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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밤, 기린의 말 - 「문학의문학」 대표 작가 작품집
김연수.박완서 외 지음 / 문학의문학 / 2011년 3월
평점 :
품절
<여행자의 독서>를 읽은 후여서 그랬는지 괜시리 오기가 생겼다. 어차피 1박 2일의 워크샵 기간 동안 책을 읽기는 힘들 터였고 행여나 책 읽을 시간이 난다해도 사람들 앞에서 책 읽는 모습을 보이긴 싫었다. 그래도 꼭 한 권의 책이 동행했으면 했고, 바닷가의 밤 하늘 아래 단 한 쪽이라도 책을 읽고 싶었다. 그렇게 고민이 시작했다. 책장을 둘러보고 몇 권의 책을 뽑았다 놨다 서성였다. 그러다 문득, 이 책에 눈이 갔다. <깊은 밤, 기린의 말> 그 말이 너무 예뻐 몇 번이나 곱씹던 제목이었다. 코끼리에 이어 기린이란 말인가, 라고 생각하며 혼자 깔깔거리기도 했던 제목이었다. 하지만 몇몇 단편들이 이미 읽은 것이라는 이유로 책은 쉬이 펴지지 않았었다. 그래, 이 책이다. 바닷가의 밤은 유난히 어두운 법이지. 그 깊은 밤에 이 책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충분히 의미는 있을 듯 했다. 생각보다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은 자주 찾아왔다. 남해까지 6시간, 버스에 앉아 단편을 하나씩 읽어나갔다. 창 밖으로 비는 내리고 있었고 책을 읽기 더 없이 좋은 때였다.
날 단 한번도 실망시킨 적 없는 김연수 작가의 글이자, 이 책의 표제작이기도 한 첫 단편은 너무 예쁜 그 제목만큼 예쁘기만 한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깊은 밤 기린이 들려주는 희망을 담고 있었다. 결국 나도 나를 모르는 그와 이렇게 그의 글을 통해 공감하고 있으니, 짧은 이야기가 주는 여운은 더 클 수 밖에 없었다. 이어서 작고 소식에 내 마음을 아프게 하던 한국 문학계의 거장들의 글들이 몰아쳤다. 특히 잃을 게 하나 없다는 <이상한 선물>의 마지막 구절은 괜시리 가슴을 아리게 했다. 잃을 게 하나 없는 나이란 어떤 것일까, 이런 저런 상념들이 지나갔다. 이럴 때에는 별 수 없이 책을 덮고 한 숨을 골라야 한다. 그러는 새, 차는 남해에 도착했고 펜션의 베란다에서 잠시 쉬는 사이 다음 단편 하나를 읽을 수 있었다. 내게는 낯선 작가였지만 그가 뱉어낸 언어들은 내 삶에 밀착 되어 있기도 한 부분들이었다. 버릴 것이 단 하나도 없는 알맹이가 꽉 찬 한 권의 단편집을 만나는 일은 늘 이렇게도 즐겁고, 한 편의 장편소설을 읽는 것보다 더 버겁기도 하다.
그 날 저녁, 술 자리에서 내 목소리가 커지고 말았다. 가급적 책 이야기엔 조심하려고 노력했는데 늘 실수는 이렇게 터지고 만다. 한국 문학에 대한 비난, 일본 문학에 대한 추종. 그 말들이 어디선가 새어나왔고 순간 아찔했다. 어디선가 내 자식이 돌을 맞고 있는 것처럼 아려왔다. 누군가에게는 꿈이자 목표이기도 한 것을, 개인적 취향의 문제로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만 목소리를 높이고 말았다. 이러면 안 된다, 조금만 참자, 라는 외침이 허무하게 무너졌고 그와 함께 반짝 이 책이 나와 동행한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결핍을 채우려는 불완전한 욕구로 허덕이는 생이라는 <퍼즐> 속 말이 무색했다. 나와 상대는 서로의 불완전함의 교집합은 본 체도 없이 서로의 차집합 속에서 서로의 불완전한 욕구만 바라보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가 비난하던 한국 문학은 내겐 이렇게 가르침이고 빛과도 같다. 이 책 속의 말들이 그 깊은 밤, 내 귓가에서 재잘거렸다.
난 내가 바랐던, 바닷가의 밤하늘 아래 책을 읽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 밤에 이 책 속 언어들이 내게 속삭이던 말들은 기억한다. 하나의 단편 하나하나가 내게 술친구가 되었고 하루 밤을 잠재우는 자장가가 되었다. <한 구레네 사람의 수기>에서처럼 우리 문학은 내게 들리지 않는 말을 들리게 했었고, <소금창고>처럼 지난 시간을 깨우는 촉매제이자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 했다. 그 모든 일들이 이 작은 책 한 권이 떠올렸다. 좋은 소설이 가득한 하나의 책은 이처럼, 때론 전부의 시간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