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캐러멜! 중학년을 위한 한뼘도서관 3
곤살로 모우레 지음, 배상희 옮김 / 주니어김영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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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한 동화나라로.
 
     동화(童話)란 어린이들을 위하여 동심을 바탕으로 지어진 이야기예요. 하지만 우리가 소위 이야기 하는 '명작동화'의 이면에는 본래 잔혹한 장면들이 많다고 해요. 그리고 우리의 전래 동화에도 이런 잔혹한 장면은 등장하지요. 콩쥐팥쥐에서는 팥쥐의 사체로 젓갈을 담가 어미한테 보내는 장면이 나오고, 헨젤과 그레텔에서 아이들은 할머니를 오븐에 넣어 구워 죽이는 장면이 나오기도 하니까요.
     그렇다면 이런 동화들은 단지 어린이들을 위해 지어진 이야기라는 이유로 걸러지지 않고 아이들에게 그대로 읽혀지고 들려졌을까요? 글자를 읽지 못하고, 문장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하지 못하는 시기에 아이들에게 동화를 읽어주고, 들려주는 사람들은 어른들이잖아요. 그러니 어떻게 생각하면 이런 동화는 아이들에게보다 어른들에게 먼저 소개되고 읽히는 글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어요? 더군다나 학구열이 높아진 요즘은 부모님들이 먼저 아이들 책을 접하고 아이들에게 책을 건내니 요즘같은 때는 동화는 어린이들을 위한 것이기 이전에 어른들의 눈을 사로잡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난 아직 아이가 없는걸요? 결혼도 하지 않았는데 뭘.'하고 불평하지는 말아요. 하루하루 시간을 흘려 보내며 점점 우리는 아이 때의 마음에서 멀어지잖아요. 가끔은 그게 너무 슬퍼 지나가는 시간을 잡아보고 싶거나 잠시나마 어른아이가 되어 맘껏 투정부려보고 싶을 때, 그럴 때 동화책을 꺼내 보는 건 어떨까요? 사실 어릴 때 우리가 읽었던 동화들은 많이 각색된 것들이예요. 원작 동화를 찾아 만나다보면, 머리도 마음도 몸도 훌쩍 커 버린 지금도 금새 그 이야기에 빠져들어 어린 아이일 때의 나 처럼 손에 땀을 쥐며 이야기에 몰입하는 날 발견할 수 있을 것이에요. 그러니 한 번 떠나보자고요.  어른이 되어 만나는 이상한 동화나라로.
 
     곤살로 모우레의 동화 나라
 
     곤살로 아저씨는 참 따뜻한 이야기를 하시는 분이에요. 스페인에서 태어난 곤살로 아저씨는 아이들과 청소년을 위한 글을 쓰고 계시지만 그 글이 절대 가볍거나 예쁘기만 하지는 않아요. 아저씨는 난민촌 아이들을 비롯해 소외되어 가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많이 쓰세요. 당연히 이야기는 가벼울 수만은 없죠. 어른인 우리가 읽어도 생각해 봐야 할 거리들이 가득해요. 그리고 아저씨의 이야기에는 그런 아이들에게 힘이 되어주는 동물의 이야기도 많이 나와요. 세상을 살아가는 건 인간인 우리들 뿐만이 아니라, 동물들도 함께이며 그들은 가끔 우리에게 사람 이상의 상대가 되어주기도 한다는 것을 아저씨는 너무 잘 알고있는 듯 해요. (아저씨는 지금 스페인의 시골에서 동물들과 함께 살고 있다고 하네요.) 그런 아저씨의 이야기 중에 <안녕! 캐러멜>이라는 사하라 난민촌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 볼래요?
 
     안녕! 캐러멜!
 
