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로 산다는 것 - 우리 시대 작가 17인이 말하는 나의 삶 나의 글
김훈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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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로 산다는 것이 어떤 기분일지 나는 알지 못한다. 나는 그저 그들의 삶이 만들어 낸 하나의 창작물을 보고 공감하고 시기한다. 하지만 늘 그들의 기분이 궁금하다. 하나의 세계를 창조해 내는 사람들은 어떤 시선으로 삶을 보고, 어떤 마음으로 삶을 관통하는지, 마치 그것은 며느리에게도 가르쳐주지 않는 양념의 비법 같을 것 같다. 그래서 살짝 들여다본다. 그들이 하는 소설 창작에 대한 이야기 속에 그 비법이 감춰져 있기를 기대한다. 그래서 나도 그 비법으로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꿈도 꾼다.

     아, 그런데 맙소사. 맛집마다 다 그 비법이 다르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결국 맛집의 비법을 알았다한들 그 다음 맛을 만드는 것은 오롯이 내 몫이 되는 것이다. 즉, 그들의 이야기를 다 듣는다 한들 나는 그들의 소설을 흉내내지 못한다. 그것은 경험의 차이 탓이기도 하다. 이 책 속 모든 소설가가 그 누구 하나 뺄 수 없게 수려한 글을 쓰고 있지만, 그들의 창작 방법은 다 다르다. 그들이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자라왔느냐가 그들의 소설이고 그들이 만드는 세계이다. 그러므로 그 비법을 배운다고 한들 나는 그들의 맛을 낼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하는 이야기 하나하나를 듣고 있자면 세상을 보는 조금 다른 시선은 배울 수가 있다. 우리가 흔히 지나치게 되는 것들에서 작가들은 하나의 이야기를 뽑아낸다. 왜? 만약? 사물에 대한 이런 물음들은 하나의 이야기로 시작되고 그들의 손을 통해 활자화 된다. 정말 멋진 일이다.

    나는 이렇게 멋진 일을 할 수 있는 그들이 오롯이 자신들의 일만을 했으면 좋겠다. 김연수 작가에게 닉네임처럼 붙은 '프로소설가' 라는 말이 그의 전업작가 생활 때문이라면, 모두에게 그런 기회가 생겼으면 좋겠다. 예술가라면 흔히 치뤄야 한다는 선입견이 있는 삶의 고단함에서 벗어나 조금 여유롭고 호기로운 환경 속에서 마음 놓고 글을 쓰기를 바란다. 그들이 그럴 수 있다면 이렇게 수려한 우리 문학들이 세상 속에서 빛을 발하지 않을 수는 없다. 세계가 힘들어질 수록 사람들은 스토리를 원하고 허구의 스토리 속에서 대리만족과 위안을 경험한다. 그리고 내 경험상, 이 작가들이 주는 위로는 내가 읽고 느낀 그 어떤 이야기의 그것보다 컸으니 나는 그들의 힘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그들의 글이 나오는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그 확신은 더욱 더 커진다. 혹자는 문학시장이 어렵다고 하고, 혹자는 우리문학은 재미가 없다고 한다. 전자는 후자 탓이고, 후자는 그들이 고교시절 필수로 배우던 교과과목의 지루함에서 벗어나지 않고 소설을 읽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그들의 무지함을 탓한다. 내 교만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아는 것이 힘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은 여기서 시작된다. 자, 다시 한 번 우리의 소설을 읽자. 우리의 젊은 작가들을 만나고 그들의 작품이 어떻다는 것은 그 다음에 판단하자. 장담하건데 한 번 그 맛을 보게 되면 멈출 수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우리의 문학은 풍성해 질 것이고 활발해 질 것이고 그들은 마음껏 더 좋은 글을 쓰게 될 것이다. 그럴 그들에게 무한한 응원과 존경을 보낸다.

