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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언젠가 "왜 책을 읽느냐"라는 질문을 받았다. 잠시 멍해졌다. 난 왜 책을 읽는 거지? 그 땐 그저 장난처럼 '습관?'이라며 넘어갔지만 그 질문은 오래 마음에 남았다. 난 왜 책을 읽는 걸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갑자기 튀어나왔다. 자주 있는 일이 아니라서, 그 공백이 길어질 수록 그 때의 감정은 희미해 져가지만 책을 읽으며 가장 희열을 느끼는 순간은 내가 아닌 누군가가 되고 내가 갈 수 없는 어떤 공간에 가 있는 것을 느낄 때였다. 행복한 순간이건 비참한 순간이건 두려운 순간이건 기쁜 순간이건 책을 읽음으로서 할 수 있는 그런 간접 경험들은 때론 직접 경험들을 능가할 때가 있다. 그리고 정말 오랜만에 그런 경험을 다시 했다. 한 순간 육체가 이탈 해 낯선 장소에 가 있는 기분, 이 맛에 난 책을 읽는 것 같다는 묘한 긍정을 해 버렸다. 하지만 이번의 그 경험은 기쁘지도, 행복하지도 않았다. 처참함과 싸워야 하는 두려움이었다.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눈은 멀었지만 본다는 건가.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p.461)
모든 것이 진실한 모습을 드러내는 곳, 눈먼 자들의 도시
도로를 달리던 차 한 대가 갑자기 멈춰 버렸다. 사람들은 화가 났다. 멈춰 선 차를 향해 돌진하고 창문을 두드린다. 그 때 그 차 안에 있던 사람이 말한다. 눈이 안 보여.
그리고 전염병 처럼 점점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증가한다. 나라는 새로운 전염병을 경고하고, 백색의 악이란 이름으로 전염병을 정의한다. 눈이 보이는 사람들은 어둠 속에 갇힌 것이 아니라 하얀 빛 속에 갇혀 버렸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을 격리하기로 한다. 처음에 격리 된 사람은 여섯 명, 하지만 점점 수가 늘어난다. 그리고 결국엔 나라 전체가 눈이 멀고 만다. 단 한 사람, 의사의 아내를 제외 하곤.
우리는 눈이 머는 순간 이미 눈이 멀어 있었소. 두려움 때문에 눈이 먼 거지. 그리고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계속 눈이 멀어 있을 것이고. (p.185)
전염병이라는 것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급속도로 공포에 빠진다. 그리고 먼저 그렇게 된 사람들을 격리시킴으로서 안전을 찾으려고 한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다. 백색의 악은 점점 도시를 침투한다. 백색의 악이라는 전염병을 두려워 했던 사람들은 이제 갖고 있었던 때는 몰랐던 것의 중요성을 깨달으며 상실에의 두려움에 빠진다. 도시는 점점 공황 상태로 변하고 인간의 진실한 모습이 드러난다. 폭력적이고 야만적이고 비도덕적인 모습들, 사람들은 그 누구도 보지 못하기에 자신을 드러내고 그 모습들은 우리가 바랐던 질서 잡힌 윤리의식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전쟁 속에서도 희망은 싹 트는 것처럼, 사라지지 않는 휴머니즘이 의사의 아내를 둘러싸고 있다. 안보이는 사람들 속에서 보아야만 하는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그녀는 희생의 정신으로서 잃어가는 사람들의 삶을 회복시킨다.
눈먼 것이 드문 일이었을 때 우리는 늘 선과 악을 알고 행동했어요, 무엇이 옳으냐 무엇이 그르냐 하는 것은 그저 우리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이해하는 서로 다른 방식일 뿐이에요. 우리가 우리 자신과 맺는 관계가 아니고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믿지 말아야 해요. (p.388)
결국 모든 사람들은 시력을 회복한다. 그리고 잊지 않는다, 자신들이 눈먼 자들의 도시에 살았음을. 그렇기에 검은 색안경을 썼던 여자는 애꾸눈 노인 곁에 남고 첫번째로 눈이 먼 남자의 부인은 앞이 보이는 순간 의사의 아내를 끌어안는다. 그로 인해 그리고 그녀로 인해,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그들은 인간성을 상실한 것이 아니라 인간성을 회복했기 때문이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 살아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참혹하고 끔찍한 일이었다. 개들은 사람의 시체를 먹었으며 사람들은 악취에 익숙해져 갔다. 책을 덮고 한참을 멍하니 있어야 했다. 이것은 책 속의 상황이 아니라 우리의 상황이었다. 우리는 비록 지금 앞을 보고 있지만, 우리는 보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우리의 참 모습을 알기에 우리는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실은 우리가 윤리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것, 조금만 틀에서 벗어나도 한 없이 잔인하고 한 없이 야수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숨기기에 급급해서 보지 못한 척 하고 있는 것 뿐일테다. 그런 우리의 모습들이 이 책 속에서, 눈먼 자들의 도시 안에서 살아난다. 우리에게는 과연 인간성을 되찾아 줄 치과부인이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 나 부터 그런 사람이 될 수는 없을까? 어떤 공포물보다 어떤 스릴러물보다 더 섬세하게 감성을 흔들었다. 눈을 뜨고 똑바로 현실을 직시하라고 책은 소리치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 차례도 언젠가 올 것이다.
도시는 여전히 그 곳에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