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난 아니게, 눈이, 날린 날. 만나는 사람마다 눈 얘기라 내내 조바심을 쳤던 날. 하던 일 팽개치고 나갈 수도 없고, 좀만 더 좀만 더 외쳤던 날. 사나운 눈보라를 헤치고 미용실로 달려가 머리를 잘랐다. 앉자마자 그녀는 히터를 켠다. 나는 설레설레 켜지 말라 말한다. 뜨거운 것을 싫어해요. 얇아 보이는 스웨터 차림을 보는 사람마다 다들 놀라서 안 춰요? 하고 물어보면 서늘함을 좋아해서요. 라고 웃으며 말하지만, 사실 보이지 않게 껴입은 내의가 보온성이 뛰어난 탓임을 그들은 모른다.
짧아진 머리만큼이나 가벼워진 몸에 검은 코트를 걸치고 검은 장갑을 끼고 어두워진 거리로 나서는데 가슴이 뛴다.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은 무시무시하고 회오리 모양으로 맴도는 눈보라가 스산하건만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발걸음은 날 듯 가볍다. 미끄러울 것을 염려하여 미리 등산화도 준비했고 곧장 집으로 걷기만 하면 된다. 사람들, 차들, 불 켜진 상점가를 휙휙 지나쳐 가며 저녁으로 뭘 해 먹나, 고민한다. 가능한 따듯한 국물 있는 걸로 빠르게 만들 수 있는 것, 침대 위에는 읽어야할 책들이 쌓여있고 무엇보다 긴 휴식이 기다리고 있다. (051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