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상 3인조, 수영장 가다>

 

 

혹시 로바다야끼에서 남자 몇 명이 ‘궁상맞게’ 앉아서 지나가는 여자나 여자들만 앉아있는 테이블을 힐끔거리는 걸 보신 적이 있다면 그 중에 한 명이 저였을 지도 모릅니다.

지하 고급카페에서 계단이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아서 침 흘리고 쳐다보는, ‘궁상맞은’ 남자들을 보신 적이 있다면 그 중에 한 명이 저였을 지도 모릅니다.

수영장에서 온 몸에 오일을 처바르고, 수영은 절대 안 하고, 선글라스로 눈의 궤적을 교묘히 숨긴 채 비키니 글래머를 감상하는 남자들을 보신 적이 있다면 그 중에 한 명이 저였을지도 모릅니다.

 

그 때 난 궁상 패밀리의 일원이었다.

 

1990년 초반.

당시에 유명한 수영장은 워커힐호텔, 타워호텔, 서울교육문화회관, 한강 수영장이었다.

(지금은 어딘가요?)

왜 유명한 지는 아마도 아실 것이다.

그 곳은 타고난 몸매나 노력 많이 한 몸매가 아니고서는 절대 주목 받을 수 없는 곳이다.

그렇다면 나는?

노 코멘트다.

 

하여간에 그 곳은 최신 유행의 수영복은 다 출동한다.

그 당시 형광 비키니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노란색, 오렌지색, 핑크색

전통적인 강세인 화이트와 블랙은 디자인을 다양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어진 표범무늬(호피)는 남자들을 아찔하게 만들곤 했다.

랩 스커트인가? 수영복 바깥으로 힙과 다리를 감싸는 천이 유행하기 시작한 것도 그 때부터다.

여자 수영복의 단가가 올라가기 시작한 것도 그 때부터다. 투 피스에서 쓰리 피스로.

(사 줘 봐서 잘 안다.)

 

남자들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일제(스피도나 아레나) 최신형 초삼각 팬티나 박서형.

대체로 근육질이나 단신은 초삼각을 선호하고, 호리호리한 몸매나 장신은 박서형을 많이 입었다.

남자들은 형편에 따라 순금목걸이, 18K, 은목걸이, 메달(십자가)과 줄로 된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남자들의 유일한 포인트가 목걸이다. (당시엔 귀걸이를 하는 남자들이 전무했다.)

구리빛이라는 의미의 Coppertone(?)과 하와이안 트로픽이라고 적혀 있는 선탠오일들과, 얼굴과 어깨에 마구 처바르는 SPF 30 전후의 선블록.

(아- 얼마나 오랜만에 입에서 튀어나오는 그리운 단어들인가? 음- 그립다.)

 

늘씬한 스타일의 여성들과 글래머 스타일의 여성들은 남녀 모두의 관심의 대상이다.

남자들도 키 크고, 잘 생기고, 체격마저 좋은 놈들을 질투하고 있었다.

수영장에 갔는데도 수영은 말 그대로 너무 더워서, 심심해서, 몸 풀려고 하는 거다.

오로지 목적은 선탠과 눈요기.

 

이번 여름을 위해 인공선탠을 미리 하고 온 여자들.

연초부터 부지런히 헬스클럽을 드나들면서 몸 만들어 온 남자들.

나름대로 최선의 선택이라고 자부하며, 올 여름 반드시 주목을 받아야만 직성이 풀리겠다는 의지가 역력히 나타나는 스타일의 수영복을 걸치고 초여름 수영장 개장하자 마자 그 주 주말에 나타난다.

빠르면 6월 초, 중순부터 호텔 수영장은 개장한다. (요즘은 잘 모르겠다.)

7월 하순부터 8월 초의 피크타임에는 이미 그 동안의 작업을 통해 조달된 파트너와 근사하게 그을려진 구리빛 피부와 책과 과일이 선탠 베드나 돗자리 위에 있어야만 했다.

 

여자들은 어떻게 하는지 잘 모르지만 남자들 중엔 수영장 오기 전에 집에서 푸쉬업을 한 100번 정도 하고 오거나 아령을 한 200번 정도 하고 와서 자신의 가빠(갑바?)와 알통을 자랑한다.

(여자들은 똥배 나올까봐 굶고 와서 수영장 와서 배를 채우는 지도 모르겠다. 오후쯤 되면 긴장이 풀려서인지, 포기해서인지는 잘 모르지만 하여튼 엄청들 먹는다.)

 

우리 궁상 패밀리에게 유일하게 쥐구멍에도 볕 든 날이 있었다.

Pool 건너편에 현재 스코어 최강의 글래머 비키니가 등장했다.

(우리 궁상들은 그 녀를 ‘젖소’라고 이미 부르고 있었다. 뭐가 그리 재밌는지 한 마디씩 품평회를 해댄다.)

