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을 기다리며 - 개정판
마사 베크 지음, 김태언 옮김 / 녹색평론사 / 200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난 비관론자인 것 같다. 세상에 대한 불만이 끊임이 없다. 그것은 큰 사건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난 정말 작은 것 하나하나에도 불만이 많다. 말 자체에 대한 불만도 크다. 성 차별이니 뭐니하는 문제가 생기는 것은 '남자', '여자'라는 말이 따로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냥 '사람'이면 되는 것을 왜 굳이 남자와 여자로 나누어야 했을까? 생물학적 특징이 뭐 그리 다르다고, 어떻게 생각하면 우리가 잘생긴 사람 못생긴 사람 나누듯 겉모양이 조금 다른 것 뿐일텐데. 하지만 이 성별 문제는 조금 봐줄만 하다. 그래도 인류가 가져온 종족보존의 본능을 해소하는데 성별문제는 꼭 필요하니까.

하지만 일반인 혹은 정상인 그리고 장애인, 비정상인 이라고 하는 말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도대체 일반의 기준이 무엇이기에, 정상의 기준이 무엇이기에 정상인과 비정상인을 나눌 수 있고 일반인과 장애인을 나눌 수 있는 것일까? 그저 다수에게 주어진 환경과 조금 다른 환경을 가지고 있는 것 뿐인데. 사람들은 항상 다수의 시선으로 세상을 나눈다. 하지만 다수의 시선이 옳다는 것은 누구도 장담할 수가 없다. 그저 자신들이 틀리지 않았음을 바라는 마음에 조금 힘을 싫어놓는 것 뿐이다. 하지만 옛날부터 우린 배워왔지 않는가. 다수결의 원칙 뒤에는 소수의 의견에 귀기울일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을. 그렇게 다수는 자신들이 합당함을 주장하며, 소수를 위한 배려도 잃지 않음을 강조하여 자신들을 합리화시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난 예전부터 그 말들이 그렇게도 싫었다. 장애인, 비 정상인.

 

예전에 살던 아파트에는 소아마비에 걸린 아이가 있었다. 나보다 조금 어린 그 아이는 내가 학교에 갈 때도, 학교에서 돌아올 때도, 엄마 심부름을 갈 때도 늘 집에 있었다. 그 아이가 외출하기 위해선 늘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고 그 아이의 옆을 지키고 있는 것은 항상 그 아이의 엄마였다. 난 그 아이가 불행해 보이지 않았다. 그저 조금 몸이 불편하겠구나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아이의 엄마 얼굴은 늘 어두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다. 한 번도 그 아이의 엄마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아이가 자라나며, 가장 처음 사회를 접하는 건 부모와의 관계를 통해서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 부모와 친밀도가 높은 아이들은 사회에 적응을 잘 하고, 부모와 친밀도가 낮은 아이들은 어느정도 사회에 적응하는데 문제가 생긴다고 했다. 후자의 이야기는 동의하기 조금 미심적은 구석이 있지만, 전자의 이야기는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를 키우는 부모가 항상 아이에게 사랑한다는 이야기를 해주고 함께 교감하며 웃어주는 것은 정말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예전에 살던 아파트에 있던 그 아이는 몸이 아픈 것 보다 마음이 조금 더 아프지 않았을까? 자신 때문에 웃지 못하는 엄마를 보며, 자신의 몸보다 마음이 더 아프지 않았을까?

 

