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13
이성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2년 1월
평점 :
다 읽는 데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은, 읽다가 잠시 멈추고 생각에 잠기는, 이것이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길어졌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궁에서 떠돌 뿐이라 다시 들어가는 것이 두려워졌기 때문이다. 황동규 시인의 해설은 시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지만, 이미지의 연상 작용에 대한 해석이 항상 들어맞는 것은 아니어서 나의 연상이 끊기기도 하였다. 글을 쓰는 지금에 와서도 나는, 내가 그의 시를 이해했노라, 시를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었노라, 라고 감히 말 할 수 없다. 나는 결국 <부패에 대한 연구>를 완성하지 못할 것이다. 별을 하나 남겨둔 것은 내가 이 시집을 이해했다는 오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작은 표시다.
시집 전체에서 흐르는 비극의 정서와 이미지들, 그리고 '유곽'으로 대표되는 화자의 현실 인식은 처절하다 못해 충격적인 언어로 나타난다. 이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은 세계일 것이다.
(...)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占 치는 노인과 便桶의
다정함을 그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날 市內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 '그날' 中
화자가 바라보는 세계, 그리고 화자가 머물러 있는 세계는 모두 '유곽'이다. 그냥 유곽도 아닌 '정든 유곽'이다. 아마 자신과 함께 유곽에서 살아가던 사람들, 병들었는데 아프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정이 들었을 것이다. 세계는 때로 '언덕배기 손바닥만한 땅'에 심은 고추나무의 고추를 몰래 따가던 공사장 인부들의 모습으로, 때로는 '집을 지어야겠으니 / 고추를 따가라'는 집 주인의 모습으로 나타나 화자의 가족을, 작부들을 핍박한다. 그리고 그 핍박은, 도저히 논리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미지의 형태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우연히 스치는 질문── 새는 어떻게 집을 짓는가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풀잎도 잠을 자는가,
대답하지 못했지만 너는 거기서 살았다 붉게 물들어
담벽을 타고 오르며 동네 아이들 노래 속에 가라앉으며
그리고 어느날 너는 집을 비워 줘야 했다 트럭이
오고 세간을 싣고 여러번 너는 뒤돌아 보아야 했다
- '모래내 · 1978년' 中
화자는 이 세계에 '질문'을 던질 수 있다는 점에서 자기 주변의 사람들보다는 나은 위치에 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병들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 인식 속에서 나타나는 것은 아버지 또는 어른스러운 생활과 같은 것으로 대변되는 기성의 가치들(황동규 시인의 말을 빌리자면 '우상')에 대한 분노다. 하지만 이런 분노와 파괴 행위가 화자 자신을,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 지에 대해 시인은 확신이 없는 듯하다. 이 세계는, 우리를 수없이 흔들면서 자신은 흔들려 본 적 없는, 그런 존재이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구할 수 있을까
詩가 詩를 구할 수 있을까
왼손이 왼손을 부러뜨릴 수 있을까
돌이킬 수 없는 것도 돌이키고 내 아픈 마음은
잘 논다 놀아난다 얼싸
天國은 말 속에 갇힘
天國의 벽과 자물쇠는 말 속에 갇힘
감옥과 죄수와 죄수의 희망은 말 속에 갇힘
말이 말 속에 갇힘, 갇힌 말이 가둔 말과 흘레 붙음, 얼싸
돌이킬 수 없는 것도 돌이키고 내 아픈 마음은
잘 논다 놀아난다 얼싸
-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中
너는 네가 무엇을 흔드는지 모르고
너는 그러나 머물러 흔들려 본 적 없고
돌이켜 보면 피가 되는 말
상처와 낙인을 찾아 고이는 말
지은 罪에서 지을 罪로 너는 끌려가고
- '너는 네가 무엇을 흔드는지 모르고' 中
이러한 시적 정조가 시집 전체를 지배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죽음과 폭력, 타락의 이미지들은 얽히고 설켜 마치 초현실적인 장면처럼 나타나기도 하고, 연상 작용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 모든 이미지들을 한 번 읽고 해석하는 것은 내 역량을 벗어난다. 아니, 다시 읽어도 해석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다만 여전히 병들어 있는 지금, 아픈 줄은 알고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마지막 시, '이제는 다만 때 아닌, 때 늦은 사랑에 관하여' 전문을 적으며 글을 마무리한다. '송곳'보다 '송곳에 찔린 허벅지'에 대해 이야기하겠다는 이 시가 마지막에 수록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세계의 '송곳'보다 우리의 상처에 주목하겠다는 시인의 의지가 아닐까 싶다. 나도 이제 내가 병들었음을 알고, 아픔을 알고, 잠에서 깨어나 움직이길 바란다. 병들어 있는 것이 이 세계만은 아닐 테니...
이제는 송곳보다 송곳에 찔린 허벅지에 대하여
말라붙은 눈꺼풀과 문드러진 입술에 대하여
정든 유곽의 맑은 아침과 식은 아랫목에 대하여
이제는, 정든 유곽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한 발자국을
위하여 질퍽이는 눈길과 하품하는 굴뚝과 구정물에 흐르는
종소리를 위하여 더럽혀진 처녀들과 비명에 간 사내들의
썩어가는 팔과 꾸들꾸들한 눈동자를 위하여 이제는
누이들과 처제들의 꿈꾸는, 물 같은 목소리에 취하여
버려진 조개 껍질의 보라색 무늬와 길바닥에 쓰러진
까치의 암록색 꼬리에 취하여 노래하리라 정든 유곽
어느 잔칫집 어느 상갓집에도 찾아다니며 피어나고
떨어지는 것들의 낮은 신음 소리에 맞추어 녹은 것
구부러진 것 얼어붙은 것 갈라터진 것 나가떨어진 것들
옆에서 한 번, 한 번만 보고 싶음과 만지고 싶음과 살 부비고 싶음에
관하여 한 번, 한 번만 부여안고 휘이 돌고 싶음에 관하여
이제는 다만 때 아닌, 때 늦은 사랑에 관하여
- '이제는 다만 때 아닌, 때 늦은 사랑에 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