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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리타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5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평점 :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생각해보니, 두 달만에 처음으로 소설을 집은 거였다. 두 달 동안 읽은 책이 열 권도 채 되지 않기에(그런 것으로 짐작되므로) 놀라운 것은 아니겠지만, 소설 편식쟁이로 살았던 독서 편력을 생각했을 때, 그리고 조금씩 읽고 있지만 아직 다 읽지 못한 책 중에도 소설이 없다는 것을 생각했을 때, 개인적으로는 놀라운 일이다. 읽어야 되는 의무가 생기지 않았더라면, 이 책도 책장에 꽂힌 채 잠들어 있었을 것이다.
'롤리타'라는 이름은 소설 제목보다 '롤리타 콤플렉스'라는 말로 익숙하다. 그 이름은 주로 좋지 않은 일들과 어울렸기에, 거기에 덧붙은 의미 역시 부정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책을 다 읽은 현재, 이름을 둘러싼 의미와 사건들이 『롤리타』의 아름다움을 덮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보코프의 말처럼, 이 소설에는 "어떠한 도덕적 교훈도 없"고, "감각적 요소와 관능적 요소를 엄밀히 구분하는 일"(505쪽)은 포르노그라피의 낡은 문법을 따라가는 것만큼 터무니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롤리타』의 줄거리를 재미없게 요약하자면, '소아성애자 험버트 험버트가 롤리타를 욕망하고 취하였으나 결국 그녀를 잃게 되고 파멸하는 이야기' 정도가 되겠다. 작품을 읽으면서 험버트의 애정행각에는 전혀 감정이입이 되지 않았으나, 험버트/나보코프가 그려내는 "시적 에로티시즘"의 세계(해설에는 포에로틱(poerotic)한 소설이라는 말이 나온다)는 감탄할 만한 것이어서, 소아성애라는 요소만 빼면 정말 아름다운 사랑의 과정을 그린 소설이라고 이해/착각하게 된다. 물론 여기서 중요한 것은 롤리타의 의지가 있었는지에 대한 것이지만, 그 전에 앞서 지적할 점은 이 욕망의 서사가 포우의 시 「애너벨 리(Annabel Lee)」의 "바닷가 공국"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사실 내가 어느 여름날 첫번째 여자애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롤리타는 아예 없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바닷가 공국에서였다. 아, 언제? 그해 여름 내 나이는 그때로부터 롤리타가 태어나기까지의 햇수와 엇비슷했다. 살인자는 으레 이렇게 문장을 애매모호하게 쓰는 법이다. (18쪽)
그의 첫사랑이었던 애너벨 리(Annabel Leigh)와 해변가에서 나누었던 뜨거운 사랑과 좌절이 소설의 전반부를 이룬다. 유년 시절의 이미지는 그에게 하나의 환상이 되어 남고, 환상은 그의 삶 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따라다닌다. 그는 님펫(nymphet)이라는 신조어를 설명할 때 "롤리타와 같은 부류는 남들이 들어갈 수 없는 매혹적인 시간의 섬에서"(29쪽) 노닌다고 적는데, "매혹적인 시간의 섬"이야말로 그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환상의 공간인 것이다. 그리고 롤리타를 만나는 순간, 그의 환상에 자리하고 있던 애너벨은 롤리타로 대체된다.
굳이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잠시 후 이 새로운 소녀, 이 롤리타, 나의 롤리타는 그녀의 원형을 완전히 덮어버렸다. 여기서 꼭 강조하고 싶은 점이 있는데, 내가 그녀를 발견한 것은 결국 고통스러운 내 과거와 '바닷가 공국'이 낳은 운명적 결과였다는 사실이다. 두 사건 사이에 겪은 모든 일은 암중모색과 시행착오, 그리고 보잘것없는 가짜 행복에 불과했다. 이제 수많은 공통점이 두 사건을 하나로 이어주었다. (66쪽)
험버트가 끊임없이 님펫을 갈구하고 마침내 롤리타를 만나 그녀를 차지하는 과정은 환상의 현실화, 즉 "나에게 주어진 초라한 현실과 나에게 약속된 위대한 이상"(423-424쪽) 사이의 격차를 메우려는 몸부림이다. 끝없는 시도의 결과, 롤리타가 먼저 유혹하여(험버트의 진술에 따르면) 마침내 환상은 현실로 구현된다. 그러나...
