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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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김애란이 그녀의 첫 단편을 세상에 내 놓앗을 때부터 그녀가 싫었다. 세상에 쿨한 사람이 어디있다고 모두다 쿨 병에 걸려 버린 거냐고 비난했다. 하지만 그 비난의 근원은 내가 그 때의 그녀의 나이가 되어도 그녀만큼 삶에 대해 깊이를 갖고 그만큼 담담해 질 수 없을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고 그녀의 글 같은 것을 결코 쓰지 못할 것임을 깨달았던 데에 있었다. 세상은 그것을 '자격지심'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난 그녀가 싫다고 하면서도 그녀의 단편집을 모조리 구매해 읽었고 그녀의 장편을 손 꼽아 기다렸다. 단편에 강한 작가치고, 장편까지 훌륭한 경우는 드문데 어디 한 번 두고보자는 그런 억지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을 편 순간 이 작가에게 내가 된통 당하고 말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예감은 현실이 되었다.

     책을 편 이후,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첫 문장부터 너무 예쁜 말들을 뱉는 작가의 모습은 생경했지만 그 말들의 아롱거림은 나를 두근거리게 했다. 바람이 불면, 내 속 낱말카드가 조그맣게 회오리친다니... 희귀병으로 학교를 다니지 못했고 대신 책을 읽었고 책 속 글들이 쌓여 이젠 내가 무언가 쓰고 싶어졌다는 표현을 어찌 더 예쁘게 할 수가 있을까. 단어 하나하나의 아름다움이 이야기로 이어졌다. 너무 빨리 부모가 되어버린 이들과 너무 빨리 늙은 자식이 되어버린 이의 이야기는 통속적일 수 있었으나 통속적이지 않았고 어두울 수 있었으나 어둡지 않았다. 오히려 신선하고 밝아 반짝거렸다. 그러면서도 인간의 보편적인 감성을 자극하는 것을 잃지 않았다. 이런 완벽한 조합에 다시 또 한번 두근거렸다. 쿨해서 싫다고 하던 내 주장은 뒤집어졌다. 더 이상 따뜻할 순 없었고 더 이상 착할 수는 없었다. 지나치게 쿨하던가, 지나치게 착하던가, 왜 이리 극단적이야? 중간은 없어? 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이번에도 싫다고 고개 돌려 버릴 수 있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결국은 울고 말았으니까.

     너무 빨리 어른이 되어 버린 아이는 예전 김애란이 등단이라는 것을 했을 당시 그랬듯 그 나이에 맞지 않는 세상에 대한 덤덤함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 아이는 결코 어린아이가 아니라 말 그대로 어른아이이기에 그 덤덤함이 차갑지 않다. 그 아이의 시각에서 재해석 된 지나간 역사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되어 청춘과 세월의 소리를 들려준다. 모두가 그렇게 어른이 되어가고 모두가 그렇게 사랑을 배운다고, 너도 누군가의 슬픔이었고 기쁨이었으니 다시 한 번 두근두근 살아보라고 이야기는 종용한다. 독자를 사근사근 보채는 그 느낌이 결코 싫지 않다. 엉망진창이라고 생각하던 내 인생이 조금은 두근두근 해 진 것도 사실이니까. 결국 난 김애란을 싫어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 누가 뭐라고 해도 그녀를 싫어하지 않은 채 다음 이야기를 기다릴 것임은 분명하다. 신형철이 몰락의 에티카에서 했던 그 말처럼 어떻게 그녀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터무니 없다는 걸 알면서도, 또 번번이 저항하면서도, 우리는 이해라는 단어의 모서리에 가까스로 매달려 살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어쩌자고 인간은 이렇게 이해를 바라는 존재로 태어나버리게 된 걸까? 그리고 왜 그토록 자기가 느낀 무언가를 전하려고 애쓰는 걸까? (p.182)

 

