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있는 방의 장판을 새로 깔면서 대대적인 정리를 해야 할 위기에 처했었다. 10년이 다 되어가는 앵글로 된 책장을 보기 싫다는 동생의 성화에 버리자고 내어놓으니 당장 쌓아놓은 책이 갈 곳이 없는 것이다. 중고 가구점을 기웃거리면서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데 아는 동생이 가구의 재배치며 책의 정리를 돕겠다고 팔을 걷고 달려들었다. 먼지는 쌓이기가 무섭게 닦고 또 닦으면서도 정리하고 정돈하는 재주는 영 젬병인지라 여차하면 그냥저냥 살 생각이었는데 성격 급한 그녀가 일요일 날 공구상자를 자전거에 싣고 쳐들어왔다. 그제야 늦잠에서 일어나 아침도 못 먹고 눈을 비비고 있는데 바지런하기도 하지.


그녀는 실로 괴력의 소유자였다. 장롱이며 책장 냉장고 따위를 번쩍번쩍 들어 자리 배치를 하고 늦장을 부리는 나를 재촉해서 일을 해치우는데 누가 주인이고 누가 객인지 미심쩍었다. 집안 구석구석을 둘러보며 보기 싫은 못이며 불필요한 전선들을 찾아 잘라주고 남길 것과 버릴 것을 즉각적으로 결정하는 그녀가 참말이지 신기했다. 덕분에 생각지도 않은 획기적인 변화를 주면서 너저분하게 널려있던 책들이 모조리 질서정연하게 책장 속으로 위로 들어갔다. 못이 있는 곳을 가릴 심산으로 대충 걸어놓았던 액자와 거울도 그녀가 적당하다고 정하는 자리에 놓여졌다.


그녀를 지켜보면서 그동안 한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나의 정체성에 대해 마구 의구심이 솟구쳤다. 별로 문제라는 의식도 없이 어지간히도 대책 없이 살았구나 싶었다. 하다못해 못 하나도 빼거나 박을 줄도 모르는 인간이 혼자서도 잘 살 거라고 큰소리를 쳤던 것이다. 실상 나란 인간은 주변인들에게 엄청 민폐를 끼치며 살고 있음을 자각해 버렸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도대체 있기나 한가. 자립은커녕 매사에 의존적이지 않은가. 


P.S. 그녀를 배웅하기 위해 대문을 나섰는데 뒤따라서 나오던 그녀 덜컥 대문을 닫아 버렸다.  아니, 열쇠도 없이 나왔는데 대문을 잠가버리면 어쩌라고. 졸지에 집 없는 아이가 되어 발을 동동 구르는데, 용감한 그녀 담을 넘어가겠단다. 위험하다고 극구 말리는 내 손을 뿌리치고 결국 담을 넘어갔다. 넘어가다가 콰당 엉덩방아도 한번 찧어주고는 유유히 대문을 열고 나오는 그녀. 나는 헛헛하게 웃으며 그녀의 등짝을 후려갈기며 무탈하게 집안으로 들어와서 낄낄 웃어댔다. 사람의 이면이랄지 의외성을 발견했을 때의 즐거움이 허파를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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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 백화점 앞에서 나이가 너무 많다 싶은 할머니 두 분이 전단지를 돌리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내밀어 공손하게 받아들고 오면서도 연신 뒤를 돌아보는데, 난데없이 미친 듯한 바람이 불어왔다. 누군가가 받아서 버렸을 전단지 몇 장이 빙글빙글 돌며 날아가고 있는 중에도 할머니들은 젊은 발걸음들을 쫓아다니며 전단지를 내밀고 계셨다. 날은 점점 어두워 가는데 돌아갈 집은 어디인지 그 집에는 누가 기다리고 있는지 궁금해 하는 내가 있다.