     우리가 살고있는 지구 저 편에는, '사하라위족'이라는 사람들이 살고있어요. 모로코라는 나라 때문에 난민이 된 그들은 사막에서도 사막인 곳에서 힘겹게 살아가지요. 그들은 알라신을 믿고, 일식을 무서워하고, 힘이 들면 알라신께 숫낙타를 재물로 바쳐야 해요. 그리고 그 곳엔 <캐러멜의 말>이라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어요.
     사하라위족 마을엔 코리라는 친구가 있어요. 코리는 말을 듣지 못해서 사람들의 말을 알지 못하고, 입술을 읽을 뿐이에요. 자신의 이름 코리는 동그란 입술, 옆으로 벌어진 입술, 이렇게요. 그래서 코리는 낙타도 말을 한다고 생각했어요. 낙타는 음식을 먹을 때, 늘 우물우물 그 입을 마구 움직이면서 먹으니까요. 그것이 코리에겐 꼭 사람이 말을 하는 것 처럼 보였거든요. 코리는 낙타가 참 좋아요. 그러던 어느 날, 아기 낙타가 태어났어요. 코리는 아기 낙타에게 물었어요. ' 넌 이름이 뭐니?' 그 때 아기 낙타가 '난 캐러멜이야.'라고 말을 했다고 코리는 생각했어요. 그 때부터 코리에게 그 낙타의 이름은 캐러멜이 되었고, 코리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죠. 캐러멜은 코리에게 많은 이야기를 전해주었고, 코리는 그 말들을 받아 적었어요. 하지만 아무도 코리가 쓸 수 있다는 것을 몰랐고, 캐러멜이 그 이야기를 해준다는 것도 몰랐지요.     
     캐러멜이 점점 어른 낙타가 되어가던 어느 날 사람들은 점점 먹을 것이 부족해지자 알라신께 재물을 받치기로 하고 알라신의 뜻을 물었어요. 그러자 캐러멜을 재물로 받치라는 알라신의 대답이 들려왔고, 캐러멜이 재물이 되기로 했다는 이야기는 코리에게까지 전해졌지요. 어떤 아저씨가 캐러멜을 가르키며 손으로 목을 자르는 시늉을 해 줬거든요.
     아무리 알라신의 뜻이라지만 가장 친한 친구 캐러멜이 죽는 것을 볼 수 없었던 코리는 한 밤 중에 캐러멜을 데리고 캐러멜의 고향이라 생각한 사막으로 도망쳤지만, 코리가 모르는 것을 캐러멜은 알고 있었어요.  캐러멜이 엄마에게 들어 기억하고 있는 사막은 이 사막이 아니라는 것을요.
     코리와 캐러멜을 찾아나선 삼촌에 의해 코리와 캐러멜은 다시 집으로 돌아가게 되고, 캐러멜은 재물로 바쳐졌어요. 캐러멜이 죽는 그 순간, 캐러멜 옆에서 그 모든 것을 보던 코리는 캐러멜이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지요.  세상에서 사라져도 늘 코리와 함께 하겠다는 캐러멜의 말을요.
     코리는 계속 자라났고, 다른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지만 늘 바람 속에서 캐러멜을 만났어요. 그리고 계속 캐러멜이 하는 이야기들을 사람들에게 전해주었지요. 사하라위족 출신의 위대한 시인 선생님이 부족을 찾아 코리를 만났을 때, 코리의 글을 칭찬해 주었어요. 코리는 그 글은 자기의 글이 아니며 친구의 글이라 하자, 시인 선생님은 놀라워하며 이름이 캐러멜이냐고 물어보았어요.
     <캐러멜의 말>은 전설이 아니었지요. 진짜 일어나는 이야기일 뿐...
 
     입에서 전해지는 말이 전부는 아니에요. 세상에는 말로써 표현되지 않는 말이 더 많은 법이니까요.  '사랑한다'고 말을 하지 않아도 늘 마음 속에선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 것 처럼 말로 하지 않아도 이미 마음이 하고 있는 말들이 많이 있는 법이잖아요. 코리는 그렇게 마음과 마음으로 캐러멜과 이야기를 했던 것일 거에요. 둘은 세상에서 가장 좋은 친구였기 때문에 마음으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것이겠지요.
     한 번쯤 생각 해 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내게 세상에서 가장 좋은 사람은 누구인지, 그리고 지금 그 사람에게 가서 손을 꼭 잡고 눈을 마주 보며 말하는 거예요. 사랑한다고... 물론 마음으로요. 코리와 캐러멜을 통해 마음으로 말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에 아주 잘 할 수 있을 거에요.
 