    어른이 되는 시간이란 게

    결국 실망에 익숙해지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겠지만

    글이란 게 그걸 꼭 안아주는 것은 아닐지라도

    보다 '잘' 실망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무엇인지도 모르겠어. (p.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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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 농촌총각의 투르크 원정기
안효원 지음 / 이야기쟁이낙타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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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속 글을 읽다보면 저자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전혀 알지 못하는 상대의 말씨라던지 사소한 버릇들이 그려지는 것이다. 슬그머니 웃기도 하고, 고개를 주억거리기도 하고, 때론 진지한 표정으로 상대의 이야기를 들으며 시간은 그렇게 흘러간다. 상대의 이야기가 끝날 때쯤 책의 뒷면은 덮히고 꼴깍 침을 삼켜본다. 너무 수다를 오래 떨면 목이 마르듯 마른 침이 넘어가는 것이다. 그럼에도 좋은 대화를 나누고 난 후에는 뿌듯하다. 사람을 알아간다는 것은 언제나 참 반갑고 고마운 일임에 틀림없다.

     이 책을 읽는 내내 그런 느낌이 들었다. 여행 에세이에 수록 되어있는 그 흔한 지도도, 여행지에 대한 정보도 주지 않는 친절하지 못한 여행자는 자신의 이야기와 감성을 친절하게 풀어 놓음으로서 당연하다고 생각 했던 것들이 배제 된 여행도 사람과 이야기만 있다면 충분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말도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 낯선 도시들을 돌아다니며 낯선 길을 걷는다는 것은 두려움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두려움은 즐길 수 있는 무엇이 되고 그 때 깨닫는 것이다. 여행은 남의 삶에 잠시 들어가는 것이며 나의 삶에 깊이 들어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p.235) 자신과 전혀 만날 일이 없을 것 같던 먼 곳의 타인과 나 사이에 생기는 삶이라는 교집합 속에서 우린 지나온 시간과 지금의 시간과 미래의 시간, 그리고 그 시간 속에서 함께 할 사람들에게 고마워지는 수 밖에 없다. 그 마음을 알기에 책을 읽는 내내 저자가 함께 걸으며 많은 대화를 함께 하고 많은 공감을 나눈 것 같은 느낌은 강렬해지는 것이 당연하다.

    터키라는 나라를 생각한다. 형제의 나라라 불리며 이상하리만치 친밀하게 느껴지지만 그럼에도 너무나 멀리 떨어진 나라. 왜 하필이면 터키였을까. 갑자기 찾아 온 병과 힘들게 싸운 후 찾은 곳이 그곳일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을까. '그냥' 이라고 저자는 말할 것 같고 난 그럴 줄 알았다며 웃을 것 같다. 삶이 계획대로 진행 된다면 여행의 매력도 반감되고 말 것이다. 삶은 늘 예상치 못한 곳으로 우리를 데려다 놓고, 우리의 여행도 마찬가지다. 사전 준비가 아무리 철저하다 해도 여행은 단 한 번도 계획대로 우리를 움직이게 허락하지 않는다. 마치 넌 삶을 배우러 길을 떠난 것이라고 말하듯 원치 않는 우연과 시련들을 툭툭 던져준다. 그렇기에 계산 된 여행보다는 계산되지 않은 여행이 더 즐거울 수 밖에 없다. 그 어떤 일이 벌어져도 그럴 줄 알았다는 긍정의 힘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냥 갑자기 가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 오고 그 때 떠날 준비를 하고 그렇게 걷다 보면 '그냥' 시작 된 여행은 단순한 '그냥'이 아닌 단순한 '열정' 으로 변해 버린다. 이 책 속에도 그런 열정들이 피어 오른다. 삶에 대한 열정, 사람과 사람 사이에 대한 열정, 나 스스로에 대한 열정. 이것들을 길에서 배운 저자의 마음 속에 고마움이 피어나는 것은 그 모든 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리라.