우리는 방방곡곡을 누볐다. 그러나 사실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의 기나긴 여행은 이 아름답고 믿음 깊고 꿈 많고 드넓은 국토를 구불구불한 점액의 흔적으로 더럽혔을 뿐이고, 돌이켜보면 그때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귀퉁이가 접힌 지도 한 다발과 너덜너덜한 여행 안내서, 닳아빠진 타이어, 그리고 한밤중에─밤이면 밤마다─잠든 체하는 내 귓가에 울리던 그녀의 흐느낌이 전부였다. (280쪽)
롤리타는 어리석고 교만했으며, "버르장머리 없는 계집애"였다(험버트의 서술에 의하면). 미국 여행 내내 그들은 다투고 신경질내며, 비어즐리에 정착한 이후에도 갈등은 계속된다. 이 와중에 험버트를 사로잡는 것은 질투, 즉 자신의 환상이 산산조각날 것이라는 두려움이었고, 그는 자신의 환상을 붙잡고자 롤리타를 자신의 울타리 안에 가두려고 안간힘을 쓴다. 하지만 결국 그 환상은 무너지고 마는데, 그가 사랑한 것은 '롤리타'였지만, 그녀는 '롤리타'가 아닌 '돌로레스'였기 때문이다(그녀의 이름이 '고통(dolor)'을 생각나게 하는 건 비극적인 운명을 암시하는 걸까). "내가 미친 듯이 소유해버린 것은 그녀가 아니라 나 자신의 창조물, 즉 상상의 힘으로 만들어낸 또 하나의 롤리타, 어쩌면 롤리타보다 더 생생한 롤리타였다"는 그의 고백에서 알 수 있듯, 그가 죽을 때까지 욕망하고 삶의 목적으로 삼았던 그녀는 그의 환상에서만 존재하는 이미지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환상 속의 그녀는 목소리가 없다. 주체가 아니라 대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험버트는 님펫(nymphet)이라는 말로 아름답게 표현했지만, 결국 그녀는 철저하게 대상화된 펫(pet)이었던 것이다.
험버트는 회고록에서 어떻게든 "지옥 같은 부분과 천국 같은 부분을 가려내"고자 하지만, 그리고 온갖 엄격한 규제와 돈으로 환상의 붕괴를 막고자 하지만, 그가 그토록 가리고 싶었던 실재, "낙원에 박힌 빙산"은 끄트머리에 가서야 그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가 첫 여행을 할 때, 말하자면 첫째 낙원에 올랐을 때, 어느 날 나는 나만의 환상을 마음 편히 즐기려고 뻔히 보이는 사실을─그녀에게는 내가 애인도 아니고 매력남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고 아예 인간도 아니고 다만 (언급할 수 있는 부분만 언급하자면) 두 개의 눈과 1피트의 충혈된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무시해버리기로 굳게 다짐했다. (…) 화장실에 들어갔을 때 거울의 각도와 열린 문틈의 우연한 조합 덕분에 그녀의 표정을 얼핏 보게 되었는데…… 뭐라고 딱 꼬집어 설명할 수 없는 그 표정은…… 그야말로 완벽한 무력감의 표현이랄까, 상심과 좌절이 한계에 도달하여─그리고 어딘가에 한계가 있다는 말은 그 너머에도 뭔가 있다는 뜻이므로─오히려 아주 편안한 공허와 무심한 깨달음의 경지로 접어든 표정이었다. (…) 독자 여러분도 당시 내가 품었던 계산적 욕정이 얼마나 지독했는지, 그리고 그녀 때문에 나 역시 얼마나 절망했는지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455-456쪽)
하지만 그는 환상을 버릴 수 없다. 환상의 세계, '바닷가 공국'이야말로 삶의 목적이자 전부였기 때문이다. 여전히 험버트는 카르멘을, 베아트리체를, 롤리타를 떠나보낼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자신에게서 그녀를 빼앗았던 남자에게 복수할 것을 결심하지만, 이 행위 역시 일종의 회피에 지나지 않는다. 환상을 무너뜨린 것은 결국 험버트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환상을 차지하고 유지하려는 욕망이 오히려 환상을 무너뜨린 것이다.
