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 살아났다. 뭐, 죽었던 건 아니지만 죽을 것 같았으니까 살아났다는 말이 맞다. 요 몇 년 크게 아파보질 않아서 이번에도 금방 나으려니 했는데, 독하게도 나흘이나 아팠다. 그래도 병원에 안가고 버텼으니 장하다고 해야 하나 아님 미련하다고 해야 하나. 가족 누군가 있었으면 병원가라고 엄청 잔소리를 들었을 터이지만 큰 병 아니라는 생각에 아침저녁으로 아스피린 하나씩 삼키며 제발 떨어져 나가라고 기원했다. 몸살이 나면 무엇보다 괴로운 건 무엇을 먹어도 맛이 없다는 것이다. 살기 위해서 억지로 먹다보면 체하거나 토한다. 김치 냄새도 싫고 기름 냄새도 싫고 밥 냄새도 싫어진다. 그러다보니 며칠 만에 얼굴이 반쪽이 됐다. 혈색이라곤 하나 없이 창백한 얼굴과 검은 다크써클이 귀신 저리가라다. 내가 봐도 무섭다.


나이 드신 할머니 그리고 부모님을 뵈러갔던 지난 주말에 무리를 하긴 했다. 그러나 내 체력이 약하다는 핑계를 대고 마냥 놀고 먹다가 올 수가 없음이다. 점점 나이 들어가는 게 확연히 보이는 부모님을 보면서 마음도 복잡하고 그래서 괜히 씩씩한 척 팔을 걷어 올리고 좀 심하게 노동을 한 결과가 요 모양이라는 것이 한심할 뿐이다. 설거지 조금에 청소, 할머니 머리 감겨드리고 몸 좀 닦아드렸다고 몸살이 났다는 게 창피할 지경이라 아프다는 말도 못했다. 그렇잖아도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성화셨는데, 아팠다고 하면 얼마나 지청구를 하실까.


돌아오는 주말에도 시골엘 간다. 할머니 생신을 겸해서 온 가족이 모이는 자리라 필히 참석해야만 한다. 쉬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건만 빠졌다가는 내년이 평탄치 못하다. 그런 고로 일찍 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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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5-12-29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셔요. 아프시다니 얼른 몸을 추스리시기 바랍니다

물만두 2005-12-29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여 주무세요~

비로그인 2005-12-29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울과몽상님!!

로드무비 2005-12-29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고......잘 좀 챙겨 드시고요.

2005-12-30 09: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겨울 2005-12-30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하늘바람님. 거의 나았습니다.
물만두님^^ 지나치게 많이 잤어요.
비숍님^^ 네~
로드무님^^ 엄살 엄청 부렸어요. 만나는 사람마다 아프다고 징징 거렸고요. 어려서는 참는 게 미덕인 줄 알았는데, 나이 먹으니 그 반대가 되었어요.
검은비님^^ 건강하세요. 몸은 물론이고 마음도요.
그리고 ****님^^ 전 역시 아스피린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 싶어요.

여기에 들러주신 모든 분들 감사해요. 그리고 새해에도 행복하시기를~

잉크냄새 2006-01-07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셨군요. 이제는 건강하리라 생각합니다.
새해 건강하시고 복 많이 받으세요..

겨울 2006-01-07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후, 다 나았습니다. 황금같은 주말 시간에 님을 뵈니 참 반갑네요. ^^
잉크냄새님도 건강하시고 복 많이 많이 받으시기를..
 

 

나는 지금도 세상에서 가장 나쁜 사람은, 나쁘면서 불쌍하기까지 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12쪽)


읽는 순간 어쩌면, 하면서 무릎을 쳤던 문장이다. 내게도 저런 사람이 있었다. 수년간 그 사람을 미워하고 한없이 증오했건만 늘 연민이 미움에 앞서서 너무 불쌍해서 내치지 못하고 끊어내지 못했던 인연 말이다.


어머니가 내게 물려준 가장 큰 유산은 자신을 연민하지 않는 법이었다. 어머니는 내게 미안해하지도, 나를 가여워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가 고마웠다. 나는 알고 있었다. 내게 ‘괜찮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정말로 물어오는 것은 자신의 안부라는 것을. 어머니와 나는 구원도 이해도 아니나 입석표처럼 당당한 관계였다.(16쪽)


