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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마지막 의식
이언 매큐언 지음, 박경희 엮음 / Media2.0(미디어 2.0) / 2008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가끔 그런 시간이 찾아온다. 말랑거리면서도 우울한 얄궂은 감정에 흠뻑 젖어보고 싶은 때. <체실 비치에서>(문학동네, 2008)로 처음 만난 이언 매큐언이 그런 시간에 떠올랐다. 이 선택이 잘못 된 것이리라곤 조금의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제목조차 달콤하게 '첫사랑' 이라니. 그런 내 기대는 완전히 무너졌다. 교훈 하나,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지 말라!'. <체실 비치에서>를 읽었을 땐 왜 이언 매큐언의 글을 악마같다고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 책을 쓴 이언 매큐언은 과연 악마같은 글을 쓰는 사람이었다. 내가 원했던 말랑거리면서 우울한 감정은 어느덧 도망가고 끈적거리고 비릿한 감정만 남았다. 하지만 이 감정도 꽤나 얄궂긴 마찬가지다.
충격은 책 속 단편 처음부터 시작된다. 우연히 발견한 증조부의 일기장에서 존재를 無로 바꾸는 기하학의 비밀을 알게 된 남자의 이야기인 「입체 기하학」은 끔찍했으나 눈을 떼지 못할 정도의 매력이 있었다. 무엇이 파괴적이며 퇴폐적인 것을 매혹적인 것으로 바꾸는 것일까. 그런 의문은 근친 상간을 다룬 「가정 처방」이나 소녀 살인을 다룬 「나비」에서 계속 된다. 그리고 책을 덮으며 이 책이 단순한 단편집이 아니라 하나하나의 단편이 모여 하나를 이루고 있음을 어렴풋하게 느끼게 된다. 책 속의 인물들, 그들은 모두 사회의 혼돈 속에서 길을 잃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사회의 혼돈 속에서 어지럼증을 느끼며 올바르지 못한 성장을 하거나 성장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것은 모두 누구의 탓일까. 단지 사회라는 거대한 매커니즘의 탓으로 돌릴 수 있을까?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임을 알면서 쉽게 외면하지 못하는 것이 이 끔찍함에 눈을 떼지 못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런 병폐를 담담하게 심지어 아름답게까지 그려내는 작가를 그래서 '악마같다'고 말하게 된다.
우리의 개인주의는 무관심을 낳고 그런 무관심은 사회의 어딘가에서 또 다른 폭력으로 행해짐을 간접적으로 많이 보고 들어왔다. 하지만 경험하지 않는 한, 그것을 마음으로 느끼는 것은 어렵다. 소설은 가끔 현실의 보고가 느끼지 못하게 하는 감정의 부분들을 독자의 마음에 불편함으로 제공한다. 이언 매큐언의 이 소설은 그런 면에서 불편하고 거북하다. 더구나 그 일면들이 단지 날카롭거나 답답하게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따뜻하게까지 그려진다. 어쩌면 그 시선이 사회의 부조리를 보고 있는 우리의 무관심의 일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치면 숨이 막혀온다. 독자에게 사회의 일면을 다시 보게 해주는 작가, 그는 충분히 매력적이며 그의 글은 악마적이다. 지금까지 내가 아는 이언 매큐언은 동전의 양면같은 매력을 지녔다. 한 책에선 감성적이며 아름다웠고, 한 책에선 날카로우며 섬세했다. 또 다른 그의 매력을 밝혀내고 싶다. 오랜만에 작가의 작품들에 대한 집착이 고개를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