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소금사막에 비가 내리면 - 테오에세이
테오 글.사진 / 삼성출판사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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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난 가능한 여행기를 읽지 않으려 한다. 그것은 싫어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난 오히려 여행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읽지 않으려 함은 내가 여행을 준비할 수 없는 상황에서 여행기는 내 발바닥을 간지르고 내 등을 밀어내기 때문이다. 난 지금 떠날 수 없어서 -사실 떠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두려운 것이겠지만- 발 끝에 힘을 주고 떠밀리지 않으려 등을 곧게 세워야 한다. 그러다 보면 찌릿찌릿 온 몸에 긴장이 되고 애써 외면했던 현실이 성큼 다가와버린다.

     작가의 전작, <당신의 아프리카에 펭귄이 방문했습니다>를 만났을 때 난 (실패로 끝나버렸지만) 여행을 꿈꾸고 있었다. 그래서 여행을 꿈꾸는 내 꿈을 더듬으며 그 책을 만났고 가보지 못한 남아프리카를 그리워했다. 언젠가 남아프리카에서 온 웃는 모습이 착하던 Mr.Burger가 들려준 그의 고향 이야기에 더불어 그 책이 날 그곳을 꿈꾸게 했다. 그리고 지금 난 또 다시 여행을 꿈꾸고 있고, 그 여행이 이번엔 성큼 다가온 지금 <당신의 소금사막에 비가 내리면>이라는 작가의 볼리비아 여행을 만났다.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이 책을 내고 있고, 다양한 장소와 종류의 여행기들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그 중에서 정말 발바닥을 간지럽혀서 출발을 꿈꾸게 하는 것은 많지 않다. 이 작가의 여행기가 그런 여행기들과는 조금 다른 것은 작가만의 감성이다. 책 속에는 여행지에 대한 어떤 정보도, 또 어떤 설명도 찾아볼 수 없다. 대신 작가의 발걸음이 멈추는 곳에는 '사람'이 있고 '현재'가 있을 뿐이다. 작가는 여행지에서 그 사람들과 친구가 되어 대화를 나누고 서로를 보듬는다. 따뜻한 체온과 사람 냄새, 이 책은 그 두가지로 조금 특별한 여행기가 된다.

     <당신의 아프리카에 펭귄이 방문했습니다>에 이어 만나는 이 책은 조금 더 반갑다. 그 책의 마지막에서 작가는 다음 여행지를 '소금사막'이 될 것 같다고 했다. 그것을 기억하는 난, 작가의 소금사막이 빨리 내게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약속대로 소금사막은 너무나 벅찬 사진과 감성으로 찾아왔다. 그리고 그 소금사막에서 작가는 전작에서 조금씩 흩뿌려놓던 알 수 없는 '슬픔'의 원인을 고백한다. 우린 알고있지 않은가, 말하지 못한 슬픔은 말할 수 있는 슬픔보다 더 크고 더 깊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것을 말할 수 있게 된 지금, 작가를 치료해 준 것이 낯선 곳의 쉼과 바람이라는 것을 눈치 채본다. 그리고 살짝 시샘해 보게 된다.

 

     세상에는 나보다 더 행복한 사람도 있고, 나보다 덜 행복한 사람도 있다는 말에 마음이 멈췄다. 그 말을 읽으며 숨을 골랐다. 참 우린 바쁘게 살고 있다. 왜 우린 조금 덜 가져도 더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토록 잊으려 하는 걸까. 왜 하늘을 한 번 바라볼 여유를 갖지 않는걸까. 내가 여행을 꿈꾸게 되었을 때 난 나의 '한계'가 왔음을 깨닫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여행을 꿈에서 현실로 꺼내놓자 그동안 내게 없었던 것은 금전적, 혹은 시간적 '여유'가 아닌 마음의 '여유'라는 사실이 다가왔다. 그 사실에 난 내 시간에 미안해졌다. 이제 난 여행을 계획한다. 그곳은 남아프리카도 우유니 사막이 있는 볼리비아도 아닌 다른 곳이지만 그곳이 나의 여행지가 될 것임은 의심치 않는다.

