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 & 라캉 - 무의식의 초대 지식인마을 34
김석 지음 / 김영사 / 201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어차피 이 책의 내용을 본격적으로 다루진 않는다. 그건 내 역량을 벗어나는 일이기도 하고, 아직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부제 이야기를 해야될 것 같다. 이 책의 부제는 알라딘에서 검색해보면 '무의식에로의 초대'로 나오는데, 내가 받은 책의(난 3월 초에 알라딘 중고샵에서 이 책을 구매했다) 부제는 '무의식의 초대'다.




이런 까닭에 마음 한구석에 뭔가 찜찜한 구석이 가시지 않았다. '무의식이 초대'하는 것과 '무의식으로 초대'받는 것은 분명 다른 것이지 않은가... 혹시 파본?


이 책을 사게 된 것은 '프로이트'보다 '라캉'에 초점을 둔 것이었는데, 오히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이론에 대한 설명이 쉽게 되어 있어서 몇 가지 오해를 풀 수 있었다. 특히 1차 정신 기구 모델과 2차 정신 기구 모델의 차이는 모르고 있었던 것이기에 충격이 좀 컸다. 그동안 상담이론 등에서 정신분석에 대해 이따금씩 듣거나 심리학 교양수업을 찾아 들을 때도 '의식-전의식-무의식'과 '이드-자아-초자아'가 서로 다른 모델이라고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상담이론에서 정신분석학이 그리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는 데도 원인이 있는 듯하다. 교육학 쪽에서 주목받는 심리 분야는 학습에서는 인지주의, 상담 쪽은 인본주의다)


라캉의 경우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로 장을 나누어서 각각의 개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읽으면서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자 하는 저자의 노력이 매우 돋보였으나, 애초에 개념 자체가 어려운 것이기에 어느 정도의 각오가 필요하다. 나로서는 이번 독서를 통해 '상상계'가 'imagine'의 의미보다 'image'의 의미가 강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에 의의를 둬야 할 듯하다. 이러한 오해는 세 가지 계를 이해할 때 들었던 체스 게임의 비유를 내가 잘못 해석하면서 발생한 것인지도. 그 외에도 오이디푸스 단계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욕구/요구/욕망의 차이를 정확히 아는 것, 자아와 주체가 얼마나 다른지(맨 처음 통상적인 의미로 두 개념을 이해했다가 매우 난감했던 기억이 있다)를 이해할 수 있었다는 점 등 라캉에 대해 좀더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다만 지적해 둘 것은 프로이트와 같이 묶어서 설명하고 있다보니 프로이트와의 차이가 부각된다는 점, 그리고 주로 언어의 문제와 정신분석의 관점에서 본 라캉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이 책은 '초대', '만남', '대화', '이슈'로 구분되어 있는데, 두 인물의 사상이 중점적으로 다루어지는 건 '만남'이다. '초대'는 그야말로 프롤로그에 가깝고, '대화'는 프로이트와 라캉이 대화를 나누는 가상 장면을 설정하여 두 인물의 차이점을 부각시켰다. '이슈'는 성차와 관련해서 진화심리학과 정신분석의 관점을 비교해 놓았는데, 라캉의 '성관계는 없다'는 말을 이해하려면 이 부분을 참고하면 좋겠다. 나로서는 관심이 많이 가는 이슈이기도 하다..


정리하자면, 이 책만 읽고 '나 프로이트 좀 안다'고 젠체할 수는 있겠으나, 라캉은 아니다.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보다 심화된 수준에서 논의하고 있고, 그의 사상 전반을 다루고 있지만, 이 역시 그의 사상에서 중요한 개념들은 이런 것이다 정도에서 정리될 수 있겠다. 나 역시 라캉을 '공부'하기 위해 이 책을 읽었지만, 아직 나의 언어로 정리해서 설명할 수 없다는 점에서 변증법적인 '학습'이 일어난 것은 아니다(『로쟈의 인문학 서재』). 앞으로 몇 번 더 읽어보며 확인해야 도달할 수 있을 장소이리라. 다행인 것은 책 말미에 프로이트와 라캉의 사상에서 주로 다루어지는 핵심어들의 정의와, 깊이 읽기 위한 추천도서들이 정리되어 있다는 점이다. 덕분에 다른 책을 읽으면서 개념들이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확인하며 읽을 수 있게 되어 좋은 참고서를 얻은 느낌이다. 다른 책을 읽는 데 좋은 디딤돌이 되어줄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다른 책들은.. 살레츨이라든가, 지젝이라든가, 지젝이라든가...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6-05-17 1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의식에로의 초대’보다는 ‘무의식의 초대’가 어감상 좋아 보여요. ‘무의식에로의 초대’에 글자 한두 개 빼고 읽으면 ‘무식에로의 초대’가 되잖아요. 무식과 에로의 묘한 결합... ㅎㅎㅎ

아무 2016-05-17 16:21   좋아요 0 | URL
`에로의`라는 조사 자체가 원래 없는 말을 억지로 만든 듯한 어감이 있습니다. 조사 3개를 연달아 붙여버리니.. 그냥 `으로의`처럼 2개로만 했어도 괜찮았을 텐데요. 그래도 무의식의 초대 보단 못한 면이 있죠.. ㅎㅎ
무식과 에로..ㅋㅋㅋ 최근에 롤리타를 읽어서 그런지 `에로`라는 단어가 심상치 않게 다가옵니다 ㅎㅎ 무식에로의 초대라는 제목도 나중에 교양서 제목으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롤리타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5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생각해보니, 두 달만에 처음으로 소설을 집은 거였다. 두 달 동안 읽은 책이 열 권도 채 되지 않기에(그런 것으로 짐작되므로) 놀라운 것은 아니겠지만, 소설 편식쟁이로 살았던 독서 편력을 생각했을 때, 그리고 조금씩 읽고 있지만 아직 다 읽지 못한 책 중에도 소설이 없다는 것을 생각했을 때, 개인적으로는 놀라운 일이다. 읽어야 되는 의무가 생기지 않았더라면, 이 책도 책장에 꽂힌 채 잠들어 있었을 것이다.