자신을 연민하지 않는 법이라. 부럽고도 부러운 유산이다. 스스로를 연민하며 허송세월을 보낸 사람은 안다, 그것의 무해함 무가치를. 어느 정도의 친분이 쌓이면 사람들은 쉽게 속내를 드러낸다. 친절을 가장한 동정을 가장한 확인. 쥐뿔도 모르면서 이랬겠다 저랬겠다, 안쓰러움을 가득 담은 시선으로. 대개의 경우 나는 보이지 않는 코웃음을 친다. 댁이나 잘하세요, 라고. 관심과 위로라는 이름으로 서툴게 드러내는 관계에서의 저런 실수들을 나도 물론 저질렀다. 타인을 가볍게 쉽게 판단하고 알려하지 않기. 오늘의 다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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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 아니게, 눈이, 날린 날. 만나는 사람마다 눈 얘기라 내내 조바심을 쳤던 날. 하던 일 팽개치고 나갈 수도 없고, 좀만 더 좀만 더 외쳤던 날. 사나운 눈보라를 헤치고 미용실로 달려가 머리를 잘랐다. 앉자마자 그녀는 히터를 켠다. 나는 설레설레 켜지 말라 말한다. 뜨거운 것을 싫어해요. 얇아 보이는 스웨터 차림을 보는 사람마다 다들 놀라서 안 춰요? 하고 물어보면 서늘함을 좋아해서요. 라고 웃으며 말하지만, 사실 보이지 않게 껴입은 내의가 보온성이 뛰어난 탓임을 그들은 모른다.


짧아진 머리만큼이나 가벼워진 몸에 검은 코트를 걸치고 검은 장갑을 끼고 어두워진 거리로 나서는데 가슴이 뛴다.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은 무시무시하고 회오리 모양으로 맴도는 눈보라가 스산하건만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발걸음은 날 듯 가볍다. 미끄러울 것을 염려하여 미리 등산화도 준비했고 곧장 집으로 걷기만 하면 된다. 사람들, 차들, 불 켜진 상점가를 휙휙 지나쳐 가며 저녁으로 뭘 해 먹나, 고민한다. 가능한 따듯한 국물 있는 걸로 빠르게 만들 수 있는 것, 침대 위에는 읽어야할 책들이 쌓여있고 무엇보다 긴 휴식이 기다리고 있다.  (05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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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2005-12-18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이곳은 어제 저녁 이후로 눈이 그쳤고, 햇살이 따사롭네요. 창가에 앉아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에 눈이 부신 걸 참아내고 있습니다. 세상을 꽁꽁 얼린 추위 위로 쏟아지는 겨울 햇볕은 신의 선물 같다는 생각이, 문득.
 

   나이를 겨우 먹어가니까, 혼자서 중얼거리는 말이라면 몰라도 세상을 향하여 내놓을 수 있는 말이란 그다지 많지 않고 또 쉽지도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깨달음은 쓸쓸했지만, 도리가 없는 것이었다. 세계는 무수한 측면을 갖는다. 그 측면마다 하나의 독립된 시각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힘들여서 겨우 어떤 진술을 시도할 때 그 진술과 반대되는 또 다른 진술이 성립되어 가고 있는 것이나 아닐까, 그런 회의가 나이 든 사람을 말더듬이로 만든다. 삶 속에서 그 유효성을 검증할 수 없었던 거대하고 모호한 의미의 단어들을 만지기가 겁이 난다. 결국 끌어다 쓰지 못한다. 사전에 나와 있는 말들 중에서 끌어다 부릴 수 있는 말들은 머리카락이 빠져나가듯이 점점 줄어들어서 이제는 고작 한 움큼이다. 말들은 점점 가난해진다. 그리고 그 가난이 오히려 편안하고 가지런하다. (p.52)


몇 년 전만 해도 공감하지 못했던, 설렁설렁 넘기던 갈피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다는 것은 내가 그만큼의 나이를 먹었다는 증거인가. 이걸 슬퍼해야 하나, 아님 기뻐해야 하나. 한 가지 분명한 건 별로 좋아하지도 즐겨 읽지도 않았던 김훈의 글들이 좋아지고 있다는 거. 뭐랄까, 내용을 떠나서 글들이 참 정갈하다. 글을 잘 쓴다는 게 뭔지 비로소 알겠다. 글재주는 신이 주는 거라고 믿는다. 그러나 신의 뜻을 가지고 왈가왈부 괜히 주눅 들어 펜을 던질 필요까지는 없다고 본다(?). 환상일 만치 완벽한 글을 보고 또 보고 감탄에 감동을 더하여 숭배하는 것도 바람직하지만, 되지 않는 말이라도 주절주절 빈 공간을 까맣게 채워가는 즐거움도 만만치는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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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5-12-06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도 글도 사람과 같이 나이먹어가나 봅니다. 나이 들어 넉넉해진 사람의 모습처럼 말이죠.

겨울 2005-12-06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검은비님, 잉크냄새님, 요즘 들어 부쩍 남이 하는 말도 내가 뱉는 말도 신경이 쓰입니다. 기억했으면 했던 말이 잊혀지고, 잊었으면 좋았을 말을 기억에 담아두는 걸 보면 당황스럽고, 말을 잘 들어주는 것도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것과 잘 듣는 다는 것은 결국 잘 말한다는 것과 통하는 것 같고요..... 제대로 말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네요.
 

