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난설헌 시선>의 머리말이다.

조선시대 여인들은 이름이 없었다. 기생들에게나 이름이 있었지만, 그 이름은 노리개감으로 불리워지기 위해서 붙여졌던 이름이었을 뿐이다. 어렸을 때에는 간난이, 큰년이, 언년이 등의 아명으로 불렸지만 정작 족보에는 남편의 이름만 실려졌다. 말하자면 일생을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살다가 죽는 것이다. 게다가 삼종지도와 칠거지악 때문에 여자는 죽을 때까지 남자에게 매어 지내야만 했다. 이처럼 비인간적인 시대에 살면서 떳떳하게 이름과 자, 그리고 호까지 지니고 살던 여자가 바로 허초희이다.

그는 초희라는 이름 외에도 경번이라는 자를 가졌으며, 난설헌이라는 호는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다른 여인들이 가지지 못했던 이름을 가졌다는 것이 그에게는 바로 불행의 시작이었다. 이름을 가졌다는 것 자체가 남들로부터 자기 자신을 가려내는 행위이다. 그저 평범하게 살다가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죽어간 다른 여인들과는 달리, 스스로가 평범하기를 거부한 것이다. 그는 이 땅 위에서 겨우 스물 일곱 해를 살다가 갔지만 그 짧은 세월 속에서도 가장 뛰어났던 여자로서, 그리고 을 살다가 간 것이다.

난설헌의 시가 정한의 눈물로 얼룩지게 된 것은 김성립에게 시집간 뒤부터이다. 안동 김씨 집안인 시댁은 5대나 계속 문과에 급제한 문벌이었다. 김성립의 아버지 김첨과 허봉이 호당의 동창이었으며 각별히 사이가 좋았으므로, 이들 사이에서 혼담이 이뤄졌다. 그러나 애초부터 김성립은 허초희와 짝이 될 수가 없었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그는 얼굴이 못생겼으며 방탕성까지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자기보다 너무나 뛰어난 난설헌에게 자존심이 상하여, 그처럼 빗나갔을 것이다. 게다가 과거 공부를 한다고 해서 집에 붙어 있지를 않았다. 강가 서당에서 글을 읽는 남편을 생각하면서 시를 지어 보냈다는 사실까지도 비난하던 시대상황 속에서, 그의 상상력은 자연히 신선세계에 노닐게 되었다. 그가 죽을 무렵에 이르러, 화려했던 친정은 몰락해 가기 시작하였다. 경삼감사로 내려갔던 아버지 초당은 서울로 올라오던 길에 상주 객관에서 객사하였다. 둘째 오빠 하곡은 율곡과 당파 싸움 끝에 갑산으로 귀양갔다. 풀려난 뒤에도 한양성 안엔 들어오지 못한다는 단서가 붙었기에, 금강산을 떠돌다가 끝내 고질병을 얻어서 객사하고 말았다. 아들과 딸이 어려서 죽고 게다가 뱃속의 아기까지 죽었으니, 난설헌의 슬픔과 괴로움은 엎친데 덮친 셈이다.

이러헌 자기의 삶과 갈들을 표현한 것이 바로 <난설헌집>에 실린 211편의 시이다. 난설헌은 죽으면서 자기의 시를 모두 불태워 버렸지만, 아우 허균이 자기가 베껴 놓은 것과 자기의 기억을 더듬어 엮어낸 것이다. 이 시집은 우리 나라뿐만이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서도 출판되었다. 특히 중국에는 <난설헌집>에도 실리지 않은 시들이 그의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그의 시들 가운데 90편을 뽑아서 이번 기회에 펴낸다. 난설헌에 관한 글들이 많지만 오해인 여사의 난설헌시집과 허미자 교수의 허난설헌연구에서 도움을 받았다. ------1987년 9월 허경진 

덧붙일 것도 뺄 것도 없는 난설헌의 일대기다. 그녀의 시에는 슬픔이 가득하다.

지난해에는 사랑하는 딸을 여의고/ 올해에는 하나 남은 아들까지 잃었네/ 슬프디 슬픈 광릉의 땅이여/ 두 무덤 나란히 마주 보고 서 있구나/ 사시나무 가지에는 쓸쓸히 바람 불고/ 솔숲에선 도깨비불 반짝이는데/ 지전을 날리며 너의 혼을 부르고/ 너의 무덤 위에다 술잔을 붓노라/ 너희들 남매의 가여운 혼은/ 생전처럼 밤마다 정답게 놀고 있으리라/ 비록 뱃속에는 아이가 있다 하지만/ 어찌, 제대로 자라날 수 있으랴/ 하염없이 슬픈 노래를 부르면서/ 피눈물 울음을 속으로 삼키노라

아마도 피를 토하듯 써 내려갔을 이 시는 아이를 낳아보지 못한 이라도 가슴이 미어진다.

아름다운 비단 한 필 곱게 지녀왔어요/ 먼지를 털어내면 맑은 윤이 났었죠/ 한 쌍의 봉황새 마주 보게 수 놓으니/ 반짝이는 무의가 그 얼마나 아름답던지/ 여러 해 장농 속에 간직해 두었지만/ 오늘 아침 님 가시는 길에 드리옵니다/ 님의 옷 만드신다면 아깝지 않지만/ 다른 여인의 치맛감으론 주지 마셔요

곱게 다듬은 황금으로/ 반달 모양 만든 노리개는/ 시집올 때 시부모님이 주신 거라서/ 붉은 비단 치마에 차고 다녔죠/ 오늘 길 떠나시는 님에게 드리오니/ 먼 길에 다니시며 정표로 보아 주세요/ 길가에 버리셔도 아깝지는 않지만/ 새로운 연인에게만은 달아 주지 마셔요

지아비를 향한 이 절절한 소망만 보아도 난설헌이 얼마나 솔직하고 용기있는 여자였는가를 알 수가 있다. 그녀의 사상과 바램은 시대를 앞지르나 두 발을 딛고 선 공간은 하늘을 가린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폐쇄된 양반가였다. 자유롭고 진보적인 친정 집에서의 습관이 몸에 배인 것이 결국은 그녀의 숨통을 조르는 무기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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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4-04-07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대를 잘못 타고났지요. 혼자 힘으로 시대를 바꿀 수도 없었구요. 그래도 그녀가 있기에, 조선시대의 역사가 쓸쓸하진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겨울 2004-04-07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는 게 녹녹치 않을 때마다 그녀를 떠올립니다. 그 지독한 세상에서도 영혼만은 자유롭게 신선의 세계를 노닐었지요. 시대를 잘못 타고났다는 생각은 저도 가끔 하는데, 한살 터울인 오라버니 밑에서 받은 차별이 특히나 서러웠을 때인데, 그것도 '써클'이란 이란 영화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학대와 구속을 당하는 여성들을 보니 또 아무것도 아니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