'롤리타'라는 이름은 소설 제목보다 '롤리타 콤플렉스'라는 말로 익숙하다. 그 이름은 주로 좋지 않은 일들과 어울렸기에, 거기에 덧붙은 의미 역시 부정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책을 다 읽은 현재, 이름을 둘러싼 의미와 사건들이 『롤리타』의 아름다움을 덮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보코프의 말처럼, 이 소설에는 "어떠한 도덕적 교훈도 없"고, "감각적 요소와 관능적 요소를 엄밀히 구분하는 일"(505쪽)은 포르노그라피의 낡은 문법을 따라가는 것만큼 터무니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롤리타』의 줄거리를 재미없게 요약하자면, '소아성애자 험버트 험버트가 롤리타를 욕망하고 취하였으나 결국 그녀를 잃게 되고 파멸하는 이야기' 정도가 되겠다. 작품을 읽으면서 험버트의 애정행각에는 전혀 감정이입이 되지 않았으나, 험버트/나보코프가 그려내는 "시적 에로티시즘"의 세계(해설에는 포에로틱(poerotic)한 소설이라는 말이 나온다)는 감탄할 만한 것이어서, 소아성애라는 요소만 빼면 정말 아름다운 사랑의 과정을 그린 소설이라고 이해/착각하게 된다. 물론 여기서 중요한 것은 롤리타의 의지가 있었는지에 대한 것이지만, 그 전에 앞서 지적할 점은 이 욕망의 서사가 포우의 시 「애너벨 리(Annabel Lee)」의 "바닷가 공국"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사실 내가 어느 여름날 첫번째 여자애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롤리타는 아예 없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바닷가 공국에서였다. 아, 언제? 그해 여름 내 나이는 그때로부터 롤리타가 태어나기까지의 햇수와 엇비슷했다. 살인자는 으레 이렇게 문장을 애매모호하게 쓰는 법이다. (18쪽)


그의 첫사랑이었던 애너벨 리(Annabel Leigh)와 해변가에서 나누었던 뜨거운 사랑과 좌절이 소설의 전반부를 이룬다. 유년 시절의 이미지는 그에게 하나의 환상이 되어 남고, 환상은 그의 삶 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따라다닌다. 그는 님펫(nymphet)이라는 신조어를 설명할 때 "롤리타와 같은 부류는 남들이 들어갈 수 없는 매혹적인 시간의 섬에서"(29쪽) 노닌다고 적는데, "매혹적인 시간의 섬"이야말로 그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환상의 공간인 것이다. 그리고 롤리타를 만나는 순간, 그의 환상에 자리하고 있던 애너벨은 롤리타로 대체된다. 


굳이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잠시 후 이 새로운 소녀, 이 롤리타, 나의 롤리타는 그녀의 원형을 완전히 덮어버렸다. 여기서 꼭 강조하고 싶은 점이 있는데, 내가 그녀를 발견한 것은 결국 고통스러운 내 과거와 '바닷가 공국'이 낳은 운명적 결과였다는 사실이다. 두 사건 사이에 겪은 모든 일은 암중모색과 시행착오, 그리고 보잘것없는 가짜 행복에 불과했다. 이제 수많은 공통점이 두 사건을 하나로 이어주었다. (66쪽)


험버트가 끊임없이 님펫을 갈구하고 마침내 롤리타를 만나 그녀를 차지하는 과정은 환상의 현실화, 즉 "나에게 주어진 초라한 현실과 나에게 약속된 위대한 이상"(423-424쪽) 사이의 격차를 메우려는 몸부림이다. 끝없는 시도의 결과, 롤리타가 먼저 유혹하여(험버트의 진술에 따르면) 마침내 환상은 현실로 구현된다. 그러나...


우리는 방방곡곡을 누볐다. 그러나 사실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의 기나긴 여행은 이 아름답고 믿음 깊고 꿈 많고 드넓은 국토를 구불구불한 점액의 흔적으로 더럽혔을 뿐이고, 돌이켜보면 그때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귀퉁이가 접힌 지도 한 다발과 너덜너덜한 여행 안내서, 닳아빠진 타이어, 그리고 한밤중에─밤이면 밤마다─잠든 체하는 내 귓가에 울리던 그녀의 흐느낌이 전부였다. (280쪽)


롤리타는 어리석고 교만했으며, "버르장머리 없는 계집애"였다(험버트의 서술에 의하면). 미국 여행 내내 그들은 다투고 신경질내며, 비어즐리에 정착한 이후에도 갈등은 계속된다. 이 와중에 험버트를 사로잡는 것은 질투, 즉 자신의 환상이 산산조각날 것이라는 두려움이었고, 그는 자신의 환상을 붙잡고자 롤리타를 자신의 울타리 안에 가두려고 안간힘을 쓴다. 하지만 결국 그 환상은 무너지고 마는데, 그가 사랑한 것은 '롤리타'였지만, 그녀는 '롤리타'가 아닌 '돌로레스'였기 때문이다(그녀의 이름이 '고통(dolor)'을 생각나게 하는 건 비극적인 운명을 암시하는 걸까). "내가 미친 듯이 소유해버린 것은 그녀가 아니라 나 자신의 창조물, 즉 상상의 힘으로 만들어낸 또 하나의 롤리타, 어쩌면 롤리타보다 더 생생한 롤리타였다"는 그의 고백에서 알 수 있듯, 그가 죽을 때까지 욕망하고 삶의 목적으로 삼았던 그녀는 그의 환상에서만 존재하는 이미지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환상 속의 그녀는 목소리가 없다. 주체가 아니라 대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험버트는 님펫(nymphet)이라는 말로 아름답게 표현했지만, 결국 그녀는 철저하게 대상화된 펫(pet)이었던 것이다.


