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가 사랑한 수식
오가와 요코 지음, 김난주 옮김 / 이레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어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너무 기분이 좋았다. 혼자 콧노래도 부르고 타닥타닥 뛰어도 보고 그냥 씨익 씨익 웃기도 했다. 그냥 신이 나 있는 상태가 내겐 가끔 있다. 하지만 그런 시간이 지나가고 나면 마치 조울증 환자마냥 울고싶어질 때가 있다. 슬픈 것도 우울한 것도 아닌데 그냥 마음이 먹먹해서 울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울지 못한다. 우는 법을 많이 잊어버린 요즘이기 때문이다. 그런 울고 싶은 마음으로 이 책을 만났다. 마음 한켠이 먹먹한 채로, 친한언니가 "착한 책"이라 말한 이 책을 집어 들고 그 따뜻한 책의 기운을 느꼈다. 그러다가 울음이 목구멍까지 차 올랐다. 꿀꺽 침 한 번을 삼키자 다시 울음은 내려갔고 또 다시 차 올랐다. 여전히 울 수는 없었다.
 

     한 나라 문학은 나름대로의 그 느낌이 있다. 장르를 불문하고, 그 나라 문학 나름대로의 느낌이 있는 것이다. 국민성이라고 하기엔 조금 애매하다. 아시아 사람들이 다 똑같아 보여도, 국적에 따른 고유의 느낌이 있듯 그런 느낌이다. 예를 들어, 우리랑 비슷하게 생겼지만 왠지 중국인 같은 느낌이 있고, 우리랑 비슷하게 생겼지만 왠지 일본인 같은 느낌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일본문학은 나름대로의 섬세함을 지니고 있는 느낌이다. 아주 미세한 손 끝으로 0.1도의 온도차이까지 감지해 낼 것 같은 섬세함. 어떤 장르를, 어떤 작가를 읽어도 일본문학을 만날 때면 왠지 모르게 그런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이 책 역시 그 섬세함으로, 그 날카로운 손끝으로 독자의 감성을 건드리고 있었다.
 

     80분을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내 기억이 어느 순간 멈춰있고 난 80분마다 그 스톱 된 시간에서 다시 시작하는 느낌이란. 아니, 그런 느낌조차 없다. 난 내가 80분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 조차 몰라야 하니까. 글을 쓰지 않을까란 생각을 한다. 80분 어치의 글을 쓰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또 80분이 생기면 전의 80분 동안 썼던 글을 읽고 거기에 이어 또 다시 글을 쓰는 것이다. 그러다 생각이 미쳤다. 80분 안에 다 읽지 못할 정도로 글이 길어진다면 어쩌지? 그래서 생각을 했다. 단편을 써야겠다고. 내가 사랑하는 활자로.


     하지만 박사는 활자보다는 수식을 사랑한다. 숫자로 이루어진 그 나열 안에서 박사는 80분이 아닌 하나의 인생을 살아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인생을 살아내기 위해 박사는 옷에 메모를 붙여나간다. 가정부, 가정부 아들 루트, 루트의 생일파티, 루트의 글러브 선물은 어디에, 난 80분 밖에 기억하지 못한다.

     수식을 사랑하던 박사지만, 난 감히 그에게 말하며 웃어보인다. 당신의 인생 역시 활자였군요. 그 수식들을 기억하기 위해, 당신도 활자를 사랑했군요 라고. 그러면서 박사와 나 사이에 묘한 공감대를 형성한다. 마치 루트와, 가정부와 박사 사이의 그 미묘한 일체감처럼.

     80분을 살아가는 박사지만 그 병이, 그리고 80분이 모든 것을 가져가도 가져가지 못하는 것이 있다. 인간 본연의 따뜻함, 그리고 배려. 박사는 루트를 그렇게 보살핀다. 80분이 지나면 이 아이가 누구인지 알 수 없어지지만, 또 다시 네 머리통이 루트 같으니 루트이다! 할 뿐이지만, 그래도 그 본연의 따뜻함과 배려로 루트를 사랑해 주는 것이다. 평생 누군가에게 안겨 본 적이 드문, 하지만 역시 따뜻한 마음을 지닌 그 아이를.
 

     내 시간이 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조금쯤은 흘려버려도 될 것이라고. 하지만 생각해본다. 나 역시도 아니 우리 모두가 주어진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고. 박사는 80분이었지만 우린 단지 몇년일 뿐이라고. 그 시간이 지나가면 우리는 그동안 살아낸 모든 것을 잊고 다시 시작하는 것이고 아무도 그걸 알아채지 못하는 것일 뿐이라고. 그렇다면 지금의 이 시간은 박사의 1분만큼이나, 그리고 그가 사랑한 수식만큼이나 사랑스런 시간이다. 슬며시 박사의 손을 잡는다. 나도 당신과 같은 병에 걸렸노라고 말해본다. 또 다시 묘한 동질감에 휩싸인다.

    

     결국 울지 못했다. 목구멍까지 울음이 찬 상태로 책을 덮었다. 그런데 계속 마음에 박사가 남았다. 몇년 간 가정부를 9명이나 갈아치운 그 사람을 평생 찾아갔던 한 가정부와 루트 옆에 내가 서 있었다. 그리고 박사가 내게 물었다. 생일이 언제야? 9월27일이요. 멋진 수군. 매력적이야. 난 씨익 웃으며 박사에게 묻는다. 이건 어떤 의미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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