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페터 회 지음, 박현주 옮김 / 마음산책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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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여름은 유난히도 힘겨웠다. 먹고 자고 일어나는 기본적인 일상을 지속하는 것조차 버거워 헐떡였다. 그리고 기력이 쇠한 이유를 나이 탓으로 돌렸다. 먹을 만큼 먹었잖아. 힘든 게 당연해. 더 이상 핑계 댈 마땅한 게 없으니 가장 만만한 나이를 들먹이는 허접함, 동정표를 기대하는 비겁함에 이를 악물며 울음을 참아냈다. 그나마 잘한 일이지 암, 잘했어.


그리고 스밀라, 그녀를 만났다. 아름다운 눈 위의 스밀라, 무소의 뿔처럼 돌진하는 스밀라, 참을성이나 신중함, 두려움과 공포를 모르는 얼음공주 스밀라와 만났다. 사춘기 시절 가슴에 품었던 제인 에어의 독기와 고집을 닮은 이 여주인공의 매력에 소설을 읽는 내내 낄낄 웃어댔다. 행복해서, 그녀가 사랑스러워서, 내가 처한 세속적인 문제들을 그까짓 꺼, 라는 한마디로 무시할 것 같은 여자라서 흥에 겨웠다. 그래서 주문처럼 스밀라, 스밀라, 스밀라 하고 부르면 삶의 해법을 제시해 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이 소설의 처음은 빠르게 읽히지 않는다. 그럴 수가 없다. 어린 이사야의 참혹한 죽음 앞에서 에둘러 가거나 속도를 내는 건 불가하다. 아이에 대한 묘사와 스밀라의 기억과 마주치면 주춤 읽기를 멈추고 숨을 참아야한다. 등장하는 하나하나의 인물들이 저마다 비밀과 신비를 품고 있지만 그 중, 누구보다 눈부신 존재는 단연 이사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아이를 까마득한 지붕 위에서 천길 아래 차가운 눈 속으로 밀어낸 어떤 존재, 거대한 그 무엇의 실체를 감지하고 무모하고 과격하게 전사처럼 달려가는 스밀라를 놓칠 수가 없다.


어머니의 죽음이후 누구에게도 어디에도 속하거나 지배받기를 거부했던 스밀라가 유일하게 소통했던 이웃, 작은 소년 이사야는 스밀라의 고향과 닮았다. 불모의 땅 그린란드, 강인하고 민첩한 이누이트 여인이었던 어머니의 나라, 이제는 갈 수 없는 땅에 대한 그리움과 상처 그리고 동경을 공유했던 사랑하는 이사야가 죽었다. 경찰은 단순한 실족사로 단정하나 눈 위의 발자국을 따라서 스밀라에게만 보이는 지도에는 그 사건이 사고가 아닌 살인임을 알아챈다. 


스밀라를 스밀라이게 하는 무시할 수 없는 존재로서 어머니가 있다. 스밀라의 속절없는 상처, 혹은 열정과 냉소는 그녀로부터 왔다. 스밀라는 척박한 땅, 그린란드의 생존방식인 추적과 사냥의 습성을 문명세계에서도 그대로 답습한다. 마치 자궁으로의 회귀를 꿈꾸듯이, 야만과 문명의 경계에서, 스밀라의 사색과 고독은 달콤한 초콜릿 같은 유혹의 냄새를 흩뿌린다. 그리하여, 기꺼이 중독 되어지기를.

 

아직 겨울은 멀지만 그 겨울이 어서 오기를, 그리하여 스밀라의 감각으로 눈과 얼음의 결정을 들여다보는 몽상에 잠긴다. 늦더위에 숨을 몰아쉬며 걷다가도 스밀라의 눈을 떠올리면 서늘한 기운과 함께 정신이 명료해지는 듯한 착각, 물론 과도한 감정이입과 상상력이다. 그러나 책을 읽는 내 멋대로의 방식에 대해 누가 뭐랄 것인가.


보통 한번이면 충분하지만 이 책은 처음보다 느리게 다시 읽고 싶다. 스토리에 빠져들어 원치 않음에도 중반부터 후반까지를 너무 빨리 읽고야 말았다. 


진흙탕을 지나 수면으로 떠올라온 듯한 기분이 드는 아침이 있다. 발은 시멘트 덩어리에 묶인 채로. 밤사이에 숨을 거두어버렸다는 것과 벌써 죽어버려서 생명력 없는 기관들을 이식해줄 수도 없다는 것 외에는 별로 좋아할 만한 일도 없음을 알게 되었을 때와 같은 기분. 일주일의 일곱 번 아침 중의 여섯 번이 그렇다. 


이런 사유는 밑줄을 그어가며 천천히 읽고프다. 무릎을 탁 치면서. 책의 첫 장을 열었을 땐 누가 이사야를 죽였는가에 대한 통렬한 분노로 떨었으나, 마지막 장을 덮은 지금은 그 연약한 아이를 무방비상태로 방치하고 제물로 내어준 무력하고 나약한 알코올중독자인 엄마, 율리아네에 대한 분노로 떨린다. 그녀는 왜 스밀라와 스밀라의 어머니처럼 강하지 못했을까. 그렇다면 이사야는 죽지 않았을 테지. 그리고 이 소설을 읽을 수도 없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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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09-17 0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읽어보고 싶지만, 책을 구입만 해놓은터라.. 잠시 미룹니다..;;
우울과 몽상님, 행복한 추석 보내세요(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