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01&aid=0008200001&sid1=001

며칠 전부터 관련 기사를 볼 때마다 자꾸 불편한 지점이 있는데, 여자가 나무로 변하는 이야기는 <채식주의자>가 아니라 `내 여자의 열매`다. 한강의 문체가 갖는 서정성이 잘 표현이 될까라는 의문이 있었는데, <채식주의자>나 <소년이 온다>는 다루는 내용 자체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주목받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든다. 다만 외국인들이 한강 소설의 어떤 부분에 열광한 걸까라는 생각과, 이것도 한때의 유행처럼 지나가는 것이 아닐까하는 우려가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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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6-02-21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 년도에 나온 작품 이란 것까지 적어주시면 더 좋을것 같아요!^^
잘 읽고 가요.

아무 2016-02-21 23:14   좋아요 1 | URL
<채식주의자>는 단행본이 2007년에 나왔고 `내 여자의 열매`가 실린 단편집은 2000년에 나왔다고 하네요. 연재된 날짜는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채식주의자>의 작가의 말에서도 `내 여자의 열매`와 비슷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는 내용이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정확히 어떻게 쓰여있는지는 기억이 안나지만..^^;;

[그장소] 2016-02-22 00:22   좋아요 1 | URL
요즘에 한강작가의 인터뷰 들을 읽고 있어요.
작가를 이해하기 위해 ㅡ제 나름의 방법들인 셈인데 ..이런 글은 도움이 된다고 봐서 ..고맙거든요. 최근작과 멀어질수록 책이 발표된
년도를 표기치 않아서 전작을 읽기 하는 저 같은 경우 ㅡ약간 불편하거든요. 순서대로 읽으면 더 좋겠는데..싶고요.
좋은 정보 고맙습니다 . 아직 갈길이 멀다 ㅡ 생각이 들어요.^^

아무 2016-02-22 00:10   좋아요 1 | URL
작가의 인터뷰는 항상 호기심을 부르죠. 어떤 생각으로 이 작품을 썼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저는 한강 작가의 책을 장편 두권, 연작소설 한권, 단편 한 편을 읽었는데, `내 여자의 열매`와 <채식주의자>는 인상적인 작품이어서 아직까진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ㅎㅎ 전작을 읽으려면.. 저도 아직 갈길이 멀죠^^;;

[그장소] 2016-02-22 00:23   좋아요 1 | URL
초반에 읽던 때와는 좀 시간이 많이 지나서 한강 작가가 가진 고유한 것들을 그녀 목소리로 잘 듣는 게 중요할것 같아서 찾아보기 시작했어요.
이전에 제가 쭉 읽어 왔던 작가라면 안그랬을텐데..혹, 제가 의도치않게 잘못읽고 있는 부분이나 이해를 다른 면으로하고있는게 있을까 싶어 ㅡ저를 경계키 위한 ㅡ것이랄까.
그렇다고 너무 그 말들에 삼켜지는 글은 싫고요.
방향만 잡아보는 정도 ㅡㅎㅎㅎ
저는초기작부터 만나서요.검은 사슴.여수의사랑 희랍어시간.등등 ..단편은 나오는 데로 본 것 같아요.시집때문에 ..다시 읽기 시작했네요..이 작가는..

아무 2016-02-22 00:31   좋아요 1 | URL
희랍어시간은 저도 봐야지 봐야지 하면서 여태 안 보고 있는 책 중에 한 권입니다 ㅎㅎ... 시집은 아직 읽어보진 않았지만, 제목이 묘하게 끌리긴 하더라구요. 조만간 다시 찾아보기로.. (이러고 또 잊어버리려나..) 전작읽기는 참 험난하죠ㅠㅠ 파이팅입니다!!

