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6시 주 3일 가는 영어학원을 갔더랬다. 들어가기전 가판대에서 유일한 석간신문인 문화일보를 샀더랬다. 강의실에 도착, 수업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난 끝내 분을 참지 못하고 수업도중 강사분께는 참으로 죄송스럽지만(개인적으로 조금전 메일을 보내 나의 무례함에 대한 변명(?)을 했다.) 강의실을 뛰쳐나왔다. 지금 이 상황에서 공부를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된다고 생각했다. 지금 이 한 시간을 '땡땡이'침으로써 볼 피해는 적지만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 피해쯤은 감수하겠노라 생각했다. 나의 장래와 연관되는 더 큰 피해라 할지라도 차라리 시민운동으로 직업을 바꾸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그 상황에 영어문장을 붙들고 해석이나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성균관대에서 공부를 하던 친구도 분을 이기지 못해 학교를 벗어났고, 난 그와 합류하여 여의도로 향했다. 나 혼자였다면 아마 시위에 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친구가 '가자'는 말에 그들과 동참할 수 있었다.



버스를 타고 여의도에 도착한 시간이 대략 저녁 7시쯤이다. 이미 전경들이 쫙 깔려있었고, 지하철 공사를 한답시고 여기저기 큰 구멍(?)을 파놓은 까닭에 시위 장소는 그다지 넓지 않았다. 하지만 넓지는 않되 길었다. 우리는 무대라 하기에는 너무나 초라한 트럭 앞쪽으로 이동해 비교적 시위의 중심이 되는 앞부분에 위치했다.



자원봉사자들이 나누어주는 촛불을 들고서 불을 밝히고 트럭 위에서 발언을 하는 목수아저씨, 학생, 음악인 등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에 호응도 하고 노래도 하며 그들과 함께 했다. 아직 학생신분이지만, 대학 4년(마지막 다니지 않은 한 학기를 포함하여)동안 난 운동권도 아니었고, 시위에 참석해본 경험이라곤 ''총장물러나라'고 하며 학교를 점거한 때 그 때가 유일했다. 그리고서 오늘이 두번째다. 사실 첫번째 시위참석에 대해서는 그다지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우리 내부에서도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는 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텔레비젼을 통해 탄핵안이 가결되는 장면을 본 시민들은 누가 오라고 한 것도 아닌데 퇴근시간에 맞춰 속속 여의도로 몰려들었고, 텔리비젼으로 생방송되는 이 장면을 보고 또 몰려들고, 이정열씨, 신기남 의원, 김희선 의원, 명계남씨, 김종환씨, 권해효씨 등이 이에 합류해 공식적으로 주체자가 없는 이 시위에 '정리자'의 개념으로써 참석했다. 오늘의 이 시위는 모든 사람이 자발적으로 모여든 것이기에 주인이 따로 없었다. 그래서 그중 나이가 많은 명계남씨가 정리자가 되어 시위를 진행했고, 그는 달변가답게 우리를 즐겁게 해주었다. 단순히 '민주당 죽어라, 한나라당 죽어라'라는 구호가 아닌, 그들이 어떻게 잘못을 저질러왔고, 무엇이 잘못됐는지 조목조목 비판하면서 성토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촛불행렬의 꼬리가 보이지 않았고, 도대체 몇 명이나 이 자리에 모인 것인지 가늠하기조차 어려웠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같은 마음으로 이 자리에 참석했다. 헌정사상 초유의 사태를 불러일으킨 16대 국회의 장례식을 치르고자, 노무현 대통령을 살리고자, 한나라당과 민주당, 자민련을 몰아내고자 이 자리에 모였다. 사람들은 이미 엄청난 규모를 형성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서로를 존중하며 질서를 지켰다. 이것이 바로 민주적인 시민의 모습이다. 국회는 탄핵안을 가결함으로써 민주주의를 죽였지만, 이 자리에 모인 시민들은 죽은 민주주의를 되살렸다. 전경 또한 시위규모에 맞게 대거 배치되었지만 굳이 있을 필요는 없어보였다. 우리가 특별히 시설물을 부수거나 불을 지르거나 줄을 지어 국회를 향해 행렬하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집회중 명계남씨가 한 말이 생각난다. 힘이 들어 뒤에서 잠시 쉬고 있자니 전경들이 이런 말을 하더란다.

'우리의 최고상관이 대통령 아닌가? 그런데 대통령을 몰아낸 사람들을 잡으러 가야지, 우리가 왜 대통령 살리자고 여기에 있는 사람들을 감시하고 있는건가?'

이 말은 다른 어떤 말보다도 지금의 사태를 확실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박정희 정권을 거쳐, 전두환, 노태우 정권때조자도 침묵을 지키던 의원들이 노무현 대통령을 몰아냈다. 왜? 힘이 없으니까. 힘이 강한 자에게는 약하고, 힘이 약한 자에게는 강한 그들이 아니던가? 어쩌면 오늘 탄핵안이 가결돼 노무현 대통령이 힘을 잃게 된 것은 그들에게는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에게 당연한 것이 우리 모두에게 당연하게 여겨지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오늘 우리는 이렇게 시위를 한다. '당연함'을 '당연하지 않음'으로 바꾸기 위해서. 민주주의를 살리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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