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대학교 1학년 때 <상실의 시대>로 무라카미 하루키를 알게 되었다.

그의 냉소적이고 허무한 분위기, 개인주의 같은 것들에 빠져 들면서 그 당시 우후죽순으로 나오게 된 단편집들도 열심히 보게 되었다.
몇 개의 출판사에서 <무라카미 하루키 단편걸작선>,<화요일의 여자들>,<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집> 등의 이름으로 나왔는데, 대표적인 몇 편은 중복이 되기도 했다. (그 땐 저작권이라는 것이 생소할
때였다.)

장편으로 그 다음에 보게 된 책이 <댄스,댄스,댄스>였다.
그 당시 나이트클럽 가는 것을 좋아해서 순전히 제목 때문에 고르게 되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아쉽기도 하다.

지금 기억으로는 <댄스,댄스,댄스>라는 책에는 '댄스'는 안 나오고, 양 사나이라는 이상한 존재가 나타나 비현실적인 이야기들을 하며 독자들로 하여금 뭔가 생각을 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 당시의 지적수준이나 참을성으로는 도저히 끝까지 읽을 수가 없는 책이었다. 또, 지금처럼 그나마 책값을 여유있게 지불할 수 있는 수준도 아니었다.

그 이후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계를 떠나 이번엔 무라카미 류라는 작가를 알게 되었다. 일본에서 작가로 성공하려면 성이 '무라카미'여야 되나 보다, 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한 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를 시작으로 <코인로커 베이비스>,<영화소설집(제목이 맞나?)>,<초전도 나이트클럽>, <고흐가 왜 귀를 잘랐는지 아는가> 등등등...
초기엔 색다른 소재와 호기심으로, 그리고 그의 자유분방함에 매력을 느껴서 보다가 어떤 시기부터 서서히 질리기 시작했다.

어느날 알라딘 명예의 전당에 올라있는 어떤 분이 최고의 책 다섯 가지 중에 하나가 바로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라고 했다.
또 양 사나이가 나올 것 같은 제목이었다.
몇 달 있다가 <해변의 카프카>가 나오길래 속는 셈 치고 <세계의 끝...>도 같이 샀다. <해변의 카프카>는 다 읽었는데, <세계의 끝...>는 결국 1권도 다 읽지 못 했다.

억울했다.
왜 남들은 최고의 책 중 하나인 책이 나에겐 이다지도 느낌이 오지 않는가?
아마도 개인적인 취향이 실용서적 위주의 독서습관이 있어 직설적인 표현엔 익숙하지만, 은유와 비유는 생소하기 때문일 지도 모르겠다, 는 생각이 들었다.

포기할 순 없었다.
<스푸트니크의 연인들>에 도전을 했다. 조금은 견딜 만 했다.
그 다음에 보게 된 책이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이다.
이 책은 재미있었다. 아마도 <상실의 시대> 이후로 처음으로 하루키의 장편소설이 재미있었다.

그 이후에 하루키의 세계에 푹 빠져들게 만든것이 에세이였다.
그 다음이 여행기였다.
먼저 에세이 중에선 <슬픈 외국어>를 보게 되었다.
이 책을 보면서 가슴 설레이면서, 혼자 싱긋이 웃으면서, 새벽 2시에 혼자만의 자유로움을 느끼면서, 오랫만에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즐겁게 살고 싶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도 편안하게,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여행기 중에선 <하루키의 여행법>과 <먼 북소리>를 연달아 봤는데, 개인적으로 이탈리아와 관련된 이야기를 좋아해서 <먼 북소리>를 더 흥미있게 봤다.

이제 슬슬 하루키의 '전작주의자'가 되어 가는 것 같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아 <태엽 감는 새>도 보지 못 했지만, 한 7년 전에 사촌동생에게 빌려줘서 받지 못한 <상실의 시대>를 다시 샀다. 그리고 절판된 책 1,2권과 어쩐지 내용이 중복되어 있을 것만 같은 책 몇 권 빼고는 다 소장하고 있는 것 같다.

작가가 장편소설에서 보여주는 초현실주의적인 흐름을 제대로 따라 가지는 못 하지만 일상적인 생활과 생각을 보여 주는 소설(<상실의 시대>,<바람의 노래를 들어라>,<1973년의 핀볼> 같은.)과 에세이, 여행기는 나로 하여금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작가의 세계를 계속해서 알고 싶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지금 내 책상 위에는 <양을 쫓는 모험>과 <거센비 내리고 뜨거운해 뜨고>, 레이먼드 챈들러(하루키의 책에 자주 등장하는 작가이다.)의 <빅슬립>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또 다시 어딘가에서 '양 사나이'가 나타나 나를 괴롭힐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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