가난이 분명 죄는 아니지만 때로는 부끄러울 때가 있다. 부자 앞에서 움츠러들고 당당하지 못할 때, 내가 짐작하는 그런 의미로 무시를 당했다고 느낄 때다. 아는 여자가 있다. 매사에 솔직한 그녀는 돈이 없다는 말을 쉽게 뱉는다. 이유가 궁금해서 물어봤더니 무시하지 않고 그냥 웃을 것 같아서란다. 어느 날은 어떤 쇼핑몰에서 몹시 싸가지가 없는 종업원에게 심한 무시를 당했다며 분개했다. 물건 값을 깎으려 했더니 안 판다며 오히려 큰소리를 내더란다. 사지 않겠다며 던져주고 왔어야지 했더니, 자기는 그게 안 된다며 하소연이다. 마땅히 따지고 권리를 주장하고 무엇보다 말다툼을 벌이는 일이 싫어서 손해를 감수하지만 그렇게 고스란히 참고 삭혀둔 것은 두고두고 상처로 남기 마련이다.


나는 그녀에게 다음부터는 다소 무식해 보이더라도 큰소리를 내어 싸우라고,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어 화를 내는 것은 아주 솔직한 감정일 뿐이라고 일러준다. 그러나 남의 부당함에는 손을 들어 분개하면서도 정작 나 스스로의 일에는 무관심한 편이다. 가슴과 머리에 오래 담아두지 않는 편리한 성격 탓도 있지만 드물게 싸워야할 땐 확실히 끝장을 보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끝장이란 말 그대도 진짜 끝장이다. 사람이니 코드가 맞아 죽이 척척 맞는 관계도 있지만 척을 지고 원수처럼 지낼 수도 있지 하면서도 나란 인간의 그릇이 이것밖에 안되는 구나 싶어 한심스럽다.


미친 듯이 부는 바람에 머리카락과 옷자락을 날리며 돌아오는 길. 계절이 가을로 바뀌었다는 생각. 거리에는 벌려 논 좌판을 거두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을 흘낏 지나쳐 빠른 걸음을 옮기는, 짧지만 씩씩한 내 다리. 9월 어떤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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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2005-09-29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슴과 머리에 오래 담아두지 않는다니... 좋은 성격인걸요? ^^

겨울 2005-09-29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요, 무심하고 차가운 성격이래요.

로드무비 2005-09-30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필요에 의해서 그런 전략 아닌 전략(마음에 담아두지 않는 것)을
선택하신 게 아닐까요? 자기도 모르게......
저도 그런 경향이 좀 있어서.^^
할머니들이 전단지를 돌리시거나 모두 합해 5천 원도 안 될 것 같은
푸성귀를 내다파시거나 빈병들을 모으거나 하는 모습들이 눈에 들어오면
아닌게 아니라 자꾸 뒤돌아봐져요.


겨울 2005-09-30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맞아요. 전략 아닌 전략. 그런데 강한 척도 자꾸 반복하다보면 내가 정말 강하다는 착각에 빠집니다. 거기다 남들이 인정을 하기 시작하면 그래 나는 이런 인간이었어라고 확신을 하죠.
 

 

혼자 사는 게 외롭지 않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무슨 재미로 사는지 혹은 무섭지 않은지. 외로움, 외롭다는 거. 나는 외로운가? 언뜻 의미가 잡히지 않아서 전전긍긍하다가 외로운지 아닌지도 모르는 바본가 싶어서 하하 웃고 마는데. 과거로 돌아가 보면 정말 외롭다고 생각했던 시절은 가족 안에서, 친구들 속에 있을 때였다. 견디다 못해 죽음을 꿈꿨던 것도 사람들과 부대낄 때였다. 그러니 혼자라서 외롭다는 의미에 기겁을 하지.


주말에 가족을 만나러 가는 일을 절반은 의무감 책임감에 떠밀려 치루다 보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다. 아직은 젊음과 건강이 따라주기 때문이라는 엄마의 말씀에도 일리가 있다. 더 나이 들거나 병이 들게 된다면....... 좀, 고통스럽고 괴로울 것이다. 하지만 고통을 나눈다고 고통이 사라지거나 즐거움이 되지는 않으니 혼자서 겪은 들 어떠랴. 병원에 다녀온 조카의 소식에 벌써 며칠을 심란해 하고 마음이 아픈 것을 보면 혼자서 짊어지는 짐의 무게가 아무리 무겁다한들 나눌 사람을 구할 마음도 없다. 가족이나 타인의 고통에 대해 안다는 것과는 또 다른 문제다. 


