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에 홀린 광대
정영문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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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쇤베르크의 음악을 틀어 놓는다. 어려서부터 운 좋게도 다양한 문화적 혜택을 누린 편임에도 내 귀는 내 눈에 비해 어둡다. 어떤 점이 훌륭하고 어떤 점이 매력적인지도 모르는 채 음악을 틀고 귀를 닫고 눈만 열어둔다. 음악을 틀어놓았지만, 음악은 닫힌 내 귀에 들어오지 않고 눈은 텍스트 위에서 유영한다. 절정의 순간, 귀가 꿈틀 거린다. 잠시 환상 속에 갇히고 이것이 환상인지 무엇인지 모르게 된다. 나처럼 기묘한 사내들은 자신을 둘러 싼 사물들을 단어로 정의 해 놓은 관계로 이름 짓지만 그들의 관계는 낯 모르는 이들과 다를 바가 없다. 다른 기억을 가지고 다른 과거 안에서 관계가 정의 해 놓은 이름만을 가지고 살며 다른 현실을 보고 다른 미래를 꿈꾸고 외로워진다. 그들의 모습은 정말 달에 홀린 광대, 그것과 다를 바 없다.

 

     표제작이자, 이 단편집을 여는 <달에 홀린 광대>부터 작가만의 독특한 텍스트는 독자를 매혹시킨다. 서로를 아비와 아들로 부르지만, 타인과 다를 바가 없는 두 사내는 가족이라는 단어만 유지한 채 살았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다른 단편에서 나오는 것처럼, '지금'이라는 단어자체가 무의미한 시간의 흐름 따윈 아무렇지도 않게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모든 시간 속에서 그들의 관계는 모르는 이와 다르지 않다. 그들을 잇는 것은 가족이라는 단지 그 단어 하나 뿐이다. 또 그들이 함께 보고 있는 현실은 현실과 동떨어지는 것이 현실이고, 그 현실이 그들의 하루를 평범과는 동떨어진 현실로 만들어 버리는 것도 현실이다. 이처럼 언어의 각종 변형으로 재조합 된 이 책의 문장들은 각 단편 속, 그리고 표제작 속 그들과 꽤 닮아있다.

    

     나는 잠시 내가 한 얘기가 사실인지 자문해본다. 그것은 사실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상관없는 일이다. 나는 사실만을 말하는 데 흥미를 잃었으며, 또한 내게는 사실과 사실이 아닌 것 간의 차이란 없다. - <산책) p.84

 

     앞의 단편에 이어 두번째 단편에서도 마지막 장면에서 비가 내린다. 나는 잠시 책을 내려두고 '비'의 의미에 대해 생각한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잠시 호흡을 멈추고 말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는 일이 잦다. 위의 구절처럼, 화자의 이야기는 다 지어낸 것이고 사실일 수도 사실이 아닐 수도 있따는 자각이 각 문장을 애처롭게 만든다. 반전을 거듭하는 내용은 우리가 갖고 있는  기억이라는 것의 진면목을 유감 없이 드러내고, 그에 따라 평이한 문장들은 그저 평이하지 않고 아련하게 평이해져 문장 속에 갇혀진다. 마치 이 단편의 마지막 문장 '슬픔은 그냥 하나의 평이한 문장일 뿐인 문장 속에 가둔다'는 문구처럼 ...

     다음 단편 <숲에서 길을 잃다>를 보면 이 책의 텍스트들이 주는 느낌의 근원이 분명해 진다. 인간의 외로움, 특히 도시라는 거대한 콘크리트 숲 안에서 더 커지는 그것이다. 모든 단편들의 주인공들은 마지막에 결국 혼자 남고 만다. 우리가 삶이라는 길 위에서 그렇게 혼자 서는 것처럼. 그리고 그들은 <양떼 목장>의 주인공이 들렀던 유적지의 유적들 같이 버려지고 쓸모 없어질 상념들을 계속한다. 하지만 그들이 그것을 생각하는 그 순간, 그것은 결코 버려지고 말 것들이 아닌 것만 같았다.