     아직도 이 곳엔 여행을 꿈꾸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난 그들의 손을 잡고 이 책을 가만히 놓아주고 싶다. 이 책은 여행을 꿈꾸지 못하는 사람들의 등을 힘껏 밀어주고 그들의 등에 아주 작은 날개를 달아줄 것이다. 단 한장의 사진만으로도 많은 이들을 설레게 한다는 '우유니 사막' 그리고 그 곳까지의 여정에 있는 우리를 닮은, 그리고 우리와 다른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동안 그 날개가 무럭무럭 자라나 여행을 꿈꾸지 못하는 그들의 일상에 '꿈'이 다가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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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북소녀 2008-06-30 1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땡스 투~^^
 
낭만과 모험의 고고학 여행
스티븐 버트먼 지음, 김석희 옮김 / 루비박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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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시간을 캐는 모험, 고고학 속으로.

 

     고고학이란 꽤나 매력적인 학문임에 틀림없다. 지나간 시간을 복원해 우리 이전에도 누군가 살아왔으며 우리 이후에도 누군가 살아갈 것임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이 땅이 우리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그러니 우리에겐 이 땅을 '소비'할 권리가 없고 '아낄' 의무가 있다고 말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듣기 위해선 우리가 과거를 끊임없이 발굴해야 하며 그 발굴엔 어쩔 수 없이 희생과 상처가 따른다. 그래서 고고학은 다소 역설적인 학문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갈 수 없는 곳에의 신비는 예로부터 계속 지속되었기 때문에 우린 아직도 발굴되지 않은 과거의 시간을 갈망하고 탐구하려 한다. 그렇게 신비와 매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다소 낯설고 어려워 보이는 것이 고고학이기도 하다.

 

     이 책의 처음 '추천의 말' 부분에는 버트먼 박사가 명쾌하며 알기 쉽게 글을 쓰는 작가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을 만나게 되면 그 말이 결코 거짓이 아님을 실감하게 된다. 이 책을 통해 고고학이라는 학문과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우린 우리가 신비와 매력을 느꼈던 '과거'로의 여행을 하게 된다.

     책은 26개의 과거 여행을 담고 있다. 물론 그 안에는 약간의 기본적인 고고학이란 학문으로서의 접근도 담겨있지만 마치 할아버지의 옛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정겹고 재미있다. 고고학이 어려운 것이 아닌 그저 우리의 옛날이었음을 실감하게 되고, 그들이 걸었던 길을 마치 인디아나 존스가 된 기분으로 파헤쳐 보게 된다. 이런 고고학은 당연히 종교와 지리와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류에게 큰 영향을 미친 몇몇 종교에 대한 지식과 정보도 알 수 있게 되고 세계 유적지의 지리적인 요건들까지 파악할 수 있게 되니 일석 삼조 이상의 정보를 갖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정보를 갖게 되는 과정이 결코 어렵지 않으니 고고학에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막연히 어려울 것이라 생각하고 낙담하던 사람들은 아주 반갑고 쉽게 고고학으로 들어가는 문이 생긴 셈이다.

 

     챕터도 길지 않고 중요한 부분만 재미있게 그려져 있어서 짧은 이야기를 듣듯 재미있게 책을 읽어나갔다. 특히 전설로만 알고있던 이야기들을 파헤치는 '미노타우르스의 전설'이나 '아서 왕 이야기'들은 흥미를 끌기 충분했고 내가 평소에 관심을 갖고 있던 '중국 진시황제의 무덤'에서는 기존의 정보 외에 또 다른 것들을 알 수 있어서 보다 유익했다.

     하지만 늘 고고학 관련 서적을 읽을 때면 아쉬움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우리는 우리가 가보지 못한 시간을 발굴하고, 그 시간 속에서 미래를 꿈꾸게 되지만 발굴이란 이름 하에 있는 어쩔 수 없는 약탈 행위를 목격하는 것은 썩 반가운 일은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미래라는 이름 하에 과거를 약탈하고 있는 약탈자인지도 모른다.

     "모든 인간은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죽인다." 라는 오스카 와일드의 말이 고고학에는 어쩜 이리도 마침맞을까.

 

 

     + 밑줄 긋는 앨리스

     과거가 '옛날'인 까달은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이 자리에서 과거를 돌아보기 때문일 뿐이다. 옛사람들에게 과거는 언제나 활기차고 새로운 현재였따.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언젠가는 '옜사람'이라고 불리게 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 덧없는 인생을 사랑하고 이들과 함께 나누고 있지만, 언젠가는 몇 마디로 요약된 무미건조한 모습으로 교과서에 실릴 것이다.

