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想 셋. (2022년 5월 23일)
















  《서울리뷰오브북스 5호》의 리뷰를 읽다가 《힐튼호텔 옆 쪽방촌 이야기》를 다룬 서평의 한 문장에 오래 눈길이 머물렀다. "빈자의 몸은 외부인이 망치를 힘껏 내리칠 때마다 ‘희망‘이나 ‘절망‘을 뱉어 내는 두더지 게임기가 아니다. 오랜 시간 여러 형태의 폭력이 누적되고 마모되어 무엇 하나 쉽게 도려내기 힘든 끈끈이에 가깝다."(163쪽) 피해자다움, 빈자다움, 소수자다움과 같이 약자에게 특정한 윤리적 지위를 강요하는 한국 사회의 모습이 떠올라서 그랬을 것이다. "가난한 개인을 등장시키는 순간 빈곤의 구조 대신 빈민의 품행을 왈가왈부하는 위험천만한 공론장"(160쪽)은 이미 실효성을 다한 근대 사회의 노동 윤리를 빈자들에게 휘두르며 그들을 배제하는 신자유주의적 사회의 구조를 닮았다. 약자라면, 피해자라면 으레 이러한 사람이어야 한다, 혹은 이런 언어를 발화해야 한다는 막연한 감각이 얽히고 설킨 구조의 문제를 가리고 있다는 것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바꿀 의지조차 보이지 않는 정치의 현실에서 우리의 시야에서 가려진 이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아내는 작업이 꾸준히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마지막 부분에 소개된 독립출판물 《IMO: 평택 기지촌 여성 재현》에도 눈길이 가는 이유다.


가난과 싸워 온 사람들이 가난한 개인을 전면에 등장시켰을 때, 이 개인의 몸이 다른 사람, 사물, 법, 정책과 연결되면서 펼쳐지는 세계를 서사화·역사화할 때, 우리는 은막의 구조가 아니라 울퉁불퉁한 배치(assemblage)를 들여다보고, 숙고의 시간을 갖는다. 거대한 불평등의 시대, 선진국 진입을 자축하는 나라에서 이 배치가 정말 최선인지, 우리가 이 배치에 어떻게 연루되어 있는지, 어떤 연결이 생명에 대한 동료 인간의 예의일 수 있는지에 대해서. (169~170쪽)



단想 넷. (2022년 5월의 어느 날)















  신간알리미를 통해 지그문트 바우만의 《액체근대》가 《액체 현대》로 다시 나왔다는 소식을 접했다. 동녘 출판사에서 '지그문트 바우만 셀렉션 시리즈'로 과거에 나온 저서의 개정판이 나오고 있었기에, 《액체근대》를 고되게 읽었던 경험이 떠올라 같이 번역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는데, 엉뚱하게도 새 책은 필로소픽 출판사에서 나왔다. 바우만의 대표적인 개념인 'liquid modernity'는 셀렉션 시리즈에서 '유동하는 현대'로 통일되었으나, 이번 책에서는 '액체 현대'로 번역되었다. 용어 통일의 길은 요원해보인다.















  책소개를 보면 개정판은 2012년 개정판을 기준으로 번역되었고, 개정판 서문과 옮긴이의 글이 추가되었다. 이미 고되게 읽은 적이 있기에 선뜻 구매하기가 망설여지지만([리뷰]불확실성의 세계 한복판에서) 문장들이 얼마나 다듬어졌을지는 궁금하다. '액체 현대'와 '유동하는 현대' 중 하나를 골라야한다면, 액체처럼 언제나 변화할 수 있는 것으로 변해버린 질서를 표현하는 데 동사가 더 적절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출간된 지는 벌써 20년이 넘었으나, 여전히 그의 성찰과 진단은 여전히 유효하다. 미처 다 읽지 못하고 쟁여둔 그의 저서들도 읽어야할 텐데라는 부담을 가지고 마무리해야겠다. 힘들겠지만 여기저기 산발적으로 나와있는 책들을 누군가가 발벗고 나서서 전집으로 내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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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제13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임솔아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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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솔아, <초파리 돌보기> ★★☆

  삶에서 단 하나의 이유를 찾을 수는 없다는 것. 근본적인 원인도 확실치 않다는 것. 수많은 이유들이 모여 하나의 삶을 이룬다는 것. 삶의 맨얼굴과 서사 사이에서 갈등하는 소설가의 고뇌가 담겨있지만 이를 풀어내는 이야기에 작가 본인의 목소리와 그림자가 너무 짙다.

 

김멜라, <저녁놀> ★★★

  기발한 화자 설정의 전략이 시니컬한 블랙 유머의 밑바탕을 마련해주고, 두 여성의 불안하면서도 깊은 사랑 이야기와 딜도의 목소리가 이루는 낙차가 인상적이다. 딜도의 자뻑과 두 여성의 따스함을 모두 포착해내는 작가의 솜씨는 돋보이나 커플의 사랑을 아름답게 그려낼 때 (분명 내가 화자라고 말하는) 딜도는 화자의 자리에서 이탈하고 그 자리에 작가가 들어서서 말해준다.