험버트는 회고록에서 어떻게든 "지옥 같은 부분과 천국 같은 부분을 가려내"고자 하지만, 그리고 온갖 엄격한 규제와 돈으로 환상의 붕괴를 막고자 하지만, 그가 그토록 가리고 싶었던 실재, "낙원에 박힌 빙산"은 끄트머리에 가서야 그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가 첫 여행을 할 때, 말하자면 첫째 낙원에 올랐을 때, 어느 날 나는 나만의 환상을 마음 편히 즐기려고 뻔히 보이는 사실을─그녀에게는 내가 애인도 아니고 매력남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고 아예 인간도 아니고 다만 (언급할 수 있는 부분만 언급하자면) 두 개의 눈과 1피트의 충혈된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무시해버리기로 굳게 다짐했다. (…) 화장실에 들어갔을 때 거울의 각도와 열린 문틈의 우연한 조합 덕분에 그녀의 표정을 얼핏 보게 되었는데…… 뭐라고 딱 꼬집어 설명할 수 없는 그 표정은…… 그야말로 완벽한 무력감의 표현이랄까, 상심과 좌절이 한계에 도달하여─그리고 어딘가에 한계가 있다는 말은 그 너머에도 뭔가 있다는 뜻이므로─오히려 아주 편안한 공허와 무심한 깨달음의 경지로 접어든 표정이었다. (…) 독자 여러분도 당시 내가 품었던 계산적 욕정이 얼마나 지독했는지, 그리고 그녀 때문에 나 역시 얼마나 절망했는지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455-456쪽)


하지만 그는 환상을 버릴 수 없다. 환상의 세계, '바닷가 공국'이야말로 삶의 목적이자 전부였기 때문이다. 여전히 험버트는 카르멘을, 베아트리체를, 롤리타를 떠나보낼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자신에게서 그녀를 빼앗았던 남자에게 복수할 것을 결심하지만, 이 행위 역시 일종의 회피에 지나지 않는다. 환상을 무너뜨린 것은 결국 험버트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환상을 차지하고 유지하려는 욕망이 오히려 환상을 무너뜨린 것이다.


험버트가 자신의 욕망을 쟁취하고 파멸하는 이야기는 감각적인 문장으로 인해 낭만적 세계를 형성하고, 시적인 문장들이 관능적인(erotic) 세계마저 환상의 낙원으로 탈바꿈시킨다. 개인적으로는 험버트의 행동을 지켜보며 "이런 미친...(뒷말은 생략한다)"이라는 말이 종종 튀어나왔지만, 그럼에도 이 남자가 몰락하는 과정은 어쩐지 처연하다. 그것은 그가 욕망을 실현하고 환상을 현실로 끌어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불사르는 과정을 지켜보는 데서 오는 감정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 작품이 주는 감동은 소아성애라는 자극적 소재가 아니라(소아성애는 범죄다), 마지막까지 자신의 환상을 붙잡으려는 인간의 몸부림, 그리고 이를 묘사하는 탐미적(耽美的)인 문체에서 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몸부림은 환상에 이미 유효기간이 정해져 있다는 점으로 인해 더욱 비극적인 성격을 띤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님펫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것, 유효기간이 정해져 있는 환상을 붙잡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예술뿐이라는 작가의 문학관이 담겨있는 듯하다. "지금 나는 들소와 천사를, 오래도록 변하지 않는 물감의 비밀을, 예언적인 소네트를, 그리고 예술이라는 피난처를 떠올린다. 너와 내가 함께 불멸을 누리는 길은 이것뿐이구나, 나의 롤리타."


+) 처음 목차를 보았을 때 해설을 쓴 사람의 이름이 매우 친숙하여(하지만 이 친숙함은 오로지 나만의 것이다) 반가웠고 안심이 되었다. 해설을 통해 작품에 대한 보충 설명, 작품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석을 볼 수 있어 많은 도움을 받았다. 한데 서술자가 '나'에서 '험버트'로 바뀌는 부분에 대한 설명은 내가 완전히 이해하진 못한 것 같다. 처음에 읽으면서 나는 이것이 자신과 롤리타의 사랑을 어떻게든 아름답게 포장하지만, 이것이 롤리타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는 것을 알고 있는 험버트의 (무의식적인) 도피 또는 회피의 반영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해설에서 말하는 대로 서술자의 전환이라면 3인칭으로 전환해서 자신의 목소리를 겹쳐놓은 나보코프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그 효과는 무엇일까.


