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책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4
카를로스 마리아 도밍게스 지음, 조원규 옮김 / 들녘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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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책, 제목부터 뭔가 수상하다. 위험한 책이라니.
   하이애나 처럼 책들을 킁킁대다가 발견한 이 책은 생김새부터 위험한 책이라는 그 이름을 무색치 않게 하고 있었다.
   작가 소개에는 <도밍게스는 책이 인생을 바꿔놓는다고 생각한다>고 적혀있었다.
   하지만, 우연인지 이 책과 내가 인연처럼 만날 운명이었는지 난 <도밍게스는 책이 인생을 망쳐놓는다고 생각한다>라고 읽어버렸고, 그 말 때문에 피식 웃으며 이 책을 신청해버렸다.
   버스에 앉아 다시 이 책을 펴 볼 때까지도 난 <책이 인생을 망쳐놓는다>고 읽었고 세 번째 읽고서야 환상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바꿔놓는다>로 제대로 읽을 수 있었다.
   어쨋든 그렇게 수상한 경로로 이 책은 날 자기 인생에 끌어들였고, 그 자체로도 이 책은 내게 위험한 책이 되기 충분하다.
 
   책의 첫장부터 이 책은 "어때. 나 멋지지? 흥미진진해지지 않아?" 라며 내게 말을 걸었다. <1998년 봄, 블루마 레논은 소호의 어느 책방에서 에밀리 디킨슨의 구판본 시집을 사서, 첫 번째 교차로에 이르러 막 두 번째 시를 읽으려는 순간 자동차에 치이고 말았다.>
   에밀리 디킨슨... 영시 시간에 날 얼마나 괴롭힌 인물이란 말인가... 에밀리 디킨슨의 이름에 한번 치를 떤 후에, 그 다음 말에 소리 내 웃고 말았다.
   사실, 이 첫 문장을 읽을 때 나 역시 이 책을 들고 길을 나서며 읽고 있었던 터라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받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자동차에 치이고 말았다니...
   그 다음 장은 더 가관이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고전문헌학 전공인 레오나드우드 교수는 노년에 이르러 반신마비가 되었는데, 도서관에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다섯 권이 제자리에서 빠져나와 그의 머리에 떨어져버린 탓이었다. 내 친구 리처드는 손끝에 닿을 듯 말 듯 한쪽 구석에 꽂혀 있는 『압살롬 압살롬』을 빼내려다가 다리가 부러졌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출신의 어느 친구는 지하 공공도서관에서 폐결핵에 걸렸고, 내가 아는 어떤 칠레산 개는 웬일인지 몹시 성이 난 어느 날 오후에 『카라마조파 가의 형제들』을 몽땅 삼켜버린 뒤 소화불량으로 죽고 말았다.>
   이 부분을 읽은 후 내가 얼마나 웃어댔는지... 작가의 상상력에 감탄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런 글을 읽으면서도 그래도 책 때문에 다치고 죽었다면 교통사고로 다치고 죽는 것보단 행복하겠네. 라는 생각이 들다니, 나 역시 위험한 책들에 중독되어 버린 것이 아닐까.
  
   이렇게 책의 앞부분만 보면, 이 책은 사람과 책 사이의 그 위험한 관계를 경고하는 내용이 아닐까 하기 쉽지만, 사실 이 책은 사랑에 관한 책이다. 사람과 책 사이의 지독한 사랑에 관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서로에 대한 지나친 사랑은 결국 파멸을 불러일으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과 책 관계에서도 상대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결국 한 사람을 파멸시키는 것이다.
   첫 장에 자동차에 치여 죽은 블루마 레논은 작중화자의 부인으로, 그녀가 죽은 후 그녀 앞으로 배달 된 한 수상한 책을 발송인에게 돌려주기 위한 과정에서 나는 과도할 정도로 책을 사랑하는 몇몇 사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과도할 정도의 책 사랑은 그녀 앞으로 책을 발송한 그 사람에게서 절정을 이르게 되는 것이다.
 