   우리는 때론 삶이 우리를 배신하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내가 원하는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자꾸 날 밀어내는 것 같고, 나에게 일어나지 않아도 좋을 것만 같은 일들이 하필 나에게 일어나고,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를 어둠이 자꾸 날 덮치는 것 같은 기분. 하지만 분명 그런 시간은 지나간다. 그리고 그런 시간 뒤에는 더 괜찮은 날과, 더 괜찮은 나와, 더 괜찮은 인연들이 남는다. 그러나 그런 시간들이 찾아와도 우린 자주 고맙다는 표현을 잊고 만다. 이 책에서 우리가 배울 점은 여행하는 법이 아니다. 단지 우리의 지난 시간에 고맙다고 말하는 법, 지금 우리의 시간에 고맙다고 말하는 법,. 그리고 찾아 올 우리 미래에 고맙다고 말하는 법, 이 쉽고도 어려운 일을 기억하는 것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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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분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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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어떤 기업들이 신입사원 모집에 특정 학교의 학생들의 지원을 받지 않겠다는 발표를 했다. 학교 측의 잘못된 행위에 대해 학생들의 움직임이 없는 것을 비난하는 일격이었다. 그 발표에 힘입어 여러 논란이 확산 되고 있고 난 이 책을 떠올렸다. 누구나 가슴에 울분을 지니고 살아야 하는 시대는 계속되고 있다. 양심적인 움직임을 갖기엔 거대한 힘의 보복이 두렵지 않을 수가 없다. 그 힘에 복종하는 것은 결국 나의 미래를 보증해 주는 일종의 백주수표와도 같다. 그래서 쉽게 반기를 들 수가 없다. 잘못 된 행위임을 몰라서가 아니라 잘못 된 행위임을 알지만, 그것에 반하는 것이 내게 어떤 악영향을 미칠지 너무도 쉽게 상상할 수 있기 때문에 눈을 감고 모르쇠로 일관해야 한다. 그런데 이번엔 반대 쪽에서 강한 압박이 들어온 것이다. 왜 그렇게 안이한 사람들이냐고 비난을 하며 너 같은 안이한 태도는 우리도 필요치 않다고 한다. 우린 과연 이런 양 쪽의 억압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모두의 가슴 속에는 시대의 고통에 의한 울분이 가득찬다. 개인적인 울분이 아닌 시대가 만들어 놓은 풀 수 없는 순환고리는 50년이 지나도록 전 세계적으로 계속 되어가고 있다.

    그런 면에서 필립 로스가 그려내는 청춘의 격정은 놀랍도록 현실적이다. 70이 넘은 노작가가 그려 낸 이야기라곤 믿을 수 없는 청춘들의 강렬한 자화상이다.  한국에서 비행기로도 한참을 가야 하는 미국에 있는 한 청년이 한국전쟁이라는 시대 상황에 어떤 영향을 받고 어떤 절망을 해야 하는지는 지금의 청년들의 모습과도 너무 닮아있다. 시대는 하나의 방향, 하나의 지위만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는 전쟁에 참전해야 하는 젊은이였으며 한 가정의 기대를 받는 아들이었고 한 여자를 지키고 싶은 남성이었다. 그 지위들은 때때로 무참히 충돌을 해서 그 어떤 선택도 바람직하지 않게 개인을 옥죄어 온다. 그 보이지 않는 힘은 결국 개인의 울분이 되고 한 개인의 역사를 통채로 뒤흔들어 버린다. 어디서도 정착하지 못하고 떠나버리는 주인공 마커스의 모습은 마치 그 어떤 현실도 도피하고 싶은 그 당시의, 그리고 젊은이들의 표상같아 보인다. 결국 그의 끝은 참혹하다. 불안한 선택이 결국 불안한 현실과 갈 수 없는 미래를 안긴 것이다.