+) 전체적으로 술술 읽히는 편이었으며 막히는 부분도 딱히 없었다. 옮긴이의 말에서 "줄표나 괄호를 '적극적으로' 원문과 다르게 사용"했다고 밝히고 있으니 가독성을 고려한 번역이라고 보아도 좋겠다. 하지만 원작이 담고 있는 언어유희가 최대한 전달될 수 있도록 노력한 부분이 많이 띄어서(저 수많은 미주들을 보라) 읽을 때마다 "나 엄청 공들였다!"라고 말하는 느낌이었다. 다만 사소한 이야기를 하나 하자면, 험버트가 가스통과 체스를 두는데 갑자기 가스통이 "장군 받으시게!"(290쪽)라고 말하는 바람에 읽다가 엄청 웃었다. 하긴 생각해보면 '체크'나 '체크메이트'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가스통의 어벙한 성격을 드러내게 하는 말을 찾기도 어렵긴 하다...


+) 어제 책을 다시 훑다가 문득 생각난 것은 그리스 신화의 황금 양털 이야기였는데, 내가 이것을 기억하는 것은 아르센 뤼팽 전집에서도 이 황금 양털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나의 지난 모험들 중 몇몇을 되도록 충실하게 기술한 책들을 지금 다시 훑어보노라면, 한마디로 그 각각은 여인을 쫓아다니느라 나 자신을 던지는 순간적인 충동에서 비롯된 결과라는 생각이 든다. 황금 양털(Toison d'or)이 모양만 변했을 뿐 내가 이제껏 손에 넣으려고 그토록 헤매온 것이 바로 그 황금 양털에 다름 아니었다. 그런가 하면 상황에 따라 내 이름과 성격을 달리 해야만 했기에 그때마다 전혀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는 느낌이었고 이전까지는 결코 사랑해본 적도 없으며 이후에도 다시는 사랑하지 않을 거라는 각오를 매번 새롭게 다져왔던 것이다.

- 모리스 르블랑, 『불가사의한 저택』(까치글방, 2003, 5쪽)


역자 성귀수는 해설에서 융을 인용하며 황금 양털이 "'불가능한 것에 대한 인간의 무의식적 열망'을 대변한다"고 썼다(『바르네트 탐정사무소』, 까치글방, 2003, 213쪽). 이아손의 황금 양털을 향한 여정과 획득, 그리고 비극의 이야기가 험버트의 일생과 겹친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까? 따지고 보면 황금 양털 역시 가지고 있으면 나라에 번영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인간이 의미를 부여했다는 점에서 "상상의 힘으로 만들어 낸" 롤리타와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2008)

폭력은 타인을 침묵시키고, 타인의 목소리와 신뢰성을 부정하고, 내게 타인이 존재할 권리를 통제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한 방법이다. 미국에서는 매일 약 세명의 여자가 배우자나 옛 배우자에게 살해당한다. 미국에서 임신부의 주요한 사망 원인 가운데 하나도 바로 그것이다. 강간, 데이트 강간, 부부 강간, 가정폭력, 직장 내 성희롱을 법적 범죄로 규정하려고 애써온 페미니즘의 투쟁에서 핵심 과제는 우선 여성을 신뢰할 만하고 경청할 만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었다. (18-19쪽)


대부분의 여자들은 이중의 전선에서 싸우고 있다. 하나는 무엇이 되었든 문제의 주제에 관한 싸움이 벌어지는 전선이고, 다른 하나는 애초에 말할 권리, 생각할 권리, 사실과 진실을 안다고 인정받을 권리, 가치를 지닐 권리, 인간이 될 권리를 얻기 위해서 싸우는 전선이다. (24-25쪽)


<가장 긴 전쟁>(2013)

(샌프란시스코에서 어떤 남성이 성적 접근을 거부한 여성을 칼로 찌른 사건)

그 남자는 자신이 고른 피해자에게는 아무런 권리도 자유도 없지만 자신에게는 그녀를 통제하고 처벌할 권리가 있다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던 셈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폭력은 무엇보다도 일단 권위주의적이라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폭력은 내게 상대를 통제할 권리가 있다는 전제에서 시작한다.

살인은 그런 권위주의의 극단적 형태다. 살인자는 당신이 죽을지 살지 결정할 권리는 자신에게 있다고 살인을 통해서 단언하는 셈이다. 이것은 타인을 통제하는 궁극의 수단이다. 설령 당신이 고분고분하게 굴더라도 아무 소용없을지 모르는데, 통제의 욕망은 순종으로는 좀처럼 달래기 힘든 격렬한 분노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 행위의 이면에 모종의 두려움과 취약함이 깔려 있을지라도, 아무튼 그런 행위는 타인에게 괴로움을, 더 나아가 죽음을 부여할 자격이 자신에게 있다는 생각에서 나오기 마련이다. 그런 의식이 범인도 피해자도 비참하게 만든다. (45-46쪽) 


강간을 비롯한 폭력적 행동들, 극단적으로는 살인에까지 이르며 폭력을 쓰겠다는 위협까지 포함하는 이 모든 행동은 일부 남자들이 일부 여자들을 통제하려는 시도로 펼치는 방어막에 해당한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그런 폭력이 두려워 스스로를 제약하며, 그러다보면 자신도 익숙해져서 그런 상황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게 된다. (50쪽)


<거미 할머니>(2014)

어머니들이 사라지고, 그 어머니들의 아버지들과 어머니들이 사라진다. 점점 더 많은 삶들이 세상에 살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지면서 숲이 나무로, 그물이 직선으로 다듬어진다. 혈통이나 영향이나 의미의 내러티브를 단선적으로 구성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나는 예술사에서도 그런 일을 줄기차게 보았다. 삐까소(Pablo Picasso)가 폴록(Jackson Pollock)을 낳고 폴록이 워홀(Andy Warhol)을 낳는 식으로, 예술가는 반드시 다른 예술가에게서만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듯한 설명이다. (104쪽)


<울프의 어둠>(2009)

미래는 어둡고, 나는 그것이 미래로서는 최선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이 선언은 예사롭지 않다. 이 선언은 우리가 거짓된 점괘를 믿거나 울적한 정치적 혹은 이데올로기적 내러티브를 미래로 투사함으로써 모르는 것을 아는 것으로 바꿀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이 선언은 어둠을 칭송하며─'나는 ... 생각한다' 부분이 암시하듯이─스스로의 선언에 대해서조차 기꺼이 불확실함을 인정한다.