     현재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하지만 과거는 역사적 원근법으로 정확하게 바라볼 수 있다. 과거는 시작과 중간과 결말이 완비되어 있고, 그 원인과 결과는 언제든지 해부될 준비를 갖추고 있다. 그렇게 때문에 과거는 현재보다 오히려 이해하기 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만큼 직접적이거나 활기차지는 못하다. 그러나 과거도 한때는 현재였다. 우리가 과거의 고유한 특징들을 과거에 되돌려 주기만 하면, 과거의 자연스러움과 생기를 과거에 되돌려 주기만 하면, 우리도 과거를 볼 수 있다.

     옛날의 우리 얼굴을 보려면 훈련이 필요하다. 겨울바람 속에 서서, 한때는 무성했지만 지금은 죽어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에서 힘을 얻어야 한다. 풍성한 봄은 오로지 죽은 나뭇잎에서만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p.13-14)

 

     고고학자-'시간을 캐는 사람'-란 금이 아니라 시간 자체의 보물을 찾아다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한때 지구상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 지상에서 오래전에 사라졌지만 되찾을 수 있는 이야기를 찾아내는 것이 고고학자의 임무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읽을 수 있으려면, 유적을 조심스럽게 발굴하고 조각난 책장을 모두 모아서 끈기있기 서책을 복원해야 한다. 어떤 책장도 내버릴 수 없고, 어떤 일화도 문맥에서 떼어내면 안된다. (p.126)

 

     오늘날에도 우리가 그들 앞에 서면, 그들은 그 검은 눈으로 우리를 유심히 마주보며 요구한다. 자기들은 박물관에 진열된 먼지투성이의 전시품이 아니라 과거 세계에서 온 진짜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해 달라고. (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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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첫 십년의 한국 - 우리시대 희망을 찾는 7인의 발언록 철수와영희 강연집 모음 2
리영희 외 지음, 박상환 엮음 / 철수와영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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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찍이 최인훈은 <광장>이라는 소설에서 '중립국'을 외치는 이명준을 등장시킨다. 그가 다소 내면적인 갈등에 사로잡혀 진실된 '광장'을 추구하지 못했다는 한계는 있지만 이는 처음으로 이데올로기의 대립에 대한 한 시민의 갈등을 보여준 작품이라는데 의의가 있다. 그는 결국 중립국을 외치며 바다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소설이 발표된 지 대략 반세기가 흘렀다. 지금 이 나라에서 중립국을 외치는 사람은 보기 힘들지만 좌파 우파를 외치는 사람은 흔하게 보게 된다. 종종 그런 사람들을 보게 되면 그 사람의 위치를 생각해 본다. 과연 어떤 입장에 서서 어떤 확고한 신념으로 자신들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는 것일까. 또 그 사람들이 '진보'와 '보수'를 나누고 '좌파'와 '우파'를 나누는 데에는 어떤 기준이 있는 것일까를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그 어떤 이의 말에도 귀를 온전히 기울일 수 없게 된다. 또 완전한 '중립'은 없다지만 '중립'을 꿈꾸는 나는 그 누구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고 싶지 않게 되어 버린다. 그저 나만의 사고와 판단으로 살아가길 원한다. 그러다보니 난 정치에 관련 된 이야기에는 자연스레 입을 다물게 된다. 우리나라의 대다수는 어중간한 '중립'을 허용하지 않는다. 어중간하다는 표현을 쓴 것은 위에도 말했듯 완전한 중립은 없다는데 동의를 하기 때문이며 그럼에도 중립을 꿈꾸는 것은 조금은 억지스러운 면과 함께 어중간한 애매성을 띄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어쨌든 어중간하게나마 '중립'을 꿈꾸는 사람들은 때때로 '생각이 없다'는 핀잔을 들으며 '나라 돌아가는 꼴에 관심이 없다'는 비난까지 때때로 감수해야 한다. 물론 언론이나 학계에서 이름을 알린 사람들의 그런 발언은 '진보적'이라는 말을 들으니 중립을 꿈꾸는 이들은 다시 중립적이지 못하게 되는 모순을 겪으며 그나마 핀잔과 비난을 듣지 않는 (우리가 소위 말하는) 지성인으로 거듭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 책은 그런 지성인 7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서문에서 알 수 있듯 이 책은 2003년 12월부터 2005년 6월까지에 있었던 콜로키움의 내용을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2008년 현재 시점에서 재구성한 것이다. 시간이 흘렀지만, 당시에 제기한 문제들이 현재까지 유용하다는 점에선 새삼스러운 놀라움과 함께 다소 회의가 생기게 된다. 

