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심장을 쏴라 - 2009년 제5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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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 세계문학상이다. 세계문학상이란 말이지? 순수하게 글쟁이만 해서 먹고 살기 힘든 이 나라 실정에 1억원 고료에 최상의 대우를 작가에게 해 준다는 그 문학상.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가난한 글쟁이가 되겠다고 결심한 사람이라도 솔깃하게 할 수 밖에 없는 1억 고료, 하지만 그 실체는?

     이제껏 그랬다. 제 2회 세계문학상 <아내가 결혼했다>는 그래도 좀 봐줄만 했다. 그 외는 어땠는가. 특히 3회 <슬롯>과 4회 <스타일>이 준 실망감은 세계문학상 타이틀로는 작가로 인정받기 힘들겠다고 생각하게 하지 않았던가. 그래도 뭐 <스타일>은 요새 엣지있게 잘 나가긴 하더라. 하지만 아무리 엣지있어도 미안, 나란 사람의 멋없는 관점에서 그 책은 아니었다. 그리고 또 다시 세계문학상. 두번 속지 세번 속으라고? 라고 말하고 싶지만 또 속았다. 하지만 박수 세번,은 쳐 줘야겠다. 왠일로? 괜찮은 작품이 나왔다. 미칠 듯이 감동적이지는, 미칠 듯이 흡입력있지는 않지만 독자에게 자신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게 하는 자극제가 되는 것, 괜찮다. 이 책.

     책 한권을 읽은 후, 작가의 재능에 대해 샘을 낼 때는 많다. 하지만 박수를 쳐 주고 싶을 땐 작가의 치밀한 조사와 노력이 활자 하나하나에 배어 있을 때다. 이 책을 읽은 후의 느낌은 후자였다. 작가의 프로필 따위 관심 갖지 않는 탓에 작가의 이력에 간호사가 있다는 것은 후에 알았지만 그 이력이 있다고 이렇게 섬세하게 한 배경을 묘사할 수 있다면 세상에 좋은 글 못 쓸 사람은 없지 않겠는가. 이 작가는 자신의 이력을 바탕으로 그들이 되어보려 하고그렇게 소외받는 사람들의 희망을 통해 모든 사람에게 희망을 주고자 노력한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얼마 전, 추적 60분이라는 프로그램에서는 보호시설들의 퇴폐에 대해 논한 적이 있다. 나라에서 나오는 보험금을 탈취하고 노동력을 착취하고 인간 이하의 대우. 하지만 그들도 사람이었다. 비록 정상으로 생활하기에 조금 부족한 점이 있을지언정 사랑할 줄 알고 자신의 삶에 대한 열정을 가질 줄 아는 사람들. 그들이 왜, 그런 대우를 받아야 하는가. 그 프로그램을 보며 인권에 대해 한 번, 내가 저 상황이라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해 한 번, 그리고 내가 갖고 있는 것에 대한 고마움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봤었다. 이 책을 보면서 그 프로그램을 봤을 때의 마음이 다시 떠올랐다.

     정신병동의 환자들, 우린 그 말에서 말 그대로의 미치광이들을 떠올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을 미치게 한 것은 세상, 결국 우리들이 아니던가. 이런 생각을 해 본적이 있다. 사실은 세상 모두가 미쳐있기에 유일하게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몇몇 사람들이 미치광이 취급을 받는다고. 이 책에서도 모두가 정상이 아닌 것 같지만 마지막 순간에 모두는 정확한 판단을 내리고 자신의 몫을 한다. 더 미쳐 날뛰는 것으로. 그 순간 수명과 승민에겐 그게 그저 그들의 미친 짓이 아니라 그들을 대신해 희망을 펴 보이라는 메시지가 된다.

