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새벽에 주문한 책이 그 날 밤 집에 오니까 도착해있었다. 어두운 방안으로 막 들어오다 박스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택배오는 건 늘 현관입구 쪽에 자리가 정해져있는데 누가 왜 새삼 방 안에까지ㅜ 그대로 넘어졌으면 책상 의자에 턱을 제대로 찧을 위치였어서 순간 아찔. 암튼 바로 온 거 보니까 주문하면서 당일배송 체크돼있는 걸 그대로 넘겼나본데.. 급한 책도 아니구만 뭔가 마구 보채서 받은 기분.

상자를 뜯고 증정품 확인하고ㅋ (책은 4권인데 증정품이 3개) <진심의 탐닉>을 들고 김제동 편을 먼저 펴서 읽었다. 김혜리 기자는 말만 많이 들었지 직접 그녀의 인터뷰글을 보는 건 처음인데

음... 에에... 김제동에 대한 방송이나 기사는 눈에 띄면 거의 다 보는 편이기 때문에 아는 이야기가 많아서 그런지, 좀 밋밋했다. 내가 몹시 감동받았던 이야기가 너무 확 줄여져있어 어쩐지 마음이 상하기도 했고. 김제동이 얘기를 길게 하지 않은 건지 김혜리가 정리하면서 줄인 건지 모르겠지만 암튼 그녀 인터뷰에 대한 첫 인상은 그렇게 좋지 않았던 셈.

분량을 조절하긴 해도 그렇다고 내용을 윤색하는 게 아니라 "대화의 부피를 줄이기 위해 물기를 빼는" 거라는 말이 아주 그럴 듯하게 들렸는데, 잡지에 실렸던 인터뷰라 제한된 지면상 불가피한 일이겠지만 난 그 물기라는 것도 좋아한다. 그런 작은 거 하나에 훅 갈 때도 있고.ㅎ 구술 대화를 활자로 옮기면서 "어.. 어.. 그러니까" 뭐 이런 거, 열 받아서 내뱉는 씨발 존나 이런 욕지거리, 중간중간 얕은 한숨, 대답하기까지 걸리는 시간같은 미묘한 것들까지 표현해주는 인터뷰가 좋다. 말하지 않는 시간도 인터뷰 시간이고 그것 역시 인터뷰의 일부니까. 그래서 그녀의 손을 거친 정갈함이 나와는 별로 맞지 않았다. 좀 중구난방이라도 사실감이 그대로 느껴지는 게 좋은데.

단행본으로 다시 정리하면서, 애초에는 다소 거칠었을 인터뷰 질감을 조금 살려줬어도 좋지 않았을까? 고현정의 말마따나 "마구잡이 단어 나열이 정돈되면서 반듯반듯해졌고, 마치 내가 생각이 깊은 인간인 것 같은 착각이 들었고, 김혜리 기자와의 인터뷰는 그렇게 자신을 발견하게 해주는 신비한 힘이 있"어서 인터뷰이의 입장에선 좋겠지만, 역시 그런 건 내 취향과는 거리가 멀다. 자칫 미화시키는 느낌이 들어 진실을 의심하게 되곤 하니까. 보기엔 좋고 예쁘지만, 보기 좋은 떡이 맛도 좋다는 말같은 것 그닥 탐탁치않아 하는 나같은 사람은 마구잡이 단어 나열, 이런 게 더 좋다. 뭐 굳이 예쁜 걸 흐트리자는 게 아니라, 예쁘면 예쁜 그대로 예쁘지 못하면 또 예쁘지 못한 그대로의 모습이 좋다는 거...  

어쨌든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방식은 아니지만 그녀의 인터뷰는 무척 아름답다. 그녀는 참 잔잔하게 흐르는 맑은 냇물처럼 사람을 바라본다. 아주 조심스럽고도 편안하게. 그녀와 인터뷰를 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알 것도 같다. 나를 예쁘게 바라봐주는 진심어린 눈빛에 마음을 가만가만 풀어놓게 되는 기분이랄까. 질문도 마음을 울리는 것들이 있었지만, 평이한 질문에도 마음에 울림을 주는 답을 하는 것 또한 인터뷰이의 힘이 아니라 그녀라는 인터뷰어의 힘인지도 모르겠다. 인터뷰 앞뒤로 삽입된 그녀의 글도 참 좋다. (이런 날씨에 이런 비유라니 덥긴 하지만) 벨벳처럼 촉감이 보드랍고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문장들. 문학이다.  

