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오와 일기라는 부제가 말하듯, 이 책은 작가가 미국 아이오와주 아이오와 시티 아이오와 대학에서 주최하는 International Writing Program에 참가하며 씌어진 일기다. 지난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내 일기를 읽는 머쓱함에 비해 타인의 일기를 훔쳐보는 느낌은 지극히 비밀스럽고 설렌다. 더구나 이렇게 편견없이 소탈한 작가의 색이 분명한 글을 만나기란 쉽지 않으므로, 최승자가 누구지? 라는 호기심에서 비롯된 탐색은 그녀의 시집이며 에세이 번역서등을 찾기에 이르렀다.

여자로서 괜찮은 여자를 발견하는 것은 괜찮은 남자를 발견하는 것보다 가치가 크다. 이 나라에서 여자로 태어나서 살아보지 않으면 결코 모를 경험과 사유를 공유했다는 가치만으로 책을 통해 만난 그녀는 근사했다. 어지간하지 않고는 두어 번을 찾아 읽기가 드문 책 중에서도 손이 닿는 자리에 놓고 보는 책이란 얼마나 특별한지. 유독 여성작가에게서 동지애를 느끼는 것은 나 뿐일까?

이 책의 하단에는 전체적으로 누런 커피 얼룩이 번져있다. 때문에 누구에게도 선뜻 빌려주기 꺼렸던 탓인지, 영구적으로 내 소유가 되었다. 책에 관련한 나쁜 버릇 중에 하나가 너무 괜찮다 싶으면 반강제적으로 지인들에게 읽으라고 권하는 것인데, 그러다보면 그 책을 다시 돌려받기가 요원할 때가 많다. 다시 갖고 싶으면 새로 사던가 그게 귀찮으면 영영 무소유다. 그러지말자고 매번 결심하지만 혼자보기 정말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 걸 어쩌랴.

아이오와에 관한 몇 가지 이야기들....

'이곳 아이오와 시티에서 발견한 재미있는 현상 중의 하나는 한 대학을 졸업한 뒤에 또 다른 대학에 들어가 또다른 것을 배우는 사람들이 무지 많다는 거다. 한국에서처럼, 대학을 졸업한 뒤에 일류기업체나 아니면 대학이거나, 아무튼 사회적인 신분과 안정된 생활기반을 얻기 위해 어떤 안정된 시스템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잘 보여주는 것이 이곳 X세대의 용어들이다. slacker는 본래 회피하는 사람, 게으른 사람, 병역기피자 등의 뜻을 갖고 있는데 X세대적 의미로는, 되도록이면 최소한의 일을 하면서 살아가고 흔히 서너 가지의 중요한 창작품을 쓰고 있는 중이며 -대개는 결코 완성되는 법이 없는- 그런 완정되지 않을 창작을 추구하는 것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terminal wanderlust는 결코 한 군데 머무는 법 없이 이 도시 저 도시, 이 대학 저 대학으로 떠돌고 고정된 직장을 갖지 않고 끊임없이 이 Mcjob(임금도 낮고 내노랄 것도 없고 안정성도 없고 품위도 없고 미래도 없는 서비스 분야의 직업, 이를테면 피자 배달부 같은 임시 직업)에서 저 맥잡으로 전전하는 것을 뜻하고 여기엔 제삼세계를 방문하는 것도 포함된다. 말하자면 한국에 가서 영어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것도 터미널 원더러스트에 들어가는 거다.

mid twenties breakdown은 20대 중반에 겪는 정신적 붕괴를 말하는데, 그것은 학교를 벗어나서 혹은 조직화된 환경을 벗어나면 제 구실을 못하는 무능력과 이 세상에서 자신은 원래부터 외롭다는 자각 때문에 생긴다는 것이다. 판단마비는 문자 그대로 무제한적인 선택권이 주어질 때,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하는 판단마비 증세'

개인적으로는 슬랙커와 터미널 원더러스트를 지향한다. 최근 눈에 많이 띄는 외국인의 다수는 저런 종족들인가. 경제적 문화적 우월감으로 똘똘 뭉친 거만한 외국인들을 보면 화가 난다. 생존과는 무관하게 제3세계를 유랑하는 그들의 색깔있는 눈이 거북하다. 그들의 옆에서 유창한 영어를 쓰는 한국인도 또한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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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 2004-06-04 0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자로서 괜찮은 여자를 발견하기 어렵다는 말 맞아요. 최승자씨의 시는 전에 읽은 적이 있었는데 이 책은 모르는 책이네요. 남의 일기 읽는 것이 소설읽기보다 재미있을 때도 있어요. 이 책 언젠가는 읽어야 할 책에 넣어야겠어요.