사람들은 대부분 어둠을 두려워한다. 아이들의 경우에는 말 그대로 캄캄한 것을 두려워하고, 어른들의 경우에는 무엇보다도 자신이 모르는 것, 못 보는 것, 모호한 것이라는 어둠을 겁낸다. 그러나 무언가를 구별하고 규정하기 힘든 밤이란 한편으로는 우리가 사랑을 나누는 시간이다. 사물들이 합쳐지고, 변화하고, 매료되고, 흥분하고, 충만해지고, 사로잡히고, 풀려나고, 재생되는 시간이다. (122-123쪽)


빈틈을 메운다는 것은 우리가 완전히 알지는 못하는 어떤 진실을 완전히 안다고 착각하는 어떤 거짓으로 바꾸는 일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다 안다고 착각할 때는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보다 사실 더 모른다. 완결된 지식을 가진 척하는 이런 태도는 어쩌면 실패한 언어의 문제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대담하게 단언하는 언어는 뉘앙스와 모호함과 성찰을 간직한 언어보다 더 간명하고 덜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후자의 언어에서라면 울프는 달리 비길 상대가 없었다. (125쪽)


<#여자들은다겪는다>(2014)

T. M. 루어먼(Luhrmann)은 지난해(2013) 신문에 실은 멋진 기고문에서, 인도에서 정신분열증 환자들이 환청을 들을 때는 머릿속의 목소리가 집 청소를 하라고 말하곤 하는 데 비해 미국 환자들은 폭력적인 행동을 하라는 말을 듣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문화는 중요하다. 형사사건의 피고 측 조사관으로 일하기 때문에 정신이상과 폭력에 관해서라면 속속들이 잘 아는 내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현실과의 접촉을 잃기 시작하면, 병든 뇌는 무엇이 되었든 그것을 둘러싼 환경에 집착적으로, 망상적으로 매달리기 마련이야. 주변 문화의 질병에." (178-179쪽)


내가 최근에 읽은 글 중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1964년에 뉴욕 퀸스의 주택가에서 살해된 그 유명한 캐서린 '키티' 제노비스(Catherine Kitty Genovese) 사건을 이야기한 『네이션』 기사였다. 기사를 쓴 피터 베이커(Peter Baker)가 우리에게 환기해준바, 제노비스가 강간당하고 살해되는 광경을 자기 집 창문으로 목격한 이웃들 중 일부는 낯선 남자가 저지른 야만적인 폭행을 남편이 '자기' 여자에게 권리를 행사하는 장면으로 오해했을지도 모른다. "당시에는 남자가 아내나 연인에게 가하는 폭력은 대체로 사적인 일로 치부되었던 것, 그것이 분명 중요한 문제였다. 1964년의 법률적 시각에서 남자가 아내를 강간하는 일은 있을 수 없었따는 것이 분명 중요한 문제였다."

'아는 사람에 의한 강간' '데이트 강간' '부부 강간' 같은 용어들은 만들어지지도 않은 시점이었다. (188-189쪽)


우리는 폭력과 권력 남용이 성희롱, 협박, 위협, 구타, 강간, 살인 같은 범주들로 서로 깔끔하게 분류되는 것처럼 다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때 내가 무슨 말을 했던 것인지 이해하겠다. 나는 그것이 자칫 미끄러지기 쉬운 비탈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한 것이었다. 우리가 여성 혐오의 다양한 양태들을 구획하여 각각 별도로 다루기보다 그 비탈 전체를 이야기해야 하는 까닭은 바로 그것이다. 구획화란 큰 그림을 조각냄으로써 전체가 아니라 부분만 보게 하는 것이다. (197-198쪽)


<판도라의 상자와 자원경찰들>(2014)

혁명은 사실 특정 체제에서 권력을 확보하는 일이 주가 되는 사건이 아니고, 그보다는 파열을 통해서 새로운 사상과 제도가 탄생하고 그 충격이 퍼지는 사건이었다. 그레이버는 "1917년 러시아혁명은 소련 공산주의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뉴딜 정책과 유럽 복지국가들을 낳았다는 점에서 세계적 혁명이었다"라고 말한다. 그 말인즉 러시아혁명이 재앙만을 낳았다는 종래의 가설을 뒤집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는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대열의 맨 마지막은 1968년 세계혁명이었다. 1848년 혁명과 상당히 비슷한 방식으로, 1968년 혁명은 중국에서 멕시코까지 거의 모든 곳에서 터졌고, 그 어디에서도 권력을 잡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그것은 국가관료주의에 대항하는 혁명이었고, 개인적 해방과 정치적 해방을 분리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혁명이었으며, 그 혁명이 남긴 가장 영속적인 유산은 현대 페미니즘의 탄생일 것이다." (213-214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심리정치 - 신자유주의의 통치술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군주의 권력이 군림하던 시대가 지나고 규율 권력의 시대가 왔다. 규율 권력을 기반으로 한 생정치는 개인의 몸을 정형하고, 인간을 규범 체계 속에 묶어두며 모든 것을 통제했다. 그리고 새롭게 도래한 신자유주의의 권력은 빅데이터를 통해 인간의 심리를 파악하고 심지어 예측하는 심리정치의 시대를 알린다. 그것은 더이상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강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사라고, 더 하라고 부추길 따름이다. 긍정성의 과잉 상태야말로 신자유주의 이전과 이후를 가르는 권력의 차별성이다.