 

* 책 속 한 구절

믿고 싶다가 어느 순간 완전히 믿어버리지 않으면, 혹은 믿어버린 척 굴지 않으면, 글은 시작되지 않는다. 시침조차 떼지 않고, 정직한 얼굴 그대로, 나는 나 자신에게 '여보세요'라고 말을 건넬 용기가 아직도 나지 않는다. (p.63_ 김인숙)

형, 소설은요 인생을 별로 겪지 않은 자가 쓰는 거에요. 인생을 다체롭게 경험한 자들은 인생을 다체롭게 경험하는데 썼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자신의 체험을 문장으로 보고하거나 기록할 능력이 없지요. 문장은 치열한 연마의 소산이기 때문이에요. (p.78_ 김종광)

언어는 이 세계의 불완전성의 소산일 뿐이다. 그래서 모든 언어는 다른 언어에 의해 부정당해 마땅한 것이고 부정당하기를 거부하는 언어는 이미 언어가 아닐 것이다. 언어에게 소통 기능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부장당하는 운명을 수락하는 그 불완전성 안에 있는 것이 아닐까. 듣는 작가 없는 시대의 말하기란 말이 아니라 재앙이다. (p.86_ 김훈)

삶은 늘 느낌의 절박함으로 나에게 다가온다. 그 절박함은 몸과 마음의 절박함인데, 그것을 글로 들이밀자면 말의 모호성에 부딪힌다. 그래서 내 글쓰기란 그 절박함과 모호성 사이에서 좌충우돌하는 파행인 것이다. 나는 글 전제에 어떤 지향성을 설정하는 일을 감당해내지 못한다. (p.88_ 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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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나를 본다 오늘의 세계 시인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지음, 이경수 옮김 / 들녘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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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한 번의 가을이 지나가고 있다. 이 가을에도 나는 불안했다. 이십대의 마지막, 그 단어는 늘 설렘과 두려움을 함께 동반하기에 작은 바람에도 흔들릴만큼 나는 위험했고 연약했다. 그리고 그 어느 날 밤, 시가 내게로 왔다. 시라는 것은 늘 그런 식이다. 마음을 쉽게 열지 않는다. 발걸음도 가벼이 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갑자기, 방심한 틈을 타 덜컹 들어오는 것이다. 그 순간 나는 마음을 허락하게 된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2011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스웨덴의 한 시인이 읊는 노래는 무게의 아름다움이 있다. 시인의 눈에서 가슴으로 들어 온 방대한 자연은 인간사의 흐름이 되고 개인의 소소한 일상이 된다. 자연이란 이렇게 겉돌지 않고, 이용당하지 않고, 그 자체로 청순할 때 사람과 하나가 될 수 있는 법인 모양이다.

 

사물의 맥락

 

저 잿빛 나무를 보라, 하늘이

나무의 섬유질 속을 달려 땅에 닿았다.

땅이 하늘을 배불리 마셨을 때, 남는 건

찌그러진 구름 한 장뿐. 도둑맞은 공간이

비틀려 주름잡히고, 꼬이고 엮어져

푸른 초목이 된다. 자유의 짧은 순간들이

우리 내부에서 일어나,

운명의 여신들을 뚫고 그 너머로 선회한다.

 

     1년에 3편 남짓의 시를 쓴다는 시인의 시에는 시간이 담겨있다. 한 편의 시 안에 시간의 흐름을 오롯이 담아낸다. 그래서 시 속에는 자연이 자연일 때의 그 시간부터 문명화사회의 이기심이 가득한 그 시간까지가 가득하다. 그 시간 속을 살고 있는 나는 시인의 한 구절 한 구절에 문득 두려워진다.

 

겨울밤

 

폭풍이 집에 입을 갖다대고

불어서 음악을 만든다.

나는 불편한 잠을 자다 돌아누워, 감은 눈으로

폭풍의 텍스트를 읽는다.

 

하지만 아이의 두 눈은 어둠 속에 동그랗다.

아이에게는 폭풍이 울부짓는다.

아이와 폭풍은 둘 다 흔들리는 램프를 좋아한다.

둘 다 말이 어눌하다.

 

폭풍은 아이 같은 손과 날개를 가졌다.

카라만 호(號)가 라플란드 쪽으로 치닫고,

자기 손톱의 별무리가 벽을

꼭 움켜잡는 것을 집은 느낀다.