미래는 여전히 불안하다. 십대에도 그랬고 이십대에도 그랬다. 삼십대라고 다를 리 없고 사십대도 역시 그럴 것이다. 애초에 불안한 영혼을 소유했으니 감수하는 것은 당연하다. 피하거나 망각할 생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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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5-09-29 0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말이 그말입니다. 마음이 안맞는 다른 이와 같이 있을 때, 엄청난 외로움이 밀려오죠. 그럴 땐 혼자 있을 때가 훨씬 더 낫다고 생각하죠...저도 그랬었어요

2005-09-29 08: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잉크냄새 2005-09-29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군중속의 고독 이란 말이 이리도 오랫동안 이어져 가나 봅니다.

겨울 2005-09-29 2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 지나서 읽어보니 외롭지 않다는 말은 외롭다의 간곡한 표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오래 전 한 친구가 외롭지 않다는 건 지독한 이기심 내지 옹고집이 아니냐고 화를 낸 적이 있었는데, 뭐든 혼자서도 잘해요라는 태도가 가까운 사람을 화나게 한다더군요. 늘 입버릇처럼 아프다 힘들다고 말하는 사람을 위로할 줄은 알면서 정작 본인은 그 말을 뱉어 본 적이 거의 없으니.... 정말, 이상하죠.

겨울 2005-10-08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내가 아는 그녀 맞나요? 씩씩함과 건강함을 두로 겸비한 정신의 소유자, 반가워라. ^^
 

 

추석 전전날, 이유 없이 마당에서 넘어지셨다는 할머니, 괜찮으려니 하시면서 병원에도 안가고 버팅기시다가, 오늘 종합병원 응급실로 실려 가시다. 웬 교통사고 환자가 그리도 많은지, 가족들이 떼를 지어 들이닥치는 응급실 한 귀퉁이에서 그래도 가장 무난해 보이는 할머니를 보는 마음이 짠한 것이. 엑스레이 사진을 찍어보니 손목뼈 부근에 작은 조각들이....... 일단 반 깁스를 하고, 낼 전문의에게 정확한 진단을 받아봐야 한다고 응급의가 설명한다. 조각이라니, 부러지거나 금이 간 것보다 더 나쁜 상황 아닌가? 며칠간 통증도 심하셨을 텐데 어떻게 참으셨는지. 노인들의 괜찮다는 말은 절대 곧이곧대로 믿어서는 안 되는데, 그나저나 큰일이다. 두고 온 할머니가 못내 걱적되어 쓰라린 마음과는 달리, 돌아오는 길은 생각 외로 수월했다. ........ 그래서, 덜 피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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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5-09-18 1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런... 빨리 쾌차하시기 바랍니다. 할머님들은 늘 그러시더라구요. ㅠ.ㅠ

겨울 2005-09-19 2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문의의 진찰을 받은 결과 뼈가 부서진 것은 아니고 인대가 늘어난 정도랍니다. 손목이 많이 붓고 통증도 굉장히 심해서 걱정을 많이 했는데 한시름 놓았습니다.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페터 회 지음, 박현주 옮김 / 마음산책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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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여름은 유난히도 힘겨웠다. 먹고 자고 일어나는 기본적인 일상을 지속하는 것조차 버거워 헐떡였다. 그리고 기력이 쇠한 이유를 나이 탓으로 돌렸다. 먹을 만큼 먹었잖아. 힘든 게 당연해. 더 이상 핑계 댈 마땅한 게 없으니 가장 만만한 나이를 들먹이는 허접함, 동정표를 기대하는 비겁함에 이를 악물며 울음을 참아냈다. 그나마 잘한 일이지 암, 잘했어.