     초반 흡입력 부족, 절정의 극대화가 좀 약한 점. 아쉬운 점도 많다. 하지만 첫 술에 배부르랴. 이 말을 그동안의 세계문학상 작품들에게는 해 주지 못했다. 첫 술에 만족감이 좀 있어야 두 번째 숟갈도 기대 되는 법이기 때문에. 그러나 두 번째 작품이, 그 후의 작품이 더 기대가 된다. 꿈을 꾸지 못하는 청춘들, 내 인생이 지금 끝나나 몇십년 후에 끝나나 별볼일 없겠다 생각하는 청춘들의 심장에 쏴 주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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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노래한다
김연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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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시간을 이야기한다는 것, 그것은 애틋함이 될 수도 있지만 때론 고통이기도 하고 위험을 수반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야기해야만 하는 것, 그것은 작가의 숙명이자 업일 것이다. 작가 황석영이 한 말이 생각난다. 금기를 뛰어넘는 것, 그것이 작가의 몫이라고. 김연수는 이 책을 통해 금기를 뛰어넘어 자신의 업에 가까이 갔다는 느낌이 든다. 누군가는 말해야 했지만 누구도 말하기 힘들었던 '민생단 사건'을 바탕으로 한 이 소설은 많은 사람들에게서 잊혀져 가는 동시 잊고 싶어했던 과거의 진실을 현대의 독자들에게 끌어다 놓는다. 그럼에 이 책을 읽는 것은 고통일 수도 있고 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시도가 될 수도 있다.

 

     간절히 원하면 온 세계가 그 열망을 도와준다고 믿는 작가의 신념은 이 소설에서는 무색하기만 하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간절히 민족의 자주를 원했지만 결국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붉은 핏빛과 서로를 죽여야 하는 잔혹한 인간 본성의 목격 뿐이었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는 밤의 노래는 어쩌면 그들의 바람이 현재의 우리에게까지 이어져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증거 인지도 모르겠다. 열망의 간절함에 무게를 달 수는 없지만 언젠가 우리의 열망이 더 간절해지는 그 날, 그 열망이 이뤄지리라는 희망이 있고 그 바람이 깊어질 수록 새벽을 향한 노래도 더 깊어지리라.

     삶이 어떤 형태로 흘러가든 그 곳엔 피끓는 청춘이 있다. 아스러지는 목숨만큼이나 붉고 선홍하게 끓는 청춘, 그 안에는 조국을 향한 투쟁과 개인을 향한 투쟁 모두가 들어있다. 그리고 그 안에 사랑은 덜어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 사랑, 그것이 우리를 살게하고 키워가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래서 김해연은 정희를 가슴에 묻고 또 다른 사랑 여옥이를 품고 오늘을 살고 내일을 살아나간다. 눈 감으면 생생히 떠오르는 아픈 날들이지만, 그 역시 지난 날로 묻고 내일을 살게 될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그렇게 살아가니까.

 

     책을 읽는 내내 가슴이 아렸다. 나 역시도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청춘이기에 서로에게 총을 겨누고 의심을 품으면서도 내일을 알 수 없어 오늘을 충실히 사랑하고 살아간 그들의 삶이 지독해 보였다. 작가의 전작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김연수, 문학동네, 2007)이 가슴 한켠에서 살아나기도 했다. 난 이 두권의 책을 김연수 열망 이부작이라 이름 붙이고 싶다. 두 책의 내용은 선명히 다르지만 그 속에서 드러난 청춘의 열망과 정의는 어느정도 일치해 보였기 때문에. 누구나 어제를 묻고 오늘을 살고 내일을 꿈꾼다. 꿈꿀 수 있는 권리, 그것은 사람이기에 누구나 공평하게 지닐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열망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 이 책은 마음 아픈 이야기지만 그 열망이 피어나는 순간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하나하나 생을 잃지만 그들이 부르던 밤의 노래는 아직도 이리 슬프게 아름답지 않은가.

     내 자신이 한없이 작아지던 날들이 있었다. 그 때에도 김연수의 책은 내게 힘이 되었다. 스무살이 지나면 스물 한살이 오는 게 아니라 스무살 이후가 온다던 <스무살>(김연수, 문학동네,2000)을 읽으며 난 내 앞에서 아른거리던 내 시간들을 위로받았었다. 그리고 또 다시 지겨운 날들이 이어졌다. 그리고 난 또 다시 김연수의 책으로 위로받는다. 그리고 그의 책의 표지, 에곤실레의 그림. 표지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채식주의자>(한강, 창비, 2007)의 표지와 표지 속 사내의 모습이 아스라히 겹쳐 보였다. 에곤실레의 그림은 이리도 문학같은지, 책에 한 번 울컥한 마음이 표지 속 그림에 스며든다. 아, 오늘 밤에도 난 밤의 노래를 들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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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북소녀 2008-12-05 1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앨리스, 땡스~^^
 