     그리고 기도 해 보아요. 사하라위족 난민들이 그들의 땅을 되 찾아서 그들의 땅에서 평화롭게 살 수 있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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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콩 2007-10-23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들은 슬프다는 얘기만 하는데 엄마인 나는 왜 이리 생각이 많아지는지요. 그래서 요즘은 아이들 동화를 읽게 되네요. 님의 글을 일고 저도 책을 보고나서 리뷰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감정이 공유되는 느낌이 참 좋으네요. 잘봤습니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
오가와 요코 지음, 김난주 옮김 / 이레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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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너무 기분이 좋았다. 혼자 콧노래도 부르고 타닥타닥 뛰어도 보고 그냥 씨익 씨익 웃기도 했다. 그냥 신이 나 있는 상태가 내겐 가끔 있다. 하지만 그런 시간이 지나가고 나면 마치 조울증 환자마냥 울고싶어질 때가 있다. 슬픈 것도 우울한 것도 아닌데 그냥 마음이 먹먹해서 울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울지 못한다. 우는 법을 많이 잊어버린 요즘이기 때문이다. 그런 울고 싶은 마음으로 이 책을 만났다. 마음 한켠이 먹먹한 채로, 친한언니가 "착한 책"이라 말한 이 책을 집어 들고 그 따뜻한 책의 기운을 느꼈다. 그러다가 울음이 목구멍까지 차 올랐다. 꿀꺽 침 한 번을 삼키자 다시 울음은 내려갔고 또 다시 차 올랐다. 여전히 울 수는 없었다.
 

     한 나라 문학은 나름대로의 그 느낌이 있다. 장르를 불문하고, 그 나라 문학 나름대로의 느낌이 있는 것이다. 국민성이라고 하기엔 조금 애매하다. 아시아 사람들이 다 똑같아 보여도, 국적에 따른 고유의 느낌이 있듯 그런 느낌이다. 예를 들어, 우리랑 비슷하게 생겼지만 왠지 중국인 같은 느낌이 있고, 우리랑 비슷하게 생겼지만 왠지 일본인 같은 느낌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일본문학은 나름대로의 섬세함을 지니고 있는 느낌이다. 아주 미세한 손 끝으로 0.1도의 온도차이까지 감지해 낼 것 같은 섬세함. 어떤 장르를, 어떤 작가를 읽어도 일본문학을 만날 때면 왠지 모르게 그런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이 책 역시 그 섬세함으로, 그 날카로운 손끝으로 독자의 감성을 건드리고 있었다.
 

     80분을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내 기억이 어느 순간 멈춰있고 난 80분마다 그 스톱 된 시간에서 다시 시작하는 느낌이란. 아니, 그런 느낌조차 없다. 난 내가 80분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 조차 몰라야 하니까. 글을 쓰지 않을까란 생각을 한다. 80분 어치의 글을 쓰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또 80분이 생기면 전의 80분 동안 썼던 글을 읽고 거기에 이어 또 다시 글을 쓰는 것이다. 그러다 생각이 미쳤다. 80분 안에 다 읽지 못할 정도로 글이 길어진다면 어쩌지? 그래서 생각을 했다. 단편을 써야겠다고. 내가 사랑하는 활자로.


     하지만 박사는 활자보다는 수식을 사랑한다. 숫자로 이루어진 그 나열 안에서 박사는 80분이 아닌 하나의 인생을 살아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인생을 살아내기 위해 박사는 옷에 메모를 붙여나간다. 가정부, 가정부 아들 루트, 루트의 생일파티, 루트의 글러브 선물은 어디에, 난 80분 밖에 기억하지 못한다.

