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씩은 쉼표하나에 마음이 편안해질 때가 있다. 긴 문장을 읽다가 쉼표에 한번 숨을 쉬고, 혹은 짧은 문장을 읽다가 쉼표 하나에 마음이 놓인다. 물론 쉼표의 남용이 좋다는 의미는 아니다. 쉼표의 적절한 사용, 그것은 글에 숨을 쉬게 하고 글을 보는 - 여기선 읽는다는 표현보단 본다는 표현이 좋을 것 같다 - 사람의 마음을 놓게 한다. 저자는 그것을 알고 있었던 걸까? 이 책의 제목 <그림에, 마음을 놓다>는 왠지 제목만큼이나 제목을 구성하는 글자의 배열에서부터 마음을 놓게 만든다. 한젬마를 선두로 해서 다양한 그림을 읽는 책들이 나오고 있다. 이런 책들은 그림을 이해하기 어려운 별세계의 예술로 생각했던 사람에게 그림과 친해지는 기회를 제공한다. 하지만 늘 그렇지 않은가. 모자랄 땐 필요성을 모르다가 적게나마 공급이 시작되면 필요성은 급증하고 그러다가 공급이 넘쳐나면 그 홍수 속에 잠시 방향을 잃게 된다. 정말 다양한 미술관련 서적이 나오고 있고 그 중 어떤 책이 괜찮은 책인지는 참 골치아픈 일이다. 그런 와중에 꽤 괜찮은 그림을 읽는 책을 만났다는 기분이다. 바네사 벨 <욕조>, 1917 그림을 볼 수 있는 책들을 꽤나 반기는 내 입장에서 괜찮은 책과 그저그런 책을 나누는 기준은 수록된 그림의 신선도이다. 어느 미술책을 펴나 다 만날법한 그림들은 왠지 식상하다. 그 그림은 유명세를 치루는 것이겠지만 독자의 입장에선 학창시절 교과서에서 보던 그림을 보고 또 보는 셈이다. 물론 저자에 따라 그림을 해석하거나 감상하는 능력을 달라지지만 이미 낯이 익은 그림들은 나 역시 그 그림을 감상하는 방법을 갖고 있는 경우가 있어 그다지 흥미가 생기지 않는다. 그래서 낯이 익은 그림보단 좀 더 새롭고 가슴 설레는 만남을 하고 싶다. 그리고 다행히도 이 책에는 아주 멋지고도 새로운 만남이 많이 자리하고 있다. 가장 첫 페이지에 나오는 바네사 벨의 <욕조>도 내겐 새로운 만남이었고 시작부터 난 그림에, 마음을 놓아버렸다. '나는 언제나 네 편이야'라는 저자의 말에 괜시리 내 마음을 열고 책과 그림과의 소통을 시작하게 된 셈이다. 라우리츠 링 <창 밖을 보는 소녀>, 1885 물론 낯익은 그림도 없지는 않다. 마그리트의 <인간의 조건>이나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비롯해 르누아르의 <물랭 드 라 길레트에서의 춤> 같은 낯익은 명화도 많이 만날 수 있다. 하지만 그림과 소통하는 저자의 개인적 이야기를 통해 내 나름대로의 그림과 마주하는 법을 만들어 볼 수 있다. 저자는 단지 그림의 배경만 이야기 하거나 그림을 통한 자신의 감정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을 아주 적절하고 교묘하게 섞을 줄 안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꺼냄으로서 독자들도 이 그림들을 보며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도록 이끌어 간다. 자신의 내면을 돌보기란 쉽지가 않다. 내 몸, 내 마음은 내 것이지만 어쩜 이리 내 이성대로 돌아가지 않는지. 타인을 돌보기보다 나 자신을 돌보기가 더 힘이 든 법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그림과의 소통을 통해 자신을 돌아볼 수 있다면 이는 참 멋지고도 황홀한 경험이 될 것 같다. 난 가끔 한적한 시간의 미술관에서 그림을 보며 혼잣말을 하는 버릇이 있다. 그냥 그림을 보며 그림 속 누군가 혹은 무언가에게 말을 건네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나도 모르게 아무에게도 못하던 내 속마음을 이야기 하게 된다. 이제 더 이상 그림은 먼나라 별나라의 것이 아니다. 다양한 전시회가 우리 주변에서 열리고 있고 다양한 미술관련 서적이 나오고 있다. 이제 미술은 우리에게 조금씩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다. 한권의 문학서적도 독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리듯 미술서적도 자신에게 맞는 것이 독자마다 다를 것이다. 하지만 조금 더 다양한 그림을 만나 그림에, 마음을 놓고 싶다면 이 책에 한 번 안겨 보는 것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