     2년 반정도에 걸쳐 진행 된 콜로키움의 내용이지만, 중심적으로 흘러가는 것은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국제관계이고 그 중에서도 특히 과거사 청산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물론 이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이며 아직까지도 우리에게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아있는 것이다. 콜로키움이 진행된 지 3년 정도가 지났지만 여전히 '문제거리'인 이 과제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안병욱씨가 말한대로 과거사 청산에서 '청산'이란 의미는 clearing이나 liquidate보다는 settling의 의미가 강하며 이는 우리역사의 흐름에서 나온 특수적인 형태이므로 주체적인 해결이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까지 '쭉' 그래왔듯 우린 또 다시 어딘가에서 타국의 경험을 차용해서 쓰려하고 있는 꼴이다. 이것은 단지 미국에 대한 맹목적인 숭배사상에서 벗어나 서구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가 가져오는 어이없는 경우이다. 이 책 속 7인은 이 점을 지적하며 바르게 나아가길 지적한다. 하지만 손호철씨 말처럼 우리나라엔 틀린 것을 이야기 할 자유가 없다. 우린 끊임없이 자유를 위해 개혁을 해왔다 생각하지만 그것은 수구였을 뿐이고 보수나 수구나 마찬가지로 앵똘레랑스의 요구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언론을 극히 비신뢰하게 되는 일명 '음모론'을 끊임없이 생산해 내는 나는 곧잘 언론을 무시하게 된다. 이렇게 언론을 무시하다보면 분명 다수가 주장하는 현실에 무지해지는 부정적인 결과는 생길지 몰라도 적어도 한 편의 주장에 기울어지지는 않게 된다. 또 자신이 어느 한 편의 주장에 기울어져 있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중립을 주장하지도 않게 된다. 그저 무지를 핑계삼아 다양한 의견을 듣고 자신만의 생각은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대다수는 풍부한 언론 속에서 너무 영리해져 현실을 보는 자신의 시각이 종종 모순에 빠진다는 것을 잃어버린다. 그런 대다수에게 차라리 '공격'적인 깊이보면 자가당착적인 면이 있는 몇몇 주요 언론보다는 일관성이 있는 논리를 피력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볼 것을 권하고 싶다.

     이 책 속 7인의 주장은 어느 하나 버릴 것이 없고 모두 일관적인 논리를 펼친다. 이 주장들은 모두 일관되고 논리적이지만, 이상하게 언론에 노출된 대중의 귀에 이런 일관 된 이야기가 들어가면 곧잘 또 다른 가지를 첨가한 논리로 재탄생하며 모순을 띄기도 한다. 풍부한 언론을 무시하지 않고 모두가 정치에 한소리 할 수 있는 영리한 시민이 되어가는 현실이 다시 언론의 노예를 생산해내는 셈이다. 책에서 리영희씨는 "To doubt is the beginning of reason."을 항상 염두에 둘 것을 당부했다. 사실, 그 당부를 받아들이자면 이 책의 모든 내용 역시도 'to doubt' 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괜찮은 목소리까지 의심해 버리는 생각없는 인간이 의심할 줄 모르는 똑똑한 방관자보다는 낫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의심을 할 수 있는 근거들을 책 안에서는 충분히 찾아볼 수 있으며 그 근거를 통해 좀 더 다양한 대안을 스스로 찾아보길 희망한다. 다양한 TATA - There are thousands alternative를 만나게 되는 것에는 옳고 그름, 혹은 좋고 나쁨이 개입할 여지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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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향하여
존 버거 지음, 이윤기 옮김 / 해냄 / 199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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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걱정하지 말아라. 그 나머지는 사랑해도 된다.

 

    결국 모든 것을 구원하는 건 사랑이야. 문학작품이나 TV드라마를 보며 난 종종 이렇게 중얼거린다. 그런 이야기들 속에서 사람들은 사랑으로 인해 다양한 두려움과 역경을 헤쳐나갈 힘을 얻게 된다. 하지만 그런 종류의 것들을 보면서도 정작 나는 사랑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있진 못하다. 어차피 사랑도 소모적인 것이고 조건적인 것이라 순수할 수 없다고, 그러니 역시 세상에 믿을 건 나 하나 뿐이라고 그렇게 믿는 난 많이 이기적인 사람이다. 하지만 이 책은 내 마음을 흔들만큼 아름다웠고 그다지도 이기적인 내게 걱정말고 사랑하라고 보듬어 주었다. 사랑, 그것은 어쩜 이리도 달콤한 유혹인걸까.