    과거의 이야기들이 현실과 너무도 닮아있을 때 우린 또 한 번 좌절해야 한다. 바뀌지 않는 사회에 우리가 종속되어 있고 앞으로 우리가 낳을 아이들이 종속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고통이고 비극이다. 그래도 여전히 우리가 미래에 희망을 거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렇게 시간이 흘러도 지옥같은 모습들은 변화되지 않는데 무엇이 우리의 상상 속에 미래의 푸른 빛을 주입시키는 것일까. <반 고흐 영혼의 편지>에 나왔던 한 구절이 떠오른다. '봄이 되면 종달새는 울지 않을 수 없다.' 그 말이 맞다면, 더디게도 봄은 오고 있고 결국은 올 것이란 말인가? 이렇게 많은 청춘들이 보이지 않는 울분에 휩싸여 들리지 않는 울음을 그렇게도 세차게 울어대는 것을 보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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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경사 바틀비 일러스트와 함께 읽는 세계명작
허먼 멜빌 지음, 공진호 옮김, 하비에르 사발라 그림 / 문학동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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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책을 볼 때면 괜히 속상해 지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좋은 책들이 꽁꽁 숨어있는 건지. 허먼 멜빌이라면 떠올리는 책은 '모비딕' 뿐인 채로 지금껏 살아왔고 누군가 이렇게 세상에 내놓지 않았다면 난 그렇게 알고 계속 살아갔을 것에 대해. 그러면서 한 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제라도 알게 된 것에 대한 안도감이랄까.

     바틀비는 의심할 여지 없이 매력적인 캐릭터이다. 책을 읽는 내내 나는 '당신을 미워하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라고 중얼거렸고, 그 다음 날 아침 출근을 위해 눈을 부비며 '출근하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했고 상사가 일을 시킬 때마다 '하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라는 말이 입 안에서 오물거렸다. 사회에 어울릴 수 없는 그의 무능함을 한탄하면서도 그의 지조있는 그 태도에 전염 되어 가는 나는 우스웠다.

     그리고 문득 찾아오는 왜? 라는 의문. 책은 끝까지 바틀비가 '하지 않는 편을 택한' 그 이유를 말하지 않는다. 그러다 독자가 자신도 모르게 그의 말을 따라하게 되는 순간 '왜?' 라는 의문은 찾아온다. 왜 그는 하지 않는 편을 택해야 했고 왜 나는 이 말을 따라하고 있는지. 그 의문에 대한 약간의 실마리라도 생각하게 된다면, 이 책이 주는 수려한 매력은 빛이 난다.

       내가 가진 능력보다 월급이 형편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절대 이의를 제기 하지 않으려는 모습, 그들이 나의 진면목을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공적'인 관계로 묶인 이들에게 무슨 기대를 할까 생각하며 불만을 갖지 못하는 모습, 이 길은 내 길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당장의 안전 때문에 거부하지 않는 모습, 이 모든 모습을 우리가 가지고 있기에 바틀비의 모습은 한탄스러우면서도 매력으로 다가온다. 그는 우리가 하지 않는 그 모든 무의식의 발현이기 때문이다. 작은 사무실 한 구석자리에 앉아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꾸준히 해 나가지만 자신의 업무가 아니라고 생각되는 일엔 '하지 않는 편을 택하겠다'고 말할 수 있는 신념, 그리고 이 일이 자신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 일도 '하지 않는 편을 택하겠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 자신의 동선을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란 지금 우리가 타의적으로 자의적으로 더 크게는 사회가 돌아가는 원칙이라는 큰 힘에 의해 억압 당하고 있는 것들이다. 그것들을 바틀비는 거부한다. 하지만 거부한다는 그를 순순히 용납할 세계가 아닌 이 곳에서 그는 결국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거부권을 실행한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은 심금을 울리게 될 수 밖에 없다.