 

우리 층에서는 밤이 고요하다.

이곳은 기한 끝난 발자국들이 모두

연못 속에 가라앉은 잎사귀처럼 쉬고 있지만,

바깥에서는 밤이 야성적이다.

 

세계 위로는 더한 폭풍이 지나간다.

우리 영혼에 입을 갖다대고

불어서 음악을 만든다. 폭풍이

우리를 텅 비게 불어 버릴까 두렵다.

 

     그가 느낀 두려움을 우리라고 느끼지 않을리가 없다. 비어 버리지 않으려 분노하고 분노하는 우리는 그럼에도 두려워하지만 시인의 말에 위안을 얻는다. 시인의 말은 음악이다. 다양한 음악적 표현들이 시의 곳곳에 숨어 있다가 하나의 음표처럼 퐁퐁 솟아난다. 살아 숨쉬는 그 음표들 하나하나가 찬란하게 부서지는 것, 이것이 시인이 가진 내면적 성찰의 힘이자 그가 가진 시간, 경험치이다. 시인은 그 음악적인 요소로 언어를 움직이게 해 이미지를 극대화 시킨다. 그것은 상승과 하강의 이미지, 시에는 유독 하늘과 땅의 만남이 많다. 그 굴곡은 자연의 굴곡이며 시간의 굴곡이며 인생의 굴곡이다. 그 어떤 것 하나 허투루 넘길 것이 없다. 아름다운 글이라는 것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아쉽게도 국내에 나와있는 시인의 시집은 이 한 권 뿐이다. 그러나 다작하지 않는 시인임을 감안하면 이 한 권으로 우린 꽤 많은 그의 시상을 접할 수 있다. 그리고 또 아쉽게도 그가 시를 쓴 모국어를 번역한 것이 아니라 영어로 번역된 것을 다시 번역한 것이니 이중번역에서 사라지는 글 맛은 어찌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런 생각을 해 본다. 그렇게나마 이 시의 아름다움을 만나는 것이 아예 만나지 않았던 것보단 훨씬 나은 일이라고. 이리되었든 저리되었든 그 아름다운 언어들이 내 불안한 가을 밤을 지켜주었던 것만큼은 분명한 일이니까. 그 밤 하늘을 음악과 언어로 가득 채워 주었는데 더 바랄 것이 무엇이 있겠냐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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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도 되겠지 - 호기심과 편애로 만드는 특별한 세상
김중혁 지음 / 마음산책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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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린 때론 '-답다.' 라는 표현을 이용한다. "아, 그거 참 그 사람 답네." "참 너다운 짓 한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 ~답다 라는 표현에는 실체가 없다. 나다운 게 뭔데? 그 사람 다운 게 뭔데? 하면 제대로 표현할 방법은 없다. 마치 어느 선전의 "아, 이게 남자한테 참  좋은데 뭐라고 말할 수가 없네." 같은 정도랄까? 그래도 그 선전은 정력에 좋은 음식이라는 구체적인 상품이 있어 '산수유=남자한테 좋음'이라는 공식이라도 낼 수 있지만 사람에겐 그것조차 안 된다. 예를 들어 누군가 내 책꽂이를 들여다보며 참 너답다 라고 말을 한다고 해서 '책꽂이=앨리스'라는 공식은 나올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난 이 책을 보자마자 '참 김중혁 작가 답다'는 말을 했다. 제목이며, 표지까지, 어느 하나 할 것 없이 김중혁이었다. 마치 윤종신의 노래를 듣고있자면 그 노래를 그가 부른 것임을 몰라도 '안녕하세요, 나 윤종신이에요.' 라는 말을 듣게 되듯이.