     수식을 사랑하던 박사지만, 난 감히 그에게 말하며 웃어보인다. 당신의 인생 역시 활자였군요. 그 수식들을 기억하기 위해, 당신도 활자를 사랑했군요 라고. 그러면서 박사와 나 사이에 묘한 공감대를 형성한다. 마치 루트와, 가정부와 박사 사이의 그 미묘한 일체감처럼.

     80분을 살아가는 박사지만 그 병이, 그리고 80분이 모든 것을 가져가도 가져가지 못하는 것이 있다. 인간 본연의 따뜻함, 그리고 배려. 박사는 루트를 그렇게 보살핀다. 80분이 지나면 이 아이가 누구인지 알 수 없어지지만, 또 다시 네 머리통이 루트 같으니 루트이다! 할 뿐이지만, 그래도 그 본연의 따뜻함과 배려로 루트를 사랑해 주는 것이다. 평생 누군가에게 안겨 본 적이 드문, 하지만 역시 따뜻한 마음을 지닌 그 아이를.
 

     내 시간이 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조금쯤은 흘려버려도 될 것이라고. 하지만 생각해본다. 나 역시도 아니 우리 모두가 주어진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고. 박사는 80분이었지만 우린 단지 몇년일 뿐이라고. 그 시간이 지나가면 우리는 그동안 살아낸 모든 것을 잊고 다시 시작하는 것이고 아무도 그걸 알아채지 못하는 것일 뿐이라고. 그렇다면 지금의 이 시간은 박사의 1분만큼이나, 그리고 그가 사랑한 수식만큼이나 사랑스런 시간이다. 슬며시 박사의 손을 잡는다. 나도 당신과 같은 병에 걸렸노라고 말해본다. 또 다시 묘한 동질감에 휩싸인다.

    

     결국 울지 못했다. 목구멍까지 울음이 찬 상태로 책을 덮었다. 그런데 계속 마음에 박사가 남았다. 몇년 간 가정부를 9명이나 갈아치운 그 사람을 평생 찾아갔던 한 가정부와 루트 옆에 내가 서 있었다. 그리고 박사가 내게 물었다. 생일이 언제야? 9월27일이요. 멋진 수군. 매력적이야. 난 씨익 웃으며 박사에게 묻는다. 이건 어떤 의미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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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호로 역 다다 심부름집 - 제135회 나오키 상 수상작
미우라 시온 지음, 권남희 옮김 / 들녘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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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한테 필요한 존재라는 건 누군가의 희망이 된다는 의미야.(p.105)
 

     한 때는 일본문학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가벼운 문체가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 문학을 만나며 특유의 매력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일본 문학은 어딘지 모르게 독특하며 기발하고 상쾌하다. 조금 어렵거나 복잡한 책에 지쳐있을 때 목캔디 하나를 입에 문 기분이다. 일본문학도 어렵고 복잡한 것도 많이 있지만 요즘 트렌드가 되는 문학들을 만나다 보면 한 숨 돌릴 수 있는 기분이 되기에 요즘은 일본 문학에 저절로 손길이 간다. 아마, 젊은 이들 사이에서 일본 문학이 인기를 끄는 이유도 이런 점 때문일 것이다.
 
     나오키상을 수상한 책은 앞서서도 몇 권 만나보았다. 어렵고 심오한 책만이 상을 받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나오키상을 수상한 책들은 하나같이 가독성도 높고 그 발상이 신선한 것들이었다. 그러면서도 가장 중요한 핵심을 놓치지 않고 있는 것, 내게 나오키상은 그런 이미지였다. 그렇기에 이 다다 심부름집에 대한 기대도 상당했다.
 
     책 자체로 보면, 만화같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제목도 그렇고 겉 표지부터 그런 첫인상에 한 몫한다. 책 표지는 책의 첫인상을 좌우하기에, 책 표지로 난 장르를 파악하곤 한다. 이 책의 표지로 판단한 이 책은 보나마나 코믹물이었다.
 