겨울 2004-06-04 2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저는 이 책이 절판되었다고 생각했을까요. 검색해 보니 여전히 건재하네요. 깨끗하고 예쁜 책으로 다시 사고 싶어라..... 독자를 행복하게 만드는 책 중의 하납니다. 필히 보셨으면 좋겠네요.
 

처음 이 만화 봤을 땐, 어 그림이 이게 뭐야 혹은 또 요상한 스토리군 했다. 그러다가 여기저기서 이 만화에 대한 찬사들이 쏟아져나오면서 아는 게 약이라는 신념으로 읽기 시작. 지금은? 이성과 감성이 오랜만에 함께 흥분한 만화라고 지인들에게 열변을 토하는 중.

등가교환은 연금술에서 필연의 법칙이다. 무언가를 원하면 같은 값으로 대가를 치뤄야한다.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엄마가 죽었다. 어린 두 형제는 연금술사인 아버지의 재능을 이어받아 아기적부터 연금술을 놀이삼아 성장했고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창조하는 그 매혹적인 작업에 매료되었다. 그들이 원하는 단 하나의 소망은 죽은 엄마를 다시 만드는 것.

연금술에서 절대 해서는 안 될 인체의 연성을 시도한 에드와 알 형제는 결국 참혹한 대가를 치루는데, 알의 육신과 에드의 다리 하나를 잃는 것. 그리고 알의 혼을 연성하는 대가로 다시 팔 하나를 내어준 것. 거구의  강철 갑옷에 갇힌 알의 혼을 부여안고 에드는 피눈물을 흘리며 맹세한다. 널, 반드시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려 줄게.

이야기는 '현자의 돌'이라고 알려진 연금술의 최후의 비법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두 형제의 모험을 다루고 있는데,  시공간이 불분명한 시대는 내란으로 인해 혼란 속에 있고 국가에서 공인하는 연금술사의 자격증을 가진 '군부의 개'는 국가의 부름에 언제 어느 때라도 달려가 전투에 임해야 한다.  최연소의 나이로 국가 연금술사 자격증을 취득한 에드는 그 특권을 이용해서 자신이 실패한 인체 연성의 비밀에 한걸음씩 다가가고....

이 만화의 매력은 그 조악하고 거칠은 그림에도 불구하고 눈물샘을 자극한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그들을 버리고 떠났다. 엄마는 두 형제를 위해 고생하다 병에 걸려 죽었다. 어린 두 형제는 연금술로 엄마를 살릴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어 위대한 스승을 찾아가 갖은 고난을 겪으며 연금술사의 수련에 정진한다. 그러나 그 소망은 산산히 부서지고 지울 수 없는 상처만을 남겼다. 이야기 안에는 상당히 유쾌하고 재밌는 부분들이 많지만 그럼에도 본질은 진지하고 어둡다. 그래서 읽히는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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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4-05-27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을것 같네요. 저도 한번 읽어볼 생각입니다.^^
 

글 / 위미경(만화칼럼니스트)

"난 서른이 되기 전에 인생의 숙제 둘 중에 하난 해결할 줄 알았어. 결혼하거나 일에 성공하거나 근데 이게 뭐냐고, 서른이 코앞인데 당장 이달 카드값은 어떻게 할 지 그 걱정뿐이야."

