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처음 읽은 것은 1989년 8월이다. 속표지 여백에 초록색의 볼펜으로 선명하게 써 있는 "나는 행복하게 되고 싶지 않다. 다만 생생하고 활동적이길 바란다." 라는 버나드 쇼의 글이 인상적이다. 그로부터 십여 년, 지금의 나는 안일한 행복만을 꿈꾼다. 활동적인 생생함과는 완전히 반대편에 있다.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씁씁함.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디서 어떻게 무엇을 할 것인지를 찾아서 두문불출 하던 시기에 읽었던 책 한 권은 마치 종교나 마약과도 같은 영향을 끼쳤다. 세상을 보고 사람을 판단하는 잣대도 이 책을 통해서였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책읽기를 시도한 것도 아마 이 즈음이었을 것이다. 이 책에 언급된 모든 책들을 거의 설렵했으니까.

<아웃사이더의 특징으로 서먹서먹한 감정이나 비현실성을 들 수가 있다. 죽어버려서 사후의 세계의 살고 있는 듯한 이 비현실감은 때때로 청천벼락과 같이 사람들을 엄습한다. 건강하고 신경이 민활할 때는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건강한 사람은 다른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도 않고 불확실한 방향으로는 눈도 돌리지 않기 때문일 뿐이다.

그러나 일단 그것을 보았던 사람에게는, 세상은 두 번 다시 이전과 같이 있는 그대로의 장소일 수가 없다. 안락한 부르조아의 고립 세계에 안주하면서, 그가 보고 접촉한 것을 현실로써 받아들이고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이 바로 아웃사이더라는 것을 바르뷔스는 보여주고 있다.

"나는 너무 깊게, 그러면서도 너무 많이 본다"고 했지만 그의 눈에 비치는 것은 본질에 있어서 혼돈이다. 부르즈와에게는 이 세계가 질서 있는 정연한 사회인 것이다. 불합리하고 두려운 불온의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현실에만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부르즈와는 그것을 무시할 수 있는 것이다. 아웃사이더에게는 세상이 합리적인 것도, 질서있는 것도 아니다. 부르즈와의 자기만족인 용인의 태도에 저항하여 아웃사이더가 무정부주의적인 감정을 주장한다면, 그것은 그의 감정을 건드리는 세속적인 관행을 멸시하거나 조소하려고 한 때문만이 아니라,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진리는 이야기되어야 한다'는 것과 그렇지 않으면 궁극적인 질서 회복은 바랄 수 없다는, 어쩔 수 없는 감정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비록 희망의 여지가 없더라도 진리를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아웃사이더는 깨어나서 혼돈을 본 인간이다. 아웃사이더는 혼돈이 적극적인 것이며 생명의 근원이라고 믿을 만한 이유를 갖고 있지 않은 지도 모른다. 유태인의 신비 사상에 의하면, 혼돈이라는 것은 질서가 잠재하는 상태에 불과하다. 즉 알은 새가 창조되기 전의 혼돈에 불과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는 말하지 않으면 안되며, 혼돈에는 맞부딪칠 수밖에 없다.>

다시 읽노라니 이게 무슨 말인가 싶다. 24세의 젊은 나이에 쓴 재기발랄한 주제의 글이지만 무언가 정리되지 않고 엉성한 것이 의미전달이 불분명하다. 아니면 번역상의 오류일까.  그것도 아니면 이런 류의 글이 더이상 감동을 주지 않을 만큼 감성이 녹슬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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