     저자인 허먼멜빌에 대해 생각한다. 글을 쓰고 싶었고, 글을 쓰며 살고 싶었지만 그의 편이 아니었던 세계 탓에 힘이 들었고 단 몇 푼이라도 벌기 위해 짧은 글이라도 기계적으로 써 냈을 그의 모습 안에는 바틀비를 동경하는 모습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나도 그 당시의 허먼멜빌과 다를 바가 없음은 물론이다. 그러기에 바틀비는 그 시대나 지금이나 상징적인 인물이다. 우리의 해소할 수 없는 욕망을 대신 실현해 주는 그런 인물이기에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중얼거리게 되는 것이다. 나도 '하지 않는 편을 택하겠다'가 아닌 '하지 않는 편을 택하고 싶다'를. 그의 말처럼 그렇게 단호하게 할 수 있는 말은 이것 하나 뿐이다. '바틀비를 폄하하지 않는 편을 택하겠다. 이런 좋은 책들을 모르고 살아가지 않는 편을 택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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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레터
틸만 람슈테트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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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을 쓰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공부를 해야 한다고 했다. 작은 세부사항마저 다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써야 한다고 했다.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이 배경이 아닐 때는 그 곳에 직접 가서 그 곳을 느껴봐야 한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들은 독일의 작가 틸만 람슈테드는 말한다. "뭐... 그럴 수도 있고."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다소 난감한 책인 <베이징 레터>는 그래서 미워할 수가 없다. 중국에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작가가 단지 론리 플래닛 한 권을 들고 써 내려간 글에서 작가의 모습은 왠지 소설 속 할아버지의 모습과도 겹쳐진다. 끊임없이 자식들의 속을 썩이면서도 그 엉뚱함이 결코 밉지 많은 않은 할아버지는 기행을 일삼을 것 같은 작가의 모습을 반영하는 듯 하다. 그런 할아버지가 중국행을 선언했고 다시 한 번 자식들은 기가 막힐 뿐이고 중국 관련 서적을 두 권 사 놓고 한 권은 글이 많아서 던져놓고 단 한 권을 참고 해 이 책을 썼다고 할 때 독자는 기가 막힐 뿐이다. 그런 작가의 행동처럼 소설 속 주인공들은 미워할 수 없게 매력을 발산한다. 중국에 간 줄 알았던 할아버지에게서 중국이 아닌 다른 곳으로부터 중국인 체 하며 편지가 오지만 그것들은 헛점 투성이다. 그리고 갑자기, 할아버지 일대 최고의 서프라이즈 소식이 들려온다. 불과 몇 키로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할아버지의 사망 소식이 날아온 것이다. 이 때부터 그의 할아버지 만큼이나 이해할 수 없는 주인공의 행동이 시작된다. 자신이 저지른 일은 둘째치고, 가족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할아버지의 장례를 치루는 것이 인지상정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는 가족들에게 중국에서 보낸 것 같은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편지 안에서 가족들의 천덕꾸러기였던 할아버지는 신비롭고 추억을 가진 진정한 기인으로 거듭난다. 그가 쓰는 편지 속에서 할아버지의 모습은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 속 남작의 허풍과도 닮아있다. 하지만 중국인 것이다. 그렇게 할아버지가 가고 싶어하던 그 곳엔 분명히 이유가 있을테고 주인공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 이유를 만들어 나간다. 그것이 할아버지를 향한 자신의 최대 사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타인의 삶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들의 삶을 우리가 온전히 살아보지 않는 이상 누군가를 절대적인 기준(이라는 것이 있다면)으로 판단하는 것은 오만이며 자만이다. 그렇기에 그가 받아들이는 할아버지의 죽음은 다소 이상하지만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다. 평생을 자유롭고 즐겁게 살아 온 할아버지가 자신의 죽음인들 가족들이 슬퍼하는 가운데 치루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라는 그의 주관은 아주 설득력이 없지는 않기 때문이다. 모두가 죽음을 맞는다. 우리는 스스로의 죽음은 보지 못하지만, 살아 가며 수 많은 죽음을 마주한다. 우리가 하나하나를 개인으로서 사랑하고 아꼈다면 그 죽음조차 그들의 방식으로 만들어 주는 것도 나쁘진 않을 터, 책을 넘기며 주인공의 상황을 이해하고 웃으면서도 짠하게 여기게 된다.

     그런 책들이 있다. 마지막 장이 덮어지고 고개가 갸웃거려지면서도 뭔가 색다른 별미를 맛본 듯한 기분을 주는 책. 이 책이 그랬다. 마치 유럽의 습관에 길들여있던 내가 중국이라는 문명을 발견하고 그들의 베이징 덕을 처음 전병에 싸서 파와 소스와 함께 찍어먹어 본 느낌이랄까? 단 한 권의 중국 여행서로 이런 독특한 맛을 낸 작가, 이 작가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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