     하지만 막상 이 책을 만나보면 그것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다. 조그마한 심부름집을 하는 다다, 그리고 어느 날 다다의 심부름집에 얹혀 있게 된 교텐, 그렇게 그들의 기묘한 동거생활이 시작된다. 심부름집을 하며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 속에 꼭 필요하지 않은 것 같은 꼭 필요한 일을 하는 다다는 교텐의 등장이 반갑지만은 않다. 오히려 주인 잃은 귀찮은 개같은 존재일 뿐이다. 하지만, 그런 교텐과의 생활 속에 서서히 다다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아픔을 드러내고 싶어진다. 그렇게 다다는 자신의 아픔을 치유받는다. 그리고 돌아갈 곳이 없던 교텐에게도 돌아갈 곳이 생긴다. 그들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어 서로의 희망이 되어주고 있었다. 사실은 모두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기존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심부름집의 이미지는 좋지 않은 것들이었다. 불륜 현장을 잡기 위해 뒷조사를 해준다거나, 거액을 받고 살인청부까지 일삼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이렇게 고마운 심부름집이라니. 하지만 우리 손으로 할 수 있는 소소한 일들까지 이런 심부름집의 도움을 부르는 현대인의 잘못된 생활방식이 조금은 안타깝기도 했다. 편하면 그만이라는 것인가, 특히 자식의 문제까지도.
     하지만 그렇게 다다의 심부름집은 모두에게 필요한 존재이자 모두의 희망이 되어간다. 이런 각박한 세상 속에 희망 같은 심부름집이라, 상상만 해도 전화기에 손이 가지 않는가. 뭔가 꼭 필요한 일을 일부러 만들어 다다와 교텐을 불러보고 싶다. 그들은 나의 희망이 되고, 고객이 꼭 필요한 그들에게 나는 희망이 되도록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독자들의 다다 심부름집이 되어줄 것 같다. 건강한 웃음과 함께 이 사회 속에 아직도 희망이 남아있음을 또 나 역시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어줄 수 있는 가능성을 선물해주기 때문이다. 난 정말 누군가의 희망이 되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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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데기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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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인과 세상에 대한 희망

 

     나는 사람이 살아간다는 건 시간을 기다리고 견디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늘 기대보다는 못 미치지만 어쨌든 살아 있는 한 시간은 흐르고 모든 것은 지나간다. (p.223)

 

     작가의식,이라는 말을 들을 때면 늘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을 쓰는 사람은 작가의식이라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데 난 글을 쓰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작가의식'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조차 없었다. 도대체 작가의식이란 뭐야.

     때론 오래 가지고 있던 의문이 한 순간에 풀려버리는 경우가 있다. 이 책을 만나며 작가의식에 관해 갖고 있던 내 의문이 아주 조금은 풀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동안 아무리 고민해도 나오지 않던 답이 책 한권에 모여있는 듯한 기분, 독서의 즐거움을 또 다시 알아버렸다.

     현재를 살아가는 힘, 황석영이라는 작가가 논란이 되면서도 꾸준히 사랑받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삼포 가는 길]을 제외하고 내게 그의 작품은 처음이었지만 [오래 된 정원]은 영화로 만나보았기에 어느정도 그의 작가의식을 알 것 같았다.

 

     가끔 텔레비전 뉴스에서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기아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때면 난 이렇게 어지러운 세상이 정말 있을까 하는 기분이 든다. 난 지금 내가 발 붙이고 있는 곳에서 너무 안락하게 살고 있고 식량 걱정은 조금도 하지 않으며 전쟁에 대한 두려움도 없이 그저 편안하게 있기에 마치 뉴스에서 나오는 일들이 영화나 소설 속 장면처럼 생각된다. 조금 떨어진 나라에선 인질극이 벌어지고 민간인이 학살당하고, 너무 멀리가지 않아도 당장 이 땅 어딘가에서도 굶어죽는 아이들이 있다는 데 그것이 내겐 너무 먼 이야기같이 들린다.