 

    장님 행상인이 풀어나가는 이야기는 위험해 보이지만 아름답고 무모해 보이지만 눈물겹다. 사랑에 빠진 그 순간, 자신이 에이즈에 걸렸음을 알게 된 니농. 그리고 니농을 사랑하는 것을 포기할 수 없는 지노. 그들은 위험하고 무모하게도 결혼을 향한 준비를 해 나간다. 이들을 말릴 수 없는 지노와 니농의 부모는 결국 그들의 사랑에 축복을 해주는 수 밖에 없다. 끝이 보이는 축복이지만 어차피 우리는 누구나 늙어가고 그 현실이 어떻게 보면 우리에겐 가장 무자비한 병이 아니던가. 그러니 살았을 땐 누구나 사랑해도 된다. 이 책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모두 믿어지지 않는 방식으로 살아가지요. 상상도 못하던 짓을 하면서 살아가지요. (p.178) 책 속 말처럼 니농과 지노의 사랑은 믿어지지 않고 상상조차 하기 힘든 위험한 기로지만 그들은 뛰어넘는다. 그게 바로 우리의 희망이고 상실이기 때문이다. 우린 누구나 이 둘을 가슴에 안고 살지 않았던가.

 

    니농의 아빠 쟝이 니농의 결혼식에 가기 위해 하는 여행은 이 이야기의 아름다움을 더 돋보이게 한다. 딸이 에이즈에 걸린 것을 알지만 그것이 딸을 포기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쟝은 너무나 잘 안다. 그래서 쟝은 니농을 위해 심장이 찍힌 주석 타마를 사고 멀리 나가는 향수를 산다. 그것은 지노와는 또 다른 죽음을 뛰어넘는 쟝의 사랑법이다. 그리고 쟝 뿐만 아니라 니농의 엄마 제나, 그리고 지노의 아빠의 마음도 크게 다를 순 없다. 그들도 또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아이들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세상의 증오와 아픔을 뛰어넘는다.

 

    세상엔 얼마나 사랑과 사람을 파괴하고 억압하는 것이 많은가. 하지만 그것들에 의해 파괴당하고 억압당하는가 혹은 그것들을 이겨내고 행복을 맞이하는가는 전적으로 개인들의 마음에 달려있다는 것을 작가는 너무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다. 비록 이 행복의 끝이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어도 가능성으로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이 사람이고 그 가능성이 바로 사랑임을 말한다. 에이즈, 이미 많은 사실들이 알려져 있더라도 우린 아직도 그 병에 많은 편견을 갖고 고정된 시선을 풀지 못한다. 하지만 늘 두려움 때문에 마음을 열지 못하진 않았던가. 이 아름다운 두 남녀와 그들을 둘러싼 사랑을 통해 사랑의 의미와 함께 마음의 문도 열게 되길 바란다.

 

    + 책 속 구절


    정말 견딜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의 말투가 아니었어요. 견딜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의 증오였어요. 저와 상관이 있는 것이면 뭐든 다 증오의 대상이 되었어요. 누구 말마따나, 사람들은 모든 것을 사랑하면서도 모든 것을 증오하는 거예요. 거기에 남아날 게 있을리 없죠. (p.153)


 

    하늘나라에서는, 악마만 빼고 모두 아름답다더라. 하늘에 올라가면 아름다움 따위는 소용없대.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나 아름다움을 추구해. 왜냐? 아름다운 것을 보아야 '선'이 무엇인지 알 수 있거든. (p.157)


 

    어려운 시절이에요. 우리는 벼랑에서 살고 있어요. 어려운 것은 우리가 우리 습관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에요. 한때는, 노소를 불문하고, 빈부를 불문하고 사람들은 그런 습관을 당연하게 여겼어요. 삶은 고통스럽고 불확실했어요. 기회는 무자비하리만치 인색했어요. (p.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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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 마음을 놓다 - 다정하게 안아주는 심리치유에세이
이주은 지음 / 앨리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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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씩은 쉼표하나에 마음이 편안해질 때가 있다. 긴 문장을 읽다가 쉼표에 한번 숨을 쉬고, 혹은 짧은 문장을 읽다가 쉼표 하나에 마음이 놓인다. 물론 쉼표의 남용이 좋다는 의미는 아니다. 쉼표의 적절한 사용, 그것은 글에 숨을 쉬게 하고 글을 보는 - 여기선 읽는다는 표현보단 본다는 표현이 좋을 것 같다 - 사람의 마음을 놓게 한다. 저자는 그것을 알고 있었던 걸까? 이 책의 제목 <그림에, 마음을 놓다>는 왠지 제목만큼이나 제목을 구성하는 글자의 배열에서부터 마음을 놓게 만든다.

