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의 시대에 중심잡기 : 지식인과 실천 問 라이브러리 6
윤평중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9월
품절


바람직한 지식인은 스스로의 계층적 이해관계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역동적이고 종합적인 관찰자’로서 실천하려 노력하지만 동시에 지식의 존재구속성이라는 역사적 조건 위에서 활동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20쪽

지식의 존재구속성이라는 본질적 조건을 경시하면서 도덕주의의 색채가 짙은 교조적 종합에 너무 쉽게 빠져든다는 것이 우리 사회에서 지식인의 표상으로 자리 잡아온 계몽적 참여지식인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종종 이들은 거대한 적과 싸우는 자신의 언설이 진리와 정의를 상징한다고 강변한다. 탄압을 무릅쓰고 독재와 싸우던 시절에는 확신에 찬 그들의 태도가 감동을 주면서 일정한 사회적 영향력을 갖기도 했다. 존재구속성의 한계를 시인하는 열린 지식인조차도 자신이 개진하는 담론만은 일반성과 보편성을 지닌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지식이란 완성된 결과물이 아니며 종국적 진리도 아니다. (중략) 지식은 부분성 및 잠정성이라는 근본적 존재조건을 전제한다. 지식은 ‘끝나지 않을 탐구’의 도정에서 ‘진리에 점차 접근해 감’이라는 지향성과 역동적으로 맞물리는 토론과 검증외의 다른 것을 지칭하지 않는다. 따라서 지식인이란 진리 파지자나 설교자가 아니다. 지식인은 잠정적 담론을 생산, 토의하고 반증하면서 보다 나은 세계를 향해 함께 가는 해석학적 행위자인 것이다. -21-22쪽

나에 대한 반대자도 나만큼 옳을 수 있다는 유연성과 개방성이 배제될 때 남는 것은 진리의 전제와 독단의 횡포뿐이다. 나나 우리 편에 대한 반대나 이의 제기가 진리를 그르치는 악의 음모로 인지될 때 지식사회의 황폐화와 지식인의 타락은 이미 예정된 것이다. -22쪽

신지식인론은 지식인의 임무를 한것된 사회적 효용창출로 환원시킴으로써 오늘날 지식인 위기의 한 연원이 된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신지식인론의 지식인상이 전통적 지식인과 전연 관련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은 지식인의 한 측면만을 대대적으로 부풀려 놓았다는 문제가 있었다. -23쪽

명예나 학위, 직위 같은 외면적 조건이 지식인의 자기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으로 오해될 때 지식인 되기의 역동성과 개방성은 사라지고 만다. 지식인은 실체가 아니라, 권력비판과 지식생산의 과정을 육화시킨 ‘항상적 지식인 되기’의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 지식인 되기를 규정하는 조건이 만약 존재한다면, 그것은 지식담론의 보편적 정당화 가능성과 비판적 실천 외의 다른 것일 수 없다. -37쪽

한 행위자의 진정성(眞正性)이 주관적 덕목으로 왜소화될 때 정치적 재앙을 초래할 수도 있다. 현실정치의 지평에서 의도 대신 행위의 결과가 중요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교훈이다. 마찬가지로 진정성도 단순한 내면적 덕목의 표출에 머무르지 말고 상호주관적 검증과 비판의 장 앞에 개방되어야 한다. 나의 진실성과 너의 신실함이 특정한 현안을 두고 첨예하게 대립할 때 서로 자신의 주관적 확신에만 집착한다면 출구는 발견되지 않는다. 유일한 해법은 상대방의 주관적 성실성을 인정한다는 전제 위에서, 현안을 둘러싼 사실에 대한 이해와 공감대를 가능한 한 늘리는 데 있다. 진정성은 주관적 진실성과 상호주관적 검증 가능성을 포괄하는 개념이며, 양자를 잇는 다리는 사실과 비판인 것이다. 양심과 헌신, 주관적 확신과 정의감 등도 그 타당성을 공론장의 지평에 개방해야만 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43쪽