   발송인을 찾아가는 나의 여정도 흥미롭지만, 작가가 책 속에 숨겨놓은 또 다른 책 한권한권을 생각하며 읽는 것도 이 책의 큰 재미라고 할 수 있다. 또 책과 나의 관계 혹은 자신이 집착하고 있는 무언가와 자신의 관계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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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느낌일까? 세계의 걸작 그림책 지크 65
나카야마 치나츠 지음, 장지현 옮김, 와다 마코토 그림 / 보림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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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집어들고, 한 장을 넘기는 순간 내가 아이가 있다면 이 한 장에 바로 이 책을 집어들고 아이에게 읽어주었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 주위에 이 책을 읽어줄만한 아이들이 있었나? 있다면 꼭 읽어줘야 하는데.
 
 내 친구 마리는 눈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생각했다.
 안 보인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이 책의 제목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몸이 어딘가 불편한 친구들을 보며 아이는 그 친구들의 느낌을 이해해 보려한다.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를 위해 눈을 감아보고, 귀가 들리지 않는 친구를 위해 귀를 막아보며 아이는 느끼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들리지 않는 것이 슬프거나 나쁜 것은 아니구나.
 
 안 보인다는 건, 참 대단해.
 그렇게 많은 소리를 들을 수 있다니.
 보인다는 건 그런 건가 봐. 조금 밖에 들을 수 없는 건가 봐.
 
 안 들린다는 건, 참 대단해.
 그렇게 많은 것이 보이다니.
 들린다는 건 그런 건가 봐. 조금 밖에 볼 수 없는 건가 봐.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귀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 체험을 해 볼 수 있지만 부모님이 없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체험 해보기 힘들다. 아무리 생각해 보려 해도...
 하지만, 그런 과정에서 부모님이 안 계신 친구가 나를 이해해준다.
 
 움직일 수 없다는 건, 참 대단해.
 꼼짝 않고 하늘만 보고 있었어.
 다른 때보다 백배는 더 많은 생각이 떠올랐어.
 
 보이지 않는 친구를, 들리지 않는 친구를 이해하려 했던 나 역시도 움직일 수 없는 아이이다.
 하지만 내가 그 친구들의 가치를 알아주자 누군가 또 나의 가치를 알아주는 것이다.
 난 남과 다른 것이 아닌 몸이 조금 불편한 것 뿐이라는... 그리고 그 것 때문에 좋은 점도 많이 있다는..
 
 어렸을 때의 한 장면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친다. 우리 반에는 조금 이해력이 떨어지는 아이가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코에 한 가득 콧물을 머금고 다니던 그 아이는 학습능력의 부족으로 늘 선생님께 꾸지람을 들었고, 아이들은 놀 때 그 아이와 어울리지 않으려 했다.
 그 아이를 챙겨주는 아이들은 착한 어린이라며 칭찬을 받았다. 사실 착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당연한 것인데도...
 그러다 얼마 전 그 아이의 소식을 들었다. 그 아이는 벌써 결혼을 하여 또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내 기억 속의 코 흘리개 아이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어린 아이 때는, 나와 조금이라도 다른 모습의 아이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뭔가 어색한걸까? 아니면 나와는 다른 종류의 생물이라는 생각이 드는걸까?
 내 어린 시절 이야기처럼, 학습능력이 조금 떨어지는 아이만 봐도 모자란다며 손가락질 하고, 그 아이를 도와주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닌 착한 일처럼 받아들여 지는 분위기 속에서 만약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친구가 옆에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엄마들은 그 아이가 학습 분위기에 방해가 된다며 특수학교로 전학시키라 학교에 강요했을테고 그런 엄마들의 항의 속에서 아이들은 어울리면 안되는 친구 목록에 그 아이 이름을 추가시키지 않았을까?
 하지만 한 아이가 이 책을 읽고선 웃으며 그 아이에게 다가가 안 보인다는 것은, 안 들린다는 것은 참 대단해라고 웃어준다면 상황은 어떻게 바뀔까?
 