투명성이 강조되고, 개인은 이제 자발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데 익숙해져 있다(SNS에 한번만 들어가봐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심리 지도를 구축한 빅데이터는 인간의 욕망을 끊임없이 부추기고, 인간을 끊임없이 자아의 최적화를 욕망하는 경영자로, 자기 착취자로 만들었다. 빅데이터는 더이상 우리를 감시하지 않는다. 투명성이 강조되면서 만인에 의한 만인의 감시 체제가 성립되었기 때문이다. 빅데이터는 우리의 모든 것, '좋아요'를 통해 표현되는 심리 상태까지 모두 기록하고 이를 바탕으로 예측할 따름이다. 근대의 빅브라더는 빅데이터로 전환된 것이다.


문제는, 이 책의 서술이 내가 살고 있는 사회와 일치하는지 여부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그리고 내면의 기록이 범람하는 디지털 사회에 살고 있으면서 끊임없는 자기 혁신(이라고 쓰고 착취라 읽는다)과 최적화(힐링으로 대표되는 세태)를 추구하는 분위기를 보고 있으면 보이지 않는 빅데이터의 손길이 아른거린다. 하지만 눈을 조금만 돌려보면, 여전히 한국 사회는 빅브라더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사회다.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잦아진 "2분 증오"의 편린들, 전혀 투명해지지 않고 감춰지는 정보들은 우리가 여전히 규율 권력의 시대를 살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표라고 말할 수 있다.


더 나아가서, 한없이 투명해지는 것은 소비자일 뿐, 우리에게 소비재를 제공하는 대상은 전혀 투명하지 않다. 신자유주의가 노동자를 자기 경영자로 탈바꿈시켜 자신의 자유를 착취하게 만든 것은 사실이지만, 친절해진 빅브라더/빅데이터는 여전히 베일에 감춰져 있다. 우리의 욕구를 우리 자신이 인식하기도 전에 그것을 예측해 눈앞에 내놓을 따름이다.


한병철의 책을 처음 읽었는데, 다른 작품인 『피로사회』와 『투명사회』도 이 책의 연장선상에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심리정치』가 셋 중에 가장 나중에 나온 것으로 보이긴 하지만). 결국 피로는 자기 착취가 진행 중임을 나타내는 표지일 것이고, 투명사회는 디지털 심리정치를 가능하게 한, 빅데이터의 탄생을 초래한 원인일 것이다. 저자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날카롭게 벼려져 현대 사회의 이면을 찌르고 있고, 어렴풋이 짐작은 했지만 명료하게 표현할 수 없었던 신자유주의 질서에 대한 생각이 언어화되어 있었다. 다만 한국 사회가 규율 권력의 시대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기에 잘 적용되지 않았을 따름이다. 빅브라더와 빅데이터가 뒤섞인 이곳은 아직 권력이 '스마트'해지진 않았다.


저자가 내리는 결론은 "바보"가 되는 것, "바보짓을 통해 침묵과 고요, 고독이 있는 자유로운 공간"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모든 커뮤니케이션과 네트워크에서 벗어나 있는, 어떤 상상을 초월하는 외부 공간"에 거주하는 것, 그로 인해 주체로부터 해방되고 탈예속화·탈심리화의 상태에 이르는 것이 바보가 되는 길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완전히 다른 삶의 형식을 낳는 자유의 실천"이다. 그러나, 이러한 실천은 결국 개인으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어떤 흐름을 형성해서 신자유주의 질서에 반하는 새로운 변혁을 창조할 수 있을까? 이미 자본이 부여한 자유의 착각에 깊이 얽혀버린 현대인에게, "바보"가 되는 길은 새로운 인간형의 등장뿐인가? 내가 이토록 회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바보"가 되는 길이 보이지 않기 때문인지, 이미 견고해진 구조에 맞설 수 있는 개인의 의지를 신뢰할 수 없게 되어서인지 알 수가 없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6-05-04 16: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병철의 책을 출간 순서대로 읽어보면 전작에 언급했던 주제를 무한 루트로 반복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도돌이표인거죠. ㅎㅎㅎ

아무 2016-05-04 17:14   좋아요 0 | URL
어쩐지.. 분명 심리정치를 읽고 있는데 투명성이 자주 나와서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군요 ㅎㅎ 이 책 먼저 읽고 다른 책도 읽어보려 했는데 고민이 됩니다..^^;;
 