진리는 사실에 대한 엄정한 접근이 아니라 주관적 신념에 대한 복무로 정의되고 만다. 이념의 옳고 그름이 사실에 의해 획정되는 대신, 이념에 부합하지 않는 사실은 ‘제대로 된 사실(진실)’이 아니므로 무시되거나 폐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집합적 삶의 실천인 정치를 객관적 진리의 실현 과정으로 보는 진리의 정치가 극단화할 때 당파성의 해악도 최대화된다. -44쪽

성찰을 결여한 지식은 억견에 불과하며, 겸허함을 잃은 지식인은 독단론자에 지나지 않는다. -46쪽

(송두율을 논하며)
자기정합성이 특히 지식인에게 중요한 이유는 너무나 자명하다. 지식인은 자신의 입론이나 학설을 변론하는 존재며 그 논변에 대한 공론장의 비판과 반비판을 흔쾌히 수용하는 사람이다. 토론의 결과 스스로의 입장에 변화가 있다면 그것을 정당화할 수 있어야 하며, 그런 변화가 자신의 삶의 궤적에서 갖는 의미를 투명하게 설명해야 한다.
물론 자기정합성이라는 규준으로 예전에 요구되었던 이론과 실천의 통합, 즉 학자의 학설과 실존적 삶 사이의 조화까지 요구하는 것은 현대의 기준으로 지나친 것이다. 현대 지식인의 자기정합성은 논변과 학술적 신념의 일관성으로 규정될 수 있는 것이다. 자기정합성에 의해 견인되지 않는 지식생산과 권력비판은 공허한 것이거나, 최악의 경우 거짓으로 타락한다. -104-105쪽

김훈이 보기에는 극단화된 진리의 정치야말로 건전한 삶을 위협하는 최악의 추문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진리의 정치가 흘러넘치는 한국현대사의 시평에서 ‘반시대적 고찰’에 가까운 김훈 문학의 정치성은 진리정치의 과잉에 대항하는 또 다른 과잉의 수사학이다. -123쪽

헤게모니의 변환과 함께 이 시대의 화두로 부상하고 있는 경제적 실용주의가 김훈이 암시하는 삶의 정치와 친연관계에 있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한국의 신보수가 내세우는 실용주의가 이념 대신 실용을 강조하고 말보다 일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기 때문이다. 김훈의 텍스트들은 삶의 실감으로부터 분리된 채 부유하는 진리정치의 기표에 대한 혐오감을 감추지 않는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치세를 ‘잃어버린 10년’이라고 공격하는 신보수주의의 논리와 닮아 있는 것이다.(계속)-127-128쪽

그러나 신보수의 실용주의와 김훈의 삶의 정치 사이에는 날카로운 긴장이 존재한다. 요새 주목받는 실용성 담론은 자본주의적 욕망 확산과 충족의 논리에 전념한다. 죽음과 몸, 밥벌이라는 실존의 궁극에 관한 김훈의 천착이 인위와 욕망의 무한확대라는 시대의 대세를 오히려 거스르는 길을 가는 것과 선명하게 대비된다. 삶의 정치가 말하는 소박한 생의 질감과, 화폐의 만능을 고취하는 실용성은 상호대척적이다. 단기간의 돌관방식으로 전시효과를 겨냥하는 부화한 실용주의는 사회를 들뜨게 하고 안온한 일상을 오히려 위협할 수 있다. 평상심을 어지럽히는 ‘스펙터클의 사회’는 삶의 정치에 고유한 감수성을 파괴하는 것이다. -127-128쪽

정부의 진단과는 달리 광우병 사태는 민초들의 시각에서 볼 때 ‘나’의 구체적 삶의 현장을 위협하는 데 대한 자연스러운 대응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즉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상에서 먹거나 접하게 되는 물질이 부적절한 정부조치 때문에 직접 나의 건강권과 생명권을 침해할지도 모른다는 데 대한 적절한 분노와 불안감의 표현인 것이다. 미국 쇠고기 수입 반대자들의 촛불시위가 문화제 형식으로 축제 비슷하게 진행된 것도 말의 자기표현적 특질과 연관해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이명박 정부는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작은 기술적 이슈가 특정집단의 이해관계와 정치적 갈등과 얽혀서 과잉 정치화되었다는 음모론적 분석 틀을 구태어 감추지 않았는데 이는 창조적 실용주의의 상상력 빈곤을 예증할 뿐이다. -142쪽