험버트가 자신의 욕망을 쟁취하고 파멸하는 이야기는 감각적인 문장으로 인해 낭만적 세계를 형성하고, 시적인 문장들이 관능적인(erotic) 세계마저 환상의 낙원으로 탈바꿈시킨다. 개인적으로는 험버트의 행동을 지켜보며 "이런 미친...(뒷말은 생략한다)"이라는 말이 종종 튀어나왔지만, 그럼에도 이 남자가 몰락하는 과정은 어쩐지 처연하다. 그것은 그가 욕망을 실현하고 환상을 현실로 끌어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불사르는 과정을 지켜보는 데서 오는 감정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 작품이 주는 감동은 소아성애라는 자극적 소재가 아니라(소아성애는 범죄다), 마지막까지 자신의 환상을 붙잡으려는 인간의 몸부림, 그리고 이를 묘사하는 탐미적(耽美的)인 문체에서 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몸부림은 환상에 이미 유효기간이 정해져 있다는 점으로 인해 더욱 비극적인 성격을 띤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님펫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것, 유효기간이 정해져 있는 환상을 붙잡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예술뿐이라는 작가의 문학관이 담겨있는 듯하다. "지금 나는 들소와 천사를, 오래도록 변하지 않는 물감의 비밀을, 예언적인 소네트를, 그리고 예술이라는 피난처를 떠올린다. 너와 내가 함께 불멸을 누리는 길은 이것뿐이구나, 나의 롤리타."
+) 처음 목차를 보았을 때 해설을 쓴 사람의 이름이 매우 친숙하여(하지만 이 친숙함은 오로지 나만의 것이다) 반가웠고 안심이 되었다. 해설을 통해 작품에 대한 보충 설명, 작품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석을 볼 수 있어 많은 도움을 받았다. 한데 서술자가 '나'에서 '험버트'로 바뀌는 부분에 대한 설명은 내가 완전히 이해하진 못한 것 같다. 처음에 읽으면서 나는 이것이 자신과 롤리타의 사랑을 어떻게든 아름답게 포장하지만, 이것이 롤리타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는 것을 알고 있는 험버트의 (무의식적인) 도피 또는 회피의 반영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해설에서 말하는 대로 서술자의 전환이라면 3인칭으로 전환해서 자신의 목소리를 겹쳐놓은 나보코프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그 효과는 무엇일까.
+) 전체적으로 술술 읽히는 편이었으며 막히는 부분도 딱히 없었다. 옮긴이의 말에서 "줄표나 괄호를 '적극적으로' 원문과 다르게 사용"했다고 밝히고 있으니 가독성을 고려한 번역이라고 보아도 좋겠다. 하지만 원작이 담고 있는 언어유희가 최대한 전달될 수 있도록 노력한 부분이 많이 띄어서(저 수많은 미주들을 보라) 읽을 때마다 "나 엄청 공들였다!"라고 말하는 느낌이었다. 다만 사소한 이야기를 하나 하자면, 험버트가 가스통과 체스를 두는데 갑자기 가스통이 "장군 받으시게!"(290쪽)라고 말하는 바람에 읽다가 엄청 웃었다. 하긴 생각해보면 '체크'나 '체크메이트'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가스통의 어벙한 성격을 드러내게 하는 말을 찾기도 어렵긴 하다...
+) 어제 책을 다시 훑다가 문득 생각난 것은 그리스 신화의 황금 양털 이야기였는데, 내가 이것을 기억하는 것은 아르센 뤼팽 전집에서도 이 황금 양털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나의 지난 모험들 중 몇몇을 되도록 충실하게 기술한 책들을 지금 다시 훑어보노라면, 한마디로 그 각각은 여인을 쫓아다니느라 나 자신을 던지는 순간적인 충동에서 비롯된 결과라는 생각이 든다. 황금 양털(Toison d'or)이 모양만 변했을 뿐 내가 이제껏 손에 넣으려고 그토록 헤매온 것이 바로 그 황금 양털에 다름 아니었다. 그런가 하면 상황에 따라 내 이름과 성격을 달리 해야만 했기에 그때마다 전혀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는 느낌이었고 이전까지는 결코 사랑해본 적도 없으며 이후에도 다시는 사랑하지 않을 거라는 각오를 매번 새롭게 다져왔던 것이다.
- 모리스 르블랑, 『불가사의한 저택』(까치글방, 2003, 5쪽)
역자 성귀수는 해설에서 융을 인용하며 황금 양털이 "'불가능한 것에 대한 인간의 무의식적 열망'을 대변한다"고 썼다(『바르네트 탐정사무소』, 까치글방, 2003, 213쪽). 이아손의 황금 양털을 향한 여정과 획득, 그리고 비극의 이야기가 험버트의 일생과 겹친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까? 따지고 보면 황금 양털 역시 가지고 있으면 나라에 번영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인간이 의미를 부여했다는 점에서 "상상의 힘으로 만들어 낸" 롤리타와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