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 백화점 앞에서 나이가 너무 많다 싶은 할머니 두 분이 전단지를 돌리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내밀어 공손하게 받아들고 오면서도 연신 뒤를 돌아보는데, 난데없이 미친 듯한 바람이 불어왔다. 누군가가 받아서 버렸을 전단지 몇 장이 빙글빙글 돌며 날아가고 있는 중에도 할머니들은 젊은 발걸음들을 쫓아다니며 전단지를 내밀고 계셨다. 날은 점점 어두워 가는데 돌아갈 집은 어디인지 그 집에는 누가 기다리고 있는지 궁금해 하는 내가 있다.


가난이 분명 죄는 아니지만 때로는 부끄러울 때가 있다. 부자 앞에서 움츠러들고 당당하지 못할 때, 내가 짐작하는 그런 의미로 무시를 당했다고 느낄 때다. 아는 여자가 있다. 매사에 솔직한 그녀는 돈이 없다는 말을 쉽게 뱉는다. 이유가 궁금해서 물어봤더니 무시하지 않고 그냥 웃을 것 같아서란다. 어느 날은 어떤 쇼핑몰에서 몹시 싸가지가 없는 종업원에게 심한 무시를 당했다며 분개했다. 물건 값을 깎으려 했더니 안 판다며 오히려 큰소리를 내더란다. 사지 않겠다며 던져주고 왔어야지 했더니, 자기는 그게 안 된다며 하소연이다. 마땅히 따지고 권리를 주장하고 무엇보다 말다툼을 벌이는 일이 싫어서 손해를 감수하지만 그렇게 고스란히 참고 삭혀둔 것은 두고두고 상처로 남기 마련이다.


나는 그녀에게 다음부터는 다소 무식해 보이더라도 큰소리를 내어 싸우라고,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어 화를 내는 것은 아주 솔직한 감정일 뿐이라고 일러준다. 그러나 남의 부당함에는 손을 들어 분개하면서도 정작 나 스스로의 일에는 무관심한 편이다. 가슴과 머리에 오래 담아두지 않는 편리한 성격 탓도 있지만 드물게 싸워야할 땐 확실히 끝장을 보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끝장이란 말 그대도 진짜 끝장이다. 사람이니 코드가 맞아 죽이 척척 맞는 관계도 있지만 척을 지고 원수처럼 지낼 수도 있지 하면서도 나란 인간의 그릇이 이것밖에 안되는 구나 싶어 한심스럽다.


미친 듯이 부는 바람에 머리카락과 옷자락을 날리며 돌아오는 길. 계절이 가을로 바뀌었다는 생각. 거리에는 벌려 논 좌판을 거두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을 흘낏 지나쳐 빠른 걸음을 옮기는, 짧지만 씩씩한 내 다리. 9월 어떤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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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2005-09-29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슴과 머리에 오래 담아두지 않는다니... 좋은 성격인걸요? ^^

겨울 2005-09-29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요, 무심하고 차가운 성격이래요.

로드무비 2005-09-30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필요에 의해서 그런 전략 아닌 전략(마음에 담아두지 않는 것)을
선택하신 게 아닐까요? 자기도 모르게......
저도 그런 경향이 좀 있어서.^^
할머니들이 전단지를 돌리시거나 모두 합해 5천 원도 안 될 것 같은
푸성귀를 내다파시거나 빈병들을 모으거나 하는 모습들이 눈에 들어오면
아닌게 아니라 자꾸 뒤돌아봐져요.


겨울 2005-09-30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맞아요. 전략 아닌 전략. 그런데 강한 척도 자꾸 반복하다보면 내가 정말 강하다는 착각에 빠집니다. 거기다 남들이 인정을 하기 시작하면 그래 나는 이런 인간이었어라고 확신을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