     앞서 말했던 '비'와 상반 되게 단편들 속에는 '햇살'의 이미지도 뚜렷이 드러난다. 그것은 카뮈의 <이방인> 속 주인공을 상기 시킨다. 햇살이 너무 뜨거워서 그들은 정신을 잃고 환상을 보며 달이 떠오르기 직전의 시간을 기다린다. 그 시간이 되면, 모든 것이 다 괜찮을 것만 같다. <배추벌레>의 주인공이 배추를 뽑다 정신을 잃은 순간, 그 이미지는 더 확고 해 진다. 마지막 단편 <횡설수설>을 보면 정말 난감해 진다. 그 어지러운 텍스트 안에 지금까지의 모든 단편을 에우르려는 시도는 돋보인다. 작가는 이렇게 끝없이 새로운 시도들을 하고 있다.

 

     뒷 커버의 추천사에 나온 언어의 연금술이라는 말이 과분하지 않다. 하나의 단어는 끊임없이 다른 모습을 추구하지만 결국 하나의 문장 속에서 더 이상의 것도 더 이하의 것도 없을 듯한 유일한 것으로 쓰인다. 결국 단어 하나만 남는 순간, 그것은 단편들 속의 사람들처럼 외로워 지고 애처로워진다. 이 책의 매력은 그렇게 도드라진다.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애씀으로서 다시 그것이 눈에 띄는 순간을 갖게 되는 것이다. 문장 하나하나가 밑줄을 긋고 싶진 않으면서도 전체적인 흐름에 녹아내려 곱씹게 되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유일한 색, 그것을 고수하려 작가는 얼마나 외로웠을지 그리고 그것을 이해하는 독자들은 또 얼마나 외로운 삶인 것인지, 외로운 사람과 문장과 단어의 만남이 아롱이 눈 안에서 눈부시게 전해지는 순간을 이 책은 선사한다. 달갑지도, 달갑지 않지도 않은 순간이 꽤나 달갑다. 그러고 보면 나도 어쩌면 이것을 공감했을 당신도 달에 홀린 광대와 같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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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밤, 기린의 말 - 「문학의문학」 대표 작가 작품집
김연수.박완서 외 지음 / 문학의문학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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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자의 독서>를 읽은 후여서 그랬는지 괜시리 오기가 생겼다. 어차피 1박 2일의 워크샵 기간 동안 책을 읽기는 힘들 터였고 행여나 책 읽을 시간이 난다해도 사람들 앞에서 책 읽는 모습을 보이긴 싫었다. 그래도 꼭 한 권의 책이 동행했으면 했고, 바닷가의 밤 하늘 아래 단 한 쪽이라도 책을 읽고 싶었다. 그렇게 고민이 시작했다. 책장을 둘러보고 몇 권의 책을 뽑았다 놨다 서성였다. 그러다 문득, 이 책에 눈이 갔다. <깊은 밤, 기린의 말> 그 말이 너무 예뻐 몇 번이나 곱씹던 제목이었다. 코끼리에 이어 기린이란 말인가, 라고 생각하며 혼자 깔깔거리기도 했던 제목이었다. 하지만 몇몇 단편들이 이미 읽은 것이라는 이유로 책은 쉬이 펴지지 않았었다. 그래, 이 책이다. 바닷가의 밤은 유난히 어두운 법이지. 그 깊은 밤에 이 책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충분히 의미는 있을 듯 했다. 생각보다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은 자주 찾아왔다. 남해까지 6시간, 버스에 앉아 단편을 하나씩 읽어나갔다. 창 밖으로 비는 내리고 있었고 책을 읽기 더 없이 좋은 때였다.