 물론 어른들도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와 뭔가 다른 사람들이지만, 아이 때부터 이런 책을 읽어줌으로써 그들은 결코 우리와 다른 것이 아니야. 조금 불편한 것 뿐이지. 그런데 아마 그 아이들은 너보다 더 많은 것을 보고, 더 많은 것을 듣고, 더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을껄? 이라고 말해준다면 아마 세상이 조금은 더 밝아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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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에 가기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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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주위에서 알랭 드 보통에 대한 평은 두가지로 나뉜다. '정말 좋다' 혹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난 알랭 드 보통을 '정말 좋다'라고 생각하는 언니에게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선물받고 그를 처음 접하게 되었었고, 그에 대한 내 첫 인상 역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였었다. 아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것 보단 공감하기 힘들었다. 그의 말재간을 따라가지 못해 헐떡대다가 사람들이 보내는 그에 대한 환호에 갸우뚱 하기도 했었다. 그렇게 그와의 첫 만남을 가진 후 얼마가 지나자 그가 궁금해졌다. 그냥 이유없이 갑자기. 그렇게 그와의 두번째 만남을 감행했고, <우리는 사랑일까>로 인해 그의 가치가 내 안에서 빛나기 시작했다. 나와는 너무도 닮아있던 책 속의 그녀 앨리스 때문에.
   그 후로 난 주위 사람들이 책 추천을 해 달라치면, 늘 보통을 한 번 읽어보기를 권해줬었고 그건 항상 내게 책 추천을 부탁하던 친구 녀석에게도 이어졌다. 사랑이야기란 말에 "내가 사랑은 더 잘 알아." 하며 시큰둥해 하던 친구 녀석은 그래놓고는 보통을 읽었다며 "뭐라는거야?"라며 내게 성질을 부렸다. 그리고 그 녀석의 보통은 나의 또 다른 친구에게 이어졌고, 그 또 다른 친구녀석 역시 "뭐라는거야?"라며 성질을 부렸다. 난 당연히 그녀석들이 보통의 다른 책을 읽었으리라 했지만, 그 녀석들이 읽은 책은 다른 책이 아니라 바로 이 책, <동물원에 가기>였다. 
   새로운 책이 출판 되었다는 이야기에 반가운 마음으로 이 책을 사두고도 다른 읽을거리에 밀어두었던 내가 친구 녀석들의 성화에 이 책과의 만남을 서두르게 되었다. 그리고서야 알게되었다. 왜 친구녀석들이 그렇게 "뭐라는거야?"라며 성화를 부렸는지..
   두서없이 친구녀석들의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혹여나 이 책을 만나고 당황했을 사람들을 위해서이다. 이 책은 그동안의 보통아저씨의 이야기들을 조금씩 묶어논 단편집 아닌 단편집이다. 그동안 꽤 묵직한 책으로 엮어냈던 그의 이야기에서 아주 조금씩 시식코너의 음식들처럼 맛뵈기로 추려냈으니, 보통을 처음 접하는 사람이라면 당황하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보통아저씨의 글재간과 전반적인 생각을 알아보기엔 안성맞춤인 책이 아닌가 한다.
 
   이 책은 펭귄 출판사가 창립 7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70명의 문인을 선정하여 작품집을 출간한 가운데 한 권이다. 그래서 이 책에 실린 에세이들은 그동안 보통아저씨의 글 가운데 아저씨의 면모를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것들을 추려내 하나의 단편처럼 모아놓은 것이다.
 
   사자만 보고 동물원을 다 보았다고 할 수 없고, 코끼리만 보고 동물원을 다 보았다고 할 수 없고, 여러 동물들을 만나고서야 동물원을 둘러봤다고 할 수 있는 것 처럼, 이 책을 읽어본다면 보통아저씨를 둘러봤다고는 할 수 있어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여러 단편 중 '동물원에 가기'라는 것을 제목으로 선정한 것은 참 탁월했다고 보여진다.
 
   혹시 이 책을 처음 잡고 읽기가 어렵다면, 조용한 커피숍의 창가 아닌 자리에 앉아서 책을 읽어보길 바란다. 호퍼의 그림을 알고있다면, 더 없이 좋을 것이다. 이 책의 가장 처음에서 호퍼의 그림 이야기가 나오며 현대인의 외로움을 말하는 '슬픔이 주는 기쁨'은 그렇게 읽을 때 가장 공감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도 그렇게 이 책에 발을 밀어넣었다.
 