 

다른 글래머 비키니들의 견제와 질투 속에서 ‘젖소’의 일거수 일투족에 남자들은 관심이 집중되곤 했다.

 

‘젖소’와 그 떨거지들이 물(!)이 어떤가 보러 다니는지 풀Pool을 한 바퀴 빙 둘러보던 중이었다.

아직, 미처 그 녀를 보지 못 했던 사람들이 그들을 보고 한 마디씩 평가하는 소리가 웅성웅성 들리던 바로 그때.

 

“어머, 오빠!”

우리 궁상들 순간 엄청 당황했다. (우리도 어머머.)

우릴 보고 그 ‘젖소’와 떨거지들이 아는 척을 하는 게 아닌가?

일순간 우리에게 수영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관심 집중.

그야말로 일약 스타가 되는 순간.

피부로 확 느껴지는 다른 놈들의 견제와 질투와 호기심.

(정말로 순간 정적이 흐른다. 진짜다.)

 

알고 보니 우리 서클(동아리) 후배 여자애였다.

우리가 미처 알아보지 못 하고 ‘젖소’와 그 떨거지들이라는 둥, 농구공이라는 둥 그랬던 거였다.

언제 우리가 옷 입은 거만 봤지, 벗은 모습을 아니 비키니 입은 모습을 본 적이 있어야지.

평소엔 관심도 없던 후배 여자애들 덕분에 우리 궁상들은 수영장에서 나올 때까지 보무도 당당하게 설치고 다녔다.

“우리가 진짜 잘 나가는 줄 알 거야.”

 

멋있게 구워져서 하얀 힙에 대각선으로 ‘라인’이 제대로 나올 때까지 최소한 10여 번을 수영장에 갔다.

피부암이고 뭐고 간에 그게 ‘멋’인 줄 알았다. (사실은… 아직도 그렇게 생각한다.)

 

멋있는 선탠을 위한 준비물

 

- ‘카퍼톤’이나 ‘하와이안 트로픽’ 같은 선탠오일

- 선블록과 선스프레이

- 모자

- 금목걸이

- 수건

- 책

- 시원한 생수와 음료수

 

 

멋있는 선탠을 위한 요령

 

1.       아침에 깨끗하게 샤워한다. 그리고 푸시업도 기본 100번. 당연히 아침밥 굶는다.

2.       일찍 개장하자 마자 수영장에 입장한다. (거의 9시 반경)

3.       선 블록(SPF 30 이상)은 얼굴과 어깨에 처바른다.

4.       나머지 부위에 선탠 오일을 듬뿍, 아끼지 말고 처바른다.

5.       반드시 모자를 쓴다.

6.       몸을 자주 뒤집어 준다.

7.       겨드랑이와 옆구리, 허벅지 부위는 잘 안 타므로 특별히 신경 쓴다. 이상한 자세가 나와도 뻔뻔스럽게 버틴다. 아니면 모자로 얼굴을 가려 버린다.

8.       탈수 예방을 위해 물을 자주 섭취한다.

9.       화끈거리는 부위(어깨, 가슴이나 종아리, 팔)에 선 스프레이를 수시로, 자주 뿌려 준다.

10.   얼굴에 한 번 더 선 블록을 처바른다.

11.   첫날인 경우 11시 반경에 집으로 돌아와서 찬물로 몸을 식혀 준다. (초기엔 정오의 햇빛은 반드시 피한다. 초기엔 절대로 돈 아깝다고 2시간 이상 하지 마라. 반드시 어깨에 껍질 벗겨진다. 그러면 스케줄에 차질 생긴다. 진도 못 나간다.)

12.   하루 정도 쉬면서 이튿날 똑 같은 방법으로 2-3회 수영장 간다. 어느 정도 피부가 적응이 됐다고 판단이 들면 시간을 조금씩 늘려 간다. 가족들이 너 흑인이냐, 라고 구박할 때까지 해야 ‘진정한 선탠’이라고 할 수 있다.

13.   잠이 많아서 오후에 가면 안 되냐구? (오후에 가면 자리가 없다. 선탠 베드도 없고, 돗자리 누일 장소는 화장실 바로 앞이나 쓰레기통 앞에나 남아 있다. 모자라는 잠은 수영장에서 책 보다가 퍼 자라.)

14.   개장하자 마자 부지런히 다녀 피크타임 때는 반드시 위에서 얘기한 대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를 기원한다.

 

 

‘진정한 선탠인’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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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시보 2004-05-27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정말 재밌군요. 전 수영장은 별로 안갔습니다. 어릴때 배우러 다니느라 잠깐 들락거린것 이외에 다 커서는 거의 안갔습니다. 특별한 이유는 없지만 별로 땡기지 않았더랬습니다. 그런데 님의 글을 읽으니 안되는 몸매 이끌고라도 한번쯤은 가 볼껄 하는 생각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