     날 단 한번도 실망시킨 적 없는 김연수 작가의 글이자, 이 책의 표제작이기도 한 첫 단편은 너무 예쁜 그 제목만큼 예쁘기만 한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깊은 밤 기린이 들려주는 희망을 담고 있었다. 결국 나도 나를 모르는 그와 이렇게 그의 글을 통해 공감하고 있으니, 짧은 이야기가 주는 여운은 더 클 수 밖에 없었다. 이어서 작고 소식에 내 마음을 아프게 하던 한국 문학계의 거장들의 글들이 몰아쳤다. 특히 잃을 게 하나 없다는 <이상한 선물>의 마지막 구절은 괜시리 가슴을 아리게 했다. 잃을 게 하나 없는 나이란 어떤 것일까, 이런 저런 상념들이 지나갔다. 이럴 때에는 별 수 없이 책을 덮고 한 숨을 골라야 한다. 그러는 새, 차는 남해에 도착했고 펜션의 베란다에서 잠시 쉬는 사이 다음 단편 하나를 읽을 수 있었다. 내게는 낯선 작가였지만 그가 뱉어낸 언어들은 내 삶에 밀착 되어 있기도 한 부분들이었다. 버릴 것이 단 하나도 없는 알맹이가 꽉 찬 한 권의 단편집을 만나는 일은 늘 이렇게도 즐겁고, 한 편의 장편소설을 읽는 것보다 더 버겁기도 하다.

     그 날 저녁, 술 자리에서 내 목소리가 커지고 말았다. 가급적 책 이야기엔 조심하려고 노력했는데 늘 실수는 이렇게 터지고 만다. 한국 문학에 대한 비난, 일본 문학에 대한 추종. 그 말들이 어디선가 새어나왔고 순간 아찔했다. 어디선가 내 자식이 돌을 맞고 있는 것처럼 아려왔다. 누군가에게는 꿈이자 목표이기도 한 것을, 개인적 취향의 문제로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만 목소리를 높이고 말았다. 이러면 안 된다, 조금만 참자, 라는 외침이 허무하게 무너졌고 그와 함께 반짝 이 책이 나와 동행한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결핍을 채우려는 불완전한 욕구로 허덕이는 생이라는 <퍼즐> 속 말이 무색했다. 나와 상대는 서로의 불완전함의 교집합은 본 체도 없이 서로의 차집합 속에서 서로의 불완전한 욕구만 바라보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가 비난하던 한국 문학은 내겐 이렇게 가르침이고 빛과도 같다. 이 책 속의 말들이 그 깊은 밤, 내 귓가에서 재잘거렸다.

     난 내가 바랐던, 바닷가의 밤하늘 아래 책을 읽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 밤에 이 책 속 언어들이 내게 속삭이던 말들은 기억한다. 하나의 단편 하나하나가 내게 술친구가 되었고 하루 밤을 잠재우는 자장가가 되었다. <한 구레네 사람의 수기>에서처럼 우리 문학은 내게 들리지 않는 말을 들리게 했었고, <소금창고>처럼 지난 시간을 깨우는 촉매제이자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 했다. 그 모든 일들이 이 작은 책 한 권이 떠올렸다. 좋은 소설이 가득한 하나의 책은 이처럼, 때론 전부의 시간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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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명탐정이 태어났다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13
우타노 쇼고 지음, 현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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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스테리 소설에 영 취미가 없는 내가, 어찌된 일인지 연속해서 미스테리 소설을 읽고 있다. 책을 읽고 잠을 자면, 책 속 기운이 꿈까지 전해 와 그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나는 덕분에 좋지 않은 꿈자리를 갖고 만다. 어젯 밤, 바람이 불고 번개는 치고 난 외딴 섬에 홀로 고립 되어 있었다. 무섭진 않았지만 섬뜩한 기분이 온 몸을 감쌌고 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섬의 한 가운데에서 무릎을 끌어안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왜 여기서 이렇게 가만히 있는 거지? 난 뭘 기다리는 거지? 잠에서 깨어날 때까지 난 가만히 생각만 했던 것 같다. 현실 속 게으름 병은 꿈 속에서도 고스란히 이어진다.