[그장소] 2016-02-22 00:35   좋아요 1 | URL
시집은 꼭 ㅡ보셔도 좋을 듯 ㅡ
희랍어시간을 중간에 툭 읽는 바람에
전체적 인상이 제가 가지고 있던 선들과 좀 엉켰던것 같아요.
앞으로 더 읽어봐야겠지만 .^^
아직 읽을게 남았다니 기쁘네요.^^
저녁을 서랍에 넣어두었다 ㅡ시집 ㅡ좋아요!

2016-03-13 01: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3-13 01: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정치와 진리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39
김선욱 지음 / 책세상 / 2001년 5월
평점 :
절판


『정치와 진리』는 아렌트의 사상을 중심으로 정치는 진리의 영역, 진리 추구의 수단이 아니며 인간의 '복수성'에 기반을 둔 공적 영역이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는 책이다. 개인적으로는 아렌트의 사상에 대해 좀더 알기 위해 구입한 책인데, 저자의 주장과 논리 대부분이 한나 아렌트의 이론을 기반으로 하고 하버마스와의 비교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내게는 매우 유용한 책이었다. 하지만 '직업' 정치가가 아닌 시민이라고 해서 대표성을 띨 수 있는 불편부당한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경제가 사적 영역에서 사회적 영역으로 옮겨가고, 준거와 기준을 요구하는 성격 탓에 정치의 성격이 훼손되었다는 사실에는 공감하지만, 시민이 자신의 지역적, 사적 배경을 고려하지 않고 세계적 연대로 나아갈 수 있을 지는 의문이 든다. 그만큼 신자유주의의 파도 아래 개인이 경제에 종속되었다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아렌트의 사상을 통해 설득적으로 의견을 전개하고 있었고, 개인적으로는 이 책을 읽은 뒤『인간의 조건』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 내 책상엔 아렌트에 대한 책이 두 권이나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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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함에 대하여 - 악에 대한 성찰 철학자의 돌 2
애덤 모턴 지음, 변진경 옮김 / 돌베개 / 2015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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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과 '폭력'과 같은 주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이었다. 어떤 분명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복잡다단한 성질과 특징들이 '악'이라는 이름 안에 뭉뚱그려져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를 고민하던 와중에 내가 구입했던 책이 애덤 모턴의 <잔혹함에 대하여>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문제의식의 제기 자체는 좋았으나 논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는 못한, 그래서 많이 아쉬웠던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초반에 저자가 제시하는 문제의식은 많은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행하는 일반화를 지적한다는 점에서 이목을 끈다. 우리 주변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잔혹한 행위의 원인을 '악'이라는 이름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특수한 것으로, 우리와 별개의 것으로 규정한다는 이야기다. 저자는 악 또는 잔혹성의 이면에 숨겨진 특수한 측면과 일반적인 측면을 규명하고 악을 이해하는 것을 목표로 자신의 논지를 이끌어가는데, 처음에 제시하는 것이 흔히 악이라는 개념에 씌워진 이미지들의 진위를 규명하는 일이다.


본질적으로 나쁜 인간이나 인간을 유혹하는 불가사의한 힘 등을 가정하는 식으로 악을 설명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잘못된 방향에서 악을 이해하려 하기 때문이다. 악행자들의 욕망에 주목하는 것도 실수다. 일반적으로 악행자들의 욕망은 다른 사람들의 욕망과 유사하다. 그 대신에 우리는 악행자들의 욕망이 행동으로 전환되는 방식을 고려해야 한다. 

(52-53쪽)


개인적으로 좋았던 것은, 우리가 일상에서 뚜렷하게 구분짓지 않고 사용하는 언어들을 재규정하려는 저자의 노력이 돋보였다는 점이다. 저자는 '잘못'과 '악'이 각기 다른 반응을 불러올 수 있음을 주장하고, 잘못과 구별되는 악의 특징을 혐오감, 잔혹성, 이해 불가능성으로 규정한다. 마지막 장에서 역시 '화해'와 '용서'의 차이를 구분짓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데, 언어들의 의미를 명확하게 구분하려는 시도가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잘못'과 '악'을 구분하려는 시도는 뒤로 갈수록 흐려지게 되는데, 이는 잘못된 행동과 악한 행동 사이의 연속성, 그리고 우리의 일상적인 행동과 악한 행동 사이의 연속성을 규명하려는 과정에서 구분이 모호해지는 것이다. 


