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한 부류의 지식인들은 ‘잠수함의 토끼’ 혹은 ‘탄광 속의 카나리아’로 비유되곤 한다. 잠수함이나 탄광의 산소가 부족하면 토끼나 카나리아가 먼저 죽는다. 죽은 짐승들을 본 광부들은 갱도에서 나가고, 잠수함의 수병들은 신선한 공기를 얻기 위해 수면 위로 떠오를 것이다. 그것이 지식인의 사회적 기능이라고 우리는 배웠다. -26쪽
실명비판으로 인해 비판의 주체뿐 아니라 객체 또한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그럴 터다. ‘실명’을 거론하며 비판하니 말이다. 실명비판을 당한 사람은 순식간에 ‘객체’가 된다. 더는 집단의 안전한 치마폭에 숨어 있을 수가 없다. 이 경우 대응 방법은 크게 두 가지일 것이다. 스스로 ‘주체’가 되어 강준만을 비판하거나, 어떤 정치적인 수단을 사용해 자신을 비판한 이에게 불이익을 안겨주는 것이다. -37쪽
실명비판은 어쨌든 비판하는 자와 비판받는 자, 즉 ‘주체’와 ‘객체’를 개인 단위에서 명료하게 드러냈다. 주체와 객체로 이루어진,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근대 세계의 문이 열린 것이다. -38쪽
진중권은 스스로 말하듯이 디오게네스, 광대, 거리의 철학자가 되는 데 성공했다. 상대방을 조롱할 줄 아는 지식인이었고, 또 조롱할 수 있는 상대가 결코 부족하지 않았다. 조갑제, 이인화, 이문열 등 극우 지식인들을 실컷 약 올리는 책으로 스타가 되었지만 진중권은 말의 장터를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인터넷이라는 언어의 시장바닥에 기꺼이 좌판을 벌이고 앉아, 문자 그대로 ‘지나가다’ 같은 아이디를 쓰는 익명의 네티즌들과 선플 악플 무플을 서슴없이 주고받았다. 물론 인터넷에서 열심히 활동한 지식인이 진중권뿐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가상 공간에서 통용되는 게임의 법칙을 완벽하게 파악할 뿐 아니라 본인이 응용하고 창조하는 경지까지 나아간 사람은 오직 진중권뿐이었다.-74-75쪽
조갑제의 입을 빌려 박정희가 ‘내 무덤에 침을 뱉’으라고 했더니, 진중권이라는 디오게네스가 정말 퉤퉤퉤 침을 뱉었다. 그리고 앙시앙 레짐이 무너졌다. 당시에는 정말, 그렇게 보였다. -75쪽
‘디워’ 논란을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이러하다. 어떤 이론가가 주창한 방안을 진작부터 실행에 옮기고 있던 한 창작자가 있다. 그런데 이론가는 창작자의 결과물을 보고 진저리를 내며 ‘데우스 엑스 마키나’ 같은 소리를 외치기 시작한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지만, 마법 소녀의 주문 같기도 하고 뭔가 묘한 매력이 있다고 느낀 대중들은 이론가에게 호감을 갖기 시작한다. 마침내 이론가는 기존 독자층을 벗어나 대한민국 최초로 자신을 ‘횽’이라고 부르는 팬 집단을 거느리게 된다. -83-84쪽
한국에 돌아온 실패한 유학생 진중권이 개척한 길은 그야말로 전인미답이었다. 그는 인터넷이라는 광장에서 질펀하게 뛰어노는 지식인상을 만들어냈다. 자신이 동경하는 디오게네스에 가장 잘 부합하는 지식인을 단 한 사람 꼽자면, 한국이 아니라 전 세계를 통틀어도 진중권은 따라올 자가 없다. 자동차 면허증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항공기 면허증은 있고,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많은 글을 쓰지만 가장 선호하는 작업실은 대한민국 어디서나 반경 2킬로미터 안에 하나씩은 있는 PC방이며, 음악에는 조예가 없다고 말하면서도 울적할 때에는 샹숑을 듣는 지식인의 모습을 진중권은 만들어냈다. 그것을 우리는, 진중권이 선호하는 표현대로라면, ‘존재 미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93쪽
그는 한창 기세등등했던 한국의 극우들을 향해 단기필마로 달려 나갔던 돈키호테였고, 그 풍차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를 다른 어떤 지식인도 해내지 못했던 방식으로 보여주는 데 성공했다. 덕분에 ‘중권이 횽’이 되었고, 그의 정치적 판단력에 대중들이 의문을 표할 무렵에는 우연히 새끼 고양이를 주워 ‘루비 애비’로 거듭났다. 근대인의 영혼을 갖고 있지만 포스트모던한 매체 환경에 완벽하게 적응한, 거의 유일한 지식인이 바로 진중권인 셈이다. -96쪽
매체 기고자에게 있어 자신의 이름 앞에 붙일 직함을 정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고도 어려운 일이다. 너무 튀어도 안 되지만 지나치게 평범하면 재미가 없다. 특정 분야의 전문가를 함부로 참칭했다가는 큰 코 다칠 수도 있고, 단순히 ‘자유기고가’ 같은 호칭을 쓰면 제대로 아는 것은 없으면서 아무 말이나 떠드는 사람처럼 보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반대로 좋은 직함을 스스로 지어 붙이면 구차한 설명을 할 필요가 없어진다. 자신이 글을 쓸 수 있는 분야, 생산해내는 원고의 수준, 독자의 눈높이까지 한번에 그려내어 보여주는, 일종의 ‘시적 도약’을 이룩해 낸 직함을 찾아낸 경우라면 그렇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에서 그렇게 완벽한 호칭을 찾아낸 글쟁이는 단 한 사람뿐이다. ‘지식소매상’ 유시민. -99쪽
진중권의 독일, 홍세화의 프랑스, 혹은 김어준의 배낭여행에서 보고 들은 ‘사람 사는 게 다 똑같더라구.’처럼 확고한 지위를 갖는 ‘외국’이, 박노자에게는 없다. 왜냐하면 그의 조국은 이미 망했고, 설령 아직 남아 있다고 해도 갓 21세기를 맞은 한국인들에게 삶의 표준으로 제시할 수 없는 구소련이기 때문이다. -134쪽
지승호: 글쓰기의 대상이 분명하신 거군요. 김규항: 그렇죠. 내 글을 읽을 사람이라면 다르다고 생각하는 거죠. 굳이 극우 세력이나 수구 기득권 세력을 욕하는 글을 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자신이 진보적이라 생각하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과 설득력을 갖는 중간게급 인텔리들이나 자유주의자들이 내 비판의 대상이죠. ("가장 왼쪽에서 가장 오른쪽까지", 116쪽)-1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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