 

     한젬마를 선두로 해서 다양한 그림을 읽는 책들이 나오고 있다. 이런 책들은 그림을 이해하기 어려운 별세계의 예술로 생각했던 사람에게 그림과 친해지는 기회를 제공한다. 하지만 늘 그렇지 않은가. 모자랄 땐 필요성을 모르다가 적게나마 공급이 시작되면 필요성은 급증하고 그러다가 공급이 넘쳐나면 그 홍수 속에 잠시 방향을 잃게 된다. 정말 다양한 미술관련 서적이 나오고 있고 그 중 어떤 책이 괜찮은 책인지는 참 골치아픈 일이다. 그런 와중에 꽤 괜찮은 그림을 읽는 책을 만났다는 기분이다.

 바네사 벨 <욕조>, 1917

 

     그림을 볼 수 있는 책들을 꽤나 반기는 내 입장에서 괜찮은 책과 그저그런 책을 나누는 기준은 수록된 그림의 신선도이다. 어느 미술책을 펴나 다 만날법한 그림들은 왠지 식상하다. 그 그림은 유명세를 치루는 것이겠지만 독자의 입장에선 학창시절 교과서에서 보던 그림을 보고 또 보는 셈이다. 물론 저자에 따라 그림을 해석하거나 감상하는 능력을 달라지지만 이미 낯이 익은 그림들은 나 역시 그 그림을 감상하는 방법을 갖고 있는 경우가 있어 그다지 흥미가 생기지 않는다. 그래서 낯이 익은 그림보단 좀 더 새롭고 가슴 설레는 만남을 하고 싶다. 그리고 다행히도 이 책에는 아주 멋지고도 새로운 만남이 많이 자리하고 있다. 가장 첫 페이지에 나오는 바네사 벨의 <욕조>도 내겐 새로운 만남이었고 시작부터 난 그림에, 마음을 놓아버렸다. '나는 언제나 네 편이야'라는 저자의 말에 괜시리 내 마음을 열고 책과 그림과의 소통을 시작하게 된 셈이다.

 

 라우리츠 링 <창 밖을 보는 소녀>, 1885

 

     물론 낯익은 그림도 없지는 않다. 마그리트의 <인간의 조건>이나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비롯해 르누아르의 <물랭 드 라 길레트에서의 춤> 같은 낯익은 명화도 많이 만날 수 있다. 하지만 그림과 소통하는 저자의 개인적 이야기를 통해 내 나름대로의 그림과 마주하는 법을 만들어 볼 수 있다. 저자는 단지 그림의 배경만 이야기 하거나 그림을 통한 자신의 감정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을 아주 적절하고 교묘하게 섞을 줄 안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꺼냄으로서 독자들도 이 그림들을 보며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도록 이끌어 간다.

 

     자신의 내면을 돌보기란 쉽지가 않다. 내 몸, 내 마음은 내 것이지만 어쩜 이리 내 이성대로 돌아가지 않는지. 타인을 돌보기보다 나 자신을 돌보기가 더 힘이 든 법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그림과의 소통을 통해 자신을 돌아볼 수 있다면 이는 참 멋지고도 황홀한 경험이 될 것 같다. 난 가끔 한적한 시간의 미술관에서 그림을 보며 혼잣말을 하는 버릇이 있다. 그냥 그림을 보며 그림 속 누군가 혹은 무언가에게 말을 건네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나도 모르게 아무에게도 못하던 내 속마음을 이야기 하게 된다.

     이제 더 이상 그림은 먼나라 별나라의 것이 아니다. 다양한 전시회가 우리 주변에서 열리고 있고 다양한 미술관련 서적이 나오고 있다. 이제 미술은 우리에게 조금씩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다. 한권의 문학서적도 독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리듯 미술서적도 자신에게 맞는 것이 독자마다 다를 것이다. 하지만 조금 더 다양한 그림을 만나 그림에, 마음을 놓고 싶다면 이 책에 한 번 안겨 보는 것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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