저자가 제시하는 '악의 장벽 이론'은 우리가 흔히 생각해보았던 일이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와닿고 수긍이 가는 부분이다. '선을 넘는다'는 관용 표현이 있듯이, 우리는 흔히 금지된 행위나 생각의 선, 또는 장벽을 상정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굉장히 매력적인 이론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입증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게다가 이 이론을 통해 정의되는 '악'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수많은 행동들은 과연 '악'이 아닌가?라는 질문을 품게 된다.


뒷부분으로 갈수록 저자는 '악'의 개인적, 미시적 측면보다 거시적, 구조적 측면에서 실현되는 악에 대한 설명에 초점을 맞춘다. 구조적인 악을 설명함에 있어서 저자는 한나 아렌트의 논의, 즉 '악의 평범성'이라는 측면에 많이 기대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저자는 이를 수용하면서도 악의 한 가지 측면으로만 수용하며 거리를 유지하는데, 정작 논의되는 내용을 보면 악의 평범성의 측면을 장벽 이론에 적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도 저자는 심리적, 도덕적 측면에서 악을 규명하는 데 집중하고 있어, 아렌트가 집어내는 정치적인 측면이나 구조적 차원에서 행해지는 잔혹행위에 대한 설명이 빈약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이 책의 미덕이라고 한다면 다양한 사례를 인용하고, 가정적 상황들을 즐겨 사용해 독자의 이해를 쉽게 한다는 점일 것이다. 실제 사례와 소설, 영화가 예시로 제시되기 때문에 딱딱하다는 느낌 없이 술술 읽힌다는 점도 하나의 장점일 터다. 하지만 그 사례가 정말 적절한 건지는 의문이 들었는데, 특히 <시계태엽 오렌지>를 폭력 억제 기제(VIM)의 사례로 제시한다든가, 스타워즈나 한니발 렉터를 활용해 논지를 전개하는 내용에서는 예시를 축소해서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악'을 이해하기 위해 저자가 제시하는 답안은 상상력과 직관적 이해다. 악한 행동의 동기와 그들이 잔혹 행위 금지 장벽을 어떻게 넘을 수 있었는지를 상상하고, 이를 직관적 이해를 통해 파악하는 것이다. 그리고 잔혹 행위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의 예시로 드는 것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진실화해위원회다. 그런데 이런 방법이 저자가 앞에서 제시했던 '근본적 귀인 오류'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적 요인을 과대평가하는 귀인 오류에 빠지면 안 된다고 말해놓고 상상력을 제시하는 건 결국 상상력이라는 내적 요인이 오늘날 허구적인 악의 이미지를 만들었다고 말하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런 결론이 내려지게 된 것은 정치경제적인 측면의 분석이 적었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문제는 결국 시스템인가...