   이 책은 보통아저씨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동안의 아저씨의 행적을 짚어가며 다시 한 번 웃음지을 수 있을 것이며 보통아저씨를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라면 조금 생소하겠지만 보통아저씨의 전반적인 면모를 파악하며 아저씨에게 관심을 갖게 할 수 있는 그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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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을 기다리며 - 개정판
마사 베크 지음, 김태언 옮김 / 녹색평론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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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비관론자인 것 같다. 세상에 대한 불만이 끊임이 없다. 그것은 큰 사건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난 정말 작은 것 하나하나에도 불만이 많다. 말 자체에 대한 불만도 크다. 성 차별이니 뭐니하는 문제가 생기는 것은 '남자', '여자'라는 말이 따로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냥 '사람'이면 되는 것을 왜 굳이 남자와 여자로 나누어야 했을까? 생물학적 특징이 뭐 그리 다르다고, 어떻게 생각하면 우리가 잘생긴 사람 못생긴 사람 나누듯 겉모양이 조금 다른 것 뿐일텐데. 하지만 이 성별 문제는 조금 봐줄만 하다. 그래도 인류가 가져온 종족보존의 본능을 해소하는데 성별문제는 꼭 필요하니까.

하지만 일반인 혹은 정상인 그리고 장애인, 비정상인 이라고 하는 말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도대체 일반의 기준이 무엇이기에, 정상의 기준이 무엇이기에 정상인과 비정상인을 나눌 수 있고 일반인과 장애인을 나눌 수 있는 것일까? 그저 다수에게 주어진 환경과 조금 다른 환경을 가지고 있는 것 뿐인데. 사람들은 항상 다수의 시선으로 세상을 나눈다. 하지만 다수의 시선이 옳다는 것은 누구도 장담할 수가 없다. 그저 자신들이 틀리지 않았음을 바라는 마음에 조금 힘을 싫어놓는 것 뿐이다. 하지만 옛날부터 우린 배워왔지 않는가. 다수결의 원칙 뒤에는 소수의 의견에 귀기울일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을. 그렇게 다수는 자신들이 합당함을 주장하며, 소수를 위한 배려도 잃지 않음을 강조하여 자신들을 합리화시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난 예전부터 그 말들이 그렇게도 싫었다. 장애인, 비 정상인.

 

예전에 살던 아파트에는 소아마비에 걸린 아이가 있었다. 나보다 조금 어린 그 아이는 내가 학교에 갈 때도, 학교에서 돌아올 때도, 엄마 심부름을 갈 때도 늘 집에 있었다. 그 아이가 외출하기 위해선 늘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고 그 아이의 옆을 지키고 있는 것은 항상 그 아이의 엄마였다. 난 그 아이가 불행해 보이지 않았다. 그저 조금 몸이 불편하겠구나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아이의 엄마 얼굴은 늘 어두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다. 한 번도 그 아이의 엄마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아이가 자라나며, 가장 처음 사회를 접하는 건 부모와의 관계를 통해서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 부모와 친밀도가 높은 아이들은 사회에 적응을 잘 하고, 부모와 친밀도가 낮은 아이들은 어느정도 사회에 적응하는데 문제가 생긴다고 했다. 후자의 이야기는 동의하기 조금 미심적은 구석이 있지만, 전자의 이야기는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를 키우는 부모가 항상 아이에게 사랑한다는 이야기를 해주고 함께 교감하며 웃어주는 것은 정말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예전에 살던 아파트에 있던 그 아이는 몸이 아픈 것 보다 마음이 조금 더 아프지 않았을까? 자신 때문에 웃지 못하는 엄마를 보며, 자신의 몸보다 마음이 더 아프지 않았을까?

