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최인훈은 <광장>이라는 소설에서 '중립국'을 외치는 이명준을 등장시킨다. 그가 다소 내면적인 갈등에 사로잡혀 진실된 '광장'을 추구하지 못했다는 한계는 있지만 이는 처음으로 이데올로기의 대립에 대한 한 시민의 갈등을 보여준 작품이라는데 의의가 있다. 그는 결국 중립국을 외치며 바다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소설이 발표된 지 대략 반세기가 흘렀다. 지금 이 나라에서 중립국을 외치는 사람은 보기 힘들지만 좌파 우파를 외치는 사람은 흔하게 보게 된다. 종종 그런 사람들을 보게 되면 그 사람의 위치를 생각해 본다. 과연 어떤 입장에 서서 어떤 확고한 신념으로 자신들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는 것일까. 또 그 사람들이 '진보'와 '보수'를 나누고 '좌파'와 '우파'를 나누는 데에는 어떤 기준이 있는 것일까를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그 어떤 이의 말에도 귀를 온전히 기울일 수 없게 된다. 또 완전한 '중립'은 없다지만 '중립'을 꿈꾸는 나는 그 누구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고 싶지 않게 되어 버린다. 그저 나만의 사고와 판단으로 살아가길 원한다. 그러다보니 난 정치에 관련 된 이야기에는 자연스레 입을 다물게 된다. 우리나라의 대다수는 어중간한 '중립'을 허용하지 않는다. 어중간하다는 표현을 쓴 것은 위에도 말했듯 완전한 중립은 없다는데 동의를 하기 때문이며 그럼에도 중립을 꿈꾸는 것은 조금은 억지스러운 면과 함께 어중간한 애매성을 띄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어쨌든 어중간하게나마 '중립'을 꿈꾸는 사람들은 때때로 '생각이 없다'는 핀잔을 들으며 '나라 돌아가는 꼴에 관심이 없다'는 비난까지 때때로 감수해야 한다. 물론 언론이나 학계에서 이름을 알린 사람들의 그런 발언은 '진보적'이라는 말을 들으니 중립을 꿈꾸는 이들은 다시 중립적이지 못하게 되는 모순을 겪으며 그나마 핀잔과 비난을 듣지 않는 (우리가 소위 말하는) 지성인으로 거듭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 책은 그런 지성인 7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서문에서 알 수 있듯 이 책은 2003년 12월부터 2005년 6월까지에 있었던 콜로키움의 내용을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2008년 현재 시점에서 재구성한 것이다. 시간이 흘렀지만, 당시에 제기한 문제들이 현재까지 유용하다는 점에선 새삼스러운 놀라움과 함께 다소 회의가 생기게 된다. 2년 반정도에 걸쳐 진행 된 콜로키움의 내용이지만, 중심적으로 흘러가는 것은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국제관계이고 그 중에서도 특히 과거사 청산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물론 이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이며 아직까지도 우리에게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아있는 것이다. 콜로키움이 진행된 지 3년 정도가 지났지만 여전히 '문제거리'인 이 과제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안병욱씨가 말한대로 과거사 청산에서 '청산'이란 의미는 clearing이나 liquidate보다는 settling의 의미가 강하며 이는 우리역사의 흐름에서 나온 특수적인 형태이므로 주체적인 해결이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까지 '쭉' 그래왔듯 우린 또 다시 어딘가에서 타국의 경험을 차용해서 쓰려하고 있는 꼴이다. 이것은 단지 미국에 대한 맹목적인 숭배사상에서 벗어나 서구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가 가져오는 어이없는 경우이다. 이 책 속 7인은 이 점을 지적하며 바르게 나아가길 지적한다. 하지만 손호철씨 말처럼 우리나라엔 틀린 것을 이야기 할 자유가 없다. 우린 끊임없이 자유를 위해 개혁을 해왔다 생각하지만 그것은 수구였을 뿐이고 보수나 수구나 마찬가지로 앵똘레랑스의 요구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언론을 극히 비신뢰하게 되는 일명 '음모론'을 끊임없이 생산해 내는 나는 곧잘 언론을 무시하게 된다. 이렇게 언론을 무시하다보면 분명 다수가 주장하는 현실에 무지해지는 부정적인 결과는 생길지 몰라도 적어도 한 편의 주장에 기울어지지는 않게 된다. 또 자신이 어느 한 편의 주장에 기울어져 있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중립을 주장하지도 않게 된다. 그저 무지를 핑계삼아 다양한 의견을 듣고 자신만의 생각은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대다수는 풍부한 언론 속에서 너무 영리해져 현실을 보는 자신의 시각이 종종 모순에 빠진다는 것을 잃어버린다. 그런 대다수에게 차라리 '공격'적인 깊이보면 자가당착적인 면이 있는 몇몇 주요 언론보다는 일관성이 있는 논리를 피력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볼 것을 권하고 싶다. 이 책 속 7인의 주장은 어느 하나 버릴 것이 없고 모두 일관적인 논리를 펼친다. 이 주장들은 모두 일관되고 논리적이지만, 이상하게 언론에 노출된 대중의 귀에 이런 일관 된 이야기가 들어가면 곧잘 또 다른 가지를 첨가한 논리로 재탄생하며 모순을 띄기도 한다. 풍부한 언론을 무시하지 않고 모두가 정치에 한소리 할 수 있는 영리한 시민이 되어가는 현실이 다시 언론의 노예를 생산해내는 셈이다. 책에서 리영희씨는 "To doubt is the beginning of reason."을 항상 염두에 둘 것을 당부했다. 사실, 그 당부를 받아들이자면 이 책의 모든 내용 역시도 'to doubt' 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괜찮은 목소리까지 의심해 버리는 생각없는 인간이 의심할 줄 모르는 똑똑한 방관자보다는 낫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의심을 할 수 있는 근거들을 책 안에서는 충분히 찾아볼 수 있으며 그 근거를 통해 좀 더 다양한 대안을 스스로 찾아보길 희망한다. 다양한 TATA - There are thousands alternative를 만나게 되는 것에는 옳고 그름, 혹은 좋고 나쁨이 개입할 여지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