 

     작가는 그 모든 것을 느끼고 있었던 것같다. 평화롭고 풍요로워 보이지만 아직도 이념의 갈등이 끊이지 않고 있고, 세계 어딘가에선 전쟁이 지속되며, 기아는 멈출 줄을 모르고, 그런 상황 속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또 어디에선가 삶에 대한 투쟁을 벌이며 하루하루를 나아가고 있다. 시간을 견디며 이 모든 것이 지나가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이 책의 바리처럼.

     '바리공주'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따온 이 책은 그 제목과 주인공의 이름부터 원형이 되는 그 설화를 따르고 있다. 북한에서 태어나 기적처럼 살아남은 한 여자아이가 넋과 몸을 분리해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고, 제 이름값이라도 하듯 그렇게 모진 세상과 현실을 감내해 가며 긴 여정을 이겨낸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바리공주가 겪고 깨달은 수 많은 것들처럼 바리 역시 수 많은 것들을 보고 깨닫게 된다. 하지만 바리공주는 생명수를 찾아냈지만 바리는 생명수를 찾아내지 못했다. 그러나 책을 다 읽고나면 독자는 깨닫게 된다. 바리가 생명수를 찾아내지 못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희망을 버리면 살아 있어도 죽은 거나 다름없지. 네가 바라는 생명수가 어떤 것인지 모르겠다만, 사람은 스스로 구원하기 위해서도 남을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한다. 어떤 지독한 일을 겪을지라도 타인과 세상에 대한 희망을 버려서는 안된다. (p.286)

 

     이렇게 다양한 모습의 세계 속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생명수란 각자의 몫으로 남겨져야 했을지도 모르겠다. 결국 자신을 구원하는 것은 자신 뿐이고 희망을 유지하는 힘도 자신의 것이다. 분명히 세상엔 아직도 많은 대립과 갈등이 존재하고, 전쟁을 겪고 있는 사람들은 전쟁으로 괴로운 시간을, 전쟁을 겪고 있지 않는 사람은 누군가의 말처럼 전쟁을 준비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감내하고 살아갈 수 있는 건 사람이기 때문이고 그래도 아직 이 세상을 살만한 곳이기 때문이 아닐까. 사람에겐 그 무엇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때론 세상의 이기를 이겨내지 못하고 스스로 그 끈을 놓아버리는 사람도 있지만, 그 사람들보다 더 견디기 힘든 일이 있음에도 꿋꿋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이 이 세상이기에 조금은 세상과 사람에 희망을 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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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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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젠가 "왜 책을 읽느냐"라는 질문을 받았다. 잠시 멍해졌다. 난 왜 책을 읽는 거지? 그 땐 그저 장난처럼 '습관?'이라며 넘어갔지만 그 질문은 오래 마음에 남았다. 난 왜 책을 읽는 걸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갑자기 튀어나왔다. 자주 있는 일이 아니라서, 그 공백이 길어질 수록 그 때의 감정은 희미해 져가지만 책을 읽으며 가장 희열을 느끼는 순간은 내가 아닌 누군가가 되고 내가 갈 수 없는 어떤 공간에 가 있는 것을 느낄 때였다. 행복한 순간이건 비참한 순간이건 두려운 순간이건 기쁜 순간이건 책을 읽음으로서 할 수 있는 그런 간접 경험들은 때론 직접 경험들을 능가할 때가 있다. 그리고 정말 오랜만에 그런 경험을 다시 했다. 한 순간 육체가 이탈 해 낯선 장소에 가 있는 기분, 이 맛에 난 책을 읽는 것 같다는 묘한 긍정을 해 버렸다. 하지만 이번의 그 경험은 기쁘지도, 행복하지도 않았다. 처참함과 싸워야 하는 두려움이었다.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눈은 멀었지만 본다는 건가.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p.461)

 

         모든 것이 진실한 모습을 드러내는 곳, 눈먼 자들의 도시

 

     도로를 달리던 차 한 대가 갑자기 멈춰 버렸다. 사람들은 화가 났다. 멈춰 선 차를 향해 돌진하고 창문을 두드린다. 그 때 그 차 안에 있던 사람이 말한다. 눈이 안 보여.