     작가가 국내에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된 소설,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 하네>를 난 읽지 않았다. 쏟아지는 호평 속에서도 시큰둥했던 것은 추리소설이기 때문도 했고, 표지가 내 취향이 아니라는 단순한 이유도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고, 시간은 취향도 변하게 하는 까닭에 몇몇 추리소설을 읽기 시작했고, 그 중 몇몇에 열광했고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쾌감이 무엇인지 아주 조금은 알게 되었다. 그리고 궁금해졌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추리 소설에 열광하는 사람들은 그 열정을 쉬이 가시지 못하는 것이며, 그런 사람 중 몇몇을 다시 추리 소설 작가로 만들어 내는 것일까. 그 물고 물리는 순환이 생겨나는 까닭은 무엇일까. 시대가 흘러도 변하지 않는 악에 대한 인간의 본성과 그것을 찾아 처단하는 영웅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언제 어디서나 원하게 되기 때문일까?

 

     이 책은 그런 물음을 가지고 있는 자들에게 조금이나마 그 답을 알려줄 수 있을 듯 하다. 고전 추리 소설의 오마주 형태인 이 책 속 단편들을 살펴보면, 작가는 기존의 틀을 비꼬면서도 그것을 이어가고 싶은 면모를 보여준다. 작가가 사건의 배경으로 사용하는 밀실살인 같은 경우는 조금 식상할 수도 있는 고전 추리물의 단골 소재이다.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풀어나가느냐에 따라 전혀 색다른 모습으로 보이게 할 수도 있다. 표제작이기도 한 <그리고 명탐정이 태어났다>는 독자를 아주 당혹케 한다. 모든 조건을 두루 갖춘 기존의 '명탐정'이라는 틀에 박힌 인물을 살짝 비꼬아, 완벽하지만 돈을 밝히는 인물로 희화화 한다. 한 발 더 나가, 그 명탐정은 살해당한다. 기존 어떤 추리 소설에서 명탐정이 극 중간에 죽는단 말인가. 하지만 거기에서 밝혀지는 전말과 반전은 황당하면서도 수긍을 하게 만든다. 자신이 열렬히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순수를 지키고 싶은 마음. 어쩌면 작가가 밀실살인이라는 소재를 사용한 것도 그런 이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생존자, 1명>에서는 추리소설도 시대상과 사회상을 충분히 반영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극한 상황에서 인간이 얼마나 야비해지고 이기적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말한다. 죽음이 다가온 순간, 자신이 지켜온 믿음이나 신념 따위도 아무렇지 않게 되어버리는 것이 본성이며 그렇기에 악은 늘 우리 주변에 있음이 몇 번의 반전과 더불어 독자를 서늘하게 만든다. 영화의 소재로도 많이 봤음직한 장면들이지만 상상을 자극시키며 우리 곁에 붙어 있는 듯한 현실감은 그런 기시감을 무력하게 한다. 마지막 단편 <관이라는 이름의 낙원에서> 역시 뛰어나다. 작가의 극한 추리와 서늘한 공포를 원했던 독자들에겐 지루하고 실망스러운 것일 수도 있지만, 달리 보면 고전 추리물에 대한 오마주 형식을 빌려 작가의 추리물에 대한 애정이 아주 듬뿍 담겨있다. 그러면서도 무언가 사건이 벌어질 것만 같은 긴장감을 유지시킨다.

 

     손금에도 겁이 많은 것이 드러날 정도로 겁쟁이인 난, 이 책을 읽는 내내 섬뜩했다. 창 밖은 어두웠고, 난 실내에 정적이 흐르는 것을 선호하기에 어떤 소리도 나지 않았고, 고양이들의 사박거리는 발소리만 간간히 들렸을 뿐이다. 고개를 들었을 때, 허공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내 고양이 두마리가 보였다. 그들의 시선이 닿는 곳에 눈을 돌리는 순간 등에서 식은 땀이 살짝 솟아났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평화로운 이런 시간에도 공포란 찾아오는가. 그것은 다름아닌, 악이 우리 주변에 늘상 존재한다는 믿기 싫어도 믿을 수 밖에 없는 끔찍한 현실 때문일 것이다. 이런 책들이 지속적인 사랑을 받는 이유도 현실과 첨예하게 붙어 가상의 공포를 만들어내는 체험적 환상을 불러 일으켜 주며 그런 현실을 일깨우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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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경꾼들
윤성희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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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덮고 왜 제목이 구경꾼들일까에 대해서 생각했다. 0.00000001%의 확률도 되지 않을 것 같은 특이한 죽음이 한 가족 안에서 이어지고, 평범해 보이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이들의 이야기가 모여 가족이라는 것이 된 내용의 이 책에 왜 하필 그런 제목이 붙은 것일까. 그러다 문득, 가까운 이의 죽음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와 그 안에 농축되어 있던 삶의 여정들이 이어졌다. 아, 하는 깨달음이 왔다. 결국 우리도 모두 구경꾼에 지나지 않았다. 작가는 글을 쓰는 자신을 포함한 이 책 속 모두, 그리고 독자까지 이 제목 네글자 안에 끌어안았다.

