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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데기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7년 7월
평점 :
타인과 세상에 대한 희망
나는 사람이 살아간다는 건 시간을 기다리고 견디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늘 기대보다는 못 미치지만 어쨌든 살아 있는 한 시간은 흐르고 모든 것은 지나간다. (p.223)
작가의식,이라는 말을 들을 때면 늘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을 쓰는 사람은 작가의식이라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데 난 글을 쓰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작가의식'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조차 없었다. 도대체 작가의식이란 뭐야.
때론 오래 가지고 있던 의문이 한 순간에 풀려버리는 경우가 있다. 이 책을 만나며 작가의식에 관해 갖고 있던 내 의문이 아주 조금은 풀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동안 아무리 고민해도 나오지 않던 답이 책 한권에 모여있는 듯한 기분, 독서의 즐거움을 또 다시 알아버렸다.
현재를 살아가는 힘, 황석영이라는 작가가 논란이 되면서도 꾸준히 사랑받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삼포 가는 길]을 제외하고 내게 그의 작품은 처음이었지만 [오래 된 정원]은 영화로 만나보았기에 어느정도 그의 작가의식을 알 것 같았다.
가끔 텔레비전 뉴스에서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기아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때면 난 이렇게 어지러운 세상이 정말 있을까 하는 기분이 든다. 난 지금 내가 발 붙이고 있는 곳에서 너무 안락하게 살고 있고 식량 걱정은 조금도 하지 않으며 전쟁에 대한 두려움도 없이 그저 편안하게 있기에 마치 뉴스에서 나오는 일들이 영화나 소설 속 장면처럼 생각된다. 조금 떨어진 나라에선 인질극이 벌어지고 민간인이 학살당하고, 너무 멀리가지 않아도 당장 이 땅 어딘가에서도 굶어죽는 아이들이 있다는 데 그것이 내겐 너무 먼 이야기같이 들린다.
작가는 그 모든 것을 느끼고 있었던 것같다. 평화롭고 풍요로워 보이지만 아직도 이념의 갈등이 끊이지 않고 있고, 세계 어딘가에선 전쟁이 지속되며, 기아는 멈출 줄을 모르고, 그런 상황 속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또 어디에선가 삶에 대한 투쟁을 벌이며 하루하루를 나아가고 있다. 시간을 견디며 이 모든 것이 지나가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이 책의 바리처럼.
'바리공주'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따온 이 책은 그 제목과 주인공의 이름부터 원형이 되는 그 설화를 따르고 있다. 북한에서 태어나 기적처럼 살아남은 한 여자아이가 넋과 몸을 분리해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고, 제 이름값이라도 하듯 그렇게 모진 세상과 현실을 감내해 가며 긴 여정을 이겨낸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바리공주가 겪고 깨달은 수 많은 것들처럼 바리 역시 수 많은 것들을 보고 깨닫게 된다. 하지만 바리공주는 생명수를 찾아냈지만 바리는 생명수를 찾아내지 못했다. 그러나 책을 다 읽고나면 독자는 깨닫게 된다. 바리가 생명수를 찾아내지 못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희망을 버리면 살아 있어도 죽은 거나 다름없지. 네가 바라는 생명수가 어떤 것인지 모르겠다만, 사람은 스스로 구원하기 위해서도 남을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한다. 어떤 지독한 일을 겪을지라도 타인과 세상에 대한 희망을 버려서는 안된다. (p.286)
이렇게 다양한 모습의 세계 속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생명수란 각자의 몫으로 남겨져야 했을지도 모르겠다. 결국 자신을 구원하는 것은 자신 뿐이고 희망을 유지하는 힘도 자신의 것이다. 분명히 세상엔 아직도 많은 대립과 갈등이 존재하고, 전쟁을 겪고 있는 사람들은 전쟁으로 괴로운 시간을, 전쟁을 겪고 있지 않는 사람은 누군가의 말처럼 전쟁을 준비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감내하고 살아갈 수 있는 건 사람이기 때문이고 그래도 아직 이 세상을 살만한 곳이기 때문이 아닐까. 사람에겐 그 무엇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때론 세상의 이기를 이겨내지 못하고 스스로 그 끈을 놓아버리는 사람도 있지만, 그 사람들보다 더 견디기 힘든 일이 있음에도 꿋꿋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이 이 세상이기에 조금은 세상과 사람에 희망을 걸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