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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에 홀린 광대
정영문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9월
평점 :
쇤베르크의 음악을 틀어 놓는다. 어려서부터 운 좋게도 다양한 문화적 혜택을 누린 편임에도 내 귀는 내 눈에 비해 어둡다. 어떤 점이 훌륭하고 어떤 점이 매력적인지도 모르는 채 음악을 틀고 귀를 닫고 눈만 열어둔다. 음악을 틀어놓았지만, 음악은 닫힌 내 귀에 들어오지 않고 눈은 텍스트 위에서 유영한다. 절정의 순간, 귀가 꿈틀 거린다. 잠시 환상 속에 갇히고 이것이 환상인지 무엇인지 모르게 된다. 나처럼 기묘한 사내들은 자신을 둘러 싼 사물들을 단어로 정의 해 놓은 관계로 이름 짓지만 그들의 관계는 낯 모르는 이들과 다를 바가 없다. 다른 기억을 가지고 다른 과거 안에서 관계가 정의 해 놓은 이름만을 가지고 살며 다른 현실을 보고 다른 미래를 꿈꾸고 외로워진다. 그들의 모습은 정말 달에 홀린 광대, 그것과 다를 바 없다.
표제작이자, 이 단편집을 여는 <달에 홀린 광대>부터 작가만의 독특한 텍스트는 독자를 매혹시킨다. 서로를 아비와 아들로 부르지만, 타인과 다를 바가 없는 두 사내는 가족이라는 단어만 유지한 채 살았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다른 단편에서 나오는 것처럼, '지금'이라는 단어자체가 무의미한 시간의 흐름 따윈 아무렇지도 않게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모든 시간 속에서 그들의 관계는 모르는 이와 다르지 않다. 그들을 잇는 것은 가족이라는 단지 그 단어 하나 뿐이다. 또 그들이 함께 보고 있는 현실은 현실과 동떨어지는 것이 현실이고, 그 현실이 그들의 하루를 평범과는 동떨어진 현실로 만들어 버리는 것도 현실이다. 이처럼 언어의 각종 변형으로 재조합 된 이 책의 문장들은 각 단편 속, 그리고 표제작 속 그들과 꽤 닮아있다.
나는 잠시 내가 한 얘기가 사실인지 자문해본다. 그것은 사실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상관없는 일이다. 나는 사실만을 말하는 데 흥미를 잃었으며, 또한 내게는 사실과 사실이 아닌 것 간의 차이란 없다. - <산책) p.84
앞의 단편에 이어 두번째 단편에서도 마지막 장면에서 비가 내린다. 나는 잠시 책을 내려두고 '비'의 의미에 대해 생각한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잠시 호흡을 멈추고 말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는 일이 잦다. 위의 구절처럼, 화자의 이야기는 다 지어낸 것이고 사실일 수도 사실이 아닐 수도 있따는 자각이 각 문장을 애처롭게 만든다. 반전을 거듭하는 내용은 우리가 갖고 있는 기억이라는 것의 진면목을 유감 없이 드러내고, 그에 따라 평이한 문장들은 그저 평이하지 않고 아련하게 평이해져 문장 속에 갇혀진다. 마치 이 단편의 마지막 문장 '슬픔은 그냥 하나의 평이한 문장일 뿐인 문장 속에 가둔다'는 문구처럼 ...
다음 단편 <숲에서 길을 잃다>를 보면 이 책의 텍스트들이 주는 느낌의 근원이 분명해 진다. 인간의 외로움, 특히 도시라는 거대한 콘크리트 숲 안에서 더 커지는 그것이다. 모든 단편들의 주인공들은 마지막에 결국 혼자 남고 만다. 우리가 삶이라는 길 위에서 그렇게 혼자 서는 것처럼. 그리고 그들은 <양떼 목장>의 주인공이 들렀던 유적지의 유적들 같이 버려지고 쓸모 없어질 상념들을 계속한다. 하지만 그들이 그것을 생각하는 그 순간, 그것은 결코 버려지고 말 것들이 아닌 것만 같았다.
앞서 말했던 '비'와 상반 되게 단편들 속에는 '햇살'의 이미지도 뚜렷이 드러난다. 그것은 카뮈의 <이방인> 속 주인공을 상기 시킨다. 햇살이 너무 뜨거워서 그들은 정신을 잃고 환상을 보며 달이 떠오르기 직전의 시간을 기다린다. 그 시간이 되면, 모든 것이 다 괜찮을 것만 같다. <배추벌레>의 주인공이 배추를 뽑다 정신을 잃은 순간, 그 이미지는 더 확고 해 진다. 마지막 단편 <횡설수설>을 보면 정말 난감해 진다. 그 어지러운 텍스트 안에 지금까지의 모든 단편을 에우르려는 시도는 돋보인다. 작가는 이렇게 끝없이 새로운 시도들을 하고 있다.
뒷 커버의 추천사에 나온 언어의 연금술이라는 말이 과분하지 않다. 하나의 단어는 끊임없이 다른 모습을 추구하지만 결국 하나의 문장 속에서 더 이상의 것도 더 이하의 것도 없을 듯한 유일한 것으로 쓰인다. 결국 단어 하나만 남는 순간, 그것은 단편들 속의 사람들처럼 외로워 지고 애처로워진다. 이 책의 매력은 그렇게 도드라진다.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애씀으로서 다시 그것이 눈에 띄는 순간을 갖게 되는 것이다. 문장 하나하나가 밑줄을 긋고 싶진 않으면서도 전체적인 흐름에 녹아내려 곱씹게 되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유일한 색, 그것을 고수하려 작가는 얼마나 외로웠을지 그리고 그것을 이해하는 독자들은 또 얼마나 외로운 삶인 것인지, 외로운 사람과 문장과 단어의 만남이 아롱이 눈 안에서 눈부시게 전해지는 순간을 이 책은 선사한다. 달갑지도, 달갑지 않지도 않은 순간이 꽤나 달갑다. 그러고 보면 나도 어쩌면 이것을 공감했을 당신도 달에 홀린 광대와 같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