     사연을 갖고 있지 않은 가족은 없다. 세대가 거슬러 올라가고, 또 거슬러 올라가면 어디엔가는 가족의 구성원인 자신조차 믿겨지지 않을 이야기들은 있었기 마련이다. 털어서 먼지나지 않는 사람 없다고 했던 말을 살짝 바꾸어본다. 털어서 잔사고 없었던 집안 없다. 그런 사고와 사건들이 모여 하나의 이야기가 되고 그것은 역사가 된다. 그리고 그것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것을 직접 경험한 사람 조차도 관객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미 지나간 시간 속 사건들은 다시 되풀이 되지 않기에 그것을 바라보는 수 밖에 우리는 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때로 그 사건은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 아픈 상처로 남는다. 할머니가 큰삼촌과 할아버지의 밥그릇을 여전히 올려놓는 것도 상처의 표면이다. 그 시간으로 되돌아간다면 우리는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겠지만, 연극무대에서 관객이 무대 위의 배우들의 이야기를 바꾸어놓을 수 없듯 우리도 이미 일어난 일을 어찌할 수는 없다. 그저 기억하고 남은 이야기를 꾸려가는 것이 우리의 몫일 뿐이다.

     그러고보면, 이 책 속 모두의 죽음은 무언가가 떨어짐으로서 만들어진다. 자살하는 사람 밑에 깔려 죽은 큰 삼촌, 돌로 만든 집을 구경하다가 집이 무너지는 바람에 죽은 부모님, 위에서 누군가 내려친 각목에 의해 죽은 할아버지. 하지만 부모님이 여행을 통해 만났던 사람들처럼 그런 경우에도 어떤 사람은 죽지 않고 살아난다. 사람들은 그것을 기적이라 불렀지만 난 우연이라 부르고 싶다. 누군가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우연에 죽음을 맞이하고, 누군가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우연에도 멀쩡할 수 있는 것이다. 전자는 사고가 되고 후자는 사건이 된다. 그리고 그 둘을 보고 듣고 겪은 사람들은 그 속에서 살아있는 자신을 독려하며 다시 살아간다. 그래야 이야기는 계속 진행되는 법이다.

     평범하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이 이야기들 속에서 작가는 평범하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텍스트를 만들어 낸다. 소소한 감동이 주는 큰 울림은 그녀의 단편에서만큼 강렬하다. 장편이되, 하나하나가 단편으로 봐도 좋을만큼 탄탄한 구성을 가지고 있는 이 책을 통해 왜 그간의 윤성희의 단편에 환호했는지 다시한 번 느끼게 된다. 그들의 삶을 지켜보는 구경꾼으로서, 또 이제 내 이야기를 꾸려나가야 하는 한 명의 주인공으로서 내 삶은 이 글로 인해 단단해진다. 좋은 작가의 멋진 작품을 만나는 것은, 이렇게나 멋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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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개의 고양이 눈 - 2011년 제44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최제훈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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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고양이 롤리팝이 꼬리를 흔들며 내 주변을 맴돈다. 난 이 책을 내려놓고 롤리팝을 번쩍 안아 쓰다듬는다. 그르렁 거리며 눈을 감는 롤리팝의 표정에 내 마음이 편안해 진다. 문득 롤리팝에게 눈이 간다. 일곱개의 고양이 눈, 일곱개의 푸른 고양이 눈, 일곱개의 푸른 고양이 롤리팝 눈 ... 너에게 눈이 일곱개 있다면 얼굴에 둘, 뒷통수에 하나, 몸통에 둘, 꼬리에 하나, 배에 하나 ... 그 눈들은 다른 눈을 보고 또 그 다른 눈은 또 다른 눈을 보고, 보고 보고 또 보고 ... 모든 것을 보겠구나. 일곱개의 고양이 눈 ... 아, 표지 속 저 사람인지 뭔지 모를 매지션인지 뭔지 모를 이의 안경은 뫼비우스의 띠로구나. 또 끝없는 순환. 어랏, 입에는 파이가 있군. 또 끝없는 순환. 그리고 보니 도대체 표지에 몇 번이나 나오는 거야? 하나 둘 서이 너이 ..... 롤리팝을 내려놓고 책의 목차를 편다. 여섯번째 꿈, 복수의 공식, 파이, 일곱개의 고양이 눈, 여섯, 일곱, 3.14....., 공식... 아 돌고도는 숫자로구나. 숫자를 세어 볼까? 숫자의 끝은 어디일까.