 

김병운,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 ★★★☆

  자기고백적 퀴어 서사가 특유의 진솔함과 라이트한 톤으로 독자들을 붙잡아왔지만, 그 다음으로 새로이 나아가야 할 길은 여기가 아닐까. 성찰할 수 있게 해주는 소설을 오랜만에 만나 반갑고, '퀴어'라는 말만으로 무지개의 모든 색깔을 지칭할 수 없음을 새삼 다시 생각하게 해준다. 명명하기의 문제와 부유하는 정체성에 대한 생각도.

 

김지연, <공원에서> ★★★

  언제나 홀로 있으면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비명 말고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언어가 없다는 것에 대한 분노, 폭력을 당한 피해자임에도 강요받는 윤리적 지위에 대한 묘사는 작품에 넘실거리는 생생한 감정 덕분에 요동친다. 어느 한쪽의 감정으로 기울지 않고 생에 대한 의지로 끝맺는 부분이나 '개 같다'는 언어의 전복으로 매듭짓는 것도 인상적. 다만 차별의 구조를 내재한 언어의 탐구는 작가의 목소리가 강하게 들어가 인물의 목소리와 동화되지 못한다.

 

김혜진, <미애> ★★★☆

  좋은 사람이 되고픈 인정욕망과 자신의 '없음'을 입증하며 도움을 받고픈 이의 생존욕망의 거래가 보여주는 현대 사회의 계급적 인간관계도. 사소한 일에서 보여지는 양측의 생생한 욕망의 민낯은 풍속도 같아 씁쓸하고, 언뜻 관계회복의 희망을 암시하는 듯한 결말도 자본주의적 욕망에 잡아먹히는 것처럼 보인다. 희망의 모습을 찾는 작가의 말과 달리 암담해 보이는 미래.

 

서수진, <골드러시> ★★★

  그들만의 아메리칸 드림이 허상으로 사라졌듯이 진작에 산화해버린 관계를 어떻게든 붙잡아 보려던 몸부림. 타지에서 뿌리를 내리려던 시도와 황금광의 역사가 겹쳐지고, 그들의 끝나버린 사랑의 역사도 함께 겹쳐진다. 끝나버린 관계에 대한 쓸쓸함으로 여운을 오래 남기지만 황금광이나 노을의 은유는 전형적이라는 인상을 남긴다.

 

서이제, <두개골의 안과 밖> ★★★

  단조롭고 도식적일 수 있는 윤리적 주제를 형식적 실험으로 돌파하고자 했던 소설로 읽힌다. 이미 박민규나 황정은과 같은 작가들에게서 익히 보아왔던 형식적 실험임에도 돋보이는 건 근래에 이러한 실험을 시도하는 작가를 보지 못했기 때문. 동물들의 목소리와 고통을 어떻게든 인간의 언어를 통해 그들이 느끼는 그대로 담고자하는 노력과 작가의 고뇌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지만 그것이 성공했는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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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2-05-15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개인적으로 작년 것이 훨씬 좋았어요. 이번 수상작들은 완독에 실패했어요. 세세한 분석 잘 읽고 갑니다.

아무 2022-05-15 12:48   좋아요 0 | URL
전 개인적으로 작년보다는 올해가 더 좋았습니다~ 작년에도 수상한 작가들의 작품을 한번 더 읽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던...😊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1F/B1 일층, 지하 일층
김중혁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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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살고 있고 살고픈 도시와 그 속의 인간들에 대한 소설들. 끝없이 갈라지는 골목길처럼 숨어있던 도시와 사람들을 포착하는 글솜씨는 김중혁스럽다. 다양한 장르적 서술과 갑작스런 끝맺음, 유머를 읽는 재미도 쏠쏠하나, <크랴샤>를 읽고난 뒤 젖어드는 쓸쓸함과 따스함에 비할 바가 못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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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깜언 창비청소년문학 64
김중미 지음 / 창비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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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결혼, 다문화사회, 농촌의 쇠락, 장애와 혐오 문제 등 수많은 화제를 다루면서도 힘을 잃지 않는 건 유정의 진솔하면서 당당한 성격과 화법 덕분. 7년이 지난 지금도 진행형인 현실의 장벽에 한숨이 나오고 마음은 무겁지만, 투닥거리며 서로를 아끼는 네 친구를 보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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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긴밤 - 제21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 수상작 보름달문고 83
루리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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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김을 받아본 이만이 타자를 보듬어줄 수 있다는 것. 코끼리와 노든의 태도가 겹쳐지는 건 이것을 말하고 말하고 싶어서가 아닐까. 나와 타자와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타자를 보듬고 연대할 때 서로 완성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걸 사랑과 우정의 연대기로 아름답게 풀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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