하지만 저자의 문제의식은 분명하며, 생각해볼 거리를 던져준다. '악'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관성적으로 가지고 있던 이미지, 그리고 그것을 자신과 별개의 것으로 치부하려는 시도들에 문제를 제기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분명히 도움이 되었고, '악'이라는 주제를 탐구할 수 있는 좋은 입문서의 역할을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개인적으로는 이 책 덕분에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읽게 되었다는 점에서 고마운 책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물론 이 책 하나만 읽고 끝나는 것은 위험하다. 악의 문제를 상상력으로만 치부하는 것은 너무 국소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고, '화해'라는 대안이 현실적으로 실행가능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게 된다. 질문을 던져주었다는 점에 의미를 두고 마무리해야겠다. 이제 다른 책을 찾아볼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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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열린책들은, 흠.. 내가 책읽기에 본격적으로 입문하도록 해준 <개미>를 출간해준 출판사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더 멀리 가면 나는 지금은 이름도 기억 못하는, 90권짜리 동화책 세트를 내준 출판사에 고마워해야겠지만, 본격적으로 읽고 모으기 시작한 것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 덕분이었으니... (덧붙여 <개미제국의 발견>을 쓰신 최재천 교수께도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이후에 베르베르의 책들을 미친듯이 모으면서, 나는 열린책들을 통해 쥐스킨트를 알았고, 에코를 알게 되었고, 아멜리 노통브를 알게 되었다. 그렇게 여러 외국 작가들의 책을 접하면서, '열린책들'이라는 출판사의 이름에 신뢰감을 가지게 된 것 같다. 열린책들이 고집하는 전작주의에 대한 믿음인 것 같기도 하고... 어찌됐든 열린책들의 책들이 내 청소년 시절의 독서 체험에서 매우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을 하루종일, 야자 시간까지 투자한 끝에 다 읽어버린 일이라든가... 그 시간에 공부를 했으면...).


페이스북에는 30주년 이벤트가 올라온 지 꽤 되었는데(끝난지도 꽤 되었다), 그 때는 한 번도 응모를 안하다가 알라딘에서 보고 책장을 정리한다. 돌아보면 아쉬운 점도 많았지만(굳이 양장본을 할 정도의 분량이 아닌데 양장본으로 책을 낸다든가, 줄 간격이라든가, 하는 것들), 정리를 하고 나니 여전히 나에게는 출판사에 대한 믿음이 남아 있나보다. 물론 저 중에 여전히 다 읽지 않은 것들도 많지만...


저의 일천한 책읽기의 시작을 열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30주년 축하드려요^^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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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에 입학하면서 노트북을 처음 샀을 때,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외장하드를 구입했을 때, 나는 외장하드 안에 나만의 영화관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죽기 전에..' 시리즈도 찾아보고, '세계 명작영화 100선' 같은 리스트도 인터넷으로 찾아보았던 것 같다. 이때 영화를 구하는 데 돈을 되게 많이 썼는데, 정작 그 중에서 본 영화는 많지 않다. 언제나 그렇듯 나란 인간은 소장의 욕구가 더 강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큐브릭의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는 외장하드 영화관을 만들던 초창기에 구입하고서 쟁여놓고 있던 영화 중 하나였는데, 이번에 소설을 읽으면서 몇 년만에 다시 찾아보게 되었다. 영화는 소설의 줄거리를 비교적 충실히 재현하고 있었지만 알렉스가 좋아하는 음악이 클래식 음악에서 베토벤의 9번 교향곡으로 축소된 점은 좀 아쉬웠고, 특유의 강렬한 이미지들을 감상하며 '이래서 큐브릭, 큐브릭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했다(큐브릭의 영화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소설로 돌아와서, 앤서니 버지스의 <시계태엽 오렌지>는 읽고난 뒤 역시 세계문학전집에 들어갈만하구나라는 생각을 했지만, 걸작이라는 칭호를 붙이기가 다소 망설여졌다. 그 이유는 이 작품에 드리워 있는 헉슬리와 오웰의 그림자가 나에게 너무 강하게 다가왔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은 총 3부로 나뉘어 있는데, 나는 이를 1부와 2,3부로 나누어서 말하고 싶다. 알렉스라는 개인과 그를 둘러싼 사회라는 두 대립항을 설정하며 읽은 나로서는, 1부와 2,3부 사이에 나타나는 차이점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1부에 드리운 <멋진 신세계>의 그림자, 그리고 2,3부에 드리운 <1984>의 그림자를 보면 나는 이렇게 나누어볼 수밖에 없다.