     이런 워밍업은 바람직했다. 머리는 아팠지만 이건 서곡에 불과했다. 책을 펴는 순간 끝없이 이어지는 단 하나의 이야기 속에 침체되어 갈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으니, 세헤라자데라의 이야기 같은 이 이야기에 파묻혀 샤푸리 야를왕이 되지 않은 것은 저 워밍업 탓이라고 생각해 본다. 그래, 늘 사건은, 인생은 뜻하지 않은 곳에서 발생해 또 다른 곳으로 흘러가는 법이지.

     악마라는 사람의 초대로 한 곳에 모인 사람들은 고립되고 그 안에서 매일 한 명씩 죽는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소년탐정 김전일이 풀었던 한 에피소드와 매우 비슷하지만 결론은 그들 중에 한 명이 "범인은 이 안에 있어!"라고 그 중 하나가 멋지게 외치며 사건을 해결하지 않는다. 그들은 악마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 결국 그들이 악마라는 환상을 본 것인지 자신 안의 악마를 드러낸 것인지 알지 못한 채 죽음을 기다린다. 이제 독자는 상상한다. 범인은 누굴까, 아직 책의 1/5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벌써 한 명 빼고 모두 죽으면 어쩌라는 거지? 궁금증과 의아함이 머리 속을 헤집을 때 쯤, 전혀 다른 챕터가 웰컴 투 스토리를 외친다. 그러면 또 다시 혼란스럽다. 이거 장편이라며, 왜 다 단편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책을 덮기엔 이미 이야기가 속삭인다. 이 이야기는 아주 길어. 어쩌면 네 인생보다 더, 환생을 믿어? 그렇게 이야기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결코 끝나지 않을 듯이 이어진다. 마침내 독자의 머리 속에 남는 것은 수 많은 이미지와 물고 물린 이야기들, 그 속에서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허구인지 결코 알 수 없을 때쯤 무릎을 친다. 아, 소설은 원래 모두 허구였어. 그럼 내 인생은? 모두가 허구가 아니란 말인가? 다시 이야기는 시작된다. 물리고 물리며 하지만 절대 같은 이야기는 없다. 

     필력이 뛰어나다던가, 섬세한 글 쓰기를 하는 작가라던가 하는 말은 못 해주겠다. 하지만 오랜만에 엄청난 이야기꾼을 발견하고 말았다. 아... 언변으로 사람을 후리는 사람, 또 오랜만이군. 무척이나 반갑기도 하고, 속지 말아야겠어란 각성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미 그의 이야기의 마력에 홀리고 말았다. 이 책 속 모두는 단 한 권의 미스테리 소설을 갈망한다. 그리고 그 갈망은 독자의 입장에선 작가의 바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에게 이 책은 단 한 권의 미스테리 소설이 되었을까? 나에게 이 책은 유일하진 않지만, 아니 .. 이런 느낌으로 본다면 유일하기도 한, 한 권의 미스테리 소설이 되고 말았다. 스릴러, 범죄, 추리를 포함한 미스테리가 아니라 도대체 끝과 시작을 알 수 없는 미스테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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