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적인 삶 그르니에 선집 4
장 그르니에 지음, 김용기 옮김 / 민음사 / 2001년 8월
구판절판


여행이란, 리트레 사전에 따르면 <어떤 곳에서 멀리 떨어진 다른 곳에 이르기 위하여 옮겨가는 과정>이다. 여기서 <위하여>라는 말을 강조해야 한다. 여행은 의도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도달해야 할 목표가 주된 것이며 그 수단은 부차적이다. 수단은 그것이 목적지에 닿게 해줄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의 이동이 바로 여행이니만큼 중요한 것은 목적지이다.
(여행 中)-13쪽

여행의 기원과 궁극적인 목적은 여행을 무효화하는 것이다. 여행의 완성은 결과적으로 그것의 소멸인 셈이다. 이는 마치 나무를 태우는 불이 결국은 스스로를 소진시키는 것과 같으며, 직관이 떠오르고 나면 논증적 추론은 그 존재 이유를 상실하게 되는 것과 같다. (여행 中)-15쪽

한편 <여행>에는 옮겨감으로 인해 치르게 되는 희생에 대한 저항이 따른다. 이를테면 <이곳을 위하여>라는 관념은 끊임없이 <다른 곳을 위하여>라는 관념보다 우위에 선다. 또한 머무르려는 욕망은 이동하려는 기질을 이겨내며, 영원에 대한향수는 순간적인 것의 유혹을 물리친다. 시베리아 횡단 여행자가 원양 항해자도 결국은 정착한다. 그는 더 이상 여행하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여행>의 패러독스이다. 즉 <존재>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의도된 <변화>, <존재>를 상정했을 때에만 실재하는 그 <변화>가 이제는 <존재> 그 자체로 탈바꿈하기에 이른다. 상업적인 목적으로 여행하는 자는 자신의 습관에 집착한다. 그는 이전의 그 호텔 그 방에 다시 머무르려 하고 그 음식점의 그 테이블에서 식사하려 한다. 이렇게 해서 방랑자는, 자기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정착민이 된다. 말하자면 여행하지 않기 위해 여행하는 것이다.
(여행 中)-16쪽

아이들이 타는 회전 목마는 여행으로서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순환적인 여행이다. 거기에는 시작도 끝도 없기 때문이다. 그때 여행자는 움직이지 않는 축을 중심으로 회전한다. 빙빙 돈다는 것 말고는 어떠한 목적도 없다. 영화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유추해서 생각하면, 여행기를 읽고 있는 사람도 돌아가고 있는 사물과 사람들의 한복판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거기에도 어떤 방향, 어떤 목적이 여전히 존재한다. (여행 中)-27쪽

산책할 수 있다는 것은 산책할 여가를 가진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공백을 창조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산책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일상사 가운데 어떤 빈틈을, 나로선 도저히 이름 붙일 수 없는 우리의 순수한 사랑 같은 것에 도달할 수 있게 해줄 그 빈틈을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결국 산책이란 우리가 찾을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발견하게 해주는 수단이 아닐까?
(산책 中)-53쪽

내가 담배를 피움으로써 세계가 내 속으로 흡입되며 그럴 때 나는 세상을 단지 보고 듣고 만지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소유하게 된다. 나를 둘러싸고 있으나 결코 내 것이 아닌 이 견고한 세계를 담배를 태움으로써 내 것으로 전환시킨다. 왜냐하면 내가 그 견고한 세계를 연기로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
<무언가를 소유한다는 것은 곧 그 사물을 통해 세상을 소유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담배 中)-79쪽

두 사람이 서로 지키기로 약속한 비밀은 한편으로 큰 부담이긴 하지만 동시에 커다란 즐거움이 되기도 한다. 세상 어느 누구도 당신들 둘의 관계를 모르고 - 물론 그게 당신들의 착각일 수도 있지만 - 많은 사람들 속에 섞여 있으면서도 단둘이 있다고 느끼는 것, 그것은 어떤 은근하고도 지속적인 만족감이다. 그렇지만 남몰래 하는 사랑의 은밀함은 그리 오래도록 지켜지지 못한다.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두 사람의 관계가 드러나고야 말거나 혹은 속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서로를 애써 피하려 하는 것도 기대와는 반대의 효과를 내기도 하는 것이다.(비밀 中)-88쪽