 

어느 날, 적정치 못한 시기에 하늘에서 선물이 내려왔음을 깨닫는다. 아니, 깨닫기 전에 이미 조금은 그런 느낌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물을 받았다. 선물을 받는 행위는 자의였지 타의는 아니었으니까. 몸 안에서 하나의 생명이 자라나며, 조금 남다른 경험을 한다. 누군가 나를 보호해주고 있는 것 같은 기분, 그리고 떨어져 있어도 '보이기'를 통해 늘 곁에 있는 것 같은 남편. 누구나 한 아이의 엄마가 되는 과정은 힘이 든다지만, 유독 힘이 든다. 먹을 수도 없고, 걸핏하면 쓰러져야 한다. 그것도 하버드에서. 하버드에서는 누구나 개인사정은 이유가 되지 않는다. 냉철해야 하며 내 안의 독종을 꺼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야 한다. 안되는 것도 가능하게. 행복하기 위해 사는 곳이 아닌, 모든 것을 갖은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사는 곳인 것 같다. 하지만 포기할 수가 없다. 이 곳에서의 삶도. 그래서 몸 안에 있는 생명이 더 힘이 든다. 그러다가 알게 된다. 아이가 조금 다르다는 것을. 그런 느낌을 받고 있었지만, 아닐 거라고 아이는 괜찮을 거라고, 건강한 아이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는 조금 다르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날들이 흘러간다. 어쩌면 기적처럼 건강한 아이가 태어나고, 몸 안의 생명이 조금 다르다고 한 것은 병원측의 실수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점점 신비한 일들이 일어난다. 남편 집안의 내력대로 조상의 이름을 딴 이름을 지어주려 했지만 어느 새 이 아이의 이름은 '아담'이라는 것을 알고있다. 그리고 조심스레 말을 연 남편 역시 그 아이는 '아담'이라고 말을 한다. '아담'이 몸 안에서 커가며 누군가 아담을 보호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불이 났을 때, 보이지 않는 손은 아담과 날 건물 밖으로 밀어냈으며 아담이 태어날 때쯤, 일주일은 걸려야 구하는 비행기 티켓을 남편인 존은 우연처럼 바로 구해 마사와 아담 곁으로 날아온다. 그리고 아담이 태어나던 날, 마사는 그동안 자신을 지켜주었던 설명할 수 없는 그 모든 존재가 자신의 곁에 있음을 아담이라는 천사의 지구정착을 지켜보고 있음을 깨닫는다.

 

세상엔 과학으로, 그리고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얼마든지 벌어지는 법이다. 사람은 자신이 보고 싶어 하는 것만 보고 알고 싶어하는 것만 안다. 그렇기에 설명될 수 없는 일들을 그저 환상으로 혹은 자신이 잘못 본 것으로 짚고 넘어가려 하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그것들은 분명히 벌어진 것이다. 내 주위에서. 내게 뭔가를 알려주려고. 작가는 그렇게 아담을 건네받는다. 하늘로부터, 세상으로부터. 그것은 작가와 작가의 남편이 만들어 낸 생명이 아닌 하늘로 부터 받은 것이다. 그리고 그 아담이 세상에 옴으로써 많은 것은 변화한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을 보는 법, 자신이 죽어라고 메달리던 일에 대한 새로운 시각, 그리고 넓게는 이 세상을 보는 시각이 변한다. 이 모든 변화가 '아담'이라는 작은 아이가 만들어 낸 것이다. 사람들이 혐오스럽게 혹은 이상한 시선으로 보는 그들과는 조금 다른, 한 아이가.

 

작가의 자전적인 이 이야기는 너무나 아슬아슬하다. '아담'이 그들에게 온 후, 그들이 겪어 낸 이야기를 짤막짤막 늘어놓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아담'을 그리워하게 하다가 '아담'이 그들에게 오기까지의 그 험난한 여정을 늘어놓는다. 그 여정에 그들의 고통이, 행복을 얻기까지 그들이 겪어내야 했을 그 쓰린 마음이 녹아나 눈가를 적시게 한다. 아담이 그들에게 왔음을, 그래서 모두가 행복해졌음을 이미 알고 만나는 책이지만, 책을 만나는 내내 혹여나 그 행복이 무너지진 않을까 아슬아슬하게 마음을 졸이게 된다.

