부분도 있었지만("내가 한국문학에서 그렇게 후진 존재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같은 말을 자기 입으로 하는 건 좀... 나랑은 안 맞는다), 그녀에게 상당히 가혹한 프레임이 씌워지고 대표로 공격받은 것은 사실이다. 그녀의 거침없음을 불편해 하던 사람들에게 등을 돌릴 계기를 부여해준 꼴이라고나 할까... 나에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이런 모든 일들에도 불구하고 거침없음을 유지하고 끌고가는 작가의 모습이었다.


인생을 살아오며 절절히 느낀 것이 하나 있다. 언제나 똑같은 원칙이 보였다. 그것은 그나마 진실이 모두를 덜 다치게 한다는 것. 진실이 우리를 해칠 것 같고, 바르게 얘기하면 고통을 받을 테니 숨겨야 할 것 같지만, 아니다. 진실만이 우리를 가장 덜 다치게 할 수 있다. (124쪽)


공지영이 바라보는 한국사회는 가혹하고 폭력적이지만, 그녀는 그 안에서도 어떤 희망적인 시선을 놓지 않는 듯하다. 종교의 힘인 것일까? 3호의 작가가 공지영이라는 사실에 걱정이 들었었지만, 나에게는 작가 공지영을 다시 생각해볼 기회를 주었다는 점에서 괜찮았던 것 같다.


서평으로 돌아와서, 이번에 실린 서평들을 읽으며 내가 처음 들었던 생각은 전반적으로 '문학적이다'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확신할 수 없는 것은, 이 표현이 서평에 붙을 수 있는 찬사인가, 비판인가 하는 것이었다. 결국 서평이란 리뷰(review)로써 독자에게 프리뷰(preview)를 제공해야 하는 글쓴이의 외줄타기 같은 것인데, 문학적인 서평은 이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를 생각하면 의문이 남는다. 이는 아직도 내가 서평이 어떤 글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결심이 서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우선 나는 목차를 보고 내가 읽은 소설이 고작 세 편뿐이라는 사실에 절망하였다. 그리고 황현진의 서평을 읽으면서 자신이 쓴 단편이 포함된 책에 대한 서평을 쓰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 이 서평과 서평이 다루는 책은 결국 '나는 왜 쓰는가'에 대한 중언부언이기도 하다. 과연 저 질문에 대한 완벽한 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긴 한 걸까. 난 지금 내가 이렇게 글을 쓰는 이유도 확신할 수 없는데.


쭉 읽으면서 지난 호보다 장르가 다양하지 않구나라고 생각하던 찰나, 만화에 대한 서평(그렇다. 그것도 아직 연재중인 순정만화에 대한 서평이다)이 실려 있어 약간 놀랐다. 정영목 번역가의 <바닷마을 다이어리>에 대한 서평은 영화 <가족의 탄생>과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본 사람이라면 좀더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읽으면서 결국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책과 영화를 끌어온 건가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서평은 조르주 바타유의 <불가능>에 대한 김뉘연 편집자의 서평이었는데(제일 짧아서 그랬던 건 아니다), 최근에 이성복 시집을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들이 쓰여있어 그랬던 게 아닌가 싶다. 시란 "도달할 수 없는 가능성들에 대한 언어적 환기일 뿐"이라는 바타유의 말처럼, 결국 나도 이 시에 도달할 수 없는 건가라는 아득함이 몰려왔다. 결국 나는 '불가능'을 말할 수밖에 없는가. <불가능>을 읽어보고 싶은 밤이었다. 바타유, 바타유...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어디였더라...


볼라뇨의 <2666>에 대한 서평을 읽으면서, 1752쪽짜리 소설을 서평으로 다루겠다는 글쓴이의 분투가 대단하기도 하고, 무모해 보이기도 했다. 결국 이 서평을 통해 전체를 가늠할 수는 없었다. 그건 맹인이 코끼리 다리를 만지는 격이다. 작년에 잠시 불었던 볼라뇨 신드롬을 잠시 생각하며, 그때 구입한 그대로 책장에 꽂혀 있는 그의 처녀작 <아이스링크>를 바라보았다. 저걸 읽고 마음에 들면 <야만스러운 탐정들>을 사야지, 라는 생각으로 샀던 것인데 아직 저 책도 읽지 못한 현재에서, 대작인 <2666>은 나에게 미독이 아닌 비독의 영역으로 도망가는 것이 아닌가 저어하였다. 그렇게 하나둘씩 멀어지는 건가, 하고.


작가 인터뷰까지 읽었는데 세 시간이 흘렀다. 몇 년 전이었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속도다(아, 옛날이여...). 소설들은 뒤로 미루고, 따로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 야심한 시각에 글을 쓰고 있다. 그런데 소설 다 읽고 따로 리뷰를 쓸 마음이 들긴 할까. 아니, 곧 바쁜 시간이 엄습해서 4호가 나오는 다음 달까지 미루는 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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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12-12 0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쓰셨어요~^^
가끔 뭔지 모르게 휘둘릴적 있죠..
싫다는 건 그만큼 지배받는단 것이기도 해요..^^

아무 2015-12-12 09:23   좋아요 1 | URL
싫다는 건 지배받는다는 것이라는 말이 와닿네요^^ 그땐 뭔가에 휘둘렸던 것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지만 결국 지금부터 다시 찬찬히 보고 판단하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를 떠올리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생각도 들고..