작년에 개봉했던 영화 '싱글즈'를 보며 이 땅의 20대 후반, 30대 초반 미혼여성들은 거의 자신의 일기장을 보는 것 같았으리라. 직장에서의 좌천, 오랜 연인과의 이별, 결혼적령기를 이미 벗어난 나이에서 생기는 새로운 만남에 대한 두려움과 관계의 지속에 대한 불안.... 나난의 옥탑방이나 새로운 연인의 설정은 여성의 환상을 자극하기 위해 만들어진 듯 조금 비현실적이긴 했지만 그 속에 담긴 고민은 스물여덟의 나에게 공감과 위로, 약간은 안이한 안심과 희망을 안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다가 생각났다. 만화 '금지된 사랑'에서 지이가 읊조린 대사가.

"서른이 넘으면 어떤 느낌이 들까. 쓸데없이 격정적이던 십대와 방향을 갈피 못잡는 이십대를 보내고 서른이 넘으면, 서른이 넘으면... 조금은 평화로울까?"

'싱글즈'에 앞서 1999년에 발표된 만화 '금지된 사랑'의 주인공 지이는 직장을 잃고, 5년간 사귄 애인에게서 이별 통지를 받는다. 작가 한혜연은 '그치는 것을 금한다'라고 해석하며 결코 멈출 수 없는 사랑을 제목에서 얘기하는데, 만화는 박동을 멈추는 하나의 사랑에서 출발한다. 사랑을 잃은 그녀의 마음의 흐름을 따라 조용히 흘러가는 만화는 작가의 현실적 감각이 살아있는 연출(그녀의 만화는 머리를 묶는 손가락 놀림의 묘사에서도 그 진가를 찾을 수 있다)을 따라 십대의 그녀와 현재의 그녀를 교차하고, 주변인들의 사랑 이야기를 에두르다가 강과 강이 만나듯 끊임없이 유입되는 새로운 사랑을 예고하며 끝을 맺는다.      그 사랑은 스물일곱의 지이에게는 부러운 대상이었던 삼십 대의 태경. 자신을 편안하게 받아주는 태경을 보며 서른의 평화를 궁금해 하는 지이는 나와 별 다르지 않았다.  

위의 질문을 십대 때부터 읊조리던 나는 왜 그리 조급한 애늙이였을까. 십대의 격정 따위가 실질적인 소용을 낳지는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이십대가 되어봤자 방황만 할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나이기에 스무 살의 성인식은 전쟁 전의 공포와 집단 환각이 뒤엉킨 축제, 전야제였다. 어디선가 책임과 의무가 슬금슬금 걸어 들어와 덮칠 것 같은 그 날 밤, 문을 꼭 잠그고 난생처음 소주 한 병을 비우고 쓰러진 나는 서른을 기다리는 데 스물의 대부분을 바친 것 같다.

사랑을 처음 잃었을 때도, 그리고 불신감에 두 번째 사랑을 포기할 때도, 연애와도 같은 직장 생활을 아슬아슬 이어나갈 때도 서른이 넘으면 모든 것은 나름의 자리를 찾아갈 줄 알았다. 그러나 지이가 그랬듯이 나 역시 이제 알겠다. 자신의 힘겨운 상황을 고백하며 눈물짓는 태경을 안고 위로하는 그녀의 말처럼, 삼십대 역시 힘들게 사랑하고, 힘겹게 살아가긴 마찬가지라는 것을, 그렇게 살아가면서 아무에게도 상처주지 않으려 애쓰면서, 자신도 상처입지 않으려 애쓰면서 그러면서도 삭막하게 메말라가지 않으려 애쓰면서 산다는 것을 말이다. 삶은 그렇게 사랑과 이별, 상처와 회복을 반복하며 이어져가는 것이다.

'금지된 사랑'은 사랑을 멈추지 말라고 말한다. 아! 4년간 이 책을 가지고 있었지만 미련하게도 이제야 알았다. 왜 작가가 마지막에 양희은의 노래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를 틀어줬는가. 다시 또 사랑을 할 수 있을까란 질문을 왜 던지는가. 사랑이 그쳤던 시점에서 시작하여, 다시 새로운 사랑을 할 수 있었던 지이, 그 사랑을 떠나보낸 지이와 진정 금지된 사랑을 하고 있던 친구 희성에게 이 음악은 쓸쓸함이 아니라 희망으로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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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진 이 책의 발행 연도는 1983년이고 값이 3000원이다. 헐, 언제적 이야기냐. 누렇게 변색된 것은 둘째치고 겉표지가 너덜너덜한 것이 보기가 눈물겹다. 고서적으로 간직한다면 모를까, 다시 읽기에는 무리가 많다. 다시 구입해야지, 생각은 했다가도 귀찮기도 하고 낭비같기도 해서 여직껏 버텼는데 5월이 되어 다시 꺼내니 왠지 가슴이 짠한 것이다.