 

모두가 아이를 없앨 것을 권했다. 하지만 없앨 수 없었다. 천사를 없앤다는 것이 얼마나 큰 아픔인가를 작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뱃 속의 천사에게 배우고 있었던 것이다. 작가를 만난 것이 아닌, 작가가 힘겹게 세상에 내 놓은 한 천사를 만나며, 세상에 물어보고 싶었다. 얼마나 많은 천사들이 오늘도 어둠 속에 사라지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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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소 - 중국문학 다림세계문학 1
차오원쉬엔 지음, 첸 지앙 홍 그림, 양태은 옮김 / 다림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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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학, 중국문학이라는 말에 이 책을 고르면서도 갸웃거렸다. 바다소라는 것도 있어?

이 책을 골라들고, 바다소를 찾아보았다.

하지만, 이 책에서 나오는 바다소는 일반 바다소와는 뭔가 다른 것 같았다. 분명 표지에는 기운 세 보이는 뿔 난 녀석이 아이를 태우고 있으나, 진짜 바다소는 해중생활을 하고 앞 다리도 지느러미 모양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알고나니, 이 녀석의 정체가 더 궁금할 수 밖에 없었다. 바다소, 너는 누구니?

 

이 책은 네가지 단편 이야기들이 모여있는 책이다. 네가지 이야기들의 제목 모두가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면서도 왠지 푸근한 느낌이다.

이 이야기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물, 외로움, 그리고 인간성의 회복등이 그 주요 내용인데 아이들을 위한 이야기에서 외로운 감정과 인간성의 회복을 들어내기가 쉽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농촌생활의 정감을 바탕으로 작가는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너희 모두가 사랑받는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하며, 그 모든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빨간 호리병박

뉴뉴는 강가에서 수영을 하고 있는 완을 몰래 살펴본다. 완은 뉴뉴가 언제쯤 자신을 보리라 생각하고 더 열심히 수영을 한다.

소년과 소녀는 서로가 자신을 의식하고 있다 생각하지 못하고 서로를 의식한다. 마치 <소나기>에서 징검다리 위를 서성거리는 소년과 소녀의 모습같다.

그러다가 갑자기 친해지는 것이다. 소년이 수줍게 소녀에게 내민 마름 열매 때문에. 소년은 자신이 차고 수영을 하던 빨간 호리병박을 소녀에게 주고 수영을 알려준다. 완은 아버지가 사기죄로 감옥에 있다는 것 때문에 친구도 없고, 주변 어른들에게까지 소외 받는다.

완이 사기꾼의 아들이라는 데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은 오직 뉴뉴뿐. 둘은 그렇게 세상에서 특별한 존재가 되어간다.

하지만, 뉴뉴에게 수영을 가르쳐주기 위해 완이 강 한가운데에서 호리병박을 빼앗자 완은 뉴뉴에게도 사기꾼의 아들이 되어버린다. 특별한 그들의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금새 뉘우치고, 서로의 마음을 다시 이해한다. 하지만 이미 늦어있다. 빨간 호리병박에 의지하지 않고도 수영을 해서 강을 건너 완에게 가지만 완은 이미 떠나있다.

 

바다소

세 살 때 급작스런 병으로 돌아가신 아버지와 그 후, 소년을 버리고 한 사내와 도망간 어머니 대신 할머니는 소년을 키워준다. 국가에서 나눠 준 땅을 굳이 자기 명의로 바꾸고는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새끼를 꼬아 팔고, 농사를 짓는 할머니이다.

그런 할머니를 위해 소년은 아쉽지만 기쁜 마음으로 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소를 사기로 결심한다. 보이지 않는 눈으로 할머니가 새끼를 고아 모아놓은 돈 700원.

그 돈으로 바다소를 살 수 있지만, 먼 거리에 있는 장까지 가서 엄청나게 큰 소를 끌고 오기에 소년은 아직 어리다. 그리고 할머니에겐 소년의 눈이 필요하다.

하지만, 소를 살 유일한 돈을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는 없다. 소년은 결국 몰래 소를 사기 위한 길을 떠난다. 어른도 다루기 힘든 거친 바다소를 사서 돌아오는 길. 소년은 바다소의 주인이 되려하고 바다소는 그런 소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소년은 그런 바다소의 사나움이 좋다.