표면적 레토릭과는 달리 이명박 정부의 실용주의에는 실용정신의 보편적 의의에 대한 균형 잡힌 감수성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그들이 그토록 강조하는 실용적인 것의 내용은 압도적으로 경제적인 것의 지평을 지칭한다. 경제 자체도 아주 포괄적이고 복합적인 외연과 의지평을 담고 있는 개념일 터인데, 이명박 정부의 실용주의가 주목하는 경제에서는 ‘선진화된 세계일류국가’를 이루기 위한 강력한 ‘신발전 체제구축’만이 배타적으로 강조된다. 분배나 복지는 성장의 부가적 요소로 간주될 뿐이다. 실용주의가 경제지상주의로 축소되고, 경제는 성장으로 환원되고 마는 것이다. -149-150쪽

일탈한 국가와 함께 신자유주의 시대에 과대평창한 시장은 공화정을 위협하는 또 다른 주체다. 우리가 ‘삼성 사태’에서 확인한 것처럼 민주 질서에 의해 견제되지 않은 시장은 모든 걸 집어삼키는 불랙홀이 되기 쉽다. 생산력과 개인의 창조력을 극대화하는 시장의 힘은 참으로 위대하지만 그것이 너무 커진 나머지 오히려 시민의 자유를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형해화한 공공성이 경제적 효율성에 의해 잠식되는 정도에 비례해, 자본이 국가와 민주질서를 식민화하게 되는 것이다. -158쪽

한국사회는 지금 극단의 시대를 뜨거운 열병을 앓으면서 통과하는 중이다. 모든 것이 흔들릴 때 지식인의 임무는 성찰적 균형 속에서 중심을 잡는 일이다. 극단의 담론은 맹목적 추수주의를 강요하거나 부화뇌동을 빌미로 우리를 유혹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강요와 유혹은 신념의 견결함이나 취향의 세련됨이라는 미명을 동반해 세상을 미혹한다. 세계를 투명하게 이해하는 것이 지식인의 임무이지만 시류와 유행이라는 것, 즉 ‘세상에의 부역’은 항상 지성의 최대 적이었다. 극단의 시대는 극단의 담론에 의해서는 결코 극복될 수 없는 것이다. -176-177쪽

악은 결코 궁극적으로 해소되거나 척결될 수 없으며 언제든지 재현될 수 있다. 역사에서 가장 나쁜 경우 악은 확대 재생산된다. 가장 좋은 경우에도 악이 축소 재생산되는 경우는 드물다. 역사에 주체적으로 대응하는 하나의 방식은 그것을 부단히 논의하고 반성해 기억의 정치를 활성화시키는 것이다. 이는 역사적 책임규명을 무화시키는 역사허무주의의 발언이 아니며, ‘모두가 모든 것에 책임이 있다’는 역사 도덕주의로의 후퇴도 아니다. 악의 평범성 테제는 선악을 너무 쉽게 전유하려는 정치적 인간의 오만을 꾸짖는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자신의 삶과 집합적 역사 앞에 좀 더 겸허해야 한다고 고언한다. -192-193쪽

진보는 모든 종류의 억압, 차별, 부정의, 불평등에 대한 비판과 극복 시도로 정의된다. 그 비판의 지평은 널리 열려 있으며 비판방법론과 극복 시도의 타당성과 효용성은 오직 실천에 의해서만 증명 가능하다. 이에 비해 보수는 현실에 그런 부정적 요소가 엄존함을 부인하지 않지만, 부정적 요소도 현실의 일부이므로 점진적으로 개선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204쪽

삶의 곤핍함을 보통사람들에게서 완화시켜줄 수 있어야만 진정한 진보다. 미래의 헛된 희망으로 현재의 곤고함을 메우려는 논자들은 사이비진보에 불과하다. 평균적 시민의 생활 세계에서 호소력과 타당성이 입증되지 않은 논설들은 공론일 뿐이다. 긴박한 서민의 구체적 삶과 겉도는 논쟁은 무익한 자기위안의 정열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 진보가 위기에서 벗어나 새로운 미래를 기약할 수 있는 유일한 출구는 다음의 요청에서 명쾌하게 압축된다. "그대 진보여,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2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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