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겨우 먹어가니까, 혼자서 중얼거리는 말이라면 몰라도 세상을 향하여 내놓을 수 있는 말이란 그다지 많지 않고 또 쉽지도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깨달음은 쓸쓸했지만, 도리가 없는 것이었다. 세계는 무수한 측면을 갖는다. 그 측면마다 하나의 독립된 시각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힘들여서 겨우 어떤 진술을 시도할 때 그 진술과 반대되는 또 다른 진술이 성립되어 가고 있는 것이나 아닐까, 그런 회의가 나이 든 사람을 말더듬이로 만든다. 삶 속에서 그 유효성을 검증할 수 없었던 거대하고 모호한 의미의 단어들을 만지기가 겁이 난다. 결국 끌어다 쓰지 못한다. 사전에 나와 있는 말들 중에서 끌어다 부릴 수 있는 말들은 머리카락이 빠져나가듯이 점점 줄어들어서 이제는 고작 한 움큼이다. 말들은 점점 가난해진다. 그리고 그 가난이 오히려 편안하고 가지런하다. (p.52)


몇 년 전만 해도 공감하지 못했던, 설렁설렁 넘기던 갈피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다는 것은 내가 그만큼의 나이를 먹었다는 증거인가. 이걸 슬퍼해야 하나, 아님 기뻐해야 하나. 한 가지 분명한 건 별로 좋아하지도 즐겨 읽지도 않았던 김훈의 글들이 좋아지고 있다는 거. 뭐랄까, 내용을 떠나서 글들이 참 정갈하다. 글을 잘 쓴다는 게 뭔지 비로소 알겠다. 글재주는 신이 주는 거라고 믿는다. 그러나 신의 뜻을 가지고 왈가왈부 괜히 주눅 들어 펜을 던질 필요까지는 없다고 본다(?). 환상일 만치 완벽한 글을 보고 또 보고 감탄에 감동을 더하여 숭배하는 것도 바람직하지만, 되지 않는 말이라도 주절주절 빈 공간을 까맣게 채워가는 즐거움도 만만치는 않으니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잉크냄새 2005-12-06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도 글도 사람과 같이 나이먹어가나 봅니다. 나이 들어 넉넉해진 사람의 모습처럼 말이죠.

겨울 2005-12-06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검은비님, 잉크냄새님, 요즘 들어 부쩍 남이 하는 말도 내가 뱉는 말도 신경이 쓰입니다. 기억했으면 했던 말이 잊혀지고, 잊었으면 좋았을 말을 기억에 담아두는 걸 보면 당황스럽고, 말을 잘 들어주는 것도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것과 잘 듣는 다는 것은 결국 잘 말한다는 것과 통하는 것 같고요..... 제대로 말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