먼저 1부에서, 알렉스와 그 일당들이 벌이는 행동들은 지금의 눈으로 보면 사이코패스라는 단어가 어울릴 정도로 끔찍하다. 길을 걷는 노인의 책을 갈가리 찢어버리고 폭력을 행사하는가 하면, 남의 집에 무단으로 침입해 그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여자를 겁탈하는 등 잔혹한 행위의 끝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들이 돌아다니는 사회에는 이들을 통제해야 할 권력의 모습(경찰이나 어른의 모습)이 보이지 않고, 거리는 이런 범행들의 흔적으로 가득하다. 1부에 등장하는 어른들은 어른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소년들의 행동을 제대로 포착하지도 못한다. 결국 1부에서 등장하는 사회의 모습은 일정한 제도나 통제의 힘이 부재하는, 그래서 본능에 충실한 자유가 넘쳐나는 사회의 온상으로 그려지는 것 같다. 이는 내게 <멋진 신세계> 에서 그려지는 방탕한 사회를 생각나게 했다(물론 그 사회는 신분이 존재하고, 출산마저 통제되는 사회라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더욱이 알렉스 일당이 코로바 밀크바에서 마시는 칼 탄 우유를 보고 있노라면 나는 '소마'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모든 통제가 부재하는 세상에서 알렉스가 선택한 악한 행동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였을 거란 이야기를 듣고 나는 격하게 공감했었다. 무질서의 공간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선택한 삶의 방식, 더 나아가 자신의 자유의지를 온전히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전히 설명되지 않는 부분은, 알렉스가 보여주는 행동의 이중성이다. 그는 기성 세대의 질서와 규제, 지배를 거부하지만(그는 노인을 혐오했고, 노인의 책 중에서 '결정학'이라는 제목의 책을 갈가리 찢었다), 일당들 사이에선 자신이 우두머리가 되고,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욕망을 보인다. 그리고 그는 일정한 형식을 거부하는 현대적인 음악을 혐오하고, 오히려 형식적인 규제가 가장 심한 클래식을 들으며 환희를 느낀다. 음악에 있어서는, 알렉스가 열망하는 음악들이 관현악단의 웅장한 연주가 요구되는 협주곡이나 교향곡이라는 점이 환희의 상태와 연결될 수 있을 것 같지만, 무리 안에서 자신이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태도는 쉽사리 설명되지 않는다. 어쩌면 모든 것이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길 원하는 자유의지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2부에서는 감옥생활 대신 치료요법을 받게 되는 알렉스의 모습이, 3부에서는 '치료'가 완료된 후 교도소를 나와 사회에서 살아가는 알렉스의 모습을 보여준다. 범죄자의 행동을 교정하기 위한 치료는 철저하게 행동주의에 입각하여 소위 '악하다'고 불리는 모든 행위를 통제하고자 한다. 2부에 나타나는 정신병원에서의 치료 장면은 오웰의 소설 <1984>에서 윈스턴이 오브라이언에게 고문을 받다가 결국 빅브라더의 숭배자로 변하는 장면을 생각나게 했다. 말하자면 모든 것을 통제하는 빅브라더의 모습이 이 책의 2,3부에서도 그대로 나타나는 것이다. 실제로 2부는 국가의 통제가 가장 강력한 교도소와 정신병원을 배경으로 하며, 3부에서 나타나는 사회의 모습은 1부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데, 경찰이 된 깡패들이 수시로 돌아다니며 시민들을 통제하고 징벌하는 모습, 깔끔해진 거리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1부가 규제, 통제의 부재로 인한 자유의지의 방종이 낳은 사회라면, 2, 3부는 국가의 강한 통제와 지배로 인해 자유의지가 거세된 사회인 것이다. 이렇게 대조적인 두 사회를 보여주는 작가의 의도는 무엇일까. 결국 중간점을 찾아야 한다는 것일까. 작가의 이런 중립적인 시선은 통제하는 정부에게서 자유를 되찾으려는 자들, 알렉산더의 무리 역시 알렉스라는 개인의 목소리는 무시한 채 그를 수단으로 인식하는 모습에서도 나타나는 듯하다. 개인적으로 이 장면에서 통제하려는 쪽과 자유를 얻으려는 쪽 모두 그 속을 보면 다를 바 없다는 작가의 회의적인 시선이 느껴지기도 했다.