    그리고 전염병 처럼 점점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증가한다. 나라는 새로운 전염병을 경고하고, 백색의 악이란 이름으로 전염병을 정의한다. 눈이 보이는 사람들은 어둠 속에 갇힌 것이 아니라 하얀 빛 속에 갇혀 버렸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을 격리하기로 한다. 처음에 격리 된 사람은 여섯 명, 하지만 점점 수가 늘어난다. 그리고 결국엔 나라 전체가 눈이 멀고 만다. 단 한 사람, 의사의 아내를 제외 하곤.

 

     우리는 눈이 머는 순간 이미 눈이 멀어 있었소. 두려움 때문에 눈이 먼 거지. 그리고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계속 눈이 멀어 있을 것이고. (p.185)

 

     전염병이라는 것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급속도로 공포에 빠진다. 그리고 먼저 그렇게 된 사람들을 격리시킴으로서 안전을 찾으려고 한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다. 백색의 악은 점점 도시를 침투한다. 백색의 악이라는 전염병을 두려워 했던 사람들은 이제 갖고 있었던 때는 몰랐던 것의 중요성을 깨달으며  상실에의 두려움에 빠진다. 도시는 점점 공황 상태로 변하고 인간의 진실한 모습이 드러난다. 폭력적이고 야만적이고 비도덕적인 모습들, 사람들은 그 누구도 보지 못하기에 자신을 드러내고 그 모습들은 우리가 바랐던 질서 잡힌 윤리의식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전쟁 속에서도 희망은 싹 트는 것처럼, 사라지지 않는 휴머니즘이 의사의 아내를 둘러싸고 있다. 안보이는 사람들 속에서 보아야만 하는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그녀는 희생의 정신으로서 잃어가는 사람들의 삶을 회복시킨다.

 

     눈먼 것이 드문 일이었을 때 우리는 늘 선과 악을 알고 행동했어요, 무엇이 옳으냐 무엇이 그르냐 하는 것은 그저 우리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이해하는 서로 다른 방식일 뿐이에요. 우리가 우리 자신과 맺는 관계가 아니고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믿지 말아야 해요. (p.388)

 

     결국 모든 사람들은 시력을 회복한다. 그리고 잊지 않는다, 자신들이 눈먼 자들의 도시에 살았음을. 그렇기에 검은 색안경을 썼던 여자는 애꾸눈 노인 곁에 남고 첫번째로 눈이 먼 남자의 부인은 앞이 보이는 순간 의사의 아내를 끌어안는다. 그로 인해 그리고 그녀로 인해,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그들은 인간성을 상실한 것이 아니라 인간성을 회복했기 때문이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 살아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참혹하고 끔찍한 일이었다. 개들은 사람의 시체를 먹었으며 사람들은 악취에 익숙해져 갔다. 책을 덮고 한참을 멍하니 있어야 했다. 이것은 책 속의 상황이 아니라 우리의 상황이었다. 우리는 비록 지금 앞을 보고 있지만, 우리는 보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우리의 참 모습을 알기에 우리는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실은 우리가 윤리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것, 조금만 틀에서 벗어나도 한 없이 잔인하고 한 없이 야수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숨기기에 급급해서 보지 못한 척 하고 있는 것 뿐일테다. 그런 우리의 모습들이 이 책 속에서, 눈먼 자들의 도시 안에서 살아난다. 우리에게는 과연 인간성을 되찾아 줄 치과부인이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 나 부터 그런 사람이 될 수는 없을까? 어떤 공포물보다 어떤 스릴러물보다 더 섬세하게 감성을 흔들었다. 눈을 뜨고 똑바로 현실을 직시하라고 책은 소리치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 차례도 언젠가 올 것이다.

     도시는 여전히 그 곳에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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