암튼 한꺼번에 다 읽어버리긴 아까워서 몇 개 골라 읽었는데, 대체로 다 가슴 촉촉한 기분으로 잘 봤지만 무한도전 김태호PD가 압권이었다. 동아일보 입사시험 최종까지 합격했는데 포기한 이유. 

인턴 합격자 12명에 들었다고 출근하라는 연락이 왔는데 어째 남의 옷 입은 느낌만 들고 한숨만 나오는 거예요. "나 글 쓰는 건 싫은데..." 싶고. 정장을 입고 오라는 지시도 마음에 걸렸어요. 결국 "내일 못 갈 거 같습니다"라고 전화했더니 "왜요?" 묻더라고요. "마음이... 안 내키네요" 라고 대답했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렇게 귀여운 말줄임표 ㅋㅋㅋㅋㅋ  
(아 이건 정말 말줄임표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이 하늘땅 차이인데. 김혜리가 김태호의 성격을 좀 더 잘 표현하기 위해 넣은 것인지 김태호가 실제로 말을 저렇게 소심스럽게 한 건지 궁금하다.ㅎ)

제일기획은 최종까지 갔는데 재학증명서를 빠뜨렸어요. 인사부 과장님이 다음날 퀵서비스로 보내면 받아주겠다고 했는데, 어린 생각에 설마 재학증명서 없다고 떨어뜨릴까 싶어 안 보냈더니 떨어졌죠. 그냥 정이면 될 줄 알았어요. 서로 눈을 바라보며 얘기했으니까...  

미치겠다ㅋㅋㅋㅋㅋ 사랑해요 태호피디ㅠ

저희가 제일 경계하는 것이 '자뻑'이에요. 우리가 높은 데에 있고 베푸는 방식으로 나누는 것이죠. <느낌표!>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러브하우스'를 하면서 일종의 거래가 아닐까 고민했어요. 어려운 사람의 신분을 노출하고 슬픔을 다시 끄집어내 상처를 보여준 다음 그 '대가'로 집을 지어주고 도움을 주는 게 아닌가 하는 불편함이었죠. 가출 청소년을 찾아다닐 때, 딸을 찾아나선 아버지가 속옷 바람이어야 하는데 제대로 옷을 입고 나와서 헐레벌떡한 느낌이 없다고 선배한테 야단맞은 일이 있어요. 전 표정만으로 다 보여줬다고 생각했고요. '러브하우스'도 방송국에서 간다고 말씀드리면 제일 좋은 옷을 입고 화장도 하고 계신데 리얼함이 떨어진다고 지우라고 시키는 일이 있었어요.  

그런 게 너무 싫어서 공익은 다시 안 한다고 결심했는데 <무한도전>을 하다 보니 어떻게든 나누고 싶었어요. 3, 4년 전 연말 방영분에서 몰래 어려운 분들의 집 앞에 선물을 놓고 왔죠. 그 분들을 노출하지 않았지만 다음날 아침 집 앞의 용달차를 보았을 때 가족의 아버지가 모든 걸 함축하는 리액션을 하셨어요. "오, 하나님!" 하는 한마디였죠. 치킨집과 삼겹살집을 찾아간 '박명수의 기습공격'은 '신동엽의 신장개업'을 저희 방식으로 새롭게 접근한 거에요. 거기서 음식점 주인, 먹으러 간 운동선수들, 돈을 쓰는 박명수, 누구 하나 밑지는 장사가 아니거든요. 초대된 선수들은 잘 먹어서 좋고 장사하시는 분들은 불로소득이 아니니까 떳떳하게 돈을 받을 수 있고 저희는 기쁨을 나눠서 좋고 세 가지가 결부돼 긍정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공익도 거품은 빼고 진실을 돋보기처럼 확장해서 보여주는 쪽이 맞지 않나 싶어요. 