자살 시도 이후의 알렉스는 다시 치료되어 원래의 성격을 되찾지만, 그를 통제의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정부와 결탁하고 그들의 체제에 순응하는 것으로 소설은 마무리된다. 이는 그가 듣던 음악이 웅장하고 화려한 교향곡에서 하나의 목소리와 피아노만 존재하는 가곡으로 변했다는 점(사회체제에 편입되면서 찾게 된 마음의 안정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결혼을 해야겠다고 결심하는 부분에서도 잘 나타나지만, 돈에 대해서 알렉스가 갖고 있던 시선의 변화에서 더 극명하게 나타나는 듯하다.


"그래,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쩐을 가지고 뭘 하려고 그래? 네가 필요한 것들은 다 있지 않아? 네가 차가 필요하면 나무에서 과일 따듯이 구할 수 있어. 돈이 필요하면 뺏으면 돼. 그렇지? 왜 갑자기 돈이 된통 많은 자본가가 되고 싶어서 안달이야?"

- 제1부, 65p


그러나 그 며칠 사이 난 야비해졌지. 무슨 이유에서인지 내 이쁜 쩐들을 긁어모아 혼자 간직해야 한다는 충동이 대갈통 속에 생긴 거야.

- 제3부, 213p


제3부의 결말은 앞에서 보여주었던 자극적인 내용과 달리 도덕적이고, 너무 갑작스러워서 비판받는 여지가 있기도 하다. 그래서 큐브릭은 이 부분을 뺐을 거라는 이야기는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나는 그 부분을 읽으면서 <1984>의 오마주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빅브라더를 찬양하는 자로 세뇌되어 죽어간 윈스턴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악한 행위를 극단으로 밀고 나가 자유의지의 문제를 제기했다는 점, 이런 묵직한 주제를 제시하면서 경쾌하고 밝은 분위기를 밀고나간다는 점(이는 화자인 알렉스가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에서 기인한다)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지만, 여러모로 선대의 디스토피아 소설에 빚진 부분이 많다는 점을 계속해서 느끼게 된다는 점, 소설의 제목이 갖는 주제의식이 드러나는 방식이 너무 작위적으로 보인다는 점은 이 소설을 읽으면서 지속적으로 느꼈던 아쉬움이기도 하다.


많은 부분에서 아쉬운 부분이 있긴 하지만, 나에게는 자유의지와 통제 사이의 문제, 특히 자유의지의 범위에 대한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도록 만든 소설이기도 하다. 특히 자유의지라는 것은 어디까지를 말하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은 내 의표를 찔렀다는 점에서 아픈 소설이기도 했다. 결국 자유라는 것이 무언가를 선택하겠다는 목적의식을 전제로 한 것이라면, 결국 이는 수단을 발생시킬 수밖에 없는데, 개체의 수단화를 피할 수 있는 자유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여전히 명쾌하게 대답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고, 더 읽어볼 수밖에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당장 생각나는 책은 <자유론>과 <자유로부터의 도피>인데, 언제쯤 구입해서 읽을 수 있을지는 알 수가 없다...



그래, 그래, 바로 그거지. 청춘은 가버려야만 해, 암 그렇지. 그러나 청춘이란 어떤 의미로는 짐승 같은 것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아니, 그건 딱히 짐승이라기보다는 길거리에서 파는 쬐끄만 인형과도 같은 거야. 양철과 스프링 장치로 만들어지고 바깥에 태엽 감는 손잡이가 있어 태엽을 끼리릭 끼리릭 감았다 놓으면 걸어가는 그런 인형. 일직선으로 걸어가다가 주변의 것들에 꽝꽝 부딪히지만, 그건 어쩔 수가 없는 일이지. 청춘이라는 건 그런 쬐끄만 기계 중의 하나 같은 거야. (22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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