이 책은 당시 대학생이었던 오빠의 서가에서 슬쩍 한 것인데, 읽은 것을 후회한 몇 권의 책 중의 하나가 되었다. 타인의 삶으로 인해 끔찍할 정도로 가슴이 아파했고, 평전 속의 그와 다를 바 없는 나를 자각한 것도 괴로웠고, 그럼에도 그가 느낀 분노와 열정의 1%도 내게 없다는 사실에 좌절했기 때문이다. 고작 내가 한 거라곤 그가 했던 일 속으로 무모하게 뛰어드는 정도였달까. 그리고 그 시도는 무참한 실패로 끝났다. 물 위에 뜬 기름처럼 겉돌다가 이쪽도 저쪽도 아닌 경계에서 길을 잃었을 뿐, 내게 파업은 무섭고 추운 밤이었다는 기억 뿐이다. 지식으로써의 노동운동은 삶에서의 이상을 실현시키고 인간의 본질을 탐구케 하지만 노동자로서의 현실은 무력감과 무료, 무지와의 질긴 싸움일 따름이었다. 노동은, 고된 밥벌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고 고용인의 의식화는 피고용인의 의식화가 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고통만이 가중될 뿐이라는 거다. 

지금이라면 싸우는 방법도 알고 피하는 요령도 알겠는데, 시간은 너무 흘렀고 돌아가는 것은 더구나 불가하다. 함께 일하며 웃고 울던 그 시절의 친구들은 무엇이 되어 살고 있을지. 다시 만나면 얼싸안고 눈물부터 흘릴 것 같은데, 세월에 무뎌진 기억 한 모퉁에 죽어도 지워지지 않을 얼굴들이 있다. 현주, 재희, 미희, 용자, 영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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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4-05-09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님이 노동운동의 대열에 있었던 적이 있었나봐요. 전 이 책 읽고 저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에 치를 떨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아름다운 영혼에 가슴 뛰었구요. 전태일과 조영래. 머리와 손과발이 전혀 일치하지 않는 저같은 사람에 비하면 현장에서 고뇌한 님은 노동자로서의 노동운동이 아니었다하더라도 그런 사람들에게 자그마한 힘이 모름지기 되었을 겁니다. 소위 지식인으로서의 노동운동, 그것마저도 먼 나라의 이야기인 보통의 사람들에 비하면요. ^^

겨울 2004-05-09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동자로서 현장에 있었고 파업이 끝난 후에는 사측으로 돌아서 보상을 받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힘없고 약한 친구들이 말 한마디로 해고되어 떠나는 것도 수없이 보았죠. 끌어안고 우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시절입니다.
 

어린 시절의 나는 꽤나 식탐이 강한 아이였다. 넉넉하지 못한 살림이라 간식이란 듣도 보도 못하고 하루 두 끼를 먹으면 잘먹었다 하던 시절이라 먹거리에 대한 욕심이 강하다한들 양껏 먹은 기억도 물론 없지만.

동네 구멍가게 앞을 지나는 일이 고역이지만 그렇다고 부모님을 졸라 먹을 것을 사달라 떼를 쓰던 철부지도 아닌지라 그져 꾹꾹 참고 또 참기만 했던 것 같다. 또래의 아이들이 10원, 20원 짜리 군것질을 하는 걸 부러움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만 보는 자존심 강한 여자애라니, 지금 생각해도 가엾다.

도시락이 없는 점심시간의 곤혹스러움을 피해 교사 주변을 배회해 본 사람이 아니면 굶주림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는 것이다. 하긴 요즘 시대에 굶주림이 어쩌구 하는 것이 어불성설인가.