아. 완전. 공감. 사람 아픈 데 찔러서 눈물 빼고 그거 팔아서 옛다 집 한 채, 옛다 가게 하나... 참 야만스럽다고 생각했다. 약자에겐 사람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병원24시인가, 치료비가 없어서 수술 못하는 환자들의 처지를 보여주고 모금하는 프로그램도 나는 좀 불편해서 잘 못 본다.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미안한.. 그런 기분도 있고, 당신은 도움을 받는 입장이니까 배려같은 건 기대하지 말라는 듯한, 너무 쉽게 가는 방식이 거북한 데서 오는 불편함. 에둘러 가더라도 다르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이 있을 텐데.    

김태호는 그런 고민을 하는 사람이었다. 눈물을 사고 싶지는 않은 사람. 섣불리 상처를 위로하려 하기보다는 그냥 한 번이라도 더 웃는 것으로 덜 아프게 해주고 싶은 사람. 웃음은 얼마든지 거래하고 싶은 사람.  

처음엔 <진심의 탐닉>이라는 제목이 다소 거창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탐닉이랄 거 까지야 싶었던 건데, 그러나 생각해보면 대체 이런 유명인들의 진심이라는 것을 어디까지 내어놓아야 할 것인가, 그 답도 쉬운 게 아니긴 하다(아예, 내놓을 필요가 있을까 싶을 때도 있고). 그들이 생각하는 진심의 정도와 내가 생각하는 진심의 정도가 다를 때, 내가 만족스럽지 않다는 이유로 그들의 진정성이 부족하다며 실망할 수야 없는 노릇이니까. 에... 바보같은 말을 하고 있구나. 사람의 진심이라는 것이 어디 누가 감히 판단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상대방에게 어떤 감흥을 주고 말고를 떠나서 그들에게서 나온 그 모든 것은 진심일 것이다. 조금쯤 꾸며서 하는 듯한 얘기도, 웬만해선 보여주려 하지 않는 모습도, 그 역시 또 다른 형태의 진심인 거겠지. 그들이 드러내는만큼 받아들이고 내 마음이 반응하는만큼 공감한다면 그것으로 족하지 뭐 더 달리 있을 게 없는 거고. 그저, "나 이 사람 팬"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들의 그 맨모습 슬쩍 엿볼 수 있는 것으로 인터뷰를 읽는 즐거움은 충분하다 싶다. 게다가 이렇게 깊고 따뜻한 눈에 비친 그들이라면. 

천천히 하나 하나 골라가며 느릿하게 읽어가야지.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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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06-22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인용하신 태호피디 인터뷰 부분 때문에 저도 이 책을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건조기후 2010-06-22 23:56   좋아요 0 | URL
오, 미모의 다락방님. 헤헤.
김태호 편 정말 좋았어요. 아 정말 입사서류 안 내놓고 정이면 될 줄 알았다니.
다른 멋진 얘기도 많은데 저 말에 완전 꽂혀가지고.ㅋㅋ

오늘은 정우성 편을 읽었는데..
그 배우는 그냥 글자로도 사람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더군요. 어휴.

마노아 2010-06-22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 나면 또 이렇게 써주세요. 감동이에요.^^

건조기후 2010-06-22 23:59   좋아요 0 | URL
인터뷰가 다 좋아요. 남은 것도 야금야금 조금씩 삼켜가며 볼라구요. ^^

글샘 2010-06-22 1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턱,에 바늘자국 안 내게 돼서 다행이에요. ^^ 재밌네요. 천천히 하나하나 골라가며 읽고 싶에 만드는 책... 참 드물죠. 좋은 책을 알게 되었습니다. 고마워요~~

건조기후 2010-06-23 00:07   좋아요 0 | URL
인터뷰 한 꼭지 읽고 나서 감도는 여운이 더 좋은 거 같아요. 그래서 바로바로 다른 사람 인터뷰로 잘 안 넘어가게 돼요.ㅎ

무해한모리군 2010-06-22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기대가 되요.

건조기후 2010-06-23 00:11   좋아요 0 | URL
저도 다음에 골라 읽을 인터뷰에는 어떤 이야기가 펼쳐져 있을 지 기대하는 마음으로 보고 있어요.ㅎㅎㅎ

2010-06-26 09: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26 13: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26 13: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27 11:0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