절대 이 녀석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온갖 고난과 시련이 따르는 벅찬 존재인 녀석을 소년은 놓지 못하고 결국 바다소도 소년의 소가 되는 것이다.

 

미꾸라지

서로 성격도, 생김새도 정 반대인 싼류와 스진쯔는 같은 논에서 '카'라는 도구를 이용해 미꾸라지를 잡는다. 비쩍 마르고 의기소침한 싼류를 스진쯔는 늘 무시하고 방해한다. 하지만 어느 날, 스진쯔는 자신의 방해 때문에 울고있는 싼류와 그런 싼류를 지켜주는 미망인 완의 눈물을 보게 된다. 그리고 나서야 깨닫는 것이다. 싼류와 완도 외롭고 아픈 사람들이라는 것을.

그 아픔과 외로움을 서로 보듬아주고 돌보고 있는데, 그것을 보는데에 심사가 뒤틀린 자신이 그들을 괴롭혔다는 것을.

싼류에게 스진쯔가 마음을 열고서야 서로는 이해하려고 노력해간다. 하지만, 그 노력은 왜 언제나 늦는 것일까. 싼류는 다른 지방으로 시집가는 완을 따라 가게되고, 싼류의 카까지 받은 채로 남겨진 스진쯔는 카를 바라만 보게 된다.

 

아추

아추가 어렸을 때, 부모님이 물에 빠져 익사했다.  그런 부모님덕에 홀로 살아남은 다거우의 아버지와 맞장구를 치는 마을 사람들을 보며 자란 아추는 세상에 자신의 편은 없으며 혼자라는 상처를 안은 아이로 자라난다. 그리고 자신의 그 상처를 사람들에게 돌려주려 한다.  사람들은 그런 아추의 행동을 혼내주는 것이 아닌 불쌍한 아이의 발악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이해는 아추에게는 이해가 아닌 사람들의 무관심으로 다시 한 번 상처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심술만 부리던 아추는 결국 다거우를 데리고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다거우와 사라진 사흘 째 되는 날, 마을 사람들이 그들이 있는 곳 근처로 오게되지만 모두 다거우만 찾는 것을 알게 된 아추는 사람들에게 발각되려는 다거우를 때리고 다시 두 소년은 고립된다. 하지만 이제 다거우는 알 것 같다. 왜 아추가 그렇게 심술을 부리는지.

그리고 아추의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 아추가 원래 나쁜 아이는 아님을. 아추는 다거우를 위해 음식을 구하려 상처를 입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결국 다거우를 위해 음식을 구하다가 영영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그제서야 사람들은 아추의 이름을 불러준다.

 

네 이야기 모두 물 근처의 마을에서 발생된다. 강에서 설레는 우정을 쌓는 완과 뉴뉴의 이야기, 바다 근처에서 농사를 짓기 위해 바다소를 구하고 싶어하는 소년, 물이 가득찬 논에서 미꾸라지를 잡는 싼류와 스진쯔, 물을 건너 작은 섬으로 갔다가 배를 잃어버린 채 고립된 아추와 다거우까지 이야기는 모두 물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소외받은 아이들이 등장한다. 단지 아버지가 사기꾼이라는 이유로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혼자인 법을 배워야 했던 완, 자신을 버린 어머니 때문에 눈먼 할머니 옆에서 자라야했던 소년, 아무도 없이 과부의 관심만으로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던 싼류, 돌아가신 부모님에 대한 동정없는 시선과 자신에 대한 동정어린 시선 그 모두가 무관심이 되었던 아추.

하지만 결국 그 무관심 속에서도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발견한다. 그 특별한 시선 하나면 되는 것이다.

책은 말한다.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 누구인지. 아무 죄 없는 아이들에게 단지 편견으로 어른들이 얼마나 더 아픈 존재가 될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보듬아주는 것은 결국 자신의 아이들의 몫으로 남는다는 것을.

또 아무일 없이 자라나는 아이들은 없다는 것도. 그것은 아이였던 우리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우리 역시 지금의 아이들처럼 아프고 상처받고 보듬아지며 자라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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