AgalmA 2015-12-12 13: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등을 돌렸어도 서로가 재고할 수 있다면 다시 친구가 될 수 있겠죠. 그 재고에 구구절절 근거를 따진다면 접어야죠. 마음이 있다면 이성의 잣대란 그리 대수로운 게 아니잖아요? 1.2.3....그렇게 재고한다면 그건 교우가 아니라 비지니스겠죠.
헌데 작가는 참 곤란한 상황인 듯. 한 번 돌아선 독자가 작가에게 다시 마음을 주고 책을 사서 혹은 빌려서라도 읽기란 참 어려운 일이잖아요. 독서는 가장 이기적인 교우라고 할 수 있으니. 작가의 일방적 노력이 절대적이죠. 아무님께 공지영 작가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게 했다니 Axt 큰일 했는데요!

<예술가의 항해술>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존 스테제이커에겐 일명 ˝B타령˝이란 게 있어요. 수십 년간 블랑쇼, 바슐라르, 바타유, 바르트 등 첫글자에 B가 들어가는 인물들의 이론만 가르쳐대니 뿔난 원로들과 사서들이 그의 책을 금지하는 사태도 있었다지 뭡니까ㅋㅋ 그런데 전 존 스테제이커 그 심정을 너무 알겠더란 말이죠. 제가 흠모하는 철학자를 그렇게 줄줄이 말하고 있는 그의 강의가 얼마나 듣고 싶은지!

바타유! 바타유!

아무 2015-12-12 09:52   좋아요 2 | URL
경험해본 바에 따르면 한 번 등돌린 작가의 책을 읽어본다는 건 확실히 어렵습니다.. 생각해보면 저는 공지영 소설이 가진 사회적인 힘을 좋아했던 것 같아요. 앞으로 어떤 소설을 낼지, 그 소설을 다시 찾아 읽게 될지는 저도 잘 모르겠지만 예전에 낸 소설들을 다시 찾아볼 거라는 생각은 드네요..

저라는 사람이 과격한 것, 또는 극단의 위치에 서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요즘 같은 세상에 회색분자라고 욕먹기 딱 좋은 사람이죠) 제가 등을 돌렸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드네요. 내용이 가치있어도 그것을 담는 표현이나 형식이 잘못된 것이면 안된다는 생각이 있어서... 아마 그런 것이 옳고 그름을 떠나 등을 돌리게 된 이유가 아닐까 어렴풋이 짐작은 하는데.. 하지만 특히 공지영 작가에게 비난의 화살이 쏠리고, `세 번 결혼하고 세 번 이혼한 여류 소설가`라는 이름을 씌워 별난 사람의 이미지를 만들어 낸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사실 이혼율이 이렇게나 높은 사회에서 이런 프레임으로 비난의 빌미를 준다는 게 우스운 일이기도 하고..

오래 전에 인터뷰 기사에서 본 것 같은데, 그녀가 이상문학상을 받을 때 시상식에 온 작가가 그 전 해 수상자였던 박민규 작가밖에 없었다고 하더라구요(너무 오래 전 이야기라 정확하진 않습니다만..). 다시 생각해보니 작가들이 보여주는 탈정치적인 모습도 보이고, 사회적 목소리를 드높이는 작가에게 우리 사회는 얼마나 가혹한지도 생각해 보게 되네요. 꼭 진보적인 작가에게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니까요.

<예술가의 항해술>은 아직 못 읽었지만, 바타유에 대한 부분은 유심히 보게 될 것 같은...^^ 조만간 읽어봐야겠어요!

AgalmA 2015-12-12 15:13   좋아요 2 | URL
해외엔 마르케스도 결혼 3번, 그 이상인 작가도 많죠. 결혼 2번은 아주 흔해서 얘기거리도 안되고ㅎ 누군 그 정도 해도 되고 누군 안되고 그런 게 있습니까. 특히나 매우 사적인 일을 공적으로 비난하는데 누구 윤리를 말하는지 우스워지는 대목입니다. 작가들 이혼은 빈번한 일이기도 한데 그걸 특이사항으로 볼 정도인가요. 일반인 재혼도 많은 마당에. 공지영 작가 이혼에 대한 가타부타는 아주 많은 레이어들이 깔려 있다고 봅니다.
뿌리깊은 가부장제 의식, 여성 사회 참여에 대해 우습게 보는 일(이외수 작가 트윗과 좀 다른 맥이 있지 않나 싶죠), 유명세에 대한 시기와 폄훼, 글과 현실 동종에서 품위를 바라는 대중적 기대심리...참 많은 게 섞여있죠. 모두들 자신은 있는 그대로(이상인 걸 알면서) 봐주길 바라며 작가라면 이름값 하라는 식은 우리 안의 또다른 엘리트주의 아닐까요.
공지영 작가 소설이 제겐 대체로 다 취향에 맞지 않지만(노력해도 이건 참^^;;) 한 인간으로서, 작가로서, 사회인으로서, 여성으로서 노력하는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작가면 뭘 무조건 옳고 제대로 해! 식의 채찍질... 우리 자신부터 돌아보고 말해야 될 테죠. 작가도 시행착오를 겪으며 좌충우돌하는 인간이잖아요. 이리 말해도 저도 종종 경솔할 때 많죠. 작가에게도, 친구에게도.

[그장소] 2015-12-12 14: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뭐 ..떠올릴 만한 근거가 당장은 주변에 없으므로..
왜였는지도 기억이나지 않을 수있죠..언젠가 그모든것이
번개가 치듯 연쇄적으로 떠오를 수도 있겠고..영영 깊이 가라앚을 수도 ..있는 ..거죠.
불현듯 ㅡ떠오르는게 기억인 거거든요.. 꺼내려 않해도..^^
애쓰지 마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