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나를 본다 오늘의 세계 시인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지음, 이경수 옮김 / 들녘 / 200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또 한 번의 가을이 지나가고 있다. 이 가을에도 나는 불안했다. 이십대의 마지막, 그 단어는 늘 설렘과 두려움을 함께 동반하기에 작은 바람에도 흔들릴만큼 나는 위험했고 연약했다. 그리고 그 어느 날 밤, 시가 내게로 왔다. 시라는 것은 늘 그런 식이다. 마음을 쉽게 열지 않는다. 발걸음도 가벼이 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갑자기, 방심한 틈을 타 덜컹 들어오는 것이다. 그 순간 나는 마음을 허락하게 된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2011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스웨덴의 한 시인이 읊는 노래는 무게의 아름다움이 있다. 시인의 눈에서 가슴으로 들어 온 방대한 자연은 인간사의 흐름이 되고 개인의 소소한 일상이 된다. 자연이란 이렇게 겉돌지 않고, 이용당하지 않고, 그 자체로 청순할 때 사람과 하나가 될 수 있는 법인 모양이다.

 

사물의 맥락

 

저 잿빛 나무를 보라, 하늘이

나무의 섬유질 속을 달려 땅에 닿았다.

땅이 하늘을 배불리 마셨을 때, 남는 건

찌그러진 구름 한 장뿐. 도둑맞은 공간이

비틀려 주름잡히고, 꼬이고 엮어져

푸른 초목이 된다. 자유의 짧은 순간들이

우리 내부에서 일어나,

운명의 여신들을 뚫고 그 너머로 선회한다.

 

     1년에 3편 남짓의 시를 쓴다는 시인의 시에는 시간이 담겨있다. 한 편의 시 안에 시간의 흐름을 오롯이 담아낸다. 그래서 시 속에는 자연이 자연일 때의 그 시간부터 문명화사회의 이기심이 가득한 그 시간까지가 가득하다. 그 시간 속을 살고 있는 나는 시인의 한 구절 한 구절에 문득 두려워진다.

 

겨울밤

 

폭풍이 집에 입을 갖다대고

불어서 음악을 만든다.

나는 불편한 잠을 자다 돌아누워, 감은 눈으로

폭풍의 텍스트를 읽는다.

 

하지만 아이의 두 눈은 어둠 속에 동그랗다.

아이에게는 폭풍이 울부짓는다.

아이와 폭풍은 둘 다 흔들리는 램프를 좋아한다.

둘 다 말이 어눌하다.

 

폭풍은 아이 같은 손과 날개를 가졌다.

카라만 호(號)가 라플란드 쪽으로 치닫고,

자기 손톱의 별무리가 벽을

꼭 움켜잡는 것을 집은 느낀다.

 

우리 층에서는 밤이 고요하다.

이곳은 기한 끝난 발자국들이 모두

연못 속에 가라앉은 잎사귀처럼 쉬고 있지만,

바깥에서는 밤이 야성적이다.

 

세계 위로는 더한 폭풍이 지나간다.

우리 영혼에 입을 갖다대고

불어서 음악을 만든다. 폭풍이

우리를 텅 비게 불어 버릴까 두렵다.

 

     그가 느낀 두려움을 우리라고 느끼지 않을리가 없다. 비어 버리지 않으려 분노하고 분노하는 우리는 그럼에도 두려워하지만 시인의 말에 위안을 얻는다. 시인의 말은 음악이다. 다양한 음악적 표현들이 시의 곳곳에 숨어 있다가 하나의 음표처럼 퐁퐁 솟아난다. 살아 숨쉬는 그 음표들 하나하나가 찬란하게 부서지는 것, 이것이 시인이 가진 내면적 성찰의 힘이자 그가 가진 시간, 경험치이다. 시인은 그 음악적인 요소로 언어를 움직이게 해 이미지를 극대화 시킨다. 그것은 상승과 하강의 이미지, 시에는 유독 하늘과 땅의 만남이 많다. 그 굴곡은 자연의 굴곡이며 시간의 굴곡이며 인생의 굴곡이다. 그 어떤 것 하나 허투루 넘길 것이 없다. 아름다운 글이라는 것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아쉽게도 국내에 나와있는 시인의 시집은 이 한 권 뿐이다. 그러나 다작하지 않는 시인임을 감안하면 이 한 권으로 우린 꽤 많은 그의 시상을 접할 수 있다. 그리고 또 아쉽게도 그가 시를 쓴 모국어를 번역한 것이 아니라 영어로 번역된 것을 다시 번역한 것이니 이중번역에서 사라지는 글 맛은 어찌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런 생각을 해 본다. 그렇게나마 이 시의 아름다움을 만나는 것이 아예 만나지 않았던 것보단 훨씬 나은 일이라고. 이리되었든 저리되었든 그 아름다운 언어들이 내 불안한 가을 밤을 지켜주었던 것만큼은 분명한 일이니까. 그 밤 하늘을 음악과 언어로 가득 채워 주었는데 더 바랄 것이 무엇이 있겠냐는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