 

두 번을 읽어도 여전히 흥미진진한 책이다. 사자마자 후다닥 읽어치운 후 지인에게 빌려주었다가 얼마 전에 돌려받고 보니 다시 흥미가 당겨 펴들었는데, 웬걸 내용들이 생경하다. 도대체 내가 뭘 읽었길 레? 의아했지만 읽으면서 곰곰 생각하니 그럴 법도 하다. 인간을 다룬 인간의 이야기를 평소의 습관으로 빠르게 한 번 읽었다 한들 곳곳에 숨겨둔 저자의 비장의 문맥들이 제대로 기억에 뿌리내렸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재독을 유혹하는 책의 맛은 달콤쌉싸름하다. 첫 맛의 밍밍함은 다 어디로 사라지고 강하게 톡 쏘는 제 2의 맛이 기다리고 있다. 문제는 이 중대한 사실을 시시때때로 잊는 다는 것. 그래서 한 번 읽혀 뒷방 신세가 되어 먼지를 뒤집어쓰는 가엾은 책들의 운명에 대해 새삼 심사숙고를 해본다.


백미러 없는 ‘불도저’의 자신감. 현 서울시장으로서 저자의 관심 제 1순위에 오른 이명박을 지칭하는 이 말의 뉘앙스는 묘하다. 읽는 사람의 느낌이 그러하니 글을 쓴 사람의 의도가 어쨌건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언론에 보여준 부분도 그렇고 약간은 색 있는 안경을 끼고 바라본 것도 사실이고, 저명한 글쓴이까지 그렇다고 말하니 전적으로 오해는 아니라는 것이다.


병든 할머니를 모시고 있는 10대 초반의 소녀 가장에게 ‘나도 사글세방에 살아 보아서 잘 안다. 그래도 너는 내가 겪은 가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지금은 이렇게 정부에서 도움이라도 주고 있지 않니. 용기를 잃지 말거라’라는 식의 위로가 틀린 말은 아니다. 실제로 그 소녀 가장이 이명박의 어린시절보다 덜 가난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만일 그 소녀가 술주정뱅이 아버지 밑에서 허구헌날 폭력에 시달리며 성장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이때는 물리적 궁핍함보다 정서적 황폐함이 더 문제가 된다. 배를 곯지는 않지만 생활보호대상자라는 처지가 부끄러워 친구들과의 관계가 힘겹다면 그 또한 어떤 식으로든 배려할 방법을 찾아야할 문제다. 가난의 정도라는 하나의 잣대로만 한 사람의 상황을 판단할 수는 없다. ‘배부른 투정’이라는, 세사에서 가장 무지한 관용구로 넘겨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p.28)


소녀 가장 앞에 서 있던 이명박의 모습이 성공하여 배부른 억만장자라는 사실은 솔직히 구역질이 난다. 그가 뱉은 위로와 충고를 도로 밀어 넣고 싶다. 그저 말없이 안아주고 등 두드려주는 것이 백배는 진솔했을 것이다. 이런 비판의 도마 위에 올랐다는 것에 대해서도 물론 그는 철통같은 이론으로 무장하리라 의심치 않는다. 당신이 아무리 떠들어도 나는 나다. 바꿀 생각도 이유도 없다. 고 하면서.


명박은 자신이 겪은 가난의 본질에 공감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을 극복한 자기 스토리에 깊이 공감하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인간의 기억은 우월한 쪽으로 흡수된다. 과거는 찬란했으나 현재가 보잘것없는 사람은 과거 쪽으로, 과거에 비해 현재가 월등한 사람의 과거는 화려한 현재를 돋보이게 하는 장식용으로만 가능하다.(p.29)


인간의 개별성을 중시하라는 정혜신의 호소에 공감한다. 청계천 복원공사 도중에 자살한 사람의 진심을 간과하지 말라는 뼈아픈 충고에도 그가 귀를 기울이기를 바란다. 한번은 스스로의 치명적인 단점을 인정하고 그의 불도저에 밟히고 뭉개진 파편들 앞에서 겸허히 고개를 숙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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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2005-12-04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보관함으로....
다른 리뷰를 보면서도 안사고 버텼던 책인데...^^

겨울 2005-12-04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검은비님, 날개님, 제가 사는 곳에도 눈이 왔어요, 눈이.^^ 함박눈은 밤사이 내려 오는 걸 못봐 몹시 서운했지만 낮에도 슬금슬금 내렸어요. 눈 오는 날, 저는 오리털 파카 뒤집어쓰고 내내 컴퓨터 앞에 달라붙어 혼자 놀았네요. 이중창의 불투명한 창 하나를 열어 가끔 하늘과 지붕과 나무를 보면서요. 행복해라~ 중얼거리면서요. 이 책의 두 번째로 흥미로운 사람은 박근혜라지요. 천천히 읽어볼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