문화의 패턴 - 루스 베네딕트 서거 60주년 기념, 새롭게 탄생한 문화인류학의 고전
루스 베네딕트 지음, 이종인 옮김 / 연암서가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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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류학은 모든 학문에 기초가 됨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그 연구가 활발하지 못하다. 대학에서도 인류학을 학과로 채택한 경우가 적다는 것만봐도 우리나라가 기초적인 학문에 관심을 쏟지 못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이 현실은 도서에까지 적용되는데, 이런 분야의 책은 국내 저서에 의해 쓰여지는 것도 드물고, 외국의 책이 번역되는 것도 드물다. 소비가 많지 않기에 시장에서는 자연스레 꺼리게 되겠지만, 그래도 이런 분야에 관심을 갖고있거나 갖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는 다소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인류학은 크게 (미국적인 관점에서) 자연인류학과 문화인류학으로 나눠지는데, 이 책 <문화의 패턴>은 <국화와 칼>로 우리에게 친숙한 문화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의 또 다른 저서이다. '문화'라는 것은 사람이 살아 온 흔적이며 시간의 역사이다. 그러니 그 속엔 인간에 대한 정말 많은 정보가 담겨져 있을 수 밖에 없다. 어차피 인간으로 문화 안에서 살아야 하는 숙명을 타고 난 우리는 문화에 대해 관심을 갖으려 하지 않아도 영향 속에 살 수 밖에 없고 조금만 관심을 갖는다면 그것이 얼마나 흥미로운지 금새 알 수 있게 된다.

 

     우리가 흔히 인생살이 동서고금이 다 비슷하다고 말하지만 문화의 특징은 뭐라 정의 내리기 어려울 만큼 다양하다. 그리고 그런 다양한 문화들은 또 다시 다양하게 조합될 수 있고 이런 조합들은 생겨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문화의 역사이고 이런 역사 속에서 사회는 다양하게 형성되었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 모든 문화는 서양사회의 그것에 기준되어 왔다. 대부분의 학문들이 서양사회에서 시작된 탓도 있고, 지금까지의 세계 권력의 중심에 서양사회가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것은 지극히 당연해 보일 수도 있지만, 문화인류학의 관점에서 그것은 올바른 문화를 보는 시각은 아니다.

     루스 베네딕트는 문화를 연구하기 위해 외부의 영향을 덜 받았다고 할 수 있는 원시 부족을 찾아 다니는데, 지금(저자가 살았을 때는 지금보다는 덜 했겠지만 그 때 역시도)의 문화는 다양한 결합과 생성, 소멸을 거치며 다양한 문화들과 혼합되었기 때문에 순수한 그 출발을 찾기 힘든 탓이다. 그 순수한 원천을 보기 위해 원시 부족의 풍습을 연구했고, 그것만 봐도 서양 사회의 문화를 기준으로 문화를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큰 잘못인지 알 수 있게 된다. 이 책에서 연구 된 세개의 부족 주니족, 도부족, 콰키우틀족을 살펴보다 보면 그들의 삶은 극단적으로 큰 차이를 보이지만 공통적으로 그들의 문화엔 정체성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문화에는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고 그 스펙트럼의 어떤 부분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문화의 정체성은 구축되지만, 어떤 문화든 이런 정체성을 가지고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우리 삶의 다양한 부분에서도 이런 문화의 정체성이 발견된다.  문화의 정체성은 언제나 두가지 정반대의 양상을 띠며 전체적인 문화 내에서 '반드시'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음을 파악하게 하는데 이를 통해 하나의 문화를 기준으로 다른 문화를 평가하는 것이 얼마나 큰 위험이 될 수 있는지를 깨닫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저자 역시 책 속에서 이를 강조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학창시절 교과목 속에서 문화의 다양성, 문화의 보편성, 상대주의, 국수주의, 사대주의 등 문화에 관한 다양한 용어들을 학습해왔다. 하지만 정작 우리의 삶 속에 그런 배움은 깊이 녹아들지 못했다. 세 부족을 통해 저자가 문화적 다양성과 그를 받아들이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 강조하고 있지만 만약 그런 부족의 풍습들을 실제로 맞닥뜨렸을 때 우리는 그들의 모습을 그저 문화의 다양성 혹은 상대주의의 입장에서 수용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이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그간의 배움들도 우리를 다양한 문화의 공존 속에서 살게 하지는 못했던 듯 싶다. 우리는 지나친 자국 우월주의에 빠져있거나 혹은 은연 중에 타국의 문화를 숭배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반성해 볼 일이다. 저자가 언급한 것처럼 문화가 사회 안에서 개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던 간에 문화는 존재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문화가 늘 정당하지 않았지만 그에 대처하는 여러 방식들, 예를 들면 규정을 묘하게 빠져나가는 구멍을 마련하는 등의 방법을 통해 사회는 유연하게 그에 대처해 왔고 발전해 왔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아니던가. 그러니 우리의 문화를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든 이를 발전시키는 것인 당대에 사는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자 운명인 셈이다. 이를 필요이상 혹은 이하로 평가하는 것은 우리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서구 사회는 더욱 강해질 것이다. 그것은 자명하다. 그런 현실 속에서 문화를 지키며 발전시키는 것은 더욱 힘이 들테지만 그런 흐름 속에 우리의 문화가 더욱 강해질 것 역시 분명하다.