그리고 스밀라, 그녀를 만났다. 아름다운 눈 위의 스밀라, 무소의 뿔처럼 돌진하는 스밀라, 참을성이나 신중함, 두려움과 공포를 모르는 얼음공주 스밀라와 만났다. 사춘기 시절 가슴에 품었던 제인 에어의 독기와 고집을 닮은 이 여주인공의 매력에 소설을 읽는 내내 낄낄 웃어댔다. 행복해서, 그녀가 사랑스러워서, 내가 처한 세속적인 문제들을 그까짓 꺼, 라는 한마디로 무시할 것 같은 여자라서 흥에 겨웠다. 그래서 주문처럼 스밀라, 스밀라, 스밀라 하고 부르면 삶의 해법을 제시해 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이 소설의 처음은 빠르게 읽히지 않는다. 그럴 수가 없다. 어린 이사야의 참혹한 죽음 앞에서 에둘러 가거나 속도를 내는 건 불가하다. 아이에 대한 묘사와 스밀라의 기억과 마주치면 주춤 읽기를 멈추고 숨을 참아야한다. 등장하는 하나하나의 인물들이 저마다 비밀과 신비를 품고 있지만 그 중, 누구보다 눈부신 존재는 단연 이사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아이를 까마득한 지붕 위에서 천길 아래 차가운 눈 속으로 밀어낸 어떤 존재, 거대한 그 무엇의 실체를 감지하고 무모하고 과격하게 전사처럼 달려가는 스밀라를 놓칠 수가 없다.


어머니의 죽음이후 누구에게도 어디에도 속하거나 지배받기를 거부했던 스밀라가 유일하게 소통했던 이웃, 작은 소년 이사야는 스밀라의 고향과 닮았다. 불모의 땅 그린란드, 강인하고 민첩한 이누이트 여인이었던 어머니의 나라, 이제는 갈 수 없는 땅에 대한 그리움과 상처 그리고 동경을 공유했던 사랑하는 이사야가 죽었다. 경찰은 단순한 실족사로 단정하나 눈 위의 발자국을 따라서 스밀라에게만 보이는 지도에는 그 사건이 사고가 아닌 살인임을 알아챈다. 


스밀라를 스밀라이게 하는 무시할 수 없는 존재로서 어머니가 있다. 스밀라의 속절없는 상처, 혹은 열정과 냉소는 그녀로부터 왔다. 스밀라는 척박한 땅, 그린란드의 생존방식인 추적과 사냥의 습성을 문명세계에서도 그대로 답습한다. 마치 자궁으로의 회귀를 꿈꾸듯이, 야만과 문명의 경계에서, 스밀라의 사색과 고독은 달콤한 초콜릿 같은 유혹의 냄새를 흩뿌린다. 그리하여, 기꺼이 중독 되어지기를.

 

아직 겨울은 멀지만 그 겨울이 어서 오기를, 그리하여 스밀라의 감각으로 눈과 얼음의 결정을 들여다보는 몽상에 잠긴다. 늦더위에 숨을 몰아쉬며 걷다가도 스밀라의 눈을 떠올리면 서늘한 기운과 함께 정신이 명료해지는 듯한 착각, 물론 과도한 감정이입과 상상력이다. 그러나 책을 읽는 내 멋대로의 방식에 대해 누가 뭐랄 것인가.


보통 한번이면 충분하지만 이 책은 처음보다 느리게 다시 읽고 싶다. 스토리에 빠져들어 원치 않음에도 중반부터 후반까지를 너무 빨리 읽고야 말았다. 


진흙탕을 지나 수면으로 떠올라온 듯한 기분이 드는 아침이 있다. 발은 시멘트 덩어리에 묶인 채로. 밤사이에 숨을 거두어버렸다는 것과 벌써 죽어버려서 생명력 없는 기관들을 이식해줄 수도 없다는 것 외에는 별로 좋아할 만한 일도 없음을 알게 되었을 때와 같은 기분. 일주일의 일곱 번 아침 중의 여섯 번이 그렇다. 


이런 사유는 밑줄을 그어가며 천천히 읽고프다. 무릎을 탁 치면서. 책의 첫 장을 열었을 땐 누가 이사야를 죽였는가에 대한 통렬한 분노로 떨었으나, 마지막 장을 덮은 지금은 그 연약한 아이를 무방비상태로 방치하고 제물로 내어준 무력하고 나약한 알코올중독자인 엄마, 율리아네에 대한 분노로 떨린다. 그녀는 왜 스밀라와 스밀라의 어머니처럼 강하지 못했을까. 그렇다면 이사야는 죽지 않았을 테지. 그리고 이 소설을 읽을 수도 없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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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09-17 0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읽어보고 싶지만, 책을 구입만 해놓은터라.. 잠시 미룹니다..;;
우울과 몽상님, 행복한 추석 보내세요(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