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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조림공장 골목
존 스타인벡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4월
평점 :
난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만들어진 영화를 종종 보곤 한다. 필름은 낡은 분위기를 자아내지만 영화 속 내용은 전혀 낡지 않은 지난 영화들, 난 그 영화들이 만들어내는 분위기를 좋아한다. 그런 영화들을 보고 있자면 내가 겪어보지도 못한 시간과 장소들이 그리워진다. 이 책은 마치 그 영화들을 닮았다. 책을 읽으며 한 편의 옛 영화를 보는 기분이었다. 낡은 분위기지만 내용은 전혀 낡지 않은 것, 그 속엔 웃음과 감동과 사람이 있다.
누구에게나 삶은 있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아갈지라도 그건 그만의 삶이고 그렇기에 가치가 있다. 이 책은 객관적인 시선으로 그런 사실들을 암시해 준다. 즉, 작가가 전지적 시점에 위치하여 그들의 내면을 세세히 묘사해 주진 않지만 그저 관찰하듯 그들의 동선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그런 느낌을 전해준다는 것이다. 단지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감성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것, 작가와 이 책의 가치는 그 점에서 돋보인다.
어떻게 보면 리청은 속물근성으로 쌓인 장사치처럼 보일 수도 있고, 맥은 한심한 부랑배나 다름없으며, 닥은 그 직업이 뚜렷해 보이지도 않으며 책 속 인물들이 그렇게 좋아할만한 이유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이들과 교감하지 못하는 내 탓이다. 이들은 단지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아닌 끈끈한 무엇으로 연결되어 있다. 어쩌면 우리가 이 무엇을 '精'이라 부르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들은 리청을 존경하고 맥과 어울리며 닥을 좋아한다. 그것은 이들의 삶 속에 묻어난다. 비록 그것이 예기치 않은 사건과 사고들로 이어질지라도 이들은 또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내일도 또 다시 즐기고, 어울리고, 부딪치면서. 그리고 그것이 진정으로 삶이 아니던가.
한적한 마을이다. 한 쪽에선 바쁘게 공장이 돌아가고 매음굴도 있고, 중국인 상점도 있고, 부랑배 거리도 있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한적하다. 리청의 중국인 상점은 영화 스모크의 담배가게 생각이 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한적함이 허전하지 않다. 아니, 허전할 새가 없다. 맥 패거리와 닥의 연구소는 늘 북적거린다. 그럼에도 복잡하지 않은 것은 어딘가 트여있는 곳이 보여지는 탓이다. 캐너리 로우엔 갑작스레 불운이 급습했고, 또 다시 행복이 급습했다. 이처럼, 뜻대로 되지 않는 삶. 그 삶이 보여주는 것이 어떤 면이든 모두 수용하며 일상으로 스며들게 할 수 있는 사람들, 그들 덕에 이 책은 따뜻해지고 한가해진다.
러닝타임 내내 슬며시 웃게 되는 영화들이 있다. 큰 웃음이나 큰 감동이 전해지진 않지만 자잘하고 소소한 감성들이 마음 속을 가득 채우는 기분에 충만함을 느끼게 해 주는 영화들, 이 책을 보며 그런 영화 한 편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책 속 그들과 함께 하는 것 같은 기분이 좋았다. 일상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통조림공장 골목은 아주 기분 좋은 일탈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나도 캐너리 로우에서 그곳의 태양을 맞으며 맥주의 첫모금에 지친 일상을 털어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