     이 책은 그간 우리가 지니고 있던 문화에 대한 전체적인 시각에 대해 다시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더불어 저자의 개인적인 경험과 상황들이 묻어나서 저자에 대핸 궁금증이 생기기도 하고, 알아볼 수도 있게 되어 그런 재미 역시 빼 놓을 수 없다. 점차 강해지는 서구 세력 속에 살아가면서 우리의 정체성을 지키는 일, 이 책을 통해 모두가 그것을 다시 한 번씩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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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조림공장 골목
존 스타인벡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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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만들어진 영화를 종종 보곤 한다. 필름은 낡은 분위기를 자아내지만 영화 속 내용은 전혀 낡지 않은 지난 영화들, 난 그 영화들이 만들어내는 분위기를 좋아한다. 그런 영화들을 보고 있자면 내가 겪어보지도 못한 시간과 장소들이 그리워진다. 이 책은 마치 그 영화들을 닮았다. 책을 읽으며 한 편의 옛 영화를 보는 기분이었다. 낡은 분위기지만 내용은 전혀 낡지 않은 것, 그 속엔 웃음과 감동과 사람이 있다.

 

     누구에게나 삶은 있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아갈지라도 그건 그만의 삶이고 그렇기에 가치가 있다. 이 책은 객관적인 시선으로 그런 사실들을 암시해 준다. 즉, 작가가 전지적 시점에 위치하여 그들의 내면을 세세히 묘사해 주진 않지만 그저 관찰하듯 그들의 동선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그런 느낌을 전해준다는 것이다. 단지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감성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것, 작가와 이 책의 가치는 그 점에서 돋보인다.

     어떻게 보면 리청은 속물근성으로 쌓인 장사치처럼 보일 수도 있고, 맥은 한심한 부랑배나 다름없으며, 닥은 그 직업이 뚜렷해 보이지도 않으며 책 속 인물들이 그렇게 좋아할만한 이유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이들과 교감하지 못하는 내 탓이다. 이들은 단지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아닌 끈끈한 무엇으로 연결되어 있다. 어쩌면 우리가 이 무엇을 '精'이라 부르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들은 리청을 존경하고 맥과 어울리며 닥을 좋아한다. 그것은 이들의 삶 속에 묻어난다. 비록 그것이 예기치 않은 사건과 사고들로 이어질지라도 이들은 또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내일도 또 다시 즐기고, 어울리고, 부딪치면서. 그리고 그것이 진정으로 삶이 아니던가.

 

     한적한 마을이다. 한 쪽에선 바쁘게 공장이 돌아가고 매음굴도 있고, 중국인 상점도 있고, 부랑배 거리도 있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한적하다. 리청의 중국인 상점은 영화 스모크의 담배가게 생각이 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한적함이 허전하지 않다. 아니, 허전할 새가 없다. 맥 패거리와 닥의 연구소는 늘 북적거린다. 그럼에도 복잡하지 않은 것은 어딘가 트여있는 곳이 보여지는 탓이다. 캐너리 로우엔 갑작스레 불운이 급습했고, 또 다시 행복이 급습했다. 이처럼, 뜻대로 되지 않는 삶. 그 삶이 보여주는 것이 어떤 면이든 모두 수용하며 일상으로 스며들게 할 수 있는 사람들, 그들 덕에 이 책은 따뜻해지고 한가해진다.