결핍에는 반동으로 그것을 채우려는 무의식적인 욕구가 따르는데, 하나만 있어도 충분하건만 후일을 위해 꼭 두 개 이상을 챙기려는 의지가 그것이다. 저장이나 저축이 나쁜 건 아니지만 굳이 지금이 아니어도 되는 욕심을 부리는 스스로가 구차하다 느끼는 게 문제다.

그 시절, 우연찮게 읽게 된 이 책,  '이반데니소비치의 하루'가 없었다면 난 여전히 유년의 결핍을 상처처럼 끌어안고 있지 않을까.  긴긴 노동수용소의 하루를 이반 데니소비치라는 비루하고 약한 인간을 주인공으로 삼아 그려낸 소설은 적당한 유머와 소소한 에피소드로 짜여져 무척 재밌게 읽힌다. 일생보다 긴 딱 하루, 한 끼의 형편없는 식사를 사수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고 비굴의 극치를 달리는 모습은 눈물겹다. 건더기도 없는 묽은 죽 한 그릇을 향한 이반 데니소비치의 기대와 실망과 체념을, 당연한 죄수의 몫으로 읽고 지나칠 수도 있다.

그러나 어쩐일인지 내겐, 그것이 번쩍이는 충격이었다.  최소한의 배고픔을 채우는 것 이외에는 먹거리에 대한 일체의 욕심을 버리자는 다짐 아닌 다짐을 한 계기다.  수도승이 아닌 다음에야 완벽히 식탐을 버릴 수는 없으나 살아오는 내내 그것은 잣대가 되어주었다.  먹을 거리를 다스리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는 각종 다이어트 열풍이 몰아치는 이즈음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다. 어찌해서 입맛은 건조하기 짝이없고 미식의 미자와 요리의 요자도 모르는 여자가 되었지만 이 식성은 죽을 날까지 변하지는 않을 것 같다.

한 끼의 기름진 식사를 마주하고 굶어 죽어가는 아이를 노리는 독수리가 있는 흑백사진을 떠올리는 것은 지나친 결벽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마지막 가는 길에 굶어죽기를 선택한 스콧 니어링을 따라 그렇게 죽기를 바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선택.  한 권의 책의 의미는 이렇게 삶과 죽음을 아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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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4-04-26 0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스콧 니어링이 죽음에 이르러 먹을것을 끊고 자신을 구성하던 유기체들의 떠나감을 자유로이 해준 그의 마지막 삶의 부분을 몇번이나 반복해서 읽었습니다. 죽음을 또 다른 삶의 연장선으로 바라본 그의 관조적 삶의 태도가 무척이나 존경스러웠죠.

프레이야 2004-04-26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참 인상깊게 읽었어요. 그리고 한 끼 식사앞에서 진지한 눈빛을 쏘고 있는 독수리와 새까맣게 타들어가듯 마른 몸으로 웅크리고 있는 여아의 사진, 아주 충격적이었죠. 목숨이란 건 그렇게 질기고 염증 나는 것인가봐요. 익숙해져서 뭐가뭔지도 모르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겨울 2004-04-26 2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가 지난 뒤에 내가 쓴 글을 읽으면 이게 뭐냐 싶으리만큼 엉망인 경우가 많다. 뒤죽박죽 일관성도 없고 창피할 만큼 감상적이다. 소시적 국어시간, 네 글은 절대 잘 쓴 글 아닌데... 하시면서 애들 앞에서 낭독을 즐겨하신 선생님의 의도는, 그럼에도 흥미진진하더라?

stella.K 2004-04-27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쓰셨는데요. 이 책이 유명한 줄은 알고 있으면서도 한번도 읽을 생각을 못했네요.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다가 잊혀지곤 하는 책. 님의 리뷰 읽고 꼭 읽어 봐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강하게 드네요. 님의 닉네임으로 된 책두요.^^

겨울 2004-04-27 2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라보고만 있어도 배가 부른 책이 포의 '우울과 몽상'이라죠. 일단은 두껍고 무거워서 야구 방망이 대용으로(?) 좋고, 아무리 읽어도 끝이 보이지 않아서 좋고, 그 제목이 무엇보다 좋아서 제일 맘에 든다는 말도 안되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