고전이란 누구나 이야기하지만 읽은 사람은 많지 않은 책, 또는 시대를 막론하고 그 의미가 바래지 않는 책을 말하기도 하지만, 현대로 오면서 너무나 당연한 말들로 남은 책을 가리키기도 한다. 내가 처음 『자기만의 방』을 읽을 때의 감상은 그랬다. 하지만 읽을수록 현대 사회는 울프가 살았던 사회에서 얼마나 많이 변했는지를 생각하게 되었고, 이내 씁쓸해졌다. 비단 한국 사회만 그런 것은 아니다. 울프나 밀이 말하는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주제들은 제도적으로 이미 해결된 문제처럼 보이지만, 제도 아래 감춰진 허상을 생각하면, 갈 길이 너무나도 멀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민음사에서 나온 『자기만의 방』은 「자기만의 방」과 「3기니」를 한 권으로 묶었다. 「자기만의 방」이 전달하는 메시지는 책을 읽지 않아도 워낙 널리 퍼져 있는 것으로, 여성이 픽션을 쓰기 위해서는 고정된 수입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 강연문에서 저 유명한 셰익스피어의 누이, 주디스 이야기가 나온다. 주디스를 통해 울프가 말하려는 바는 결국, 남자들의 질타와 억압이 여성의 재능을 가로막고, 이런 배경에서는 어떤 여성도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셰익스피어 시대에 어떤 여성이 셰익스피어의 재능을 갖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셰익스피어 같은 천재는 교육받지 못하고 노동하며 노예처럼 사는 사람들 가운데서 태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천재는 영국의 색슨족이나 브리튼족에서 태어난 적이 없으며 오늘날 노동 계층에서도 태어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천재가 어떻게 여성들 가운데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트리벨리언 교수에 의하면 여성들은 아이 방에서 나올 나이가 되기 이전부터 가사를 시작해야 했으며, 그렇게 하도록 부모들에게 강요받고 법과 관습의 강제력에 의해 억눌렸던 것입니다. (75-76쪽)


굉장히 현실적인 조건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작품 전체로 보았을 때 울프가 지향하는 바는 저 멀리에 있다. 여성 작가들이 자신의 성에 구애받지 않는 문학, 남성들에게 받았던 억압에 대한 반발심이 전혀 티가 나지 않는 문학, 양성성을 갖춘 문학을 쓰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이상을 실현하기에는 기본적인 조건도 보장되어 있지 않았기에, 그녀는 고정된 수입과 자기만의 방이라는, 대단히 현실적인 조건을 제시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미 제도상으로는 울프가 말하는 두 가지가 모두 가능했다는 점이다. 울프가 이 강연문을 썼을 때는 이미 기혼 여성의 재산 소유가 법으로 허용되었고, 1차 대전 이후 여성의 참정권 역시 보장되었다. 전문직에 나아갈 수도 있었다(성직은 제외하고). 그러나 남녀 간의 임금 격차는 어마어마했고(요즘도 자주 듣는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인가), 여성이 글을 쓴다거나 교육을 받는 일은 사회적인 멸시를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울프는 여성이 오롯이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자신이 되지 못하도록 막는 모든 억압과 차별에 맞서기 위한 필요조건으로 자기만의 방을 내세웠을 것이다. 꽤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 세계는 얼마나 바뀌었나.


이 나라에서는 9초마다 한번씩 여자가 구타당한다. 확실히 짚어두는데, 9분이 아니라 9초다. 배우자의 폭행은 미국 여성의 부상원인 중 첫번째다. 질병통제센터에 따르면, 매년 발생하는 그런 부상자 200만명 가운데 50만명 이상은 의료 처치를 받아야 하고 145,000명 가량은 입원해야 한다. 사후에 치과 치료를 받아야 하는 여성이 얼마나 되는지는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낫겠다. 미국 임신부의 사망원인 중 수위에 꼽히는 것 또한 배우자 폭행이다.

- 리베카 솔닛,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창비, 2015, 49-50쪽)


울프의 시대에는 언급되지 않던 것들이 수면 위로 올라왔을 뿐, 차별의 역사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듯 보인다. 의식의 변화는 미세하게나마 보이는 듯해도, 그것이 평등으로의 진일보를 보여주진 못한다. 이 에세이는 '여성과 픽션'이라는 주제에 걸맞게 현실과 가상을 오가며 울프의 주장과 문학관을 세련되게 표현하고 있지만, 울프의 연인이었던 비타 새크빌-웨스트도 "이 책의 거슬리는 점들을 싫어"했다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니, 주류 남성 사회에서 보였을 반응은 무관심 또는 멸시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반응은 그녀가「3기니」를 쓰게 된 배경이 된다.


「3기니」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세 통의 편지에 대한 자신의 답변을 피력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세 통의 편지는 '문화와 지적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방법을 문의한 중년 변호사의 편지, 여자대학 재건 기금을 요청하는 편지, 여성의 전문직 진출을 원조하려는 협회의 기금 요청 편지다. 각 장은 울프가 이들에게 1기니를 동봉하기로 결정하기까지 어떤 숙고의 과정을 거치는지를 보여주는데, 「자기만의 방」과 달리 이 작품에는 울프의 분노가 어려있다. 그리고 그 분노의 끝에는 전쟁의 시발점이 된 파시즘과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가부장제가 존재한다. 그것은 현대 사회를 바라보는 솔닛의 태도와도 비슷한 측면이 있다.