     러닝타임 내내 슬며시 웃게 되는 영화들이 있다. 큰 웃음이나 큰 감동이 전해지진 않지만 자잘하고 소소한 감성들이 마음 속을 가득 채우는 기분에 충만함을 느끼게 해 주는 영화들, 이 책을 보며 그런 영화 한 편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책 속 그들과 함께 하는 것 같은 기분이 좋았다. 일상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통조림공장 골목은 아주 기분 좋은 일탈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나도 캐너리 로우에서 그곳의 태양을 맞으며 맥주의 첫모금에 지친 일상을 털어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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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마지막 의식
이언 매큐언 지음, 박경희 엮음 / Media2.0(미디어 2.0)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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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 그런 시간이 찾아온다. 말랑거리면서도 우울한 얄궂은 감정에 흠뻑 젖어보고 싶은 때. <체실 비치에서>(문학동네, 2008)로 처음 만난 이언 매큐언이 그런 시간에 떠올랐다. 이 선택이 잘못 된 것이리라곤 조금의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제목조차 달콤하게 '첫사랑' 이라니. 그런 내 기대는 완전히 무너졌다. 교훈 하나,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지 말라!'. <체실 비치에서>를 읽었을 땐 왜 이언 매큐언의 글을 악마같다고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 책을 쓴 이언 매큐언은 과연 악마같은 글을 쓰는 사람이었다. 내가 원했던 말랑거리면서 우울한 감정은 어느덧 도망가고 끈적거리고 비릿한 감정만 남았다. 하지만 이 감정도 꽤나 얄궂긴 마찬가지다.

 

     충격은 책 속 단편 처음부터 시작된다. 우연히 발견한 증조부의 일기장에서 존재를 無로 바꾸는 기하학의 비밀을 알게 된 남자의 이야기인 「입체 기하학」은 끔찍했으나 눈을 떼지 못할 정도의 매력이 있었다. 무엇이 파괴적이며 퇴폐적인 것을 매혹적인 것으로 바꾸는 것일까. 그런 의문은 근친 상간을 다룬 「가정 처방」이나 소녀 살인을 다룬 「나비」에서 계속 된다. 그리고 책을 덮으며 이 책이 단순한 단편집이 아니라 하나하나의 단편이 모여 하나를 이루고 있음을 어렴풋하게 느끼게 된다. 책 속의 인물들, 그들은 모두 사회의 혼돈 속에서 길을 잃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사회의 혼돈 속에서 어지럼증을 느끼며 올바르지 못한 성장을 하거나 성장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것은 모두 누구의 탓일까. 단지 사회라는 거대한 매커니즘의 탓으로 돌릴 수 있을까?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임을 알면서 쉽게 외면하지 못하는 것이 이 끔찍함에 눈을 떼지 못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런 병폐를 담담하게 심지어 아름답게까지 그려내는 작가를 그래서 '악마같다'고 말하게 된다.

 

     우리의 개인주의는 무관심을 낳고 그런 무관심은 사회의 어딘가에서 또 다른 폭력으로 행해짐을 간접적으로 많이 보고 들어왔다. 하지만 경험하지 않는 한, 그것을 마음으로 느끼는 것은 어렵다. 소설은 가끔 현실의 보고가 느끼지 못하게 하는 감정의 부분들을 독자의 마음에 불편함으로 제공한다. 이언 매큐언의 이 소설은 그런 면에서 불편하고 거북하다. 더구나 그 일면들이 단지 날카롭거나 답답하게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따뜻하게까지 그려진다. 어쩌면 그 시선이 사회의 부조리를 보고 있는 우리의 무관심의 일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치면 숨이 막혀온다. 독자에게 사회의 일면을 다시 보게 해주는 작가, 그는 충분히 매력적이며 그의 글은 악마적이다. 지금까지 내가 아는 이언 매큐언은 동전의 양면같은 매력을 지녔다. 한 책에선 감성적이며 아름다웠고, 한 책에선 날카로우며 섬세했다. 또 다른 그의 매력을 밝혀내고 싶다. 오랜만에 작가의 작품들에 대한 집착이 고개를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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