한갓 인간들 사이에서 비밀은 결코 지켜지지 못한다. 그것을 끝까지 지키려고 아무리 애써봐야 결국 드러나게 마련이다.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애시당초 사람의 비밀이란 밝혀지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 같다. 은근슬쩍 털어놓는 것이 오히려 마음을 위로해 주기도 한다. 그래서 제삼자가 부추기지 않아도 스스로 토로하는 것이다. 당신이 어떤 비밀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아름다운 일이지만 당신에게 비밀이 있다는 사실을 남이 알아주는 것은 더 소담스런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 그게 비밀인지조차 모르는 바에야 그 비밀의 내용이 잘 지켜진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리고 자기에게 비밀이 하나 있다고 말하는 것은, 흔히 그러듯이, 그 내용을 드러내기로 마음먹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지만 그 비밀의 베일은, 너만 알고 있으라는 식의 공모의 분위기가 마련되어야만 벗겨진다. 그래야만 그 비밀이 저잣거리에 파다하게 퍼지는 것을 막을 수 있따. 그러나 어쩌랴, 결국은 그렇게 퍼지고야 만다. 죄의 고백은 원칙적으로 은밀한 가운데서 이루어지지만 물론 공개적일 때도 있다. 이 경우, 처음에는 남몰래 애써 감추어왔지만 더 이상 숨기고 싶지 않은 죄과가 만인 앞에 밝혀졌을 때, 비로소 그 죄인은 용서받는 것이다.
(비밀 中)-93-94쪽

긴장은 오전의 속성이다. 사람들은 아침 나절에 일어나서 하루 일과를 준비한다. 그에 비해 저녁은 이완의 시간, 휴식을 준비하는 시간이다. 그러나 종종 이 저녁 시간도 아침의 소리들과는 또 다른 소리들로 채워진다. 그런데 상대적인 침묵마저도 제대로 견뎌내는 사람이 매우 드물다. 도시에 살면서 늘상 시골로 가서 살고 싶다고 말하지만 막상 시골 집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오락거리를 찾는다. 물론 시골 사람들도 오락거리를 찾기는 마찬가지지만 도시인들은 훨씬 더 복잡한 쾌락을 요구하는 것이다. (침묵 中)-112쪽

혼자서 하는 묵독은 오늘날 많이 하는 독서 형태로서 대화의 도구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도피의 수단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둘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처럼 꼭 그렇게 대립적이지는 않다. 가령 어머니가 자녀에게 <넌 맨날 책 속에 파묻혀 있구나!>라고 말할 때 그건 자녀의 건강을 염려해서 나무라는 것이라기보다는 자녀가 지금 대화를 나누고 있는 그 보이지 않는 자에 대한 질투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독서 中)-126쪽

데카르트가 독서를 대화라고 말한 것에 대해 프루스트는 잘못이라고 지적한다. 그에게 독서는 대화의 반대이다. 즉 무엇을 읽는다는 것은 <혼자 남은 상태에서, 다시 말해 고독 속에서만 발휘되고 대화가 시작되면 이내 사라져버리는 그 지적 능력을 계속해서 누리는 상태에서 다른 사유와 소통하는 것>이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 깨지기 쉬운 어떤 고취된 상태, 우리를 그 상태로 두는 것이 바로 독서이다. 그래서 독서는 우리에게 자극제가 된다. 그것은 우리를 성가신 사회적 관계로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혼자 있는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며, 마치 베르길리우스를 읽은 단테가 그러하였듯이 우리는 독서로 인해 새롭게 자극받는다. 그래서 저자의 지혜가 끝나는 곳에서 우리의 깨달음이 시작되는 것이다.(독서 中)-143쪽

재능이 없다면 쓰지를 말아야 할 것이며 있다면 자신의 머리에 듣는 생각과 자신의 가슴에 고이는 것을 그냥 쓰면 되는 것이다. (독서 中)-146쪽

고립은 그것이 강요된 것이라는 점에서 고독과 다르긴 하지만 때로 고독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오랫동안 갇혀 있다가 풀려난 자는 다시 얻은 자유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게 된다. 사람마다 다르긴 하겠지만 묶인 채로 일정 기간이 경과하면서 그는 사슬에 너무나 길들여진 나머지 더 이상 주도적으로 행동하지 못하게 되고 결국 자신이 돌이킬 수 없이 혼자라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존재 조건에 대해서 거기에 덧입혀진 모든 것이 발가벗겨지기 전까지는 의식하지 못한다. 모든 것을 잃고 난 후에야 우리는 결정적인 탈출이란 없으며 인간의 고독은 어쩔 수 없는 것임을 이해하게 된다. 그것은 낭만적인 감정이 아니라 보편적인 인간의 감정인 것이다.
(고독 中)-173-174쪽

냄새와 향수 사이에는 경계가 있다. 냄새는 의도적이지 않지만 향수는 그렇다. 냄새는 적응하기와 방향 짚기에 도움이 되는 어떤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향수는 그와는 다른 종류의, 훨씬 의도적이고 개인적인 매력을 낳는다. 그렇지만 자연이라 부르는 것과 예술이라는 것 사이에 뚜렷한 구분이 있는 것은 아니다.
(향수 中)-187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