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유의 거래에 대하여 - 책과 서점에 대한 단상
장 뤽 낭시 지음, 이선희 옮김 / 길(도서출판) / 2016년 10월
평점 :
품절
책(冊)이라는 것, 나아가 독서(讀書)라는 행위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서점에서 책을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마지막 페이지를 넘겨 책장을 닫는 순간까지, 우리는 책이라는 이름이 주는 배음(背音)에 싸여 있다. 그 배음 안에서 우리는 책에 질문하고, 말하고, 책의 말을 듣는다. 그것을 엄선된 언어로 형언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뿐. 낭시의 『사유의 거래에 대하여』는 그 배음에 대한 짧은 기록이다. ‘책과 서점에 대한 단상’이라는 부제가 붙었으나, ‘책과 서점에 대한 찬가’라고 바꿔 불러도 무방하다. 낭시처럼 말라르메의 말을 빌리자면, 이 책은 낭시가 책이라는 “순수하고 투명한 덩어리”에 대해 말하기 위해 빚어낸 또 하나의 덩어리이다.
책은 단순히 소통의 수단도, 소통을 표현하는 매체도 아니다. 절대 그렇지 않다. 책은 중간매체가 아니다. 그 자체로 즉각적으로 그리고 우선적으로 자기 자신과의 소통이자 거래[교제]commerce이다. 실제로 책을 읽는 사람은 거래 속으로 들어갈 뿐, 다른 어떤 일도 하지 않는다. 바로 이런 점에서 책은 메시지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풍자문’이나 ‘논문’과 확연히 구분된다. 감히 말하자면 책은 스스로 직접 나서서 자신과의 소통에 가담하기 때문이다. (24-25쪽, 강조는 원문, []는 옮긴이)
낭시가 책을 말하면서 먼저 꺼내는 이야기는 플라톤의 이데아다. 그는 책의 이데아를 ‘이데아의 전달’로 정의하고, 플라톤의 책들이 그러했듯이 “책은 대화의 특징을 이데아에다 부여한다”(21쪽)고 말한다. 그러나 책은 “무엇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라는 이름의 “누구에게” 말을 건다. 이는 책이 수단을 설정하지 않고, 그렇기에 목표로 환원되지 않는 까닭이다. 그래서 활자caractére라는 흔적을 통한 말걸기야말로 책이 갖는 가장 강력한 특성caractére이다. 그리고 우리는 “사유라는 약속을 지닌 재료의 단위”(64쪽)와 거래 또는 교제(commerce)한다. 다 카포Da capo로.
책이 언제나 우리 앞에 열려 있는 것은 아니다. “열림과 닫힘 사이를 오가는 것”이 책이고, “둘 사이의 긴장감 속에 놓여 있는 것”(12쪽)이 책이다. 조재룡 평론가의 말처럼 “책이 단단하게 묶어둔 이 이데아가 독서를 통해 이 세계에 풀려나오”(88쪽)도록 하는 일은 어렵다. 낭시도 “원칙적으로 책은 읽기 어렵다”(39쪽)고 말하지 않는가. 그것은 책읽기가 “불가독성”에서 출발하는 까닭이다. 하지만 그 열림의 시도들이 무한히 이어지고, 열림의 순간을 만날 때 우리는 “수천 개의 방식으로 책을 다시 쓰”(29쪽)게 된다.