어느 날, 적정치 못한 시기에 하늘에서 선물이 내려왔음을 깨닫는다. 아니, 깨닫기 전에 이미 조금은 그런 느낌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물을 받았다. 선물을 받는 행위는 자의였지 타의는 아니었으니까. 몸 안에서 하나의 생명이 자라나며, 조금 남다른 경험을 한다. 누군가 나를 보호해주고 있는 것 같은 기분, 그리고 떨어져 있어도 '보이기'를 통해 늘 곁에 있는 것 같은 남편. 누구나 한 아이의 엄마가 되는 과정은 힘이 든다지만, 유독 힘이 든다. 먹을 수도 없고, 걸핏하면 쓰러져야 한다. 그것도 하버드에서. 하버드에서는 누구나 개인사정은 이유가 되지 않는다. 냉철해야 하며 내 안의 독종을 꺼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야 한다. 안되는 것도 가능하게. 행복하기 위해 사는 곳이 아닌, 모든 것을 갖은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사는 곳인 것 같다. 하지만 포기할 수가 없다. 이 곳에서의 삶도. 그래서 몸 안에 있는 생명이 더 힘이 든다. 그러다가 알게 된다. 아이가 조금 다르다는 것을. 그런 느낌을 받고 있었지만, 아닐 거라고 아이는 괜찮을 거라고, 건강한 아이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는 조금 다르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날들이 흘러간다. 어쩌면 기적처럼 건강한 아이가 태어나고, 몸 안의 생명이 조금 다르다고 한 것은 병원측의 실수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점점 신비한 일들이 일어난다. 남편 집안의 내력대로 조상의 이름을 딴 이름을 지어주려 했지만 어느 새 이 아이의 이름은 '아담'이라는 것을 알고있다. 그리고 조심스레 말을 연 남편 역시 그 아이는 '아담'이라고 말을 한다. '아담'이 몸 안에서 커가며 누군가 아담을 보호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불이 났을 때, 보이지 않는 손은 아담과 날 건물 밖으로 밀어냈으며 아담이 태어날 때쯤, 일주일은 걸려야 구하는 비행기 티켓을 남편인 존은 우연처럼 바로 구해 마사와 아담 곁으로 날아온다. 그리고 아담이 태어나던 날, 마사는 그동안 자신을 지켜주었던 설명할 수 없는 그 모든 존재가 자신의 곁에 있음을 아담이라는 천사의 지구정착을 지켜보고 있음을 깨닫는다.

 

세상엔 과학으로, 그리고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얼마든지 벌어지는 법이다. 사람은 자신이 보고 싶어 하는 것만 보고 알고 싶어하는 것만 안다. 그렇기에 설명될 수 없는 일들을 그저 환상으로 혹은 자신이 잘못 본 것으로 짚고 넘어가려 하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그것들은 분명히 벌어진 것이다. 내 주위에서. 내게 뭔가를 알려주려고. 작가는 그렇게 아담을 건네받는다. 하늘로부터, 세상으로부터. 그것은 작가와 작가의 남편이 만들어 낸 생명이 아닌 하늘로 부터 받은 것이다. 그리고 그 아담이 세상에 옴으로써 많은 것은 변화한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을 보는 법, 자신이 죽어라고 메달리던 일에 대한 새로운 시각, 그리고 넓게는 이 세상을 보는 시각이 변한다. 이 모든 변화가 '아담'이라는 작은 아이가 만들어 낸 것이다. 사람들이 혐오스럽게 혹은 이상한 시선으로 보는 그들과는 조금 다른, 한 아이가.

 

작가의 자전적인 이 이야기는 너무나 아슬아슬하다. '아담'이 그들에게 온 후, 그들이 겪어 낸 이야기를 짤막짤막 늘어놓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아담'을 그리워하게 하다가 '아담'이 그들에게 오기까지의 그 험난한 여정을 늘어놓는다. 그 여정에 그들의 고통이, 행복을 얻기까지 그들이 겪어내야 했을 그 쓰린 마음이 녹아나 눈가를 적시게 한다. 아담이 그들에게 왔음을, 그래서 모두가 행복해졌음을 이미 알고 만나는 책이지만, 책을 만나는 내내 혹여나 그 행복이 무너지진 않을까 아슬아슬하게 마음을 졸이게 된다.

 

모두가 아이를 없앨 것을 권했다. 하지만 없앨 수 없었다. 천사를 없앤다는 것이 얼마나 큰 아픔인가를 작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뱃 속의 천사에게 배우고 있었던 것이다. 작가를 만난 것이 아닌, 작가가 힘겹게 세상에 내 놓은 한 천사를 만나며, 세상에 물어보고 싶었다. 얼마나 많은 천사들이 오늘도 어둠 속에 사라지고 있는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