     비유가 너무 길어졌나보다. 어쨌든 그렇게 참 김중혁다운 책을 펼치면 정말 김중혁 작가가 말을 건다. "처음 뵙겠습니다. 자, 이제 슬슬 서로에 대해 알아볼까요?" 내가 이 책을 읽고 있다고 하자 누군가 어떻냐고 물었고, 나는 김중혁 작가와 선을 보고 있는 기분이라고 했다. 소개팅이 아니라 선이다. 집안의 소개로 결혼을 목적으로 만나 서로를 좀 더 알아보기 위해 하는 대화. "취미는 무엇이세요?" "아, 전 쓸데없는 발명을 공상하곤 한답니다." "아, 네..." "주말엔 주로 뭘 하세요?" "전 박물관 등을 찾아다니죠." 문제는 그런 시시콜콜한 사적인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이 사람에게 홀딱 빠져버린다는 데에 있다. 자신이 게으르며, 쓸데 없는 짓을 잘 하는 것을 인정하고, 잡다한 특기가 많다는 것을 들으며 '아, 이런 남자보단 성실하게 한 가정을 위해 일을 하는 사람이어야 해.' 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매력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가 없으니 '옴므파탈'이란 이런 말빨을 두고 생긴 단어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이 작가에 반해 그의 사적이며 공적인 이야기를 듣다보면 그래, 뭐 있어? 그냥 빠져보는 거지 뭐. 그럼 어떻게든 되겠지. 뭐라도 되겠지란 말이 내 입에서도 그저 툭 하고 나오게 된다. 그리고 그 말이 나왔다면 이제 어쩔 수 없다. 그와의 다음 약속을 기대하듯 그의 다음 책을 기다리고 또 기다기로 또 기다리는 수 밖에.

 

+ 난 특히 김중혁 작가와 의외의 공통점이 좀 있었는데, 그러다보니 정말 얼굴이 발그레질 수 밖에 없었다. (설레기도 했고 치부를 들킨 것 같기도 했고.) 자, 이쯤에서 김중혁 작가의 친구 김연수님께 경고! 빨리 신간을 내놓지 않으면 내 완소 작가 1순위를 김중혁 작가에게 주어버리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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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 고양이
메이 사튼 지음, 조동섭 옮김 / 마음산책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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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는 고양이가 무서워 길거리에서 고양이를 만나면 슬금슬금 뒷걸음질치던 내가 지금은 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지지고 볶고 살고 있으니 인생은 정말 불확실의 연속이긴 한 모양이다. 고양이와 함께 살기 시작하며, 친구의 말처럼 내 인생은 뼛 속부터 흔들리기 시작한 기분이다. 게으름의 아이콘이었던 내가 녀석들을 위해 부지런해지고, 녀석들이 보고 싶어 조금이라도 일찍 들어가려 하고, 주말엔 녀석들과 함께 햇살 아래서 낮잠을 자는 것이 가장 달콤해졌다. 그렇게 고양이에 대한 인식이 바뀌며 난 고정관념의 무서움에 대해, 또 무지의 두려움에 관해 종종 생각해 보곤한다. 내가 갖고 있던 그들에 대한 두려움은 예로부터 있었던 고양이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이기도 했고, 내가 그들의 삶에 대해 알고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요즘 그 고정관념과 무관심에 인간의 이기심이라는 것을 더해 고양이들을 무자비하게 학대하고 개채수를 줄인다는 명목으로 살해하는 것을 보고 있자면 끔찍해진다.<고양이 문화사>란 책에 따르면, 고양이과의 동물들이 그렇듯, 야생 그대로의 고양이는 맹수였으나 사람과 함께 살기 위해 스스로 변화한 종이다. 그렇게 스스로 우리에게 다가온 그 동물을 우린 마치 우리가 생태계를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듯, 무자비한 폭력을 그들에게 퍼붓고 있다. 물론 어떤 것에 대한 호불호는 개인의 몫이고 강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나 그들에 대해 알아보려 노력을 해 본다면, 우리 눈 앞에 씌여있는 고정관념을 조금 벗기려 해 본다면, 그냥 단순히 그들을 미워하고 없애려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사는 방법을 모색해 볼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런 마음에 난 요즘 끊임없이 고양이에 관련 된 책을 읽고 있다. 나와 함께 사는 그 '털북숭이 인간'들을 조금 더 이해하고, 더 나아가 함께 숨 쉬는 법을 생각해 보기 위해서.