서적상의 독서는 모든 책의 모든 페이지를 오롯이 해독해내는 것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의 독서는 ‘읽기lectio’이면서 동시에 ‘선택하기electio’이다. 선택한다. 책에 나온 생각들을, 책이 본래 지니고 있는 이데아에 따라서, 책에 따라서, 독서에 따라서, 독자들에 따라서, 그리고 편집자들에 따라서 제안해야 할 생각들을 선별하거나 수집한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내가 상품에 대해 환기했던 것을 잊지 않는다면, 서적상은 단순히 책을 파는 상인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정당하다. 추호의 모호함도 없이 말해보자면, 서적상은 서적 전달자livreur des livres이다. 서적을 가져오고 전시하고, 서적이 주체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적절한 상황을 만들어주는 사람이다. (50-51쪽)
아무리 사회가 발전한다 해도 책의 배음을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공간은 서점일 것이다. 일차적으로 서점은 책을 읽을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공간이고(*), “서적이 주체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해주는 공간이며, “은밀한 시선, 강렬한 조명, 탐문, 조사, 선별, 추출이나 발췌 등 모든 종류의 열림이 있는 보편적 장소”(54쪽)이다. 그리고 이 공간의 주인인 서적상은 인용문에 언급된 것처럼 읽는 자이자 선택하는 자이고, “서점의 천부적 영혼”(51쪽)이다. 더 나아가 나는 서점이 책읽기가 타자와 접촉하는 행위라는 걸 가장 두드러지게 보여주는 공간이라고 말하고 싶다. 독서를 통해 거래·교제되는 사유는 “본질적으로 타자를 위해서만 셈을 하며, 타자를 위해서만, 타자에 의해서만 그리고 타자의 안에서만 계산이”(42쪽)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재룡 평론가가 글 말미에 독립서점을 언급한 것이 반가웠다. 독립서점이 추구하는 바가 무한한 열림과 닫힘 사이에서 수천 개의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고, 각각의 독립서점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유의 거래에 들어서는 첫 걸음을 만들어내려 하는 까닭이다. 방식은 서로 다르지만, 말걸기의 방식도 원래 다 다른 것이 아니었던가. 접촉보다 접속이 앞서는 시대에 독립서점들이 타자와 접촉하고 말을 거는 공간으로 은은하게 빛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낭시는 글 말미에서 책의 이중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무거우면서도 가벼운 것, 불에 타기 쉽지만 소진되기 어려운 것, 대중적이면서 난해한 것. 이러한 이중성은 commerce라는 단어의 이중적 의미와도, 열림과 닫힘이라는 행위와도 잘 어울린다. 글은 이렇게 끝난다. “물질로 표현하자면 책은 우리의 사유이다. 진지하면서도 덧없는 사유, 손 닿는 곳에 있으면서도 비밀에 가린 사유, 우리가 끈질기게 공유하는 사유가 바로 거래 자체이자 약속이다.”(64-65쪽) 책은 또 다른 책을 부른다고 흔히 말하지만, 사유의 교제가, 거래가 진정 이루어졌다면, 그리고 “읽어내기 어려운 현실 세계와 몸을 비비며 접촉”(57쪽)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책의 이데아가 갖는 “변형성, 유연성, 유동성”(56쪽)이 만들어내는 의미엔 종결점이 없다. 다만 나도 누군가에게 사유의 거래의 단위로, 한 권의 책이 되어 대화하고 접촉할 수 있었으면 싶다. 책이라는 이름의 타자가 되어 대화할 수 있었으면 싶다. 그리고 책이라는 이름의 타자와 끊임없이 사유를 교제했으면 싶다.
* 도서관(bibliothéque)과 서점(librairie)은 본래 서재를 의미하는 용어로 혼용되었다. 48쪽의 역주 참고.
결론적으로 말해 책의 이데아는 이미 최초로 그것이 만들어졌을 때부터 독서의 이데아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독서를 통해서 다른 어떤 책의 이데아는, 처음부터 연이어 나오는 다른 어떤 글쓰기의 이데아가 되었을 것이다. 꼭 다른 어떤 책의 기록이 아니라 적어도 사유의 또 다른 단면의 글쓰기, 표현의, 매개의, 모방과 창조의 다른 굽이, 다른 돌기 혹은 다른 굴곡의 기록이 되었을 것이다. 책의 이데아는 어떠한 종결점도 이데아 자체에는 존재하지 않는 그런 이데아이다. 이데아가 품고 있는 것이라고는 자기 자신을 증식하기, 번식하기, 분산하기뿐이다. 그리고 언제나, 어떤 순간에, 어떤 관점에서, 책이 건네는 묵언의 조언 혹은 달변의 조언은 책을 내던지게 혹은 그만 읽게 한다. 책읽기, 그것은 이어서 또 다른 책을 읽어야 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때로 우리가 행동이라고 부르는 것, 때로 경험이라고 부르는 것, 읽어내기 어려운 현실 세계와 몸을 비비며 접촉하는 것이다. (56-57쪽)
책은 무거우면서도 가볍다. 책은 엄숙한 분위기의 도서관 서가에 붙박이처럼 고정되어 있기도 하지만 서로의 뒤를 잇기도 하고 자리를 바꾸기도 한다. 책은 인쇄 1세대의 고서 초판본이기도 하지만 대중적인 책이기도 하며 또 난해한 것이기도 하다. 책은 불에 타기 쉽지만 동시에 소진되기 어렵다. 물질로 표현하자면 책은 우리의 사유이다. 진지하면서도 덧없는 사유, 손 닿는 곳에 있으면서도 비밀에 가린 사유, 우리가 끈질기게 공유하는 사유가 바로 거래 자체이자 약속이다. (64-65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