"지금 남성들을 빈둥거리도록 내몰고 있는 여성들이 진정으로 있어야 할 곳은 가정이다. 더 많은 남성들에게 일거리를 주도록, 그리하여 그들이 지금은 접근할 수도 없는 여성들과 결혼할 수 있도록, 정부가 고용주들에게 압력을 넣을 때가 되었다." 이 옆에 다른 문장을 인용해 봅시다. "국가의 삶에는 두 가지 세계, 즉 남성의 세계와 여성의 세계가 있다. 자연은 현명하게도 남성에게 그의 가족과 국가를 보살피도록 위탁했다. 여성의 세계는 그녀의 가족과 남편, 아이들과 가정이다." 전자는 영어로 기록되었고 후자는 독일어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이 두 가지가 동일한 것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영어로 말하건 독일어로 말하건 간에, 이것은 둘 다 독재자의 목소리가 아닙니까? (259-260쪽)


그녀의 이름은 아프리카였다. 그의 이름은 IMF였다. 그는 그녀에게 올가미를 걸어 약탈당하게 했고, 보건 써비스를 폐지하게 했고, 굶주리게 했다. 자신의 친구들을 배불리기 위해서 그녀에게 쓰레기를 투척했다. 그녀의 이름은 남반구였다. 그의 이름은 워싱턴 컨센서스였다. (...) IMF는 포식세력이었다. 개발도상국들의 문호를 열어젖혀 부유한 북반구와 강력한 초국적기업들의 경제공세를 겪게끔 만들었다. IMF는 포주였다. 어쩌면 지금도 그렇다.

- 리베카 솔닛,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72-73쪽)


현대 사회의 신자유주의 질서를 젠더의 관점으로 보는 것은 나에게 생소한 것이었다. 하지만 「3기니」를 함께 놓고 보면 솔닛의 관점이 울프의 그것과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울프는 남성성이 갖는 특질 자체에 더 초점을 둔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가부장제 역시 폭력이나 잔인함 등으로 대표되는 남성성의 발현으로 파악한다는 이야기다.


「3기니」에서 세 편지들에 대한 답변은 교육, 전문직, 문화와 지적 자유에 대한 의문 제기로부터 시작한다. 울프는 '교육받은 남성의 딸'이 전쟁을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이야기하는데,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아웃사이더'로서의 여성의 역할이다. 당시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제도(교육과 전문직, 문화 등을 모두 포함해서)는 냉혹함과 폭력을 부추기는 역할을 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제도 밖으로 밀려나 있었던 여성이 전쟁을 막고 평화를 지킬 수 있다는 것이다. 오랜 시간 동안 여성의 교사 역할을 해온 '가난, 순결, 조롱, 비실재적 충성심으로부터의 자유'는 여성을 무급 직업에 어울리는 사람으로 만들었지만, 전쟁을 야기한 제도와 문화에 물들지 않게 해주기도 한다는 것이 주장의 핵심이다.


울프의 주장은 폭력성, 잔혹함이 내재된 남성성과 대비되는 여성성의 긍정적 측면을 전제하고 있으며, '비실재적 충성심으로부터의 자유'에서 무국적성으로 확대되는 주장은 세계보편주의 같다는 느낌도 준다. 하지만 남성성과 여성성이 울프가 말한 것처럼 명백하게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하지만 솔닛의 책을 읽다보면 왜 폭력성이 남성에게만 현저하게 나타나는지 고민하게 된다...), 교육받은 여성으로 범위를 한정하여 계급적인 측면을 무시했다는 점에서 그녀의 견해가 비판받기도 한다. 하지만 「3기니」의 주를 보면, 울프는 교육받은 자가 '노동 계층에 속하는 체하'는 것을 경계했기에 자신이 속한 계층에 한정해서 이야기를 전개할 수밖에 없었다. 성적 차이에 있어서는, 그것이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흐름의 결과 형성된 것으로 본 것이라고 변명할 수도 있지 않을까? 어쩌면 그 시기를 살았던 개인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울프가 아웃사이더로서의 여성의 활동을 강조하면서도 마지막까지 두려워하는 것은 남성의 강력한 잠재의식적 동기, 즉 지배의 욕구다(울프가 인용한 그렌스테드 교수의 말에 따르면 '유아 집착증'이다). 지배 욕구에 대한 두려움은 결국 남성성에 대한 두려움으로 귀결되고, 이는 다시 독재자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미지화된다. 하지만 그녀는 '우리 자신이 그 인물과 분리될 수 없고 바로 그 인물 자체'이며, 그렇기 때문에 두려움의 형체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 여성은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을 할 것이라고 답하며 글은 마무리된다. 그녀의 궁극적인 주장은 사실 이상주의에 가깝고, 남성과 여성의 이분법적 사고에 근거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두 작품의 문제의식이 유효한 것은 여전히 가부장제의 모순이 유효하고, 여전히 여성에게 실질적인 '자기만의 방'이 제공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쓰다보니 (또다시) 기승전결없이 생각나는 대로 쓴 글이 되어버린 듯하다. 워낙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핵심만 추려내지 못하는 내 능력 탓이다. 사실 정말 중요한 이야기는 따로 있다. 여전히 사회 구조나 관습이 여성을 평등하게 대우하지 않는데도, 여성의 평등을 보장하는 정책들이 '지나치다'는 시선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여성 혐오의 언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여성 혐오의 언어와 사고가 다시 공론화되기 시작한 것은, 미디어가 페미니즘의 자극적인 면모에만 주목하고 부각시킨 것이 한몫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언론만을 탓할 수 있을까? 플랫폼이 바뀌었다. 자극적이어야만 헤드라인에 올라가고, 그것은 더 자극적인 내용에 의해 지워진다). 다시 돌아와서, 여전히 혐오의 언어가 난무하는 사회에 '자기만의 방'은 진짜 있는 것인가. 혹, 아웃사이더(outsider)였던 여성이 권리를 보장받으면서 내부(inside)로 들어와 다시 그 체제에 종속되어 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여전히 젠더가 해결되지 않는 이슈라는 점에서, 『자기만의 방』이 갖는 가치는 아직 유효하다. 울프의 주장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