 

고양이 이야기의 고전으로도 꼽히는 이 책은 그런 방법을 생각해 보기 앞서 읽어보면 좋은 이야기를 담고있다. 할머니가 손자에게 소리내어 읽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쓰여진만큼 따뜻하고 순수하다. 고양이의 시선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는 우리가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고양이의 입장에서 사람을 보는 시선의 흐름을 제공한다. 물론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가정부를 선택하고 그들의 입장을 이해해 준다는 이 털북숭이 인간 '톰 존스'가 다소 거북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가 그러하듯, 세상의 모든 관계맺음은 일방적이 아니라 쌍방적인 것이라는 것, 그리고 서로의 이해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그의 그런 발언이 그와 함께 한 두 사람의 배려도 있었기에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소소한 깨달음이 바로 이 책의 즐거움이자 이 책이 주는 따뜻한 감성의 근원이 된다.

 

생명이라는 것은 우리가 어찌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어찌해 보겠다고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살아있는 것은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이 작은 고양이 한 마리가 사람에게 와 존중받고 사랑받으며 '털북숭이 인간'이 되었듯 우리 역시 사랑받고 존중받기에 하나의 온전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톰 존스가 우리에게 주는 그런 따뜻한 메시지를 들으며, 이젠 고양이가 불길하고 요망스런 것들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는 하나의 생명들이라는 인식을 해 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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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역열차 - 144회 아쿠타가와 상 수상작
니시무라 겐타 지음, 양억관 옮김 / 다산책방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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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작가의 이력따윈 아무래도 좋은 지도 모르겠다. 아무 정보 없이 책을 폈고 글을 읽어나가며 왠지 서글프고 왠지 애잔하면서도 서툰 흔적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언어는 거칠었고 날 것 그대로인 것 같았다. 겐타와 간타, 작가의 이름과 책 속 주인공의 이름의 유사함에 피식 웃으면서도 아무 생각없이 그냥 주인공이 살아 날뛰는 것마냥 나도 살아 날뛰며 읽었다. 그리고 뒤에 수록 된 또 하나의 글 「나락에 떨어져 소매에 눈물 적실 때」를 보며 겐타와 간타의 만남인가, 하고 중얼거렸다. 제목에선 왠지 근대 일본문학의 느낌도 났다. 책을 덮은 후, 작가의 이력을 살펴보자 그제야 고개가 끄덕여졌다. 이렇게 날 것 그대로의 언어를 쓸 수 있었던 까닭과 그런 언어에 환호했던 사람들의 심정이 이해가 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가공되지 않아 더 애잔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도.

누군가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지만 누군가는 똥을 밟고 태어나기도 한다. 출생은 '랜덤'이고 그 까닭에 누군가의 삶은 질척인다. 그 질척임은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늪의 느낌이다. 세상의 눈총과 무게가 발을 꼭 부여잡고 쉽게 놓아주지 않는 것이다. 한 두번 애써본 들 떨어지지 않는 그것에 더 이상 애써 볼 힘도 남아있지 않지만, 세상은 그것마저 '본인의 무능함'이라고 치부해 버리려 한다. 그리고 그것을 인정한다 한 들, 누구나 마음 속에 하나의 꿈은 살아있는 것이다. 어두운 삶,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처절함 속에서도 뒷주머니에 꽂혀있던 후지사와 세이조의 사소설 한 권처럼, 그 꿈 때문에 이 질척거림도 삶의 이유가 된다.

그런 까닭에 이 책이 희망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누군가 경험한 지옥같은 현실도, 다른 누군가의 그것보단 더 나을 수 있는 것이고 어쨋든 꿈이란 것을 갖고 있는 한 모두는 살아야 할 이유가 생기는 것이니까. 그리고 그렇게 살다보면 언젠가는 자신의 꿈이 한 번쯤은 반짝 할 그 시기가 오고야 말테니까. 그 시간이 온다면, 그 땐 그랬었다며 그 시절을 애잔하게 기억하며 술 한잔 가볍게 할 수 있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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